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8 1991. 12. 1 (일)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으나 날씨는 온화하기만 하다.
토요일, J는 팔공산가고 俊이와 지키는 빈 집, 아들과 함께 보는 비디오.
'사이코4' 오래간만에 보는 안소니 퍼킨스의 얼굴.
앳되고 어벙한 커단 키의 그도 이제 나이를 먹어 늙었구나.
알프렛 히치콕의 아류, 초반의 긴장감은 후반들어 도식적인 결말로 확 풀어져버린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변형, 모친 살해.
이상심리의 농축된 분위기로 끌고 갔으면 심리극의 영화로 성공했으련만 결국 삼류영화로 전락해 버린다.
일요일, 간밤 기억할수도 없는 꿈의 회오리 속에 날아 다니다가 새벽에 깬다.
물론 숙면은 아니었고.
결코 완벽하게 나의 소유가 되어주지 않는 잠, 잠이여.
배설 또한 그러하거니, 내 모든 생리적인 갈구에 대하여 그것들은 늘 엉거주춤하게만 내게 허락하고 있다.
이제 산성, 부서장 모임에 가려하는 아침.
염소를 잡고, 닭을 잡고, 고스톱판을 벌일 것이고, 진부해 빠진 그 행사의 모습이 명약관화하지만 그곳에 참석하는 것이 칩거의 내 일요일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
16369 1991. 12. 2 (월)
산성, 초겨울 산마을의 고즈넉함 같은 분위기는 조금도 찾아볼수 없는 먹자판의 저자거리가 그곳에 있을 뿐이다.
니나노 집보다 더 한 음탕문화가 또한 그곳에 있었다.
그 문화에 흠씬 빠져서 희희낙낙하는 허깨비들.
염소구이, 오리구이, 산성막걸리, 흐드러지게 넘치고 뒹군다.
고스톱과 노랫소리, 작부를 방불케 하는 그 집 여종업원들.
계속 봉고차로 들이 닥치는 남녀 먹자꾼들.
중간에 슬며시 빠져 나와 한봉화의 승용차로 영도까지 돌아온다.
혼곤히 잠들다.
산성막걸리에 내 강인한 불면의 신경줄도 굴복하고 마는가.
편한 잠 이루다.
꿈- 필리핀의 극장, 카마초, 칼룬소드, 오세건 등장. ...고소공포의 어떤 상황.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대공'이 울리는 월요일 아침.
英이 시험은 이제 꼭 보름이 남았다.
16371 1991. 12. 4 (수)
각종 실적 통계 자료의 컴퓨터가 그려낸 정교하고 일목요연한 그래프등을 보고 박상무는 놀란 표정이다.
컴퓨터의 기능의 우수함을 자꾸 어필하여 최신형의 대용량을 사무실에 개비하겠다는 내 의도.
퇴근하여 오랜만에 어머니 찾아 뵙다.
어머니, 어머니... 내게 그토록 커다란 덩어리, 내 존재에 드리운 그 거대한 덩어리는 이제 70을 넘은 연륜에서 어느새 작게, 자그마하게 변하고 말았는가.
온통 나의 의미이며 목적이었던 어머니라는 그 개념은 이제 점점 스러져 형해화된 하나의 공허여야 한단 말가.
이 당혹스런, 황당한 변질.
이 어처구니없는 심층의 무의식이란 놈이 꿈 속에서 온갖 요사를 떨고 있음이 분명한데...
어떤 사회적인 어떤 도식적인 의미로서 어머니의 나에 대한 사랑의 진실을 간파할지라도, 상대적인 그 무엇이 될 수없는 그것.
아, 나는 어머니를 사랑한다.
형과 형수, 속되며 작지만 그래도 선량한 내 가장 가까운 핏줄.
술 얼근하여 늦은 시각 돌아와 내 방 책상 앞 앉아서 맥주 두병을 마신다.
