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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36)

카지모도 2024. 10. 20.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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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안개보다 마음이

 

사람의 일이, 토방에서 대문간만 나가려도 자칫 잘못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수가 있는데, 한나절 좋이 걸어가야 하는 십 리 길은 어떠할꼬. 떨쳐입은 진솔옷

에 흙탕물도 튀어오르며, 비단 갖신 고운 발로 지렁이도 밟으리라. 내 앞을 가로

지르는 미친 개, 누런 황소도 만나겄지. 길도 또한 평탄치만은 않아서, 냇물도

건너며, 고개 넘어, 산모롱이 길게 휘돌아 지루하게 멀리 걷기도 할 것이다. 십

리가 그러할 때 하루 해 온종일 깜깜하기까지 걸어야 하는 백 리라면 어떠할까.

가다가 길이 끊어진 곳도 있고, 돌짝밭 가시덤불 뒤엉킨 골짜기도 있거니와 집

도 절도 없는 길에 고적하고 막막하기 뙤약볕 속 나그네 같은 고비도 있을 것이

다. 거기다가 천 리 길이야. 하루도 이틀도 아닌 그 길을 가자면, 낯선 곳의 낯

선 방에 캄캄한 밤 무섭긴들 아니하리. 더러 도둑을 만날 수도 있겄지. 가진 것

다 잃고 빈 몸으로 나서는 객지의 사립문 밖. 하물며 인생이랴. 한나절 걷는 십

리 길도 아니요, 하루 해 꼽박 넘어가는 백리 길만도 아니고, 한 열흘 혹은 보름

밤낮으로만 가면 되는 천리 길도 아니다. 나서부터 지금가지 쉬임없이 걸어왔고,

이제부터도 쉬지 않고 몇 십 년을 걷고 걸어가야 마지막에 당도하는 길. 인생.

그것이 과연 리 수로 몇 리일가. 그 멀고 먼 길에 꽃 피고 새 울어 동무 있다면

오죽이나 좋으랴만, 홀로리 고독하게 한세상을 등에 지고 다만 묵묵히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야 한다. 나는. 그러다 고꾸라지는 일 없으리오. 넘어져 깨지고

피 흘리며 주저앉아 팍팍한 걸음을 탄식할 제, 아아,나의 한세상이여. 고꾸라진

자리에 꼬챙이 없으면 그저 일진 사나운 것을 탓하며 손바닥이나 스라리게 씻기

고 말 일이지만, 돌팍에 걸려 앞으로 어푸러진 그 자리에 불행히도 칼끝이 거꾸

로 박혀 있어, 찔린 살이 벌어지고 붉은 피 선지로 엉기며, 멍든 가슴을 깊이 버

힌다면. 내가 무슨 장사여서 비명을 참을 수 있으리. 효원은 칼끝이 살을 찌르며

파고들어 뼈에 미치는 소리를 들었다. 참혹하다. 허나, 한 번 넘어졌다고 주저앉

아 썩으랴. 앉은 자리에 곰이 피게 꼼짝 않고 탄식만 하고 있으랴. 누가 와서 일

으켜 주기 바라며 좌우를 둘러보고, 어루만질 손길만 기다리다 앉은뱅이가 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설령 앙가슴의 붉은 살이 다 벌어져 너덜너덜 넝마처럼

펄럭이고, 뼈다귀 허옇게 드러나 시린 바람에 마른다 할지라도, 박힌 칼날 꼬챙

이를 맨손으로 뽑아 내고, 나는 가야 한다. 만일 그 칼날 뽑히지 않고 죄 없는

두 손만 베인다면. 가슴에 칼 박은 이대로 일어서야지. 그런 날의 하늘이 맑을

리 없어서, 한겨울 천지가 얼어 생기가 막히는 폐색이거나, 골수에 찬 비 꽂히는

우천아래 울음마저 지워지고 가리워져, 억울한 가슴을 두드리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뿐이랴. 젖은 몸 위에 바람의 회초리 후려치는데 얼음 끼치는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빙렬하는 아픔은 또 어찌할 것인가. 허나, 위로는 필요없다. 선병

자. 같은 병 겪어 본 사람 그 누구의 고언도 나는 마다하리라. 하늘 아래 나같은

이, 단 한 사람도 없다 할지라도, 나는 다만 나 혼자서 내 하늘을 이고, 우러러

단 한 방울 눈물도 흘리지 않으리라. 어금니가 썩어도 나는 결코 이 일로 입을

벌리어 탄식하지 않으리. 비록 나 혼자서 홀로이 나 자신에게 이르는 말일지라

도, 이 일을 두 번 다시 되뇌어 곱씹지 않으리라. 내, 아무런들 이만한 일에 굽은

다리를 못 펴고, 이만한 일에 넘어져서, 갈 길 먼 가슴을 상할 것이냐. 이 앞으

로 내가 세상을 살아갈 때 오직 나를 지탱하고 의지해야 할 곳은 나의 속, 나의

가슴, 나의 머리, 나의 중심뿐일 것이어늘, 지금 다 써 버리고, 지금 다 내주어

썩여 버린다면 내 어찌 살아가리. 남의 것 맡아 할 일은 그만두고 오직 내 한

몸 유지하여 살아가려도 그 유지할 만큼은 남겨 두어야 하리니. 내 가슴이 내

양식이라.

