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59 1990. 4. 1 (일)
일요일. J와 길고긴 데이트.
봉래산을 오르고, 약수를 길어 들고, 英이 학교로 찾아가 교실에서 홀로 공부하는 심통스런 표정의 딸내미도 알현하고, 미장원에 가서 머리카락도 자르고, 골목집이라는 여염의 음식점 방에 앉아 아구찜도 먹고, 과일이랑 맥주랑 사들고 돌아온다.
가시버시 함께 걷는 산길은 이리도 좋고, 마누라짜리와의 오손도손 얘기는 이토록 즐거웁고, 그러자면 J의 여성스러움도 이토록 드러나는 법인데....
俊이 충청도 어디선가에서 전화.
사려 깊고 마음 넓은 녀석.
제 엄마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俊이.
얼마나 기특한 놈인지.
아, 오늘.
산에는 개나리랑 진달래랑 벚꽃이랑 어지럽게 피어있고, 서쪽 능선에는 산불이 나서 시커멓게 그을러 쓰러진 나무 등걸들.
15760 1990. 4. 2 (월)
새벽, 어두운 산길을 J와 함께 오른다.
새소리 새소리.
둘이서 단단히 서약하기를 새벽 산행을 지키지 않는 쪽에서 서로에게 벌금 5000원 내기로.
새벽 부시시 일어난 英이 표정의 그로데스크함.
오늘 俊이는 돌아 올것이고.
산에 다녀와 내 방에 앉아 동터오는 아침 바다를 내려다 보며 기도.
15761 1990. 4. 3 (화)
어제 俊 오다.
맑고 준수한 모습, 며칠새 좀 야윈 듯 하다.
새벽. 어두운 대지의 이슬을 밟으며 오르는 산.
이 가시버시에게 살며시 내려주신 주님의 축복이다.
집 뒷편 길을 도파 동삼여중 지나 숲길에 들어서 기도원을 지나 한참을 오르면 약수터가 나온다.
그곳에서 약수를 마시고 물통에 받고나서 몸통을 이리저리 돌려 운동을 하고 다시 어두운 길을 밟고 돌아온다.
소요시간은 약 한시간 남짓.
집에 들어서면 약 6시경이 되고, 나는 베란다 내 공간 속에 앉아서 성경을 읽고 기도드린다.
감사, 새벽을 주심에 감사.
아내의 신앙, 그리고 英이를 위한 한참의 기도.
내 고교시절의 방황을 기억하여 英이를 이해하고 감싸안아야 함을 느낀다.
15762 1990. 4. 4 (수)
어제 두통 때문에 아스피린 한알 먹고나서 곤욕을 치루다.
아스피린은 내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일의 불면으로 인한 두통을 다스려 보려고 복용하였는데, 하루 종일 기분이 우울하여 흡사 지독한 염세주의자의 꼴로 안절부절하다.
이 조그만 부피의 약품이 사람의 정신 세계에 끼치는 작용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난다.
약리적인 화학 작용이 어쩌면 이다지도 한 인간의 기분을 극과 극으로 변하게 할수 있을까.
깊은 사색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화학작용에 의해 형성되는 생각이라는 것.
무서운 일이다.
끔찍한 일이다.
새벽 4시다.
아내를 깨우자. 英이도 깨우자. 俊이도 깨우자.
이 새벽도 같이 깨우자.
아침 이슬 촉촉한 숲으로 갈 시간이다.
신선한 새벽 대기를 마시고, 때묻은 영혼을 흔들어 털고, 기쁨같은 새벽의 경건을 마시게 하자.
목숨을 긍정하고, 실존을 곱게 껴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나로 하여금 웃게 하라. 경건하게 웃게 하라.
지금은 새벽.
순결하여 은밀한 시각.
15763 1990. 4. 5 (목)
달디 단 잠.
직반장들과의 회식에서 마신 술 탓인가.
간밤의 참 행복한 수면.
화창한 휴일.
베토벤의 소나타 '봄'
이렇게 행복한 선율을 그토록 단숨에 작곡할수 있었다니.