그러면서 스케치 북을 펼치고 샤갈의 그림을 베껴 그린다.
술취한 의식 속에서 샤갈의 색깔은 온통 분해되어 통일된 조화는 이미 잃고 있지만 그래도 샤갈 샤갈하고 중얼거리면서 크레파스로 도화지에 색을 채워간다.
수요일, 결국 어떤 지극히 속된 일락을 추구코자하는 이 게으름.
J는 英이 도시락 갖다주러 학교에 간 아침 녘.
큰소리로 나의 주, 하나님께 아우성치며 기도하는 이 작은 속물 한 마리.
16372 1991. 12. 5 (목)
워렌 비티 감독 주연의 '딕 트레이시'
매우 패셔너블한 영화. 물감들인 도로와 건물, 만화같은 분장.
그러나 영화 트루기까지 패션화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더스틴 호프만, 알 파치노, 마돈나도 출연.
저녁때, 이덕찬씨 맥주 사들고 찾아와 J의 괄시에도 불구하고, 선량하고 유치한 떠벌림을 한창 벌려놓고 돌아가시다.
16373 1991. 12. 6 (금)
올 겨울은 이토록 온화한 날씨로 시종하려는지 포근하기만 하다.
SB-386 고려해운 화물선 진수공정 짜서 현업에 배포한다.
아가사 크리스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추리소설의 백미, 높은 문학성까지를 기대한다는 건 무리이겠지만 그 구성과 교묘하게 깔아놓은 복선하며 그 의외성등에서 그녀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소설.
벌써 세 번쯤 읽는 것이지만 뻔히 아는 그 결말이 새롭게 재미있다.
俊이는 12월 10일 연합고사.
英이는 이제 꼭 11일이 남았고.
꿈- 보생의원, 어머니.
그리고 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안고 피흘리는 나의 어떤 시절이 변형된 그 풍경화...
내 꿈의 영원한 테마.
이 꿈의 분위기를 작품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욕망이 내게는 있다.
흑백영화- 모노크롬을 써가면서 내면의, 또는 의식의 흐름을 영상화하고 싶다는.... 무당병을 앓고있는 어느 여인의 신풀이 굿처럼 내 불면을 지배하고 있는 그 정체를 백일하에 까발리는 작업...
새벽, 안방 책상 앞에 앉아서 소리내어 성경 읽는다.
고린도후서, 요한복음, 시편.
아,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내 안에 보혜사 그 분은 함께 계시는가.
기도드린다.
나의 신앙은 하나의 윤리의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종교가 되어야 한다.
내 존재를 던지는 투기.
16374 1991. 12. 7 (토)
조선일보에 실린 논쟁.
김윤식의 문학사상지의 대담중 이문열에 대한 평가.
가짜 역사소설, 개인적인 원한과 현실성없는 허황된 정감록의 집필자, 그나마 이문열의 소설의 뼈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애비는 남로당이었다'정도인데 그마저 남들이 다 써먹었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현재 이데올로기 해빙의 시대에 '애비는 남로당이었다'마저도 빛을 잃어, 결국 이문열에게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결국 이문열은 현실의식이나 헤겔적인 변증의 역사의식이 전혀 없는 3류 몽상 소설가란 얘기다.
참 과도하게 신랄한 공격이다.
이에 대한 이문열의 반박은 점잖은 편으로 김윤식의 평론가적인 진지하고 분석적인 자세를 촉구하여 점잔을 가장하고 있지만, 행간에서는 이문열의 노여움이 상당히 흐른다.
가장 지적이고 사변적인 작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이문열의 실체가 감상주의, 뛰어난 상상력과 구성력이 있을뿐만의 소치일 혐의는 있을수 있겠다.
그러나 그때그때 하나의 주제를 천착해 들어가는 그의 능력은 발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꿈- S형 어머니, 한상혁씨, 형, J ... 화재발생.
안방에 앉아 오랜동안 소리내 성경 읽는다.
