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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38)

카지모도 2024. 12. 28.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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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배는 휘적하게 일어나며 공배네한테 말했다.

밤바람이 어둡고 습한 자락을 쓸며 거멍굴 틈바구니마다 들어차, 벌써 바깥은

짓눌리게 검었다. 웬만하면 구름이 있어도 달빛을 아주 막지는 못하여 희미하게

나마 발밑에 비추어질 보름 근처련만, 성난 구름장이 얼마나 두텁고 무겁길래,

이렇게 달 없는 밤보다 더 캄캄할까.

공배는 이 어둠 속에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람이 쓸어 내리는 낯바닥에 눈물이 번진다.

애민 놈 저테 베락맞는다드니 니가 그짝 났구나.

아 왜 허도 안헌 투장을 너보고 했을랑가도 모른다고 무작정 끄집어야 했다

냐. 당골네 푸네기 저테 섰다가 무단히 너부텀 잽힌 거인디, 모난 독(돌)이라 정

을 맞은 거이냐 어쩌냐 시방. 모질게도 내리쳐서 병신되야 불지 알고 내가 기양

애간장이 다 녹아 부렀그만, 그래도 뼉다구 실헌 놈이라 어디 뿐지런진 디는 없

능게빈디.

대체나 상놈이라, 니 말대로 설웁기는 설웁다.

"상놈은 더럽고 서럽다."

고 곧잘 토악하던 춘복이 말을 그는 곰곰이 떠올려 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

'더럽고 서러운' 상놈 중에서도 부모 형제 일가 친척 단 하나 붙이조차 가짖 못

한 춘복이가, 사천왕들처럼 에워싼 살기등등 원뜸의 종 호제 머슴들한테 뭇매로

뭉동이 찜질을 당할 때

얼매나 무서웠으꼬잉.

"아이고 어매."

단말마 비명처럼 외마디로 부를 제 어미 낯바닥조차 없는 그 천애고아, 혈혈

단신의 심전이 어떠했을까, 를 생각하니 불쌍하고 안쓰러워 억장이 무너지는데.

그나마 지은 죄가 있어서 그랬다면 맞아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겠지만, 투장

은커녕 투장할 만한 부모 조상 뼈다귀 손톱조각 한 토막도 없는 춘복이를 끌어

다가

"문서도 절차도 없이"

불문곡직 무작스럽게 달려들어 개 패듯이 패다니.

그것은 오직 그가 상놈이기 때문이었다.

문서도 절차도 없이.

공배는 저도 모르게 그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문서'도 없고 '절차'도 없어서 억울하게 당한 이번 일이 만일 문서만 있고 절

차만 있었으면 결코 당했을 리 없는 일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것이 처음으

로 미어지게 억울하였다.

"헤기는, 상놈이 달리 상놈이겄냐. 문서 없고 절차 없는 거이 곧 상놈이여. 조

상이 누군지를 아는 족보가 있냐아, 이 사람은 누구누구 자손으로 양반이 분명

헙니다. 허는 가싱이 있냐."

공배가 전에 언젠가 아랫몰 임서방한테 얻어들은 말 '가싱'은, '가승'이었다. 아

는 것 많고, 돌아다닌 것 많고, 기억력도 좋아 한 번 들어면 그대로 외울 수 있

는 임서방이 말도 붙임성 있게 잘하여, 사람들한테 곧잘 새롭고 재미난 세상 이

야기를 들려 주곤 했는데.

어느 여름날, 멍석 꽁지에 궁둥이 붙이고 앉은 공배가 밤하늘의 은하수를 올

려다보고 있을 때, 임서방은 옹게옹게 둘러앉은 사람들한테

"똑바른 가싱이 있어야 양반 행세를 허능 거이여."

하며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기둥겉이 오똑하니 세워 들었다.

가승

그것은 보첩, 가첩, 가계, 세계라고도 하는 족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니

까 가계의 기록인 것이다. 말하자면, 집안의 내력을 기록하고 있는 사람의 저 아

득한 시조 선대로부터 자기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한 줄기로 놓이는 조상과 그

조상의 배를 세대마다 밝히어 적고, 그 이름 곁에 그들의 생졸년월일 과거 및

관직을 중심으로 하는 이력이며, 묘가 있는 곳, 그리고 배우자의 가계, 자녀관계

를 명확하게 서 놓은 것이 가승이었다.

