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0. 5

카지모도 2016. 6. 23.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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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90 1990. 5. 2 (수)


어제 밤, 늦도록 녹화된 영화 '간디' 보았다.

간디 역을 맡은 킹 벤슬리의 연기는 좋았을지라도 큰 덩치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바 어렸을적 보았던 그 분은 아주 자그마한 몸집이었는데.


석가탄신일의 휴일이다.

심한 바람과 비 몰아치는 아침.

아침 먹고 목욕하고 발톱깎는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테이프 듣다.

의식깃든 가요, 그 순결함은 필경 때묻어 더러워진다는 변증을 생각하고, 그 젊은 순결함이 공연히 슬프기도 하다.


월간 조선에서 일는 '천상병'

60넘은 순진무구한 어린애.

그 백치같은 표정이 나를 감동케 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15792 1990. 5. 4 (금)


비는 그첬지만 낮게 드리운 구름은 그 두께감을 느끼게 한다.

바람도 잠들었다.

며칠만에 J와 산에 오른다.

비 온후 상그러운 솔향, 새벽 까치는 서기 깃든 흰 와이셔츠에 검은 연미복을 입고 전깃줄에서 폼을 잡고 앉아있다.


요즘 너무나 멀리 떠나있음을 느낀다.

정신의 균형감각, 경건.


15793 1990. 5. 5 (토)


청량한 새벽, 5시 30분인데도 세상은 환하게 밝아있다.

모처럼 바람은 자고 비도 그치고, 푸른 하늘자락이 아침바다와 맞물려 있다.

산을 오르는 일, 운동장을 뛰는 일, 아니 늙어 가는 J와 함께 새벽을 맞는 일은 진정 소증한 시간이 아닐수 없다.

오월, 오월의 푸르름이 여상한 아침. 까치소리.

간 밤에 내 수면이 편편치 못했을지라도, 이 휴일의 아침의 찬란함 앞에서는 감 밤 수면의 기억 따위는 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만다.

주님, 이런 쪽으로 살게 하여 주십시오.

긍정과 밝음...

새소리, 밥 익는 소리, 英이 기침소리.... 사는 소리.

살아가는 소리, 밝은 소리.

긍정과 사랑과 신뢰와 온갖 밝은 쪽의 德들이 가득한 소리.


15794 1990. 5. 6 (일)


나는 스스로를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상황의 개선없음에 너무나 의기소침한 나머지 자포하여 스스로를 내팽겨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상황을 향하여 도전코자하는 기개 한줌 남아있은 것인지.

아무런 보장없는 미래의 경제와, 이루어지지 않는 내 사람들과의 그 눔의 코이노니아를 향하여 추파라도 빙긋 던질수 있는지.


낙천성의 결여, 무엇이라도 씹어 용해시킬만한 소화력을 나는 갖고 있지 못하다.

조울증, 겁쟁이, 나약하여 교활마저 번득이는 이상한 짐승.


주님, 다시 한번 불타게 하소서.

상황의 어두운 것들을 사르도록 불타게 하소서.


15796 1990. 5. 8 (화)


월요일 오후부터 살며시 번져오는 몸살끼.

회사는 비교적 온유한 편이었으나 주님을 모시는 마음밭 만들기는 역부족.


어제 저녁, 俊이 녀석 친구 데리러 나가서 9시가 넘도록 돌아오지 않아 한바탕 가슴 졸이다.


꿈- 새벽에 깨어나면 그 내용은 기억할수 없을지라도, 꿈꾸는 순간의 의식 작용은 진지하였을 것이다.

진지하였다는 것은, 내용은 뚜렷이 기억에 없지만 강렬한 인상이 어떤 색채감으로서 남아 있음으로 알수가 있다.


J를 깨워 산에 오른다.

안개 자욱한 숲, 운동장 달음박질은 몸살기운 때문에 생략.

돌아 오니까 英이의 어버이날 선물.

만년필과 볼펜. 내 새끼.


안개를 넘어서 수채화의 번짐같은 붉은 빛을 거느리고 해가 떠오른다.


15797 1990. 5. 9 (수)


근로자들의 임금인상 요구에 현장은 흔들리고 있다.

특히 외주업체들이. 대동조선은 이미 분규가 시작되고.


어제 어머니께 간다.

근 한달만에 보는 어머니, 살이 많이 찌셨다.

이제 어머니 언저리에는 눈치보는 노파의 서글픔같은 것이 어른거린다.


15799 1990. 5. 11 (금)


이제 조선업은 기능인력이 없어서라도 유지해 나가기 힘들 것이다.

기능공의 평균나이도 다른 기술업종에 비하여 높은 편이고, 더럽고 고되고 위험하다는 이른바 3D의 업종이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피하고 있다.


현장 분위기는 한껏 어수선해져 있는데, 무언가 터져서 과감한 회사의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음흉한 표정 하나가 내게 숨겨져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러한 음흉한 표정을 감추고 있는 사람은 비단 나뿐이 아님을 나는 또한 알고 있다.


새벽, 겨우 몸을 일으켜 J를 깨워서 안개 자욱한 숲 속을 간다.