고뇌의 베토벤, 인고의 베토벤, 거인의 베토벤.
그리고 여리고 여린 소녀의 베토벤.
회사의 화장실에서 읽는 李箱.
그는 또 얼마나 귀족적이고, 사적이고, 현란하고 감각적인지.
도시적이고 어떤 反모랄적인 그의 의식세계는 주님의 반듯한 그 세계와는 너무도 다른 빛깔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 두세계의 동일한 것은 깨끗함이다.
휴일인데 현장 가보아야 할 아침이다.
오늘 새벽 오르지 못한 산에는 이제 俊이도 함께 오를 것이다.
현장 들렀다가 운전교습, 그리고 시내 나가 약을 사고.
그리고 이 봄날의 어떤 사무침은 아마도 몇 잔의 술을 마시게 할 것이다.
15764 1990. 4. 6 (금)
어제 아침 J, 俊이와 함께 산에 갔다 내려오다가 김춘동의 차를 만나 그대로 타고 회사로 간다.
휴일의 현장 한번 둘러본후 남포동 나가다.
이원복 만화 '자본주의 공산주의', 세명약국에서 '생위단 기모타부 치선액', 산다.
청학동 언덕받이 쌍용 운전 학원 반클러치 연습, 인근 개고기집의 수육과 소주 한병.
먼지 섞인 봄바람 몹씨 불어댄다.
바람은 불어대지만 봄의 양광은 화사하기만 하다.
초저녁 쓰러져 잠들다.
꿈, 개그맨 임미숙 등장, 달빛가족의 큰아들 등장.
꿈은 화사한 편이었다.
깨어 일어난 시각은 이미 5시를 넘어 섰다.
새벽 山은 포기할 수밖에 없고, 英이를 깨워 머리 감으러 화장실 들여보내 놓고 내 방에 앉아서 머리 숙여 흐트러진 영육을 추스려 본다.
15765 1990. 4. 7 (토)
감히 느끼거니와 내게는 창조적인 재능이 있다.
사물의 어떤 면을 꿰뚫어 그 이면을 보고, 그것을 내재적으로 흡수하여 새롭게 가공하고 자아표출로서 나타낼수 있는 소질.
예전 좀 더 젊었을적 이 소질을 자각하여 노력을 기울였으면 좋았을 것을 이제 불혹의 길목에서, 온갖 조건의 부자유 속에서 이 재능을 느끼고 그를 억울해하는 이것은 PARADOX, 주님이 주신 기막힌 역설이다.
그냥 공부를 하고 싶다, 배우고 싶다, 인식하고 싶다, ..싶다, ..싶다하고 메아리 없는 고함만 처대고 있을 뿐.
새벽 4시, 화장실의 용무를 마치고 J를 두드려 깨워 산에 오르다.
늙어 가는 부부의 새벽 데이트, 이것은 情이다.
내 방에 앉아 청색과 회색의 단순한 색조로 그린 유화와 같은 흐린 아침바다의 풍경화를 내려다 보다가 사도행전 소리내어 읽고 기도드린다.
아버지 나의 하나님. 사랑 온유... 아내의 신앙, 英이의 바른 성장.....
<밤>
술취해 가며 끄적거리는 낙서.
나는 지금 슈베르트를 듣고 있다. '겨울 나그네'
나는 감상적인가, 아니 그저 눌눌할 뿐이다.
슈베르트는 내게 그저 눅눅한 늙은 할아범의 목소리, 저것은 제라르 슈제.
나의 겨울 나그네.
사고라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공간에 걸린 깃빨이냐.
그리고 이 술은 英이가 사온 설악의 향취가 섞인 쏘주이냐, 아니면 내 은밀한 성에서 따라주는 한잔의 悲酒이냐.
英이는 친구 순주와 제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그 英이에게 제 아빠, 엄마, 동생은 아웃사이더.
英아. 수린아.
흙집 줄께 꽃집다오.
英아. 수린아.
꽃집 줄께 흙집 다오.
