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초아흐렛날.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튼다."
는 무신일 무방수날인지라 귀신 없는 이날을 놓치지 않고, 무엇을 해도 탈이 없
다 해서, 집집마다 안방 건넌방의 가재 도구들을 옮기기도하고, 지붕이며 바람
벽, 부뚜막이나 뒷간 들을 수리하기도 하며, 아낙네들은 무엇보다 중요한 장을
담그었다.
"장 담기에 제일 좋은 날은 암만해도 정묘일이지 머."
율촌댁은 마침 큰집으로 올라온 오류골댁한테 말했다.
"그럼 내일이지요?"
"하아. 자네도 내일 담을라는가?"
"그럴라고요."
"그게 참 요상헌 일이데. 무얼 그러랴 해도 신날 장을 담으면 꼭 장맛이 시고,
물날 담으면 꼭 장이 묽어진단 말이야."
"그러니 날 놓치면 큰일지요. 오도 가도 못허고 신일 수일에 장 담게 되면 참 난
감헐 일 아니요잉? 일년 농사 안 중헌 것이 없지마는 장맛 버리면 한 해 음식
다 버리는 것이니."
"아이고, 삼백예순다섯 날 끼니끼니 하루에도 세 끼니 천 번도 넘는 밥상에 온갖
절사, 크고 작은 상 차릴 적에 장맛 아니고 무엇으로 버틸 재간이 있는가."
인가의 요긴한 일 장 담그는 정사로다 소금을 미리 받아 법대로 담그리라 고추
장 두부장도 맛맛으로 갖추 하소 앞산에 비가 개니 살진 향채 캐오리라 삽주 두
릅 고사리며 고비 도랏 어아리를 일분은 엮어 달고 이분은 무쳐 먹세 낙화를 쓸
고 앉아 병술로 즐길 적에 산처의 준비함이 가효가 이뿐이라 아낙네 평생의 일
로 밥상 차리는 것보다 크고 중한 일이 없어, 일년 열두 달 삼 시 세 끼 언제라
도 김치를 준비해야 하고, 모든 음식에 간을 맞추는 장류에, 각종 젓갈이며 장아
찌 같은 밑반찬이 고루고루 상비되어 있어야만 하였으니. 제 철에 메주 쑤어 장
을 담그고, 된장 고추장을 알맞게 마련하는 일이야 주부의 가장 근본되는 일이
었다. 거기다가 봄철이면 고사리 고비 취나물을, 가을에는 호박 가지 무 버섯 들
을 말리었고, 끓는 물에 슬쩍 데쳤다가 말리는 고춧잎, 날것대로 썰어 말리는 고
지나물은 종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서해안 생굴을 소금 탄 물에
깨끗이 서너 번 씻어 헹군 뒤 소금 뿌리고 끓는 물에 탐 고춧가루 넣어서 버무
려 담근 어리굴젓. 논에 사는 게를 잡아 산 것 그대로 설설 기는 것을 오지동이
에 담고 물을 부어서 흙물을 다 토해 내게 하고는, 진간장을 부은 뒤 며칠은 그
냥 두었다가, 그 장을 따라 달여서 붏은 고추 말린 것이랑 마늘을 같이 넣어 다
시 동이에 붓고, 며칠마다 한 번씩 서너 차례 간장을 따라내 끓여 붓는다면, 노
랗게 익은 게젓의 등딱지 속이라니. 새까만 간장의 달큰하고 쫀독한 맛에 따끈
한 흰 밥을 비비고, 게젓 등딱지에 밥 한 숟가락 얹어 먹으면 진수성찬 수라상
이 부럽지 않은 게젓 아닌가. 또한 조기젓 멸치젓 창란젓 새우젓 아가미젓 명란
젓 화석어젓, 언감생심 쉽게는 넘볼 수 없는 민물새우 토하젓.
"젓 담는 솜씨야 형님 따라갈 사람 있을라고요?"
오류골댁은 장독대에 선 율촌댁을 도우면서 말했다.
"솜씨가 무어 따로 있어? 정성 들어가면 누구나 다 같지."
