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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38)

카지모도 2024. 10. 22.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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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동서는 마주 받으며 잇던 말 끝에 서로 보고 웃었다. 내일은 장을 담그는 날

이라, 매일같이 맑은 물로 닦아내는 장독을 오늘따가 어느 때보다 정성들여 돌

보고 매만지는 유촌댁 손길에 햇빛이 묻어났다. 오류골댁은 옆에서 그 일손을

거든다. 이른 새벽 동이 틀 대 뒤안 장꽝 장독대에 즐비한 장독 뚜껑을 반드시

열어, 신선한 공기를 쏘이게 하고, 동쪽에서 떠오르는 아침의 깨끗한 햇볕을 쪼이

게 하는 장독들. 쌀 세가마가 들어간다는 우람한 독아지는 대를 물린 장독이요,

그 옆에 해를 묵여 걸쭉해진 진간장과, 진하지 않은 간장 청장 항아리가 놓이고,

김칫독들이 어깨를 반듯하게 맞댄 맨 뒷줄은, 한낱 흙을 구워 만든 독이라기보

다 위엄 있는 가문의 엄위를 자랑하며 버티고 앉은 마나님을 보는 듯하였다. 그

리고 그 앞에 중간 크기인 중들이 독들은 된장을 다복다복 담은 것이 나란히 몇

개씩, 또 두태를 종류별로 담은 항아리에, 다시 한 줄 앞으로 물러앉은 좀더 작

은 단지들은 고추장이며 담북장 밀가루 담은 것이다. 맨 앞줄 올망졸망 앙징스

럽고 조그만 단지 단지에는 가지가지 장아찌에 조청과 자반 깨 젓갈 들이 들어

있었다.

"그 집안 장독대를 보면 가격을 알 수 있다."

는 것이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었다. 작게는 여나믄 개에서 많게는 수십 개

의 크고 작은 장독들을 어마어마하게 줄 맞추어 키 맞추어 세워 놓고 앉혀 놓

고, 그 어느 것이나 모두 한결같이 기름이 자르르 흐르도록 반들반들하게 윤을

내어, 마치 햇빛 아래 잘 빗은 처자의 검은 머리 흑윤 같아야 하는 장독대. 그러

니까 장독 살림이 옳게 큰살림이었다.

"장은 모든 음식맛의 으뜸이다. 집안의 장맛이 좋지 아니하면 좋은 채소와 고기

가 있어도 좋은 음식으로 만들 수 없다. 설혹 외떨어진 촌야에 사는 사람이 고

기를 쉽게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여러 가지 맛 좋은 간장이 있다면 반찬에 아

무 걱정이 없다. 우선 장 담그기에 성심을 기울이고, 오래 묵혀 좋은 장을 얻게

함이 살림의 도리다."

라고 증보산림경제의 장제품조 첫머리에도 씌어 있지만, 문자로 적히지 않았다

고 그만한 것을 모를까.

"그해 장맛이 좋아야 집안에 불길한 일이 없다."

고 널리 믿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장맛이 변하여 시거나 묽어지는

것은 아주 불길한 징조로 쳤으니, 행여라도 어찌 될세라, 아낙네들은 날마다 새

벽이면 문안 드리듯 장독대로 맨 먼저 나왔다. 그리고 정화수를 길어 올려 흰

사발에 고이 담아 장독 위에 바치곤 했던 것이다.

"장맛 없으면 음식맛 없고, 음식맛 없으면 밥맛 없지. 밥맛 없으면 건강 없고, 건

강 없으면 평안도 없다."

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으므로. 장 담그는 일은 아랫사람들한테 맡길 수

없다. 율촌댁이 오류골댁과 말을 주고받으며 장독 뚜껑들을 열어 빈 독은 거풍

도 시키고 아닌 독은 햇볕도 쪼여 주며 눈부시게 흰 행주고 독아지 몸을 닦고

있노라니, 효원이 창백한 얼굴로 나왔다.

"작은어머님 오셨그만요."

"응"

행주 든 손을 독전에 댄 채로 오류골댁이 돌아본다.

"자네 어찌 안색이 그래?"

"아닙니다."

"체했는가? 무얼 잘못 먹었어?"

"그냥 좀.."

얼굴에 푸른 빛이 역력한 효원의 낯색에 율촌댁도

"속이 안 좋다더니 아직도 그만 허야? 무에 꽉 막힌 것 아닌가? 어째 그래 뵌

다."

라며 눈섭을 모은다.

"들어가 누워 있지 그럼. 정작 내일이 바쁜 날이지 오늘은 설거진걸. 조끔 있다

가 강실이도 올라오라고 그랬어. 일 좀 배우고 익히라고. 시집가서 흉이나 안 잽

힐라면 내가 잘 아는 수밖에 없거든. 건너다 본 눈썰미허고 내가 해 본 손끝허

고 어디 같은가. 한 번 이번에는 큰어머님 뫼시고 자네랑 같이, 공부로 장 좀 담

겨 보라고 그랬네. 이따 그 애 오거든 부를 테니 들어가 있어. 저런. 영 안색이

안 좋아."

