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의는 오직 난감한 안색으로 고개를 반듯이 세운 채 두 아비의 시선을 피
하여 바람벽에 걸린 횃대에만 눈을 두고, 이기채와 기표, 두 아비는 더 이상 무
어라고 이어 묻지를 못한다.
그러나 이기채의 눈동자는 감은 눈꺼풀 속에 숨어, 두려운 떨림과 흥분, 그리
고 억장을 치는 상심이 도져 아픈 통증을 참느라고 땀에 젖는다. 소식을 모르던
긴장이 무너지며 눈동자는 식은땀을 흘리는 것일까. 이기채의 눈자위가 습기를
머금는다.
내가 늙었구나.
후욱, 흐느낌이 치미는 것을 그는 어금니로 누른다.
기표는, 비스듬히 내리떠 장판을 바라보며 어른들이 먼저 무엇인가 물어 주기
를 기다리는 기색인 강호의 눈에 똑바로 제 눈빛을 꽂았다.
"사실은 이 애가 부음을 못 받았더라는구만."
강호의 곁에서 조부 이헌의가 변명처럼 나직이, 손자를 대신해서 말했다. 강호
는 이 말을 받으며 이기채한테 몹시 송구스러운 기색으로 몸을 조아렸다. 물론
아까 큰사랑에 들어서자마자 문상의 예는 갖추었지만, 이제서야 문상을 하게 된
경위는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어찌?"
내심, 강호가 만주까지 가서 강모와 강태를 만나고 왔다는데, 날짜로 보아 청
암부인의 부음이 닿고도 남는 시간이 있어, 속으로 이 천하에 불효 막심한 놈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도 외눈 하나 꿈쩍 않고 벌판에 자빠져서, 다시 한 번
집안을 버렸는가.
하고, 기가 막혀 심정이 불편했었는데, 부음을 받지 못했다니, 이유를 묻기보다
먼저 왠지 안도가 된 이기채는 심상한 척 반문한다.
"저희가 방학을 해서 저는 이미 짐을 꾸려 가지고 만주로 떠났는데, 저 없는
집에 뒤늦게 흉보가 당도한 모양입니다. "
이 말에 기표의 낯빛도 좀 풀린다.
"그럼 이 애들은 아직도 소식을 모르겠구나."
이기채의 음성에 축축한 그늘이 어린다 .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조금 늦게 움직였더라면 알릴 수도 있었을텐데... 그만
서두르노라고."
"그게 왜 네 탓이겠느냐."
애비도 알리지 못한 소식을, 너라고 어찌할 수 있었으리.
이기채는 묵연히 눈길을 낮춘 채 마음을 떨어뜨린다.
그래도, 알고 안 왔단 말보다는 낫다.
알고도 안 왔을 리는 없겠지마는.
... 알고도 안 왔을는지도 모르지마는.
"어디서 살고 있더냐?"
"봉천이었습니다."
"목단강가가 아니고?"
"예. 목단강 언저리에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살기는 하지요."
"헌데 왜? 풍문에는 목단강가에 산다고 어쩐다고 그러든데."
기표는 일부러 덤덤한 척 말을 건넨다.
아비를 버리고, 어미를 버리고, 처와 자를 버리고, 제 몸이 난 동족의 마을을
버리고, 문중을 버리고, 조상을 버리고, 그 조상의 뼈가 누우신 선영을 버리고,
들개 돌팔이 모산지배처럼 싸돌아 떨어져 나간 자식놈의 소식을 이제 들었다 해
서
"내 아들아."
목을 놓아 덤비기에는 사람들 앞에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고, 또 그 동안
자식에 대하여 뼈가 패이게 갈고 갈았던 증애가 그렇게 간단히 풀리지도 않는
탓이었다.
"봉천이라면?"
"남원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오후 서너 시경에 떠나면 이튿날 오후쯤에는 도착
을 할 만한 거리지요, 봉천이. 만 하루가 걸리는 셈입니다. "
이제 기표는 속으로 거리를 헤아려 보는 것일까, 그놈 말은 내 앞에서 꺼내지
도 말라고 길길이 뛰는 대신, 그저 묵묵히 앉아만 있다.
"둘이 같이 있더냐?"
이기채가 한참 만에 마른 목으로 물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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