일찍이 시어머니 청암부인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율촌댁의 젓갈 솜씨며 다른
음식 솜씨들을, 율촌댁 자신도 은근히 자부하고 있는 태로 대꾸하는 손위 동서
에게 ,오류골댁은 혼자말처럼
"강실도 시집가기 전에 여기 와서 낱낱이 다 배우고 가얄 것인데. 그래야 어느
시집으로 가든지 문견 없다 소리 안 들을텐데요. 저희들 살림이랴 뭐 어디 해먹
기를 제대로 허는가, 갖추기를 제대로 허고 사는가. 흉잽힐 일 많지요."
"원, 자네같이 알뜰허고 음전헌 사람이 어디 또 있어?"
"알뜰 다르고 문견 다르지요."
그것은 그랬다. 없는 중에 쪼개어 모양 내고 가꾸는 것이, 해 보고 먹어 보고 입
어 보아 몸에 익은 태깔과 격식에 비길 수 있으리야.
"알뜰하기로는 남평 아짐 따를 사람 조선에는 없을 것 같지마는 황서방댁이 당
한 경우를 생각하면 남 일 같지만은 않네요."
오류골댁이 말하는 황서방댁은, 남평 이징의의 여식인데 바로 가까이 수월 황문
으로 출가하였다. 인근에 누구라도 아는 문벌 있는 문중이었다. 오류골댁은 강실
이한테도 그네의 이야기를 해 준 일이 있었다.
"아 그 무네미 아짐이 범연헌 사람이냐? 집안 살림이 궁벽해서 끼니가 차거운
중에도 남평 할아버지 성품이며 남평 할머니 음식 범절이 어디 비길 데 있다고?
너도 알잖으냐. 참, 실 한 땀을 금쪽같이 애끼는, 서슬이 시퍼렇게 선 양반이 바
로 남평 할머니시다. 그 내력을 받은 이가 무네미 아짐이지."
그런데 시집 황문은 친정과는 다르게 이런 저런 것을 갖추고 사는 집이었다. 음
식도 넉넉하고 의복도 치레에 귀빠지지 않았다.
"워낙 눈치 있고 솜씨 빠른 무네미 아짐이라, 없는 집에서 있는 집으로 간 티 안
내고 무난히 넘어가다가, 근친을 오게 되얐네. 때마침 친정 조부 제사를 당했드
란다. 겸사해서 잘 되었다고 황서방이 서두르는데, 인제 며칠 후에면 매안으로
올 판인데 말이다. 하루는 어디를 나갔다 오드니, 허어, 참, 우스운 꼴을 다 봤다
고 그러드래."
"무엇이 그리 우스우시요?"
황서방댁이 남편에게 물었다.
"내가 제사 구경을 했소."
""제사 구경이요?"
"응"
"제사가 우습다니."
황서방댁이 의아하여 개키던 옷을 손에 든 채로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황서방은
아내의 앞에 앉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다 보아도 남의 제사 흉은 안 본다는데."
다가앉는 신랑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혼자말로 어색함을 가리며 개킨 옷을
횃대에 거는 황서방댁의 귀에
"도구통이 제상인제 우습지 않겄소?"
하는 남편의 말이 꽂혔다.
"도구통?"
"제상이 높아야 하는 것은 알았던 모양이오마는, 아직 제상 마련을 못했던가, 마
당에서 도구통을 불끈 들어 방으로 들여오길래, 이 웬일인가 했더니, 그 위에다
소반을 덮어 올립다다. 도구통 위에 갓 쓴 것마냥 귀떨어진 소반이 씌워지고, 그
소반 위에 제수를 진설하더란 말이요. 하, 이런 수도 있구나, 싶어 궁색한 편법
이 가긍도 했지만, 나막신을 깎어 팔어서라도 조상 제사 제상은 하나 마련해야
지, 도구총에 진지 잡숫는 귀신들이 처량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선 그 형상
이 우스워서 내 헛웃음이 다 나왔소."
남편의 말에 황서방댁은
"그래요?"
소리도 못하였다. 그것이 바로 갈 데 없는 자기 집 친정의 제사 풍경인 탓이었
다. 이남 평생 청수를 탕으로 대신하고 홍동 백서 어동 육서 조율이시를 한 번
도 고루 갖추지 못할 만큼 가난하게 차린 제수였으나, 정성만은 결코 부족하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제수 미약한 것을 늘 죄송히 여기고 한스러워 하였다. 그러
나, 그것보다 항상 더 한스러웠던 것은 제상 하나 없는 것이라고 슬쓸히 뇌던
어머니 남평댁의 누른 얼굴이 덮치듯 떠올라, 황서방댁은 모골이 송연했다.