"가싱이 있어야 지 조상이 누군지를 알고, 조상을 알어야 지 근본을 아능 것아

니라고? 이 세상에 뿌랭이 없는 나무가 어디 있으며, 줄거리 없는 잎사구가 어

대 있겄능가. 그런디, 그 뿌랭이랑 거이 참 묘오헌 거이제. 뿌랭이먼 다 같은 뿌

랭이냐? 아니그던. 산천초목 삼라만생이 다 지 종자 따러 나고, 천하 없어도 씨

도독은 못헌다는 말이 있잖등게비.잉?"

임서방은 말했다.

이름은 다 같어서 뿌랭이 그러지마는, 엉거시풀 뿌랭이도 뿌랭이는 뿌랭이고,

매화나무 소나무 뿌랭이도 뿌랭이는 뿌랭이여.

그런디 엉거시풀 뿌랭이허고 매란국죽 뿌랭이는 절대로 같들 안히여. 그렁게

로, 엉거시풀은 잡초오 그러고, 매란국죽은 사군자 아 그러잖이여? 군자. 긍게

군자허고 잡초허고 벌세 외양이 다르고 , 외야이 달릉게 사람들 대접도 다르체.

허는 노릇도 다르고.

엉거시풀은 들판에 ㅆ부렀고, 아무나 막 밟고 댕기는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렇그던, 근디 이 사군자는 벌세 때깔 좋고 향기 좋고 흔허도 않고, 그래

서 보도시 하나 얻기도 에럽단 말이여. 귀허제.

그렁게 가싱이 머이냐.

엉거시풀이야 뿌랭이고 나발이고 개리고 자시고 상관없이 안 죽오 그저 사방

에 짱짱허니 엥기고 감고 뻗으먼 되는 거이지만, 사군자는 나군자다아 허고 똑

바라지게 외는 거이라, 이게. 나는 매화요오, 나는 난초요, 나는 소나무요오. 나

는 국화요오, 나는 대나무요오.

그러먼, 니가 어찌 매화냐 물을 것 아니라고?

소나무든지 국화든지 난초든지 대나무든지 간에.

그럴 때 터억허니 향내나는 조상을 딜이대는 근거가 가싱이여 긍게. 가싱. 우

리 시조 누구씨가 무신 무신 베실을 허심서 어뜬 어뜬 장헌 일을 허겼는디, 나

라에 공이 되야 상감이 아시고 천하가 다 알어 존경받던 아무개요. 그러고 시호

는 뭐이요. 문짜 시호요, 충짜 시호요, 그렁 걸 탁 내미는 거이라.

그러게 현조를 확실허게 내놓고는, 그 동안 그 현조 자손 줄거리들이 이러저

러한 공부 도덕으로 훌륭허게 양명을 허고 또 절개있는 이름을 떨쳤다아, 밝히

먼, 그 가닥이 분명허먼, 오오, 참말로 매화구만요, 국화구만요, 송죽이구만요, 세

상이 인정을 허는 거이제.

그 화보가 바로 족보 , 가싱이여.

그렁게 그 보가 없는 똘씨는 양반이 못되제.

또, 설령 보가 있대도 그렁저렁 혈통이나 추려서 이름들이나 적어 놨이먼 없

능 것보돔은 낫겄지만 그것만으로 양반이 되는 것은 아니고.

가닥이 분명히야 여.

그런데 그렇게 눈부시게 호강스러운 근거는 그만두고, 아예 자신이 끼여들어

잎사괴인지 꼬투리인지 알아볼 만한 일가 친척도 없고, 단 한글자 먹글씨도 없

는 공배나 춘복이는, 문서가 없어서 상놈이었다.

"그런디, 문서 가닥만 있다고 양반이 아니라, 그 가싱에 똑 맞는 행실이 따러

야만 양반잉 거이여. 그렁게 매화나무는 매화나무답게 한겨울 엄동설한에도 꽃

망울 피고, 암향이 부동해서 은근허고 고결헌 향기가 사방에 떠 있어야만, 매화,

그러잖겄능게비?"

소나무는 낙목한천에 온 세상 잎사구가 다 물들어 떨어져 부러도, 독야청청

꿋꿋허고 새파러게 변함이 없어야 소나무고.

