Reading Books/Reading Books

혼불 5권 (18)

카지모도 2024. 7. 25. 06:28
728x90

 

그러니까 서탑거리가 조선 사람 삶의 둥지나면, 서탑소학교는 조선사람 정신의

둥지였다고나 할까. "그것이 알본 경찰의 눈에는 곱게 보일 리가 없었을 테지요." 김씨의

말에 강태가 대꾸했다. "대강 말씀을 알아들었으니 언제라도 필요하시면 연락하십시오,

그러고, 저희들은 지금 좀 가 봐야 할 것이 있어서 이만." 하, 그러신 것을 염치없이.

김씨는 멀금하게 커가지고 나온 강태가 큰길을 휘몰아 때리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몇 걸음

걷다가, 김씨를 가리켜 짤막하게 평했다.

강모는 의외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다는 아닐 겁니다. 속에는 깡치가 있어 보여요." "그렇지 않겠냐?여기가 어디라고

달랑 들고 마누라에 자식들에 주렁주렁 매달고 온 아버지. 꼴 안 봐도 뻔하지, 그 밑에서

이 만큼이나 살게 되기까지 무슨 짓을 안했을까. 하여튼 이 땅에서 안 죽고 살아 남았다면

그것으로 이미 다른 이야기는 들을 피요도 없이 족하다." "노랑 깡치" "워?" "목소리도

그렇고, 왜 그런지 그런 말이 떠오르네요." "별명이냐?" "어째 그 사람 겉은 물러

보이는데, 살 속에 뼈다귀 하나는 노란 심줄로 심지를 질기레 박고 있을 것 같애서. 그냥."

"허튼 사람을 아닐 것이다." "대단합니까?" "장삼이사지."

"그런데 뭘." "허나 저만한 재간도 흔하지는 않아." "돈 보는재간이요?" "사는 재간

말이다." "나한테 없는 것이로군요."

"말끝마다 꼭. 그럼 너는 지금 죽은 것이냐? 여기 이 시부대로를 걷고 있는 이강모는

유령이야?" "떠도는 망령." 강모는 쓸쓸히 내뱉는다.

"그러나 아직은 살아 있으니 너도 재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게 산 겁니까?"

"그러면 어떤 것이 산 것이고?" "나는 봉천으로 오면 무엇인가 달라질 것만 같았습니다.

지금까지는 맛볼 수 없었던 장쾌함, 자유, 그리고 넘치는 새로움이 이 미지의 땅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야?"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원했든지

원하지 않았든기 간에, 운명적으로 아니면 불운하게도 짊어지게 되었던, 온갖 짐들을 다

초개같이 버릴 수 있기 바랐습니다." "버릴 수 있기를?" "예."

"그 전에 너는, 나도 무산자올시다. 프롤레타리압니다. 라고 절실하게 토로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은 가진 것이 많았던 모양이구나." 아아 그랬었다.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중국으로 떠나오기 며칠 전, 눈 내리는 고사정의 요릿집 망월 모찌즈끼에서, 취한

강모는 강태와 마누앉아 심정을 털어놓았었다.

"형님, 당신도 부르조압니다. 반대로 나도 프롤레타리압니다." 했던 말을 생각하며

강모는 쓴웃음을 지었다.

"버리고 떠나오면 버려지는 것인 줄 나는 알았어요." 탄식처럼 내뱉는 강모의 말이

봉천의 겨울 석양 허공에 가시같이 걸린다.

"오히려 부둥켜 안으면서 버린다고 해?" 강태는 아마 오유끼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다들 와 있겠는데." 강태가 걸음을 빨리 했다.

형설학회 독서구락부가 오늘 모이는 날이어서 그는 아까부터, 김씨와 이야기하면서도

시계를 자꾸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물론 강모도 이모임의 회원이 분명했지만 이직 별로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터라, 가면 가고 혹 못 가게 되더라도 굳이 서두르지는

않았었다.

대륙의 붉은 노을을 등에 진 채로 서탑거리를 걸러가는 두 종형제는, 제 발걸음보다 길게

앞서 누워 가는 제 그림자를 묵묵히 밟으며, 각기 서로 깊은 생각데 빠진 듯 말이 끊긴다.