아가, 고린도 전서.
새벽 풋잠에 들어있을 아내에게 이 소리들이 꽹가리 소음으로 들리지 말기를...
16376 1991. 12. 9 (월)
일요일 사무실 나가 잔무 정리.
늦은 오후 사무실 나와 타성처럼 몇잔의 맥주 마신다.
英이도 일찍 돌아와 함께 TV의 오락 프로 보며 키득키득 웃는다.
꿈- 英이 대학 입학시험을 아비인 내가 대신 치르는데 딴 과목은 대체로 만족하게 보았는데, 시험 끝난후 보니까 영어과목을 완전히 빼먹고 답안지를 쓰지 않았다. 영어 문제지가앞장의 문제지에 붙어있어서 그냥 지나쳐 버린 것.
진 땀을 흘리다가 깨어난다.
16377 1991. 12. 10 (화)
정말 입시추위란게 있는 모양이다.
오늘 俊이, 동아고등학교에서 연합고사 치룬다.
英이는 꼭 일주일 남았다.
부모의 마음이 이토록 초조한데 英이는 오죽 할까.
간밤 역시 회색 수면.
꿈- 안성달회장이 아부꾼들에게 둘러 쌓여 2공장 정문앞의 언덕을 걸어나온다. 나도 마지 못해 인사드린다.
그의 별장, 그 부자집에서 나는 하나의 식객역할인데...
깨어난 머릿속은 꼬박 밤을 세워 버린 느낌이다.
안방에 앉아서 골로새서, 시편...
俊, 아들아. 파이팅!
16378 1991. 12. 11 (수)
어제 俊이 고입 학력고사.
녀석 왈 "수석은 힘들 것 같다"
제법의 유모어를 구사할만큼 여유있게 치렀단 말인가.
늦은 기상.
모처럼 英이 얼굴 본다.
소련연방은 와해 직전.
고르바초프 사임 임박.
세계는 이제 평화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위험을 잉태하고 있는 것인지.
16379 1991. 12. 12 (목)
俊이 이제 최종의 시험이 끝났으므로 매우 느긋한 포즈이지만 마냥 늦추어 줘서는 안된다.
이 시기에 고삐를 당겨 무엇 하나라도 익히게 하여야 한다.
어학이나 하다못해 기타라도.
俊에게는 화이트 칼라의 전문 직업인.. 이것은 결코 아비의 허영이 아니라 자식의 성격을 통찰하고 있은 아비짜리의 夫情이다.
꿈- 맥주와 함께 담배를 씹어 삼키다.
英이 결전의 날 5일전.
16381 1991. 12. 14 (토)
남북고위회담 합의서 교환.
불가침, 상호교류등 합의 이끌어내다.
정말 통일이라도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는 살아계시고, 어머니 생전에 꼭 상봉하리라는 망상은 내게 즐거운 공상인지.
북의 어느 모퉁이에서 조그마하게 또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서, 가끔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두고 온 부모형제와 처자를 그리워 눈물짖는다는....
내게 씌어진 굴레. 나를 限定하고 나를 형성한 핏줄의 관계라는 굴레.
그것이 어떤 관념의 양태를 만들고, 어떤 색깔로 작용하여 나를 형성해 갔다.
인생의 도정이 자유로의 도약이라고 할 때, 내 아버지는 내 영혼의 무엇이엇을까.
그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그를 의식치 못하는 거대한 의미 덩어리.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16382 1991. 12. 15 (일)
며칠 술은 입에 대지도 않고 있는데도 육체는 몹시 피폐하다.
뒷꽁무니의 상태도 썩 좋지 않아 아랫배가 묵지근하여 변기를 선홍색으로 물들이고 입속의 상태 역시 좋지않아 잇몸이 헐어 버렸다.
게다가 계속되는 회색수면은 나른한 피로감을 항상 동반케 한다.