英아 수린아. 그래 그래 수린아 英아.
꽃집 줄께 흙집 다오.
아니다 아니다 얘야.
꽃집 줄께 꽃집다오.
꽃집 줄께 꽃집다오.
바그너 '방황하는 화란인'
15766 1990. 4. 8 (일)
어제 비가 내린 새벽의 산은 싱그러운 냄새로 가득차 있었다.
J 그리고 俊이와 새벽 5시 집을 나서 산자락을 휘젓고 돌아온 만보계의 숫자는 6700보. 약 5Km 쯤 걸은 것인가.
先祖는 언제난 한 인간의 영혼 속에 지배자로서 군림한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그위의 그 위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선조가 아니라도 좋다. 고향이라 해도 좋고, 자라난 뒷동산이라 해도 좋다.
무의식 속에 어딘가 속하여 있다는 감정모체가 자리잡고 있는 그것은 그의 의식의 지배자이다.
그가 그것을 사랑한다던가 미워한다던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는 언제나 그것에 속해 있은 것이다.
내 지난 시절, 아무리 그것을 부정하고, 심지어 내 이제 새로운 씨족을 시작하는 하나의 조상이 되리라하고 폼을 잡았어도 나는 그 지배자에게 늘 통치를 당하였던 것이다.
슬퍼하고 피흘리는 나의 심장, 어머니를 향한 그 맹목의 콤플렉스가 차츰 엷어져 감을 느끼는 내 피흐르는 심장.
英이 俊이 시대에는 완벽한 고독쟁이들만 남아서 스스로 피흘리지 않는 굳센 사람들만 살아라.
이제 피안으로 사라져 가는 나의 핏줄, 내 선조의 모습을 이토록 처연하게 바라볼줄 아는 사람이 어찌 나 뿐이겠는가.
15767 1990. 4. 9 (월)
어제 부산시내 전역, 아니 우리나라 전역은 뿌연 먼지로 덮였다.
황사현상, 중국대륙으로부터 몇백만톤이라는 모래가루가 황해를 건너 날아와 기승을 부린다.
현장 작업자들의 노고는 오죽하였을까.
운전연습의 S자 코스, 너무 수월하게 익혀진다.
당장에라도 차를 몰고 나가라고 해도 자신있을 것 같은 건방스러움.
새벽 산에 다녀와 듣는 모차르트의 '레퀴엠'
英이 오늘 시험.
내일 아침 8시, SB-363 진수.
15768 1990. 4. 10 (화)
2시30분 기상.
3시에 현장 나간다.
4시부터 진수작업.
8시 CEREMONY, 8시 20분 배는 바다로 스르르 내려 간다.
일을 끌고 가는 사람, 일에 끌려 다니는 사람.
새벽 산은 오르지 못하여 그것이 좀은 아쉽다.
15769 1990. 4. 11 (수)
화장실 앉았을 때의 그 막막함, 쑥쑥 빠져주는 쾌변에의 바람은 늘 좌절된다.
똥. 정다운 단어.
"便이란 말은 사전에 똥, 대변, 분, 시. 영어로는 Feces, Stool.
속담 몇절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똥은 건드릴수록 냄사만 난다' '쇠묵은 똥은 삭지 않는다'.
똥의 색깔- 나물만 먹으면 황록색, 고기만 먹으면 흑갈색.
똥의 모양- 바나나 모양이나 치약같으면 잘 생긴 것, 토끼똥 같으면 미운 것.
서양인의 양은 그리 많지 아니하고 찰흙같은 형태의 걸죽한 것이 특징.
변은 물 속에 약간 가라앉는 것이 정상, 설사나 소화불량시 물 위에 뜬다.
서양인의 양은 100그람 미만, 아프리카 원주민은 400-500 그람, 동양인은 150-200 그람 정도이다."
-이규태-
새벽, 똥과 같이 지처있는 육체를 이끌고 J와 함께 산에 올라 새 힘을 축적한다.