거리 오른쪽에 여전히 사고 파는 사람들로 붐비는 구시장이 얼마 전에 새로 생긴 신시장

못지않게 시끄러운데, 그 구시장목 끝날 참에서 조그만 절이 한 채 나왔다. 귀원사. 그것은

저 서탑의 호국 법륜사 같은 중국의 웅장한 사찰이 아니라 단청이 소박하고 규모가

조촐하여, 조선에서 본다면 어느 암자 한 칸만이나 한 절이었다. 그렇지만 이 절은 조선

사람들이 세운 것이어서 각별하였다. 귀원사라.

어디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말일까. 이 사바예토 더러운 진흙밭에 갚이 빠져 나뒹굴며

허우적이는 윤희의 껍데기를 어서 빨리 벗어 버리고, 존재의 본질로서 시방정토 욕계 사천

도솔천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오로지 저 눈물나는 어미의 땅. 아비의 땅. 내 명줄 받아 태어났던 탯자리라

그리운 땅, 울며 울며 떠나 왔던 조선으로 부디 다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이 거리의 가련한 중생들은 극락정토 가 본 일 없는 불생불멸의 하늘보다는,

남루하여 서러웠으나 에이게 그리워 꿈에라도 가고 싶은 고향 산천 앞냇물 뒷동산을

향하여, 두 손 모아 엎드리어 발원을 할 것만 같았다.

귀원사 절 바로 옆에는 예배당 서탑교회가 뾰족한 지붕 꼭대기에 십자가를 달고 서

있었다.

서탑교회와 같은 담장을 쓰는 건물 명신여관은 지은 지 얼마 안되어 문등 달린

간판부터가 신식이었다. 그렇지만 봉천역에 내린 조선 사람들이 여기 무슨 특별한 연고나

일이 있다면 혹 모를까, 도로 안켠 명신여관까지 들어오기도 전에 길목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눈에 뜨이는 협화여관이나 조선여관에 짐을 풀기 쉬운 탓에, 손님은

아직 뜸한 거처럼 보였다.

그러나 야마또 호떼루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깨끗한 숙소에 머물고 싶은

손님이라면 이곳까지 일부러 찾아옴직도 하지 않을까.

"물건은 각기 다 주인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것이 김씨의 장사 철학이었다.

"내 맘에는 안 들어도 저 맘에는 꼭 드는 수가 있거든요. 아조 참 희한하지요. 이것은

팔리기 틀렸다 싶어서 구석에다 처박아 뒀댔는데, 일년에 한 번을 와두 환히 알고 찾는

것처럼 똑 그 물건을, 있느냐고 사러 온단 말이에요? 내, 탄복을 한두번 한 게 아닙니다.

나 그럴 때면 사람 인연두 그런 건가 싶습디다. 아. 그래서 항상 진담삼아 농담을 하지요.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느 심뽀를 갖지 말구우. 내가 안 쓸 거면 빨리 '버립시다' 꼬리표

붙여서 길에 내놓으라구요. 그럼 남이나 줏어 가지 않겠습니까? 돌보지두 않을 걸 버리지두

않구 꽁꽁 묶어 가지구는, 쩌어 캉캄한 광에다가 턱 처박아 곰팡이 나게 썩후는 건 죄로 갈

짓이라고 그랬지요. 쥐뿔이나 내가 뭘 알아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구요. 기냥 장사를

하다 보며는요, 그런 정도 문리는 티이거든요."

김씨는 그렇게 말하더니 손가락으로 입슬을 누르며 웃었다. 그것은 그의 습성이었다.

명신여관 앞을 지나치는데 강모의 뇌리에 그런 김씨의 말과 모습이 퍼뜩 떠올라, 그는

그만 제발 저린 사람처럼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나 들으라고 한 말이야 아니었겠지. 그 어떤 내막을 그가 알 리도 없는 일이고. 강모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좌우로 깊이 흔들어 털었다. "왜?" 자기 생각에 골똘하여 옆에 사람이

같이 가고 있는 것도 모르는 사람 마냥 걷고 있는 줄 알았던 강태가, 힐끗 강모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요."