英이 시험이 닥아 오니까, 미상불 심층심리의 어느 구석은 몹씨 초조한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찹쌀떡과 엿 선물.
바로 옆집에서도 어떻게 알았는지 가져온다.
Hw 선생님은 정성스레 녹음한 파바로티의 테이프 두 개와 함께..
英이는 찰떡같이 붙을 것이다.
밤새 뒤척뒤척.
꿈- 나는 유태인, 수용소. 또 북에서 온 소년은 내 이복동생인지, 나는 그가 떠나버린후 눈물을 흘린다. 대학시절의 전전긍긍하던 때의 그 심리의 일단도 영상화 되고....
일요일 새벽, 그예 편한 잠은 이루지 못하고 4시 벌떡 일어난다.
약 2시간에 걸처서 소리내어 성경 읽는다.
베드로후서, 요한1서, 요한2서, 유다서, 시편, 잠언, 요한복음..
불끄고 어둠 속에서 기도드린다.
나의 하나님.
英이, 드디어 내일.
16384 1991. 12. 17 (화)
英이, 중요한 고비.
결전의 날이 밝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꼬박 잠을 설치는 부모짜리의 마음은 자식의 승리하는 인생을 위한 말 못할 간구인 것이다.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를 기다리라.
시편 127.
8 시 10분까지 입실 완료, 8시 40분부터 제1교시 시작.
5시 30분 까지.
지금 깜깜한 새벽.
이제 곧 6시가 되면 英이는 제 엄마와 함께 그곳에 가리라.
이럴 때에는 태평스런 英이의 포즈가 오히려 훨씬 마음을 놓이게 한다.
기도.
16385 1991. 12. 18 (수)
전국 극도의 교통혼잡, 출근 길에 보니 시간에 쫓겨 동동 발을 구르는 수험생들.
종일 학교 정문 앞에 있었던 J.
그 긴시간 동안 무사히 학교 도착하여 시험 잘 치르고 있다는 전화 한통화 할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 이상함이여!
제 시간 도착하였는지, 어떠한지... 사무실 앉아 초조하기 이를데 없는 남편에 대한 배려가 이 정도의 아내짜리이다. 시험을 치는 英이보다 더욱 압착된 초조의 시간, 전화 한통있으면 얼마나 가벼웠을까?
아쉽고도 아쉬운 J의 생각의 범위여!
어찌 되었든 英이는 치루었다. 최선을 다하여.
밤중, TV 앞에서 답안지를 맞춰보는 英이 얼굴이 어둡지 아니하다.
올해의 출제 수준은 대체적으로 평이하여서 모든 수험생들의 표정이 밝았다고 하지만, 자신만만한 英이 포즈는 너무 기쁘다.
이제, 어둔 새벽을 다시 뛰리라.
16386 1991. 12. 19 (목)
어제 英이 면접 끝나다.
이제 다음주의 결과만 다소곳이 기다릴뿐이다.
평이한 출제수준으로 합격점이 예년보다 20점 가량 상향될 것이라는 예상.
英이 맞추어 본 점수는 글쎄, 240점 정도라고.
그 정도면 합격이다.
英이와 俊이.
고등학교 졸업과 중학교 졸업.
이제 자유로운 시간이다. 개학때 까지의 긴 시간.
방만한 시간이 되게 하여서는 안된다.
독서와 외국어라던가 무슨 기능을 하나씩 익히는 시간.
책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궁무진한 寶庫인지를 깨닫도록 하고.
사흘째 새벽 달리기.
16390 1991. 12. 23 (월)
합격여부를 기다리는 피를 말리는듯한 초조감.
英이는 오후 1시에 집을 나가 밤10시가 다 되어서야 멀뚱한 얼굴로 들어선다.
합격의 근심따위는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만이 즐거운 英이...
16391 1991. 12. 24 (화)
수산대학교 수산과학대학 미생물학과 수험번호 1301번.
이수린학생 합격.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그 전화 목소리의 반가움이라니!