내 마음이 나의 시량인즉. 뼛속에 끼치는 추위로 이 세상이 고적하여 그 어디에

도 몸 비비어 온기를 얻을 곳 없다 하여도. 내 심중이 든든하다면 스스로 땔나

무를 구하러 헤매지 않을 것이요, 어느 한 사람 나한테 마음을 나누어 주지 않

는다 하여도, 내 속에 내 먹을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비루하고 누추하게 남의

문전에서 동정을 얻으려고 서성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효원은 어금니를 깊이 물

었다. 그가 속으로 사려문 '너'의 이름이 '강모'인지 '강실이'인지는 그네 자신도

헤아리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 '너'는 두 사람이 겹치어 어우러낸 어떤 형상이었

는지도 모른다. 그 형상은 형체가 뚜렷하지 않아 안개가 덩어리져 뒤웅크러진

듯도 하고, 무슨 연기나 구름 뭉게 같기도 하였다. 내 결단코 저 속으로 얼크러

들지는 않으리라. 이만큼에 서서, 저 오리무중, 아득하고 짙은 안개 자욱한 남의

마을로 나는 들어가지 않겠다. 그것은 너희들의 것이겠지. 나는 다만 너희들의

그 안개 바깥으로 밀려나, 낯설게 떨어져서 무참히 고개 돌리고 있지만, 그렇지

만, 나는 몸을 솟구치리라. 안개와 먹구름에 나도 같이 휘감기어 뒤얽히면, 가도

가도 길은 보이지 않을 터이지만, 논도랑인지 갈대밭인지 모르고 허방을 길로

삼아 움퍽 짐퍽 진흙투성이로 헤매겠지만, 나는 너희들의 울녘에서 떨어져 나오

리라. 그리고 나를 들어올리겠으니. 검은 구름과 안개 속에 있을 때는 습하고 암

담하여 젖은 몸에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지라 숨조차 막힐 터이나. 보다 높은

곳으로 솟아오르면, 홀연 구름머리 테를 벗고 솟구칠 때, 그곳에는 청천의 푸른

하늘이 궁창 그대로 끝닿은 데 없이 드리워져 있지 않겠는가. 장막 한 겹에 불

과한 이 운무에 생애를 걸지 마라. 내 힘으로 찢을 수 없는 것이라면, 놓아 버리

라. 그 안개의 구덩이에 나를 던져 무익하게 익몰하는 어리석음 대신에 나는 내

마음을 끌어올려, 벗어나리라. 이 안개보다 내 마음이 높아져야, 나는 벗어난다.

천하에 내가 되어 가지고 이만한 안개의 구렁텅이에, 언제까지 이 몸을 담고 있

을 것인가. 효원은 숨을 들이쉰다. 깃털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숨죽인 숨을, 먼

지보다 조금씩 오래오래 다스리며, 몸 속에 들끓는 숨을 몰아내고, 고요한 새 숨

이 온몸 가득 차 오르도록 크고 깊게 들이마신 숨을, 그네는 참을 수 있는 데까

지 참는다. 숨이 서로 싸운다. 효원은 이 혼미한 안개를 몰아내고, 드디어 머리

꼭지와 손톱 발톱 끝에 차 오른 숨이 그네를 무중력의 공간으로 띄워 올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 효원의 온몸에, 피가 팽창하며 징소리가 울린다. 괭 괭 괘

앵 괭 괴굉 괭 괭 괘개앵 강수의 혼신 명혼이 있던 날 밤의 징소리다. 허공을

휘어 감아 만수향내 뭉뭉히 피어 오르는 마당을 두드리던 그 징소리와, 어디 한

데 바깥에서 야기를 쏘이어 습하고 찬 몸으로 들이닥치던 강모의 허하고도 거친

숨. 이제는 비로소 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한 날의 밤 거의 같은 시각에 그 형

체도 잡히지 않는 망혼의 저승 향내 자욱한 징소리를 두 여인에게 나누어 심어

주고, 홀연 저 홀로 몸을 감추어 버린 강모를 향야여, 효원은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쉰다. 이번에는, 강모를 삼키는 것 같다. 너는 내 것이라. 어쩔 수 없다. 내

가 너에게 매이어 있으니, 내가 너에게 매이어 있는 한 너는 내 것이라. 비록 그

형체 없을지라도. 너의 안개 속에 뒤엉키어 같이 범벅이 되거나, 너보다 더 높은

곳으로 떠오르거나, 인력이 닿는 한 이 끝과 저 끝에서라도, 할 수 없이 너는 내

것이라. 효원은 호리병 속에 한세상을 빨아들여 가두는 술사처럼, 자신의 몸 속

으로 강모를 빨아들인다. 그 숨결을 따라 강실이가 에워쓴 안개가 함께 딸려 들

어온다. 효원은 온 겨울 내내 그렇게 어금니를 물고 숨을 들이쉬고만 있었다. 그

숨은 그네의 심중 한 자락을 위로 끌어오리는 듯도 하였으나, 무서운 가슴의 한

쪽에 먹진 물주머니처럼 가라앉아 매달려 있었으니. 그네는 참으로 중심을 잡기

가 어려워, 겉으로 보기에는 표나지 않았으나, 빗금으로 기우뚱 날카롭게 심경을

긋고 있었다. 그 빗금을 타고 위태로운 겨울이 아슬아슬 미끄러질 때, 설도 쇠

고, 정월 대보름도 다 지나간 뒤, 이월 초하룻날 영동 할머니가 어느 해보다 심

한 바람을 부옇게 온 하늘 휩쓸며 몰고왔는데, 농가에서는 이 달 초엿새날 좀생

이별을 올려다보며, 징용, 공출, 수상하고 그악한 세월 속에서나마 가련한 풍흉

을 점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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