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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39)

카지모도 2024. 12. 29.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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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먼 데서 온 소식

 

"그래서... 네가 그 애를 만나 보았단 말이냐?"

아까부터 단 한 마디 없이 침묵하고 있던 이기채가 천 근이나 되는 입시울을

가까스로 열어, 말을 밀어낸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억색의 심중이

떨리는 음성이다.

어제의 일이 하도 기가 막힌 것이어서 온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한 그의 안색

은, 누렇게 말라 바튼 가죽에 거뭇거뭇 멍든 녹빛이 어혈져, 마주보기 참독하였

다. 분이 뭉친 눈밑의 움푹한 그림자 얼룩은 흡사 시신의 얼굴에 돋는 시반 같

다.

어이가 없고 놀라기는 문중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황당하게 소스라친

낯색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문장 이헌의는, 이른 새벽 동이 트기 무섭게 종

가의 큰사랑으로 들었고, 바로 뒤미처 기표가 바람을 세우며 올라왔는데 그 또

한 잠 못 이룬 면색이 역력하였다.

기표는 방안에, 이미 자리를 걷고 일어나 앉은 이기채와 동계어른 이헌의가

침심이 가득하여 차마 무슨 말을 떼지 못하면서 책상다리 한 발바닥만 쓸고 있

는 옆자리로 앉는다.

이헌의의 곁에는 뜻밖에도 그의 장손 강호가 앉아 있다가 얼른 일어서더니 기

표한테 절을 한다.

"너 언제 왔냐?"

기표는 강호가 자리를 바로하기를 기다렸다가 묻는다.

"어젯밤에 왔습니다. "

"저물어서?"

"예."

"어찌 바로 안오고?"

동절기 방학이 시작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왜 이제서야 집에 오느냐는 질문

인 것이다.

"학비 좀 벌어 놓고 오느라고요."

강호가 짓눌리게 무거운 방안의 공기에다 격자를 질러 좀 숨통을 터 보려는

것처럼 짐짓 범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평온한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얼굴이면서 희고 맑은 이마

가 둥굴게 높이 솟아, 시원하고 명윤 반듯한 강호의 모색은 보는 사람 마음을

환하게 한다.

"매안의 인물"

이란 말을 듣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상형이었다.

"강호는 이마가 일품이지. 너무 넓어 헤벌어지게 허라지도 않고, 오종종히 좁

아서 옹색 답답하지도 않고, 편안 넉넉하면서 저렇게 수기가 밝으니, 저 이마 속

에 든 한세상이 다 펼쳐지는 것을 보는 날까지 내가 살어 있을라는가 어쩔라는

가 모르겄구나."

생전에 청암부인은 자라나는 소년 강호를 보고 기꺼워하며,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거기다가 눈썹은 단정하게 빛이 나고, 눈은 가늘고 길어서 봉안인데 흑백이

분명하며, 그 광채가 총민해서 사람을 쏘는 듯 압도허잖어? 그런 눈이 자칫 매

섭고 차갑고 쉬운데, 안광에 문기가 은은히 감돌아, 보는 이를 겁나게 하고 위협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따르고 싶게 하니. 청수한 사려로 감화시켜 깨닫게 하

는 눈이라. 기특하다. 이만한 용모로 태어나 네 어찌 할 일이 없으랴."

했던 말에 과히 어긋나지 않게 어려서부터 영특 총명하다는 칭송 많이 듣던 강

호는, 어느덧 청년이 되어 동경으로 건너가, 조도전(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공

부하는 중이었다.

성짜에 비하여 가세는 그다지 넉넉지 않은 집안인지라, 험악한 세월에, 공부한

다는 유세 하나로 집에다 기대어 콩이고 팥이고 학채고 깨알같이 다 받아 쓰면

서, 유복한 서당도령 시늉을 하고 다닐 수만은 없을 것이나, 학비를 벌어 놓고

오느라고 이제서야 집에 왔다니, 무슨 일을 어떻게 하였을까, 기표는 궁금하였

다.

"사람들이 내버리는 빈 병도 주워다 팔고, 못쓰게 된 파지나 고물도 다 주워다

팔지요."

강호는 기탄없이 말하며 웃었다.

"주워다 팔다니? 그럼 네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넝마주이를 한단 말이냐?"