英이는 제 인생의 큰 고비를 좌절치 않고 넘겼다.
회사 탈의실 들어가 감사의 기도.
퇴근하며 내 식솔들 나오게 하여 목장원에 가 식사하고 걸어서 집까지.
英이 어제 콘택트 렌즈하다.
그 커다란 눈, 안경을 벗어버리니까 더욱 커다랗다.
英이는 친구들의 얘기에 귀 기울여 줄줄 아는 아이, 친구들의 카운셀러.
부모가 파악하지 못하는 딸네미의 덕성.
제 방에서 친구 은민이와 잠들어 있는 새벽.
간밤, 나는 꿈도 없는 편한 잠 이루었다.
16392 1991. 12. 25 (수)
비내리는 성탄 전야.
퇴근하여 최태용의 차타고 부평 케네디 시장.
큰 맘 먹고 벼르던 AIWA 워크맨 산다.
여늬 아이들처럼 환호작약의 기쁨을 발하는 타잎이 아닌 俊이, 그러나 나는 俊이의 기쁜 마음을 읽어내고 있다.
J는 사십넘은 여자가 크리스마스 선물없음을 섭섭해 하고, 내게는 현란한 무늬의 잠옷을 사놓았는데, 미상불 남편이란 작자의 그 무덤덤함에 섭섭치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英이는 교회, 밤 늦게 돌아오다.
英이에게는 코트를 사주기로.
'대부3'
1,2편에 비하여 장중한 비극미는 많이 떨어지고 마이클 콜레오네는 늙어 버렸다.
그러나 프란시스 코폴라의 역량은 곳곳에서 번득인다.
비내리는 성탄절.
오늘 회사의 고사에는 가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성탄절의 누가복음 1,2장은 어울린다.
소리내어 읽는다.
16393 1991. 12. 26 (목)
기온 뚝 떨어지다.
어제 귀신에게 절하여 고사지내는 회사에는 나가지 않고 마루에 누운채 종일 비디오 영화와 TV에 눈길을 준다.
그리고 밤중에 아이들과 깔깔대며 카드놀이를 한다.
술이 없는 나의 일상은 이토록 안온하고 평화로우며 균형스러운데, 어쩌자고 술에의 열망을 잠 재울수 없을까.
술- 평면적이고 안일하고 진부한 그 일상에다 때로 활력을 주기도 하고, 바라이어티한 자극과, 색채감있는 느낌의 고양같은, 순기능의 요소가 없다 할수는 없으나.
그곳에는 또한 자포의 감정도 있으며, 타성에로의 함몰이 있으며, 지엽적인 자극에 의한 피폐함이 있는 것이니 그것이 곤란하다.
메트로폴리탄의 세계 성악가들의 무대 공연 실황.
얼마나 멋진가.
英이도 대중음악보다는 이런 쪽으로 취미를 돌려서 형식과 절제와 조화와 전통의 아름다움으로 눈을 돌리게 해야 하리라.
속속 전기대학들 합격자 발표.
희비가 엇갈리는 입시생들의 집, 집.
英이는 이제야 스스로 밝히는데 우습지도 않누나.
제 별명이 '7반 한량'이란다.
스스로도 자신의 낙천주의가 우스운 모양이다.
그래도 중위권의 대학에 떡 붙어 줬으니 대견할 뿐이다.
시험 당일 집을 나서면서 英이는 동삼교회 들러 기도하였다는 그것이 섭리의 손길로 은혜를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새벽마다의 나의 기도에 은혜의 손길을 주신것인지도.
16394 1991. 12. 27 (금)
英이 친한 친구- 원주, 숙희, 효진이 부산대학 합격. 선미 이화여대 합격.
아무리 英이라도 저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간 아이들에게 어떤 거스르는 기분은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수산대학은 옛날부터 부산대학에 버금가는 웃길의 대학이고, 그 캠퍼스는 얼마나 좋더냐? 그 아늑한 캠퍼스에서 후래시 맨이 되는 너에게는 이제 눈부시고 가능성의 빛무리가 펼처져 있는 것이란다. 하고 얘기하는 아빠짜리.