국화는 오상고절이라. 난만헌 봄 무성헌 여름을 마다허고, 그 온갖 잡꽃 핏기

좋은 시절에는 묵묵히 감추고만 있던 꽃을 찬 서리 내려서 다른 꽃 다 시들어

버릴 때, 서리발 속에서도 외로이 피어나 홀로 절개를 지키며 높은 향기를 뿜어

야만 국화고.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잎새 곧은 마디 빈 몸통이 대나문디, 만일에 말이여,

이 대나무가 우수수우 낙엽이 지고, 등나무 칡뿌랭이맹이로 이리 꼬불 저리 꼬

불 휘어감고 뻗는다먼, 거그다가, 퉁소나 하나 맹글어 보까아 허고 턱 짤렀드니

깨끔허니 비어 있어야 헐 대나무 통 속이 그들먹허게 살 차 있다먼, 그건 이미

대나무가 아닝 거이여. 껍데기는 대나물랑가 몰라도 말이여.

봄에 피는 국화, 알록달록 단풍 드는 소나무, 여름에 만발한 매화며 구부러진

대나무는 진실한 군자에 못 든다고 임서방은 말했다. 그는 '매란국죽'이 '사군자'

라면서 제대로 된 난초는 본 일이 없어서 그랬던지 난초 이야기는

"난초가 잡초 되먼 쓰겄능가."

한 마디만 하고는 난초 자리에 소나무를 넣었다.

"그렁게로 양반도 처신 행실 법도에서 향내가 나야 양반 노릇을 제대로 허능

거이고오, 양반 대접을 옳게 받을 수 있능 거이여. 그런 일이 쉽겄능가? 어쩔 적

에는 우리가 보먼 안되ㅇ다 싶을 때도 있드라고. 무신 절차가 그렇게 까시랍고

복잡헌디, 원."

더우먼 기양 잠벵이도 척척 걷어붙이고 누가 보든지 말든디 웃통 훌딱 벗고는

등물 한 번 씨여언허게 허먼 오직이나 좋겄등만, 한여름 오뉴월에도 그 송진 같

은 땀을 대관절 어쩔라고, 보손에 바지에 저구리에 도포에 망건에 아이고매, 씨

꺼먼 갓끄장 꼬깔맹이로 받쳐쓰고 어디질에 가는 냥반 보먼, 나 , 참마로 그럴

때만큼은 꿈에도 양반 안 부럽데이.

다른 때라먼 몰라도.

"다리 밑에 동낭치가 넘의 집 불난 것을 보고는, 우리는 불날 일 없잉게로 얼

매나 좋냐고 허드라네."

멍석에 같이 앉아 있던 어서방이 그 이야기 끝에 꼬리를 단 말이었다.

"그 동낭치가 누구보고 아자씨이 그러겄네."

어서방 말고리를 밟은 것은 어서방의 아낙이었다. 그네는 '아자씨이'할 때 두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주둥이에 붙이고 예닐곱 살 아이들 목소리를 지어 내서,

둘어앉은 사람들이 와그르르 웃고 말았다.

그 '누구'가 자기를 가리키는 말인 줄 아는 어서방은 무색한 듯 머끔한 모가지

를 더 기다랗게 뽑아 올리며 뒤통수만 긁적였다.

"매안 이씨는 그렁게 향내 나는 양반이제."

임서방은 그렇게 말했다.

그 향내 나는 양반에게 이토록 모질고 호된 모둠매를 맞고 덕석말이를 당한

만동이와 백단이는 거의 혼절을 해 버려 사람이 들어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당골네 오막살이 좁은 방안에는 택주와 금생이가 번갈아가며 도랑물을 떠다가

두 사람을 축여 주느라고 궁둥이 붙이고 앉을 새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 거기 평

순네가 와 있었다.

"오시요예?"

평순네가 무겁게 묻는다.

"어쩡가 허고 들와 봤그만."

택주와 금생이도 공배를 보고 눈짓만 침울하게 한다.

"암만해도 만동이는 먼 일 나게 생겠는디."

만동이 곁으로 다가앉는 공배한테 택조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먼 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여?"

"이 사램이 이거 원체 버들맹이로 그러잖어요 왜? 난들난들. 장구채 들고

장단이나 허든 몸이라 심이 없는 사램이었그던. 그런디 요번에 아조 고지통을

정통으로 맞어 부렀능게비요. 대그빡이 빡 쪼개져 부렀습니다. 어찌, 내가 매안

으서 업고 내리올 때보톰 예감이 요상허드라고. 이거 살어나먼 천행이고, 열에

아홉은 내 뵈기에는 에럽겄어."

택주가 소털같이 누우런 털이 두껍게 덮인 낯바닥을 한쪽으로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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