俊이는 제 친구 두명과 제 방에서 늦도록 공부, 英이는 여전히 부스스한 새벽기상.
15770 1990. 4. 12 (목)
어제 심한 감기몰살끼.
미열은 일종의 쾌감이다.
비몽사몽의 나른한 일과를 보낸다. 마침 SB-357 은 예비시운전이었고 현장의 분위기도 비교적 조용한 편이어서 그런대로 비몽사몽의 처신이 가능하였다.
돌아 와 J가 사다놓은 약 한첩 털어놓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다.
俊이 녀석도 시험 공부랍시고 친구들과 늦도록 공부하였던지 초저녁부터 잠에 떨어져 있고.
꿈- 러시아 혁명,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등은 아버지의 동지이다. 그리고 나자예프라는 이름, 꿈 속에서는 그 이름을 분명하게 인식하였는데 어느 책에서 읽은 실존인물이었는지.
그 인상은 영화 닥터 지바고의 라라의 남편인상인데, 차거운 지성인, 냉혈한.
그가 아버지였는지도 모르겠다.
깨어난 새벽.
J를 깨워 산에 가려고 부스럭거리다가 귀를 기울이니 구성진 빗소리.
산은 포기하고 내 방에 앉아 소리내어 성경을 읽는다.
나흠, 말라기.
가슴 깊은 곳에 잔잔하게 고여 오는 예수님의 마음, 돌연 뜨거워지는 눈시울.
불끄고 두 손 모두어 잡고 기도드린다.
오, 내 기도 속의 중언부언 속에서나마 일관되어 흐르는 주제, 그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라는 그것이다.
15771 1990. 4. 13 (금)
어제는 왼종일 추적추적 비내리다.
몸살끼는 여전히 팔다리의 관절과 머리 한구석에 잔여세력으로 버티고 있다.
강당에 전접반 사람들 앉혀 놓고 교육이랍시고 한시간여 떠들다.
옛날 연극의 경험은 어투와 감정을 실리게 하는 억양, 청중과의 교감을 느낄수 있는 따위의 테크닉에 꽤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번 일요일, 생산부의 산행.
밀양 천황산 사자평.
년전 올랐던 곳인데 능선에 펼처저있는 억새밭이 멋진 곳이다.
잠 설치다. 12시 40분경 깨어나 고냥 잠을 설처버린다.
음란하고 허황된 사악한 망상에 뒤척이다가 J를 깨워 바람소리 흉흉하여 다소 무시무시한 숲길을 걷는다.
비로소 맑아지는 정신, 소너무 냄새, 신선한 바람, 그 새벽 어둠 속을 날아 다니는 은밀한 순결.
그것들은 경건한 무수한 벌레들이 되어 코로 들어와서, 내 정신을 정화시킬뿐더러 육신에게도 유익하고, 더욱이 함께 오십을 바라보며 해로하는 아내와의 情愛에도 큰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15772 1990. 4. 14 (토)
어제 김사장, Y부장과 마시다.
끝장에는 Y부장 집에 까지 가서 양주로 마감한다.
흐린 아침, 12시 넘어 돌아와 쓰러진 육신은 결국 새벽의 산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媛네 회사의 팜플렛 우송되어 오다.
미국의 무슨 광고회사와 합작, 세련된 디자인.
도무지 나의 현장과는 천양지차가 나는 광고회사라는 세련되고 감각적인 색채의 일터.
그리고 내 깊은 곳에는 세모난 눈이 있다.
부러움과 질시의 눈.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데 동생이 논을 사도 배는 아픈 것인가.
참 정말로 싫은 나.
극복해야 할 더러운 명제를 나는 너무나 많이 갖고 있다.
내 바라보는바 그 쪽의 경건, 고아,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는 너무나 많은 나를 깨뜨려야 하는데.
토요일, 아침, 숙취, 그리고 더러움.
15774 1990. 4. 16 (월)
흐리고 좀 서늘한 날씨.
회사 버스로 밀양행, 수십명의 떼거리들 천황산 사자평에 오른다.