5시쯤 되면 약수터에는 이미 사람들이 붐빈다.

대부분 늙수레한 사람들.


그리고 새벽에 길에서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 성경을 끼고 교회로 새벽 기도 가는 사람들.

건강을 위한 새벽과 영혼을 위한 새벽, 극명하게 대비되는 콘트라스트.


시편읽고 기도.

자욱한 농무는 열어 놓은 창문을 넘어 밀려 올 만큼 짙고 풍성하다.


15800 1990. 5. 12 (토)


습기 먹은 바람이 수런거리며 숲 속을 배회하는 새벽의 산.

서쪽 바다 중천에는 그야말로 둥근 보름달이 둥실 떠 있고, 동편 바다의 수평선 위로는 붉디붉은 태양이 솟아 오르고 있다.


산에서 돌아와 시편 136 소리내어 읽는다.

이스라엘 역사 속의 하나님, 레위기의 어떤 도그마로서의 하나님.

그것에 근거한 신약 속의 주님.

이런 것들을 연상하여 보면, 나만의 지극히 개인의 실존으로서 느끼는 하나님만이 진실하다는 감정은 착각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의 하나님, 역사속의 하나님, 형식의 하나님, 도그마의 하나님, 민족적 선입견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15801 1990. 5. 13 (일)


어제 퇴근하며 J를 불러내 미장원에 가서 파마한다.

뒷머리를 짧게 치켜 깎아 올려서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목이 짧은 나는 살진 목덜미를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데.


내 방에 앉아 소주 마신다. 말콤 X 읽으며.

그의 그토록 확고한 신념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차츰차츰 축적되어 가는 어떤 생각들이 외부에서 작용하는 하나의 동인에 의하여 신념으로 각인되는 것일까?

흑백분리의 극단주의자인 말콤 X, 그 신념과 용기의 표출은 어떤 전략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확고한 신념이다.

그 신념을 이룰 가능성이 無望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의 신념은 확고하다.


달려가야 하는 휴일의 현장.

엷은 막처럼 구름이 하늘을 덮고, 그 뒤에 숨어서 해는 슬쩍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늦봄의 더위가 예상되는 아침녘.


15802 1990. 5. 14 (월)


나이 먹을수록 메말라가는 정서적인 감동.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의 메마름.

아름다운 여성에게서 순수한 미를 느끼기전에 그저 정욕의 대상인 암컷이상의 의미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아름다운 예술에 대하여 그 충일한 감동대신 그 속에서 허무한 바람의 편린만 맛보게 되었는가.


어쩌면, 그것들의 본질을 간파하여 그것들의 허무함을 이제 깨닫게 되었단 말인가.


15803 1990. 5. 15 (화)


어제 퇴근무렵 무섭게 비가 쏟아지다.

숙면.

간밤의 비가 씻어내린 대기는 그지없이 맑고, 숲 속의 녹음은 흐드러져 넘칠듯하고, 산의 윤곽은 가는 세필로 선을 그은것처럼 그 윤곽이 너무나 뚜렷하다.

선연한 새벽.


그러나 이 새벽 나의 청정함은 곧 대낮의 세속적인 때가 끼어 더렆혀질 것이다.

이 새벽을 지켜가기에는 내의지가 너무 약하고, 내 신앙은 너무 부박하고, 내 사회성은 너무나 고지식하고, 내 상황을 향한 어프로치는 너무나 낙천적이 아니다.


그래서 이 밝은 5월 새벽에 새소리가 영롱한만큼, 첼로는 음울하게 노래한다.

무엇의 모티브인가.


15804 1990. 5. 16 (수)


대낮, 사무실 거울에 비친 몰골을 보며 속이 상한다.

거울에 비친 사십넘은 사나이의 얼굴은 결코 정신적인 몰골은 아니다.

정신적이기는커녕, 그럴듯한 외모의 허세가 조금이라도 깃든 그런 몰골도 아니다.

도무지 불혹의 의미를 아는 얼굴이 아니다.

링컨은 40넘은 자는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데.


나는 갖고 싶다.

정신이 깃든 얼굴.


15806 1990. 5. 18 (금)


어제 오후부터 또 빗발 듣는다.

지구촌의 기후는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

임금협상 결렬, 어떻게 치닫게 될는지.


J가 빌려온 비디오 '레인맨'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는 언제나 뛰어나다.

자폐증의 형과 야망에 찬 동생.

자폐증.. 자폐증..

낯선 것들을 향한 완강한 거부,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상태이다.

익숙한 것만을 수렴하는 행복한 정신적 반추놀이.

내게는 자폐증의 징후가 농후할 것이다.


뿌옇게 내리는 아침비, 산에는 오르지 못한다.

수평선은 흐린 하늘에 모호하게 삼켜져 있다.


15810 1990. 5. 22 (화)


어제 SB-367 진수로 어수선한 현장을 P과장에게 부탁하고, 빠져나와 덕포동 면허시험장.

코스실기는 합격, 이제 주행실기는 불합격.


나에게는 교만이 있다. 진짜 교만이 있다.

