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고우면 무엇하고 태깔이 있으면 무엇에 쓰랴.
사내로 세상에 나서 반듯하게 책상다리 개고 앉아,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경세제민, 공부를 한 번 해 본 일도 없고, 그것이 아니라면 농자천하지
대본이라. 온뭄에 땀흘리며 구리 같은 팔뚝으로 논을 갈고 밭을 갈아 농사를 지
어 본 일도 없고, 쇠푼 한 닢이라도 더 벌어서 돈궤를 무겁게 채우는 기쁨으로
무슨 장사를 해 본 일도 없이, 그저 한세상을 제 아낙의 뒷전에서 이런 저런 굿
판의 치다꺼리를 하며, 허구한 날 기껏해야. 사람 사는 세상의 땅 어디에도 부빌
곳 없는 마음을 검은 강, 검은 하늘 너머, 구천에서 맴도는 귀신한테다 메인 목
을 놓아 부벼 보니.
아, 세상이 이렇게도 허한 것인가.
전에 홍술이는 쉬혼에야 얻은 자식 만동이의 조그만 낯바닥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또 조그마한 주먹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이 애기의 손으로는, 허하고 서러
운 세상이 아니라, 실하고도 기쁜 그 무엇을 쥐게 해 주고 싶은 심정이 북받쳐
하마터면 눈물이 솟을 뻔했었다.
그것은 단순히 팔천.사천의 천민으로 태어나 세상 사람들한테 괄세받고 천대
받는 것에 대한 포원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의 한 생애를 두고 제 손으로 직접 만져 흙이나 나무나 가죽이나 그
감촉을 느끼며, 제 몸으로 힘을 들여 파고, 갈고, 깎고, 다듬어 일하고, 드디어는
완성하거나 거둔 실체를 가져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정말 한 가닥 음률, 그 순간이 지니고 나면 천지 사방 어디에도 남아 있
니 않은 음률의 실낱 같은 오라기 한 줄에 자신을 메고, 거미처럼 하염없이 허
공의 귀신에게로 귀신에게로만 오르려 했던 것 같았다.
제발 너는 나맹이로 살지 말었으먼.
홍술이는 갓난아기 여린 주먹을 주둥이처럼 벌리어, 자기의 검지손가락을 막
대기같이 그 사이에 끼워 보았다. 갓난 것은 그 손가락을 본능적으로 쥐어 잡았
다. 마치 나무에 앉은 새가 그 발가락으로 가지를 움켜쥐는 것처럼.
그때 홍술이는 문윽. 그 어린 것이 한 마리 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움켜쥐고 앉아 있던 나뭇가지 따위는 가볍게 차 버리고 후르룩 날아갈 수
있는 새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러나 물려받은 뼉다구는 나뭇가지가 아니고, 누워 있는 어린 아들 만동이는
한 마리 새가 아닌 까닭에. 이 아이는 자라서 아비인 홍술이와 그 할아비인 누
구와 그 윗대의 누구, 누구처럼, 그저 또 한 사람의 무부가 되고 말 것이었다.
니가 나한테서 안 났드라먼.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으리요.
홍술이는 쉬흔둥이 아들 만동이를 놓고, 즐겁다기보다는 시름에 겨워 점데기
도 모르게 한숨을 삼키었다.
그러했던 만동이가 어느결에 각시를 얻고 또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그날로 홍술은 칠십이 다 되어 백발이 허이연 머리를 이고 앉아, 꼬부라진 허
리를 웅크린 채 갓 태어나 손자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후에 만동이가 제 자식
을 들여다보고 그러했었던 것처럼.
너도 인자 크먼 또 벨 수 없이 무부가 될 거이냐.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는 또 다른 생각을 골똘히 하고 또 하였다.
나뭇가쟁이맹이로 차고 날러가 버릴 수 없는 거이 타고난 조상의 뼉다구라먼,
그거이 저 앉은 한펭상의 근본이라먼, 내가 인자 저것의 조상이 되야서, 내 뼉다
구를 양반으로 바꽈 줄 수는 도지히 없는 거잉게.