기표가 강호 말에 어기찬 턱을 들며 떨구듯이 묻는다.

"그러믄요. 그게 사실은 제일 깨끗한 고학이에요."

"깨끗?"

"폐물이 생산작용을 하는 것은, 그 이치만으로도 이미 사람 사는 세상의 기밀

을 누설하는 것 같아서 재미도 있고요."

"야, 이놈아. 동경까지 건너가서 기껏 한다는 게."

기표가 그 다음 말을 이으려는데, 강호는 얼른 학생복 단추를 벗기더니 품을

열고 안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낸다. 사진이었다.

네모진 사진 속에 보이는 것은 앉고 선 두 사람이었는데, 하나는 쪼그리고 앉

아 있고, 하나는 양손에 빈 병을 한 개씩 든 채로 치켜올리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웃고 있는 청년이 강호였다. 그들의 발치에는 일렬로 세워 놓은 빈 병들이

투명한 장병들처럼 꼿꼿하였다.

"아니, 이 넝마 빈 병들이 무슨 홍패 병풍이라고 이렇게 자랑스럽게 펼쳐 놓

고, 떠받들고, 사진까지 박었는고?"

조부 이헌의만 없었더라도 기표는 더 성질대로 할 소리를 했겠지만 족숙이 할

아버지를 젖히고 그의 장손을 더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어서 기표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린다.

"인력거도 끕니다."

"뭐?"

이번에는 기표가 아니라 이기채가 먼저 놀란다.

"네가 이제 가마채 잡는 교군꾼까지 한단 말이냐?"

기표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린 그대로 가만히 있고, 이기채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천하 상것들이 메는 게 가만데."

"내가 내 힘으로 내 몸 움직여서 근로하고, 그 노동과 근로를 통해서만 내가

먹을 밥과 내가 읽을 책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떳떳한 일인가요. 내가 흘린 땀

을 꼭 그만큼의 밥과 책으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교환 방법이고, 또

정직한 소득인 것이지요."

강호의 음성은 평소에도 울림이 있어 낭랑한 편인데, 격성을 내는 일이 거의

없는지라, 무슨 이야기든지 담론을 하는 것처럼 들린다.

"한번은 그런 일도 있었는 걸요. 그날따라 인력거 손님이 연달아서, 타고 내리

고 타고 내리고 쉴 틈이 없이 온종일 동경 시내를 누비고 뛰었는데 날이 저물어

요. 그래 좀 한숨 돌리려고 인력거를 담벼락에 기대서 받쳐 놓으려는 찰나, 또

손님이 다가오드구만요. 옆구리에 가죽가방을 따악 끼고 아주 점잖허게 인력거

를 타러 오는데, 저녁나절이니 피곤도 했지마는 이 손님 때문에 정말 땀 많이

흘렸어요. 어찌나 뚱뚱한 사람이었는지. 인력거 채가 공중으로 솟구쳐서 널을 뛰

건만 제 체중으로는 그 체를 끌어내릴 수가 없었지요. 그래 실랑이를 하면서 대

롱대롱 매달려 얼마나 씨름을 했는지, 겨우 균형이 잡힌 것을 가까스로 끌고는

그 손님 가자는 대로 어디까지 갔더니, 이제 까끄막 비탈 고개 꼭대기를 넘어가

야만 한다는 겁니다. 정말이지 난감허드구만요. 그날따라 점심도 못 먹고, 허기

가 져서 그냥 걷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맡은 손님이라 두 말도 더 안하고

비탈길을 오르려는데요, 그러다가 정말 큰일 날 뻔했지요. 이 인력거가 자꾸만

뒷걸음을 치면서 미끄러지잖겠어요? 식은땀이 비지땀으로 범벅이 되면서 등판이

팥죽땀 반죽을 하는데 한 걸음도 더 못 나가겠어요. 팔목에 힘이 빠지고, 머리

속이 노오랗게 어지럽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그러나 인력거에 탄 손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돈 주고 탓다. 너는 돈 받고 끈다."

는 것이지요.

옳은 말입니다. 그것은 계약이니까요.

