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2. 7

카지모도 2016. 6. 2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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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1 1992. 7. 1 (수)


올 상반기도 어느새 넘어서고 말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간의 흐름은 후딱후딱 빨라지는 느낌이다.


어린 시절의 1년은 얼마나 그 부피가 크고 깊었던가.

그러나 나이 먹어 1년이란 단조롭고 굴곡없는 짧디짧은 촌음이다.

그러므로 英이나 俊이의 하루와 나의 하루가 결코 같을수가 없다.

그 양과 질에서.

나의 단조로운 자로서 아이들의 크고 깊은 시간을 재서는 안된다.

나의 고리타분한 보수꾼의 고정관념 따위가 어떻게 英이의 찬란한 젊음의 다양함을 헤아릴수 있단 말인가.


英이 돌아오며 대우자동차 남부영업소 들러 큰 아빠 차를 함께 타고 영도에 왔다고.


16582 1992. 7. 2 (목)


소설가 박영한이 신문에서 칭송하였기 때문에 사서 읽는 책 '동양문화사'.

그 찬사는 다소 어이없다.

아무런 문학적인 감D.은 없고 단순한 역사관으로 기술한 건조한 역사서에 지나지 않는다.

근세까지의 중국, 한국, 월남을 섭렵하고 이제 중국의 고대로 들어서다.

기왕 구입하여 일고 있으니 하권도 마저 구입해 읽어야겠다.

무익한 책은 아니므로.


아마도 몇 년만인지, 어제는 英이 온종일 집안에 붙어있다.

俊이, 기말고사가 6일부터라는데, 아침 일어날 때의 빨갛게 충혈된 토끼같은 눈이 안쓰럽기 짝이 없다.


블루흐의 바이올린, 정경화의 귀기 서린 아르키의 춤.


16583 1992. 7. 3 (금)


50대의 남자가 심장수술중 수혈을 받다가 에이즈에 감염되었다.

이를 비관한 그와 그의 아내는 함께 동반자살을 기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그 과정에서 동백의 출혈로 아내에게도 에이즈가 감염되고 만다.

다시 함께 죽기로 하고 이 번에는 아내의 죽음을 남편이 도와주고, 곧 뒤따라 남편도 따라 자살하려고 하였다가 아내는 죽고, 남편은 아내의 죽어가는 모습이 끔찍하여 죽지도 못한채 검거되었다.

자살방조죄의 남편은 동정론이 앞서 불구속 기소되고.


무슨 소설보다 더 섬뜩한 얘기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 법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법이 개입해야 한다면 심장수술을 행한 그 병원에 철퇴를 가해야 할 것이고 이 부부에게는 법이 개입할 여지가 조금도 없다.


그 절망과 죽음의 과정을 한번 상상하여 보라.

법이다 동정이다 운운하는 사회적 이슈로서 떠들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 철학적인 명제로서 대토론이 있어야 한다.

사회과학 만능에서 정신과학의 천착 쪽으로 이 유물론적인 사회 분위기는 좀 바뀌어야 겠다.


16585 1992. 7. 5 (일)


오랜 가뭄.

논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있다고.

봉래산 약수터에도 찔찔 떨어지는 물줄기 앞에 물통들은 장사진을 이루고.

장마전선은 그저 먼 남쪽에서 얼쩡거리고만 있다.


중장비 열한개, 노동부의 사용중지 명령.

산업안전공단 찾아가 중장비 검사관들에게 통사정을 하여야 한다.


16587 1992. 7. 7 (화)


사무실에서 줄곧 견디기 힘든 갑갑증.

좁고 어두운 무덤 속에 갇혀있는 듯한 갑갑함으로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은 발작증이 나를 엄습한다.


무어라 표현할까?

폐쇄공포증? 일종의 협심증?

넓고 시원한 곳으로 소리지르며 뛰쳐나가고 싶은 불같은 열망, 높은 낭떠러지에서 몸을 날리고 싶은..

