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마치 우주의 궁곡을 깊은 뱃속에서 우렁차게 토해 내는 것만 같은, 저 입
속. 통로.
강호는 그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속으로 한 위 한 위, 천왕들의 입 모양을 정리해 본다.
"자, 서방광목천왕은 어떻습니까?"
그 입매에 서린 서원들.
강호는 그것이 알고 싶어 홀로 대답을 더듬는다.
"사천왕의 몸은 무궁무진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눈동자와 눈썹, 그리고 머
리카락이며 입술, 또는 갑옷과 지물들. 이 형상을 통해서 우리는 사실 법문
을 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사천왕은 부처님의 경전이 조상으로 현신을
한 셈입니다."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강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천왕들이 손에 들고 있는 지물들도 각기 다른 것, 알아보셨습니까?"
"아, 예. 북방다문천왕은 비파를 가지셨는데..."
아무래도 강호는 첫눈에 들어온 정경이 인상에 남는 모양이었다.
"동방지국천왕은요?"
"칼이었습니다."
"그럼, 남방증장천왕은 무엇을 가지고 계시겠습니까?"
"용과 여의주."
도환의 낯빛이 환해진다. 기꺼운 마음이 든 것이다.
서방광목천왕은 오른손에 나부끼는 깃발을 드높이 단 창대를 꼬느어 세우
고, 왼손으로는 손바닥에 보탑을 받쳐들고 있었다.
"서방천왕이 든 저 깃대는 당이라고 합니다."
"당...이라고요?"
"예. 불전이나 불당 앞에 세워,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나타내는 기를 이르
는 말이지요."
"오늘 공부가 모두 저한테는 과분합니다. 공으로 이렇게 배워서..."
"원 별 말씀을 다. 제가 오히려 무어 주제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흥에 겨워서 느꺼운 마음에 그만. 산중의 중이 무얼 알겠습니까."
"자꾸 그러시니, 오늘의 공부는 여기서 파하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어
째, 학생이 신통치 않으신가요?"
"어, 어, 천만에요."
짐짓 정색을 하며 섭섭하다는 낯빛을 짓는 강호의 말에, 도환이 장삼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휙휙 나도록 두 손을 내젓는다.
"아 이거 제가 모처럼 동경 소식도 듣고 신학문 공부도 해야 하는데, 귀한
기회를 거꾸로 쓰는 것 같아서 면구스럽습니다."
"동경은 동경이고, 오늘은 이 공부가 더 긴합니다."
혹시나 강호가 지루하게 생각할까 저어하여 몇 마디 운을 띄우던 도환은.
내심 기뻐서 콧마루가 벙싯한다.
"대개 사람들은 이 사천왕의 복색에 무심하지요. 옷 모양이나 빛깔을 유심
히 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울긋불긋 귀신 안오게 입었다고 생각
하기도 쉽고.
그렇지만 이 복장 하나하나를 진흙으로 빚어서, 일일이 이 모양과 저 모양
으로 입히고, 아로새기고, 색칠한 것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정성과 아름
다움에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겝니다."
녹두색 목속옥이 나붓 드러나는 동방천왕의 목에는 고동색 목수건이 나비
모양으로 느슨하게 묶이어 있는데, 그 아래 입은 가슴갑옷은 눈부신 황금
색이다. 금비늘 장식을 나타낸 것일까, 샛노란 흉갑은 오돌도돌 세밀하게
올록볼록하였다.
그 갑옷을 몸에 고정시키려고 판판납닥하게 한 바퀴 두른 띠, 가슴옷 요의
는 어쩌면 저토록 만져 보고 싶게 결 고운 명주 같을까.
이 넓은 띠를 묶은 요의끈은 가느다란 진홍색이다.
남방천왕은 거꾸로 새빨간 가슴옷에 회색 끈을 맸으며, 서방천왕은 연옥색
가슴옷에 진남색 끈을 맸다. 그리고 북방천왕은 암녹색 가슴옷에 검은 끈
을 매어 묶었다.
순금색 노란 갑옷을 바탕으로 한 그 빛깔들의 대비는 얼마나 선명하면서도
화려하고 조화로운지 생동하는 색감이 놀랍기만 하다.
"사천왕의 갑옷 양식은 어디서나 거의 모두 명나라 갑옷의 원형을 따르고
있지만, 옷 빛깔이나 장식 문양, 또는 옷의 주름이며 섬세한 세부기공들은
다 다릅니다. 그래서 사천왕을 친견할 때마다 새롭고 설레고 흥분되지요.
무장상 형태의 기본은 같지만 또 똑같은 사천왕은 하나도 없거든요. 눈썹,
눈, 코, 입, 수염부터 시작해서 발밑에 깔린 악귀에 이르기까지. 표정과 크
기와 느낌이 완연히 다를 때마다, 저는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결국 그것은, 만드는 사람의 얼굴이죠, 마음일까요?"