요즘 잦은 비 때문에 불어난 계곡의 폭포는 퀄퀄 쏟아져 내리고.
헉헉거리며 산길 도파 억새풀 스산한 능선에서 고기들 구워놓고 많이 마신다.
조선소 노가다들께서는 모두 술에 잡아먹혀 어는 무리는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무사히 9시경에 부산 도착.
몇무리들 어울려 또 맥주집행.
월요일, 겨우겨우 일어나 출근하였는데 젊은 친구들의 결근이 심하다.
책임감이나 의무감의 문제이다.
俊이 성적표, 반에서 5등, 학년에서 34등.
15775 1990. 4. 17 (화)
새벽, 제법 싸늘한 냉기.
J와 산에 오르다.
英이에 관한 얘기, 제 반에서 이제는 10등 밖으로 밀려난 모양이다.
일요일 학교에 가서 공부한다는 책가방 속에는 소설책이 들어있고.
J 왈 '우리 아이들은 공부하는 아이들이 아니야.'
그렇지 않다는 내 주장, 공부하는 아이가 따로 있을 리가 있느냐는.
英이- 내 딸 정신의 숲 속을 한번 들여다 볼수 있었으면.
무슨 생각이 그 아이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지, 그토록 영특하고, 예쁘고, 사려깊고, 예의 바르던 英이의 정신을 무엇이 훼손시키고 있는지.
내게 돈이라도 많아 어디 과외라도 시켜줄수 있었으면.
물을 떠 돌아오는 숲 속에는 온갖 새들의 새벽 합창.
휘파람새의 울음소리는 아주 독특하다.
내 방에 불끄고 앉아 기도.
英이.. 英이...
15776 1990. 4. 18 (수)
꿈- 어머니 앞에서 俊이 따귀를 갈긴다.
꿈 속에서도 때리고 나서 그 애틋한 마음은 俊이를 껴안고 울고 싶었다.
웬 천리교의 성전인지 궁전인지를 관광하다가 그랬다.
써늘한 대기 속 어두운 숲길.
15778 1990. 4. 20 (금)
조르쥬 시므농 '타인의 목' 다시 한번 읽다.
어떻게 살해하였느냐가 아니라 왜 살해하였느냐.
살해의 동기에 이르러서는 실존족인 냄새도 풍긴다.
살인자의 그런 의식은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있을 것이다.
편한 잠.
J를 깨워 산에 가려하니 새벽 어둠을 가르며 내리는 비.
비오는 현장, 공정은 뭉기적거릴 것이고.
15779 1990. 4. 21 (토)
어제는 오전내내 주룩주룩 낭만같지도 않은 봄비가 내리다.
오후에는 비가 그쳐 다행히 BLOCK의 구조검사는 마칠수 있었다.
SB-357 의 CARGO BLOCK SYSTEM의 하자 때문에 떠들썩.
1차선은 일본에서 교환 해야하는 적지않은 경비의 부담.
점심시간을 이용하는 자동차운전학원, 젊은 조교 녀석의 불친절하고 시건방진 태도가 주눅들게 한다.
새벽, J와 어두운 산에 오른다.
영롱한 새소리, 비 온후의 숲의 냄새.
돌아와 책상앞 앉아 소리내어 읽는 시편.
불꺼, 도사리고 앉아 드리는 기도.
사랑, 온유,겸손,양선.. 주님의 덕목.
그 세계의 농밀한 기쁨.
<밤>
취하여 돌아 와 책상 앞 앉는다. 낙서.
英이는 교회의 학습세례.
英이가 꿈꾸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일까.
새벽에는 새가 울더라.
내 연인은 그 소리를 아름답다고 하더라.
나는 이 고요한 새벽에 시끄럽다고 하였더라.
그러자 내 연인은 그것은 당신의 심통스러움이라고 하더라.
그것들은 모르스 기호처럼 -.-.---. -----. 하고 울었는데.
그래서 나는 그것이 나의 아름다움인 것을 슬슬 느끼고자 하였거든.