아마 투신자살의 순간은 이런 충동에서 비롯되는 것일게다.


원인이 무엇일까.

간 밤의 회색수면의 후유증이 영육을 지배하고, 아침 J와의 사소한 다툼이 또한 우울을 불러 일으켜, 무언가 '나갈길이 없다'는 절망감의 기분에 휩싸이게 하는....


16588 1992. 7. 8 (수)


논바닥은 갈라지는데 장마는 올 듯 올듯 머뭇거리고 습기 찬 무더위만이 한낮을 지배한다.

이러다가 비가 쏟아지면 또 호우가 되어 물난리가 나고..

에너지 절약이라는 핑계로 에어컨은 돌아가지 않고, 임금협상 때문에 현장은 작업을 하는둥 마는둥..


칼라시트 공사 완공.

1차 공사의 공사대금도 결재치 못하고 있은 상황에서 완공이 썩 달갑지만도 않다.


'동양문화사'

일본- 우리와 다른 토양에서 발전한 일본문화, 외풍으로 부터의 안정이 가장 큰 요소이다.

외침의 우려가 없으니 중앙집권화의 필요성이 없고, 봉건제도가 발달하였다.

봉건제도는 전문화와 다양화의 길을 걷게 하여 오늘의 일본 문화의 저력을 이루었다.

이제 上卷의 끝무렵이다.


토마스 아 캠피스의 신앙적 아포리즘의 통찰은, 나이를 먹어 지는 해를 바라보는 시점에서만이 이해가 가능하다.


주,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내 존재의 주인이시여.


16589 1992. 7. 9 (목)


정보사 땅 사기사건, 몇백억이라는 돈의 단위가 예사롭게 발음되는 세태.

KC원 의 얘기- 전라도 광주 근교의 고향 농토를 정부에서 수용하면서 막대한 보상금이 나왔는데, 그 때문에 순박한 농부들이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고.

20대 초반 젊은녀석이 그랜져를 몰고 다니며 몇천만원 단위는 아예 돈으로 생각지도 않는다는.

얘기하는 KC원 역시 그 와중의 몇 억의 재산가이다.

월 100만원 남짓한 월급에 목숨 거는 봉급쟁이들.

물려받은 돈 한푼없고, 어디서 돈을 굴려볼 재주도 없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무슨 동화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SB-391 출항.

어제도 한동안 그 갑갑증에 시달린다.

퇴근하며 KC원 이 개고기 산다.

고기 몇점의 수육 한접시가 2만원.


16590 1992. 7. 10 (금)


대구가 자그만치 38도까지 올라갔다.

38도- 끔찍한 더위다.


조명숙의 책상에서 발견하여 가져다 읽는 미우라 아야꼬의 전기소설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고'.

일본에서 최초로 드라이 크리닝 세탁법을 개발한 이가라시 겐지- 소학교를 나온 뒤 돈40전을 들고 찢어지게 가난한 집을 나온다. 우연히 기독교를 접하고 그의 인생관은 180도로 변하게 된다.

긍정과 감사와 정직의 덕목으로 그는 성공한다.


기독교적 덕목만을 갖추고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움만은 아니다.

어쩌면 그러한 덕목은 가장 큰 무기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그러한 덕목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 덕목 속에는 아주 중요한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망을 향한 낙천주의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크리스찬에게는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든든한 빽이 있는 사람의 행복의 정체는 바로 이 낙천주의일시 분명하다.


드디어 장마전선 형성.

메마른 땅은 기갈로 허덕이며 누워있다.

기도.


16591 1992. 7. 11 (토)


비 내린다. 비 내린다.

어제 반나절 내린 비가 목마른 대지에 흡족한 것인지 모르겠다.


오리엔탈공영의 이사장, 세금계산서 갖고오다.

1차공사의 잔금, 2차공사의 계약금도 아직 지불치 못하고 있는데 난처하기 짝이 없다. 甲인 내가 공연히 빗쟁이가 된 기분..