그는 인력거에 탄 그 순간부터 내릴 때까지 꼼짝도 안해도 됩니다. 반면에 저

는 인력거를 끌다가 언덕 비탈 꼭대기에서 거꾸로 미끄러져 굴러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곤두박질 나가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기어이 그 손님을 목적지까지 데

려다 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계약이니까요.

그 손님에게 잠시 좀 내려서 걷는 인정을 바라거나, 제가 하던 일을 중도에

그만두어 버린다는 것은 불성실한 위반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두 사람 사이에 약속된 일은 끝까지 지켜져야지요. 그리

고 그 일이 끝났을 ㄸ는 마따한 보수가 주어집니다. 약속대로.

비록 그 액수가 적을지라도 약속이 지켜지기만 한다면 그래도 나은 편이지요.

처음부터 약속 같은 것으로 서로 계약하는 관계조차 아닌, 오직 그렇게 태어

났기 때문에 한쪽은 나서부터 인력거를 타고 있고, 한쪽은 오직 그렇게 태어났

기 때문에 인력거 채를 죽을 때까지 끌어야 되는 관계. 그런 관계도 있지 않습

니까. 그것은 정말 참혹한 것이지요.

양반과 노비, 양반과 상민.

그 자신의 노력이나 자질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그저 자신에게 숙명적으로 지

워진 신분의 굴레 때문에 제가 태어난 환경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일생 동안, 금

방 고꾸라져 뒤집히면서 죽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비탈길에 매달린 무산자들.

그러나, 이 인력거 채나마 붙들고 있어야만 제 존재를 비빌 언덕을 이 가파른

세상에 겨우 세울 수 있는 노비 상민 가련한 족속. 저 칼등 같은 비탈의 인력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토록 안간힘 하다니요. 어리석다고 비웃을 수는 결

코 없겠지만, 헤어나는 방법을 몰라 대대손손 똑같은 굴레를 끝없이 뒤집어쓰는

그들이 너무나 가엾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기껏 욕심을 낸다는 것이, 인력거 채를 내동댕이치고서 나도 인력거

속으로 들어가 타고 앉겠다는 것이, 죽은 아비 뼈다귀를 파다가 남의 선산 산소

귀퉁이에 밀어 넣는 꾀밖에 못 내고.

손님 옆에 나도 좀 같이 앉읍시다, 하는 것이지요.

"불경스럽구나."

드디오 이헌의가 낮은 소리로 강호를 막았다.

그렇지요. 불경. 바로 그 불경 때문에 인력거꾼은 쫓겨나고, 매를 맞고, 피투성

이가 되고, 혹은 죽기도 합니다. 이미 가진 자의 몫을 가지지 못한 자가 넘보는

것은 제도 속에서 반란이고, 혁명이고, 용서할 수 없는 불경이기 때문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라고 몰아붙입니다.

누리는 자는 대를 물려 영원히 그 기득권을 누려야 되고, 착취당하는 자는 영

원히 제 가죽과 뼈를 착취당해야만 '순리'라 하고요.

순리. 그러나 그 순리는 누구를 위한 순리일까요.

왜 그 순리는, 누구에세는 권리가 되고 누구에게는 억압이 될까요.

그것이 참으로 진정한 순리라면 누구도 누구를 해치지 않으면서 공생하고 상

생해야 할 터인데.

"너도 강태란놈하고 같은 속이냐?"

기표가 강호의 말을 듣다 말고 툭, 지르듯 묻는다.

강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사실은 이 애가 만주로 해서 왔다는구만."

이헌의가 강호 대신에 무거운 입을 뗀다. 방안에 아연 긴장이 돌면서 순간 침

삼키는 소리가 꾸루루룩, 목을 깎는다. 그것이 이기채의 소리인지 기표의 소리인

지 얼른 분간이 가지 않는다.

이기채는 책상다리 발바닥 쓸던 손을 뚝 멈추고 미간을 꺾으며 눈을 침통하게

감아 버리고, 기표는 눈썹을 치킨다.

"만주로 해서?"

이기채는 말이 없고, 기표가 이헌의의 말끝을 붙든다.

"그래서... 네가 그 애를 만나 보았단 말이냐?"

결국, 얼마 동안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진정하기 어려운 회오리를 지그시 눌러

겨우 잠재운 이기채가 입을 열었던 것이다.

"예."

"예?"

"강모도 강태도 다 만나 봤습니다. "

강호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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