그 애들의 부르짖음, 자지러짐, 웅얼거림, 제 목소리가 아닌 것을 내게 들리게 하였다 할지라도 나는 그 애들의 새벽 울음을 들을수 있걸랑.
얘.
수린아, 俊아.
함께 숲으로 가자.
15780 1990. 4. 22 (일)
오늘.
英이는 교회에서 학습세례 받는다고.
俊이는 14살이 안되어 아직 세례는 받을수 없단다.
그러나 J의 신앙의 싻은 아직 움트지 않고.
나의 일요일은 에클레시아적인 경건은 있지 아니하다.
우선 목욕부터 하고 본다.
육신의 청결이 최우선, 그 연후에야 따르는 정신의 청결.
현장이 걱정스러워 달려나가보아야 할 일요일.
오늘 운전은 장거리 연습을 할터인데 비는 내린다.
그리고 다시 접근해야 할 경건한 책들.
지식의 숲, 먼저 깨우친 자들의 숲을 느끼고자 함은 결코 지적인 허영때문이 아니다.
영혼을 위한 갈급한 호기심이며, 내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은 가엾은 짝사랑임을 나는 알고있다.
<밤>
비오는 현장, 중국음식점의 점심후 고량주 나눠 마시고.
화장실 앉아 죠르주 시므농의 '황색의 개'를 펴들고 앉아 문득 떠오르는 어떤 구상.
시골, 뼈대있는 집안의 고택.
몰락하여 누각에는 잡초가 자라고, 그곳에는 곧 세상을 떠날 늙은 종부가 지키고 있다.
명절- 서울등 외지에서 몰려드는 피붙이들.
도회지에서 현대인으로 살고들 있는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조카, 손주들....
무엇이 종가에 이들을 모이게 하였는가.
핏줄에의 소속감, 군거적 순종의 편안함.
그들은 방에 둘러앉아서 그저 자신들의 얘기만을 쏟아 놓는다.
사기꾼, 노동운동가, 재벌회사의 간부, 가수지망생.. 하는 일도 다양한 만큼 얘기들도 다양하다.
개성시장의 원칙대로 그 얘기들은 자기 직업 세계의 범위에서 하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대화의 소통은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룻밤을 지새고, 늙은 종부를 중심으로 모인 핏줄의 무의미함에 놀라고, 이제 운명할 어머니며 할머니며 아주머니인 종부가 슬퍼서 싫고, 상황이 싫고, 그저 무언가 싫고 싫어서 그들은 뿔뿔이 자신들의 도회로 떠난다.
그곳 종가의 종부는 웃는다.
15781 1990. 4. 23 (월)
새벽, 비는 말끔하게 개였다.
동쪽 하늘에 초생달 하나, 그 오른 쪽 뚝 떨어져서 샛별 하나, 터키의 국기..
이제 곧 5시면 여명의 새벽이다.
밤새 어둠속에 녹아들었던 사물의 윤곽들이 차츰 살아나기 시작하는 시각.
산에 오른다.
이종성 '조직신학 개론' 다시 찬찬히 읽기 시작한다.
기독교의 교의를 다시 한번 찬찬히 들여다봄으로서 초기의 열정을 되살리고자 한다.
도그마로서가 아니라 살아서 펄펄 뛰는, 기쁨으로 환호하는 신앙이기 위하여 먼저 심득해야 할 과제가 조직신학의 도그마이다.
15782 1990. 4. 24 (화)
숲속, 새들의 집은 어디 있을까?
그 숱한 나무들, 어느 가지에 그 애들의 둥지는 숨겨져 있을까.
문패가 없이도 찾아 날아가 잠들 수 있는 그 애들 보금자리는 얼마나 따스할까.
그리고 그 애들은 언제, 어떻게 잠이 드는걸까.
새벽5시, 산에 오를 때에는 새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물길어 내려올때쯤 까치 한 마리가 우짖자 그때에야 기상하였는지 온갖 새들이 경연하듯 울기 시작한다.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아침, 다시 살아야 하는 산 것들의 몸짓이 이토록 찬란하다.