벌써 1억 이상이 밀려있다.


현장에서는 잔업을 하지 않아 다소 일찍 돌아온다.

먹구름에 덮여서 벌써 어두컴컴한 7시경의 동삼동의 분위기- 안개 속에 흐릿하게 비치는 가게의 붉은 전등빛, 흐르는 안개, 낮게 드리운 하늘, 소슬한 첫여름의 대기의 냄새.

나는 이러한 안온한 무드를 좋아한다.


이런 무드에 젖은 나는 어쩔수없이 소주 사들고 돌아와 내 방에 앉는다.

英이 俊이 둘다 일찍 돌아와 있는 집.


J가 빌려온 책- 영화를 소설로 옮긴 '퐁네프의 연인'

영화를 소설로 만든 이 책은 유치함 가득하지만, 영화의 영상은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할 수는 있겠다.

좋은 영화일 것.


16592 1992. 7. 12 (일)


KK곤 모는 차타고 반여동 안전관리공단.

검사부의 젊은 친구들은 공무원답지 않은 사명감이 엿보인다.

늙수그레한 검사부장이라는 사람의 잔소리를 한참 듣고 앉았어야 했는데, 백번 타당한 얘기이고, 내 변명의 논리는 내 입장일 뿐이지 객관적인 개연성이 결핍되어 있음이 사실이다.

봉투를 준비하여 갔으나 이런 것이 통하지 않을 분위기.

좋은 인상의 관변단체다.


'퐁네프의 연인들'

알렉스와 미셀.

리얼리즘과 환상과 비애와 파라독스와 추악함과 아름다움과...

그러나 결론은 아름다움.

아직 접하지 않은 그 영화의 감독 레오 카락스의 천재는 벌써부터 느끼게 된다.

유치한 영화소설을 읽으면서도 도달할수 있는 어떤 고양감, 진정한 예술의 빛을 볼수 있는.

뛰어난 작품은 그것을 쓰레기 포장지로 감싸더라도 그 향기는 충분히 맡을수 있은 것이다.

이 영화만은 비디오로 보지말고 꼭 영화관의 스크린으로 봐야겠다.


16594 1992. 7. 14 (화)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종일 흐린 날씨, 빗방울이 가루가 되어 때로 듣기도 한다.


죤 K 페어뱅크, 에드윈 O 라이샤워, 앨버트 M 크레이그, 3명의 하버드 교수가 쓴 '동양문화사' 上卷 다 읽다.

석학의 역사적 고찰에 의한 논슬은 감성을 자극하는 무엇이 없다하더라도 지적으로 굉장히 유익한 독서.

중국의 거대함, 일본의 다양함, 한국의 단순함.

그러나 그 왕조와 권력자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동양적인 법칙.

이 법칙을 유추해 내려는 역사인식.


어제 임금협상 타결.

관리직의 어느 직급이상의 임금은 동결한다는 설이 분분하다.

단결된 근로자의 힘은 무서워하는데, 조직의 틀로 꽉 묶어놓은 관리직 사원들은 당최 만만하기만 하다.


英이 기타를 갖고 싶은 열망.

10여만원의 그것을 당장 사주지 못하는 아비짜리의 능력.


기도드리는 새벽, 자욱한 안개.


16595 1992. 7. 15 (수)


중앙동 대한통운 빌딩12층.

CAD/CAM 의 SYSTEM 세미나.

OFF SET과 일반배치도만 제공하면 LINES, FAIRING, 구조도까지 컴퓨터 시스템에 의하여 손쉽게 이루어진다.


컴퓨터라는 첨단 시스템의 능력을 접하면서 나는 俊이와 英이를 생각한다.

앞으로 닥쳐올 세상에서의 유용한 기술, 현대를 살아가는 첨단의 낚시법.


16596 1992. 7. 16 (목)


작가 김성일의 신앙간증집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읽는다.