그것이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은 것이다.

나는 다른 성좌에서 왔을거라는 의식, 나는 이 세상에서는 이방인이다 하는 의식이 내게는 있다.

내 나라의 언어는 이곳의 언어와는 다르고, 내 나라의 윤리는 이 곳의 그것과는 다르고, 내 나라의 문화는 이 곳과는 같지 않다.

그래서 주변의 저급한 이런 것들에 대하여 우월감과 함께 소외감을 안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저급한 것들에 익숙하여 내 것인양 위선적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다른 별에서 왔다.

지구인과는 인종이 틀리다.


15812 1990. 5. 24 (목)


회색수면.

갈등, 불만, 불안, 초조.


직장과 경제.

쾌도난마, 단 칼에 이 사슬을 끊어버릴수만 있다면.


너는 그토록 싫은 짓거리를 하며 살지 않아도 좋다고 누가 말해 준다면.


동기는 충만하고, 창조성은 빛나며, 사랑은 넘치는 그 세계에의 소망.

내 이 소망에 누구 하나 눈길 한번 주지 않건만.


15813 1990. 5. 25 (금)


어제 박이사와 부차장들, 하리 횟집의 회식.

권오훈의 아파트에 가서 12시까지 다른 사람들은 고스톱, 나는 술을 마신다.

새벽 2시쯤 돌아와 곯아 떨어지다.


俊이 생일.

어머니 오셔 손주 생일 축하해 주신다.

내 분신이며 내 꿈덩어리.

俊이에게서 나를 이루고자하는 이것은 자기부정에서 오는 透寫인가.


15816 1990. 5. 28 (월)


어제 일요일 새벽,

산에 다녀오고 운동장 네바퀴 달음박질한 육신은 상쾌하였다.

구두닦고, 면도기 소제, 발톱깎고 휴일의 현장 나가다.

SB-363 FINAL DOCKING하여 칼룬소드와 BOTTOM SURVEY.

DAMAGE , 반목을 깨뜨려야 할 POINT 가 여러군데.


맥주 몇병 사들고 오후 돌아와 , 俊이 생일선물로 시형어머니가 사준 호화판 책 '세계의 마지막 불가사의' 뒤적인다.

고대인의 자취, 이스터섬의 거대한 석상들, 마야 잉카의 유적, 나스카의 거대한 지상화...

신비스럽다기 보다 어떤 전율까지도 느끼게 된다.

다시 무언가 공부를 허락한다면 고고학을 택하고 싶다.

어떤 공간이나 유적에서, 그것과 함께 숨쉬고 손이 닿았던 어느 고대인과의 은밀하고 충일한 교감. 고대인과 내 실존과의 연결의식같은 느낌은 섹스와 같은 엑스터시가 있을 것 같다.


15817 1990. 5. 29 (화)


이제 한낮의 끈끈함은 여름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조선소의 여름 현장은 피부에 느껴지는 더위도 더위이지만, 공정관리와 작업관리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한 무더위는 더욱 끔찍한데.

올 여름도 이 현장에서 그 무더위를 견뎌내야 하는 건지.


칼룬소드 녀석은 조금도 봐주려 하지 않는다.

결국 외판 네군데, 반목을 깨뜨려 부수다. 목공 10명이 달라붙어 어제 밤늦도록 작업하였는데 성공하였는지 모르겠다.


새벽 4시30분, J깨워 산에 오른다.

돌아와 시편, 기도.


15818 1990. 5. 30 (수)


SB-363 외판 문제, 칼룬소드로부터 CLEAR 시키다.

결국 칼룬소드가 기도하였던 것은 선주감독으로서의 권위세우기였다.


홀로 俊이 받은 생일선물 '잡학사전' 뒤적이며 내 방에 앉아 소주 마신다.

온유하고 안정된 정신 상태... 기분, 감정.

이러한 때일수록 조심하라.


자각과 절제.

쾌락주의가 틈입하지 말도록.


목숨은 죽어야 한다는 필연을 항상 되뇌이라.


묘비명.

'지나가는 이여, 나를 기억하라.

지금 그대가 살아있듯이 한때는 나 또한 살아 있었노라.

내가 지금 잠들어 있듯이 그대 또한 반드시 잠들리라.

나의 뒤를 따를 준비를 하라.'

-MEMENTO MORI-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15819 1990. 5. 31 (목)


어제 박대리, 이技師등 데리고 술 마시다.

교활하지 않은 어리석음은 얼마든지 아름답다.

그러나 교활이 어리석음을 가장하고 있다면 나는 단번에 그것을 간파할 수가 있다.

나 또한 어리석음을 가장한 교활이 있을것인데, 그야말로 내 눈속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티끌만 보는 격이다.

이것은 역으로 교활을 가장한 어리석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진정 이것을 부끄러워 할줄 알아야 한다.


달디 단 늦잠, 흩뿌리는 빗발.

이틀째 새벽 숲에는 가지 못하다.


英이.

英아, 수린아, 내 딸아.

부디 옳곧게 너를 키울수 있은 지혜를 이토록 바보같은 부모에게 가르쳐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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