<밤>
더포동 운전면허 시험장.
참담하다.
이토록 화창한 봅날 대낮에 참담함을 되씹으며 한시간 반가량 버스에 흔들려 돌아온다.
장난같이 수월했던 S자 코스에서 후진중에 앞바퀴가 조금 선에 가까운듯하여 다시 전진, 그리고 후진하자 이미 차의 위치는 글러먹었다.
시간의 촉박함에 쫓겨 그대로 후진하는데 찌익 긁히는 소리.
불합격은 물론이려니와 차체 손상의 배상금 85,000원.
함께 간 박두성씨에게 빌려서 물어준다.
박두성씨는 합격.
아침에 자신감 넘쳐서 간 꼬라지가 돌아올때에는 이토록 무참하다.
15783 1990. 4. 25 (수)
신새벽의 산.
온 몸에 가득한 술냄새와 어제의 참담한 마음이 숲을 오염시키지나 않았는지.
약수물로 입을 행구고, 한바가지를 꿀꺽꿀꺽 넘긴다.
이윽고 개운해지는 정신.
J와 영차영차 체조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중리국민학교 운동장에서 J는 한바퀴, 나는 두바퀴 달음박질도 한다.
이제 낮은 많이 길어저서 6시가 되면 일출을 볼수 있다.
英이 정신을 번쩍 나게 하여 줄 방법은 없을까?
학급 12등, 영도여고의 12등이면 어찌 하랴.
이 눔의 세상에서 英이가 진정 가치있고 창조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에 가야 하는 이 현실을 어드렇게 英이에게 깨우쳐 줄수 있으랴.
15786 1990. 4. 28 (토)
어제의 현장은 왜 그리 싫던지, 줄곧 싫어 싫어하며 하루를 보내다.
창조성이 없는 직장이 싫고, 동기부여없는 조직이 싫고, 현장의 불결함이 싫고, 유치찬란한 인격들이 싫고.
국무총리 표창받은 진장수씨, 한사코 사양하여도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고 억지로 고기집 끌고 간다.
내게 저녁 한끼 대접하려고 그토록 노심초사하였다는 50넘은 사나이, 그 순박함에 나는 그저 부끄럽다.
15787 1990. 4. 29 (일)
어제 저녁 俊이는 친구 2명과 제 방에서 공부하다 친구들은 새벽같이 돌아가고.
英이에게 퍼붓는 J의 잔소리에 나도 불같이 감정이 폭발하여 가시버시 함께 英이에게 퍼부어 댄다.
신중한 아비짜리의 지혜와는 거리가 있어도 한참이나 있다.
어미가 야단칠 때에는 짐짓 모른채 할수도 있으련만 충동적인 그 꼴이라니.
英이가 엄마에게 야단 맞으면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는 그 완강한 고집과 거부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치밀어 올랐던 모양인데, 참 수양도 부족할사.
15788 1990. 4. 30 (월)
일요일, 현장에서 돌아와 내 방에 앉아서 하오의 풍광을 내려다 보며 소주 마시다.
다시 읽는 수주 변영로의 '명정 사십년'
인생을 대하는 그 대범함,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결코 사적일수만은 없는 그 호방함, 교만의 극을 치닫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겸손함 넘치고.
그는 가히 주선일시 분명하다.
행간 곳곳에 엿보이는 귀족취미, 부르죠아적인 근성, 우월주의같은 것이 있음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아주 빈한하고 보잘 것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어렵게 성장하였다면 일개 술꾼으로서 그토록 주선의 풍모는 지니지 못하였을 것이다.
초저녁 자리에 들었으나 숙면은 이루지 못하다.
아픈 가시하나가 꿈 속에 있으니.
중심없는 삶, 도저히 군자의 품격은 기대할수 없는 품성, 소인임을 거부하는 자의식.
그리고 노예근성, 필부로서의 쓰라린 자각, 상황에 순치되어 맘몬의 뼈다귀에 꼬리치며 달려가는 한 마리의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