무안하여 얼른 더 크게 고개를 흔들어 버리는데, 그의 눈에 누렇게 번쩍이는 금박 글씨

간판이 들어온다. 바탕은 선홍색이었다.

이집은 서탑 골목 조선 요릿집으로 이름난 명원관과 대조를 이루는 신식 음식점인데 서양

술집을 겸하고 있었다. 왕칸카회 자리는 서탑거리 말미 부근이었다.

여기서 몇 걸음만 더 내쳐 걷다가 오른쪽, 그러니까 남쪽으로 휙 꺽어 돌면 바로 그곳이

그 훤칠하고 거침새 없는 일본인 계획도로 야마또 광장거리였다.

시부대로 서탑거리에서 야마또 광장거리로 꺽어지는 남쪽 모서리에선 부사극장은 화려한

치장을 마다 않고, 양껏 멋을 부려 광목필 댕기처럼 기다랗게 펄럭이는 현수막에 새로

상영하는 영화의 제목을 울긋불긋 적어 걸었다.

부사극장에서는 영화를 상영하지 않을 때면 연극이나 춤을 비롯하여 다른 무대 공연을

하기도 했다. 물론 주로 일본 것이 많았다.

반면에 왕칸카회 길 건너편, 즉 야마또 광장거리 맞바라기 쪽에는 조선인 민족극장이

있었다. 이 극장 역시 서탑소학교 같지는 않았지만, 조선 사람 몇이서 돈을 모아 세운

것이었는데, 원래 이름을 '민족극장'이라고 하였으나 "불온하다."는 이유로 봉천 경찰서

허가가 나지 않아 할 수 없이 '봉천극장'이라고 간판을 달았는데도, 은연중에 이 소문이

퍼져,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건만 자연스럽게 "민족극장"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서도 부사극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를 상영하거나 연극을 상연하고 또 무용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것은 창극과 국극, 그리고 협률사 공연이며 조선에서 온

유랑국단이 흐드러지게 굽이굽비 부르는 노래들을 얼마든지 조선말로 들을수 있다는

점이었다. 화면 속의 배우도, 무대 위에 선 사람도, 의자에 앉은 사람도, 모두 하나같이

조선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시부대로 서탑거리 넓은 길을 사이에 두고, 부사극장과 민족극장은 각각 제 종족들이

사는 쪽에 서서, 대각선으로 엇비키며 모가 나게 각을 세워 바라보았다.

동문사 인쇄창은 민족극장 뽀작 옆에 붙은 허리띠같이 가느다란 골목 안창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기칸방 강태의 하숙에서야 기침 소리라도 들릴 만한 거리였지만, 서탑에서부터

걸어오자면 좀 걸리는 곳이어서 벌써 박모의 노을는 지고, 서걱서걱 얼어드는 땅거미가

어느새 그림자를 덮어 간다.

"들어가자." 강모를 먼저 건물 안으로 들여 보내며 강태가 뒤따라 스며든 동문사에 붉은

주홍 전등 불빛이 밝혀진다. 어두워지는 것이다.

건너채로 돌아온 오유끼도 빈 방에 전등을 밝힌다. 방안에 불빛이 눈물같이 차 오른다.

오늘따라 손끝 하나 까딱 하기 싫은 오유끼는 벽에 등을 기대고 물끄러미 맨몸이 드러난

알전등을 바라본다. 손만 잘못 대로 깨져 버리는 저 얇은 유리막. 그러나 저렇게 뜨겁고

환한 불빛이 가득 밀려들어올수 있는 전구가, 하루종일 기척도없이 써늘하게 빈몸으로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이 왠지 하염없이 가여워 오유끼는 (이쁜 갓이라도 하나

씌워줄까) 혼자 생각하였다. 그녀는 그녀의 가슴팍으로, 전에 요릿집에 나앉을 무렵 한 때

가야금을 가르쳐 주던 늙은 기생한테서 들었든 이갸기가 파고든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5권 (20)  (0) 2024.07.27
혼불 5권 (19)  (0) 2024.07.25
혼불 5권 (17)  (0) 2024.07.24
혼불 5권 (16)  (0) 2024.07.22
혼불 5권 (15)  (1) 2024.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