어제 우리집의 반상회.
마루에서 여인네들의 수다, 시끄러움.
안 방에 갇힌채 잠을 빼앗긴다.
俊이 어제부터 대신학원 나간다.
영어와 수학.
며칠째 술은 마시지 아니하고 있는 나.
16395 1991. 12. 28 (토)
어제 직원들 데리고 망년회.
자갈치의 생선회를 시발로 가요연습장, 다시 맥주로 끝난다.
술좌석에서의 여사원 조양과 백양의 싸움.
평소의 갈등이 불거져 나온다.
나는 정말 화가 나서 몹씨 나무라고 그 애들은 훌쩍인다.
토요일 오후.
김부중의 결혼식에는 봉투만 보내고 참석치 않는다.
英이는 제 친구 한무리 끌고 와 집안을 활기차게 하고, 나는 俊이 앉혀 놓고 안방에서 맥주를 마신다.
16397 1991. 12. 30 (월)
이문열 '변경'을 읽고 크게 실망한다.
그 특유의 상투적인 사변의 언어가 너무나 거칠게 뼈대를 드러내서, 문학의 향기란 도무지 맡을수가 없다.
나는 이문열이라는 작가를 가리사니 잡을수가 없다.
英이는 1월 6일부터 E.S.S에 영어 회화 수강예정.
俊이는 대신학원에 영,수 수강중.
이제 俊이에게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한다.
俊이는 일류대학의, 장래가 보장되는 전공을 갖도록.
俊아....
월요일 새벽, 영하의 새벽공기를 섬뜩하게 느끼면서, 그래도 사흘간 찌든 때를 벗겨낸다.
새벽 마루의 공간을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채운다.
카라얀과 안네 소피 무터.
어제 英이가 아빠에게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성경과 신학 서적을 열심히 읽는 아빠의 얘기를 무슨 집사님에게 하니까 '머리만 큰 신앙인' 이라고 하더란다.
머리만 큰 신앙인..... 그는 신앙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얼마나 신랄한 표현인가.
16398 1991. 12. 31 (화)
어제 감기 몸살 담고 새 회계연도의 시설투자계획 마무리하다.
슬며시 틈입해 온 감기는 세밑을 지나 정초까지 떠나지 않으려나 보다.
간 밤, 독한 감기약에 절어 잠은 이룬 듯 하지만, 몸뚱이는 미열에 들뜬채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듯 하고, 손끝과 발끝은 자근자근, 일종의 쾌감까지 동반한 저림이 있다.
1991 년의 마지막날, 싸늘한 새벽.
마구 끌어당기는 이불속의 유혹과 한사코 일어나기를 거부하는 몸살의 육체를 일으킨다.
누가복음, 아사야, 데살로니가 전서.
그러다가 스르르 이불 속으로 무너지는 몸뚱이.
비몽사몽을 헤매이다가 다시 6시에 머리를 일으켜 엎드린채 기도를 드린다.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온다는 것이 기실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으랴.
그저 하루의 일상이 저물고 또 다른 하루의 일상이 시작되는 진부한 연결의 하루 사이일 뿐이다.
태양의 빛이 바뀌는 것도, 하늘에서 새로운 날이다하는 선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인문적으로 구분하여 놓은 시간의 구획일 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무엇이 새로운 것이 있으랴.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러나, 본시 늘 새롭도록 창조된 것을, 원죄에 의하여 새롭지 못한 곳, 어긋난 곳에 거하던 자가 기왕 창조된 진면목을 발견했을 때의 새로움.
창조주 입장에서는 새로운 것이란 없을지언정, 지리멸렬한 인간의 입장에서는 창조하신 그것들이 인생에게는 날마다 새로운 것이다.
주,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