"그렇지요. 저 사천왕의 얼굴은 바로 우리의 얼굴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마
음이고. 그게 확실한 것이, 일본 사천왕은 또 달라요."
"오, 일본에도 사천왕이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신라 시대에 건너간 것인데, 우리와 가장 큰 차이점은 우리가
저렇게 극채색인 데 반하여, 그쪽은 채색이 전혀 없는 돌로만 만들었다는
것이에요. 화강암 같은."
그리고 또 중요한 사실은, 우리나라 사천왕이 사람보다 두 배나 세 배씩
혹은 그 이상으로 크고 우람 장대한 것에 비해서, 일본 사천왕은 등신대라,
사람 크기와 꼭 같다고, 도환은 말했다.
"그런데 참으로 다른 점이라면, 그런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사천왕의 얼굴,
표정일 것입니다."
"아, 어떻게, 많이 다른가요?"
"아주 다릅니다. 우리나라 사천왕들은 저렇게 웅장한데다가 채색이 현란하
여 자칫 무서운 생각이 들게 하기 쉽겠지만, 아까 어린애 데리고 가던 부
인이 말씀하셨듯, 그 얼굴은, 분노상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무구한 애기
같으십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지요. 이 민족의 근본 심성이 그대로 담긴
얼굴이 그처럼, 우락부락한 표정을 지어도 결국 순진을 감출 수가 없는 눈
빛과 입모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손에도 몸에도 어진 기가 후북하게
배어 나오고."
우리 사천왕의 표정에는 몽상이 있습니다.
사바에 앉아서도 천상의 바람을 머리에 받고 있는,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꿈이 노니는 저 얼굴.
허나, 일본의 사천왕은 너무나도 확실한 인간의 얼굴이어서, 저는 그 꿈없
는 얼굴의 잔혹함에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아주 잔인해 보이는 두 눈만은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화강암 돌에다 새까만 흑요석인가, 검은 동자를 박아
넣었더군요.
도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강호야말로 도환의 말에 다시 한번 놀란다.
"아니, 언제 일본에까지 다녀오셨습니까?"
"뭐, 잠깐."
"오늘 저, 스님한테 여러 번 놀랍니다."
"중국에도 가 보려고 하는데요?"
"언제쯤이나?"
"중이라는 게 원래 구름같이 떠도는 운수납자 아닙니까? 한곳에 붙박이면
근이 생겨요. 그래서 오도가도 못하는 돌덩어리가 되어 버립니다. 구름도
근이 생기면 바위가 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바위도 근을 풀면 구름이 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겠지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중국의 사천왕은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강호는 그것이 미리부터 궁금해진다.
"잘 보고 와서 말씀 드리지요. 그림으로 여러 장 그려 올 생각입니다."
"그럼, 일본에서도?"
"금어가 되고 싶었던 염원이 손 끝에 아직 남아서요."
"언제 한번 보여 주시지요."
"아 이제 곧 동경으로 가실텐데, 근교의 절에 직접 가서 보시면 더 실감이
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면 산수는 무엇 하러 붓으로 그리고, 그림에는 무엇 하러 화제를 써
넣는답니까? 흥취 감동이 다 맛맛 있는 탓이지요."
"그렇던가요?"
너털웃음으로 강호 말을 막은 도환이 사천왕의 배를 가리킨다.
"저것 좀 보십시오. 저게 무언지 아십니까?"
도환이 손을 펴 가리키는 배에는 사천왕의 얼굴 반절만한 귀면이, 푸른 눈
썹에 방울눈을 부릅뜨고 코를 벌름이며, 푸른 수염 갈기를 왕가시처럼 세
운 채, 허이연 이빨을 날카롭게 드러내 혁대, 허리띠를 꽉 물고 있었다.
쪽빛 바탕에 불꽃같이 붉은 구름을 휘감고 용트림하는 누런 용이 분홍 연
꽃과 더불어 희롱하며 노니는 그림이 정교하게 그려진 허리띠 가장자리는
금빛을 위아래 두 줄로 물렸는데, 그것은 하늘의 임금이 가지는 권위와 전
아함으로 빛났다.
"이 귀면의 귀신이 사천왕의 권속입니다. 사천왕은 이처럼 난폭하고 사나
운 귀신을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지요. 그는 귀신의 왕이었으니까요. 어떤
권속들이 사천왕께 복속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 중에는 물론 건달바 같
은, 제석천의 음악을 맡은 신도 있고, 불법을 수호하는 용도 있지만, 말대
가리에 사람의 몸뚱이를 하고 사람 정기를 빨아먹는 귀신, 굶어 죽은 아귀,
사람 피를 먹고 사람 고기를 먹는 식혈육귀, 포악한 야차, 지옥에 있는 귀
신 나찰들같이 끔찍한 권속들이 오글오글 그득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권
속들을 꼼짝못하게 누르고, 배에다 척 둘러 차고, 손에다 불끈 틀어쥐고 있
는 사천왕의 위력이 어떠하겠습니까. 겁나지요."
"참, 듣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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