멩당이라도 써야제, 천하에 멩사.멩풍을 다 데리다가 묏자리 본 양반으 산소 옆
구리를 몰래 따고 들으가서라도 멩당을 써야제. 우리 재주로는 어디 그런 집안
으서 신안 뫼세다가 잡은 자리만 헌 디를 달리 구헐 수도 없을 팅게. 그 봉분
옆구리를 째고 들으가서라도. 양반이 쓴 멩당인디 오죽헐 거이냐.
뼉다구 하나 잘 타고나 양반이 된 그 뼉다구 옆에 내뼉다구 나란히 동좌석허
고 있다가. 세월이 가고 가서 나중에는 그것도 썩고 내 것도 썩어 한자리에 한
몸뚱이로 얼크러지먼, 니 다리. 내 다리. 니 복, 내 복을 누가 앉어 따로 따로 개
리겄능가. 어찌 되얏든 그 자리다가 뫼 쓴 거이 되야 부렀는디. 그런 뒤에 멩당
기운이 발복을 허먼, 그 자손 내 자손이 똑같이 받겄지.
양반이 그렇게 대대손손 내리내리 양반으로 사는 것은, 그들이 권세있고 재물
있고 식견이 있어, 한다하는 지관들을 낱낱이 다 불러다가, 몇 날 며칠을 물론이
고 혹은 몇 달씩, 아니면 몇 년씩이라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경비를 대 주면
서, 부디 좋은 자리 하나만 잡아 주기를 소원하며 온갖 치성을 다 들인 끝에, 드
디어 명당을 쓴 탓이라고 홍술은 생각했다.
"이제 나 죽으먼 투장하여 달라."
고 그는 숨을 거두면서 아들 만동이와 며느리 백단이에게 유언하였다.
투장. 그것은 밀장이었다.
"나중에 파기 좋게...... 기양 아무 디나 양지 짝에 묻었다가...... 내 살이나 다
썩그던...... 뼈다구 대강 취해서...... 저 욱에...... 매안에..... 누구 초상이 나먼...... 그
때 ......살째기.....암도 모르게......새 산소 옆구리 파내고......거그다......거그다 묻어
도라......"
홍술은 바튼 숨을 몰아 쉬며 메마른 입술을 가까수로 달싹이어, 한 마디 한
마디씩 끊어지는 소리로 그렇게 일렀다.
만동이는 이미 핏기가 가시어 누런 아비의 손을 부여주고 연신 고개만 끄덕이
었다. 온기 없는 그 손의 손가락은 죽은 나뭇가지 삭정이처럼 바짝 말라 있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그대로 두두둑, 바스라져 꺾여 버릴 것만 같았다.
아들 만동이는 이미 어쩔 수가 없었고, 그 만동이의 아들 귀만이만은, 그래도
당대 발복하는 명당에 더부살이로 들어가면 제 애비보다는 좀더 나은 세상을 살
수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니.
살아서는 못 살아 본 대가 거실 양반의 집이지만, 죽어서 혼백이라도 유택을
귀한 곳에 짓고, 원통하고 서러운 자신의 넋을 달래 주고자 그리한 것이 아니라,
한 생애를 다하도록 아무것도 실체로 쥐어 보지 못한 손의 허기를 대대 손손 무
당의 자식으로 태어날 제 후손들에게 더는 물려주고 싶지가 않아서, 그 허한 운
명의 손가락 마른 가지를 날카로운 발톱의 두 발로 차 버리고, 멀리멀리 더 높
이 까마득히 새가 되어 날아가도록 해 주고 싶어서, 홍술은 마지막 숨을 다하여
유언했던 것이다.
그것이 벌써 너덧 해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 홍술의 살은 축축한 땅 속에서 이미 다 썩어 검은 물로 흐르고 드러난
뼈다귀는 버석버석 고갱이가 떨어지면서, 무겁게 덮인 흙을 걷어 내 개장되기만
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홍술은
"저 욱에 매안에 초상이 나먼."
이라고 하였지만, 어차피 투장이 남의 땅이나 남의 산소 명당에 아무도 모르게
유골을 밀어 넣어 밀장하는 것이라면, 굳이 매안만을 바라보고 있을 일은 아니
었다.
그래서 당골네 백단이는 은근히 다른 동네 당골한테로 마실도 가 보고, 혹시
어디 명당 있다는 말 나지 않았는지. 사람들을 만나면 이리 저리 돌려서 소문
속을 떠 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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