아까보다 더 푸르게 질리는 효원의 낯빛에 율촌댁조차 며느리를 더는 못 서 있

게 하며, 안으로 들어가라 하였다. 그런데도 효원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뿐,

마치 그다리가 떨리면서 스러져 없어진 사람처럼 멍멍한 채로 발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너 그러고 서 있어야 무슨 일 허도 못허겄다. 어서 들어가래도. 고집 쉭이고. 이

따가 일헐 때 나와. 아이?"

율촌댁이 아예 나무라는 투로 말하자 겨우 정신이 난 듯 몸을 돌리는 효원은,

이대로 드러누워 앓고 말까. 내 너를 결코 보고 싶지 않다. 깊이 패이는 이맛살

에 가슴을 찔린 것같이 어금니를 문다. 그날 강실이는 큰집에 올라오지 않았다.

몸이 안 좋다 하였다. 그리고는 날이 밝아 이름 새벽 싸아한 공기 속에 장을 담

그려 다시 한 번 장독들을 손질할 때, 효원은 율촌댁보다 먼저 장독대에 나와

있었다. 어느새 낯빛도 많이 가라앉아, 감 밤 사이 나았는가 싶기도 하였다. 깨

긋하게 씻어 말린 장독 안데 메주를 찬찬히 넣고, 어제 준비해 둔 소금물을 바

가지로 떠서 다른 독에 따르는 그네의 손도 침착하다. 장 담글 소금물은 하루

전에 미리 타 놓아 찌꺼기를 가라앉혀 말갛게 만들어야 한다. 메주와 소금물의

절묘한 비례가 바로 장맛의 비밀이기 때문에 그 일은 율촌댁이 하였다. 효원이

말갛게 따라 놓은 소금물의 간을 보고, 독안의 메주를 가늠하고, 바가지를 기울여

감로수처럼 조금씩 소금물을 붓는 율촌댁의 뒷머리 낭자와 어개, 그리고 소맷자

락 도련에 칼끝 같은 정성의 서슬이 어린다. 효원도 옆에서 같이 숨을 모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온 머리끝이 대문간과 중문간으로 곤두서게 뻗치어 강실이

의 발자국 소리를 잡는 더듬이가 되어 있었다. 소금물을 다 붓고 그 위에 빨갛

게 이글이글 달군 참숯을 치그르르 띄울 때, 그네는 제 가슴을 그득 채운 쓰라

린 소금물 위에 그처럼 이름 하나가 시뻘건 숯불로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치그

르르. 소금물에 데이는 참숯 불꽃인가. 치그르르. 참숯 불덩이에 데이는 소금물

인가. 소금물에 빠진 참숯은 온몸으로 함빡 그 짜디 짠 소금물을 다 빨아들이고

꺼멓게 죽는데, 소금물은 제 가슴 데인 자리에 시꺼먼 숯덩이를 멍같이 둥둥 띄

우고 있었다.

"장에 숯을 넣는 것은 궂은 냄새를 빨아들이라는 뜻도 있고, 살림이 불같이 일어

나라는 뜻도 있느니라."

아름다운 말이로다. 율촌댁은 붉은 고추 바짝 말린 것을 불에 구워서 또 소금물

에 넣는다. 하늘이 비치게 맑은 소금물 위에 구름이 어리고, 요요 선연한 색으로

투명하게 달구어진 붉은 고추가 검은 숯덩이 옆에 뜬다. 율촌댁은 또 대추도 그

렇게 구워서 소금물 위에 던져 띄운다. 치그르르. 이제는 비명조차도 없이 달구

어진 몸을 소금물에 던지고, 신음 소리도 못 낸 채 그 뜨거운 고추와 대추를 가

슴팍에 받는 소금물은 서로 겉돌며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서로 둘다 깊이 상

한 채. 효원은 머리 속이 아득해지는 어지러움에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커다란

항아리 속의 그 화상이 그네는 무서웠다. 그러나 화상으로 데인 소금물의 수면

위에 비추이는 음 이월 봄 하늘은 얼마나 아련하고도 머나 먼가. 그네는 소금물

의 수면을 멀리 풀어 저만큼 하늘로 아득히 흘리어 떠내려 보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 동그란 주둥이의 테두리에 테머리를 매인 채 혹독히 데이고만

있는, 이 짜디 짠 가슴을 아아. 내, 저 멀리 멀리로 풀어서 흘려, 다만 흘러가게

할 수만 있다면. 나를 풀어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야. 율촌댁은 창호지

눈부시게 하얀 백지로 오린 커다란 버선본을 펼치어, 곱게 풀을 바른 뒤, 이 세

상에서 가장 크고 성스러운 항아리에 공물을 바치듯, 항아리의 가슴 한복판에

거꾸로 붙인다. 가슴을 거구로 밟고 가는 버선발이 허공으로 둥실 떠어르는 것

같다. 버선본을 스치는 바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가.

"아이고, 강실이, 인제사 오냐? 장 다 담었는데."

율촌댁이 중마당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류골댁과 나란히 강실이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단단히 아퍼 가지고는요. 무단히 몸 아픈 것이 장 담는데 어른거리면 어쩔라는

가 싶어서. 아예 일 끝날 때쯤 오느만요."

율촌댁이 대신 대답하는데, 효원은 소금물 독아지 주둥이를 틀어쥔 채로 아까보

다 더 멀리로 고개를 꺾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아,내 이 고개를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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