"신명은 형체가 없으시니 방바닥에 앉으시면 어떠하고 공중에 떠 있으면 어떠신
가. 귀신의 밥상이 도구통이면 어떠하고 도구통 씌운 소반이면 또 어떠해? 정성
을 흠향하고 몸소 둘러보러 오신 선령의 밝은 마음이 제상 모양을 가리실까. 도
굿대 끝에다 그림을 그려 매달아도 인신이 통할 만큼만 참으로 진정을 다헌다
면, 굳이 제수 안 올려도 아실 것인즉."
이징의는 쪽빛 두건을 쓴 머리를 검푸르게 이고 앉아 잘라 말했다. 하이고, 참.
남평댁은 거기에 두 말도 더 보태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황서방댁은 큰일이 났
던 것이다. 혼수로 해 가지고 간 사유 금붙이나 패물, 또는 반닫이에 몰래 간직
해 둔 비단 명주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디서 어떻게 금전을 마련하여, 근친
가기 전에 친정에다 제상을 마련해 놓을 것인가. 안 들었으면 모르려니와, 지금
바로 절구통 재상 흉을 보고 있는 남편에게, 그대로 친정의 흉을 잡히게 생긴
황서방댁은 그만 중치가 막혔다. 한 마디로
"몰풍"
이라 고개를 돌려 접어 버릴 남편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황서방댁은 이튼날로
황망히 남모르게 매안에 왔던 것이다. 그것도 친정이 아닌 원뜸의 청암부인에게로.
"잠을 안 자고 베를 짜서 반드시 머지 않아 갚을 터이오니, 부디 제상 하나 살
만한 돈을 내주시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일평생 서로 존중하고 살아야 할 내외
지간에 면목 깎이고는 바라보기 어려운 일인지라, 염치를 무릅쓰고 청을 드립니다"
새댁 황서방댁의 수그린 이마를 물그러미 내려다보던 청암부인은
"그리하라. 안서방 시켜서 장에 갔다 오라 할 것이니 너는 어서 돌아가거라. 내
일 모레 내외 동행해 올 사람이 이렇게 미리 다녀가는 것이 남 보기에 수상쩍다."
하고 손짓으로, 얼른 일어서라, 시늉하였다. 엉겁결에 뜻밖의 제상이 지게에 실
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란 사람은 남평댁이었으며, 참으로 오랜만에 처음으로
덩실하니 다리 솟은 제상에 제수를 받으신 선령은 흔흔하실 것이로되, 이징의는
"끌 끌 끌."
누구에게인지 모를 혀를 찼다.
"껍데기에들 매이어서."
라고도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어쨌거나 남평댁은 사위 앞에서 너무나 떳떳
하였고, 황서방댁은 그날부터 상값을 갚기 위하여 베틀에 앉아 온 밤을 새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큰집에 와서 눈썹 너머로만 배우고 익혀도, 어느 댁 큰살림이 눈설 리 없겄그마
는. 일 배울라허니, 그만 백모님이 이렇게 하세 허셔서."
"내 앞에 닥치면 다 잘해. 강실이 걱정은 그만두고, 부모 할 일로 어디 혼처 자
리나 야물게 골라 보아. 그 애는 아직도 별 말이 없는가? 어디서?"
"애 터지게 그마안 하고 있네요. 이게 무슨 일이까요?"
"알어는 보아?"
"울안에 마당맴만 도는데 제가 알어본들 거기서 기기지요. 서방님들이 좀 나서
주시면 오죽이나 좋을까. 지금은 또 그럴 정황도 아니고. 벙어리 냉가슴이라더
니, 저를 두고 허는 말인가 싶그만요."
"상은 상이고, 일은 또 일이니, 나도 사랑 사롸 보께. 너무 애닳지 말어. 그러다
가 다 된 밥에 코 빠질라. 아무한테나 내줄 수는 없젆은가. 인제 곧 임자 나설
것인데. 일직 간다고만 꼭좋은 것인가 뭐? 가야 한다니 왔지, 시집와 보니 좋
아?"
"죄 많어 여자지요."
"죄도 많고 일도 많고."
"탈도 많고 시름도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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