어렸을 적부터 빼어난 수재, 김승옥 김현 염무운등과 그 유명한 서울대학교의 '산문시대' 동인.

그런 그가 하나님에 붙들렸다.

그리고 자신의 달란트로써 하나님께 어프로치한다.

김성일과 같은 수재도, 뛰어난 두뇌와 많은 독서와 깊은 사색을 거친 지식인도 아주 단순하고 유치하게 직선적으로 발가벗는데, 나와 같이 범용한 인물은 옷을 움켜 잡고 발가 벗기를 거부하고 있다.

나의 신앙의 정체- 형이상학을 빙자한 사이비, 또는 편의주의적이고 자기중심주의.

아아, 나의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암시의 그 최면에서 벗어나 진정 소박하고 직선적인 그 유치함 속으로 함몰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16597 1992. 7. 17 (금)


비 흩뿌리다.


내가 싫어한다고 짐짓 내세우는 것들.

무작정 게으른 것, 부당한 것에 대하여 고집을 부리는 것, 참여치 않고 뒤에서 말로만 씨부리는 것, 관계에 대한 애정없는 이기주의, 권위가 없으면서 권위있는양 하는 것.

그러나 생각하여 보면, 나 자신이 바로 내가 싫어한다는 것의 집함소가 아닌가 말이다.

너 자신을 알라!


SB-389 오사카항에서 ENGINE TROUBLE로 안벽에 부딪쳐 외판 DAMAGE.

선주측에서는 조선소 및 ENGINE MAKER 쌍용의 하자로 밀어 부치고, 조선소는 OPERATING 미숙으로 주장한다.

1억5천만원, 보험관계도 묘하게 얽혀서 복잡한 상황이 되고 있다.


俊의 재능을 꿰뚫어보는 英이, 부모가 감지할수 없는 어떤 핵심을 또레의 제 누나는 간파하고 있다.


16598 1992. 7. 18 (토)


TV의 국산영화 보면서 소주마신다.

이혜영, 최민수가 나오는 '겨울 꿈은 날지 않는다'

잘 생긴 마스크, 반항적인 연기를 하는 최민수가 돋보이지만 내용은 역시 진부한 국산영화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소주에 부대낀 속.

편한 잠은 오지 않는다.

꿈-길우, 광우 삼촌이 고급가구 외판, 사촌누이들, 청룡열차 타고 서울역...

정욕과 열등의식과 질투등 자의식과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칵테일되어 춤을 추는 꿈.


16599 1992. 7. 19 (일)


토요일, 조건부 합격판정 받은 장비에 대하여 산업안전공단의 검사 수검.

젊은 검사원들, 융통성이 통하지 않는 그 친구들의 비위를 맞추어가며 좋은 인상으로 검사 마친다.


J와 俊이와 함께 '분노의 역류' 감상.

소방수 이야기- 마치 독립된 생명과 의지가 있는듯한 불.

미국이란 사회가 제멋대로인 듯 하여도 저토록 멀쩡하게 늠름할수 있을수 있는 것은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곳곳에 있는 탓이다.


내게도 직업의식이란 것이 있을까.

내게 직업에 대한 어떤 자부심이 있으며 자랑할 무엇이 있으며, 어떤 동기부여의 흥미가 있을까.

다만 있는 것이라고는 어딘가 소속되어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안도감과 안주의식, 그리고 끊임없이 군지렁거리는 것은, 이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싫은 것에 억지로 떠밀리고 있는 것이라는 이방의식.


16600 1992. 7. 20 (월)


홍난파의 산문들을 읽는다.

근대의 음악가의 마음이 드러나 있는 소박한 글.

난파의 글재주는 상당하지만, 어느 주석에서 수주 변영로의 빈정거림 때문에 글쓰기를 중단하였다니 아까운 일이다.

뉘라서 술꾼 변영로의 술취한 독설에 당하지 않겠는가.


"심한 정도의 음악애호자들은 여기에 중독된다는 일도 있음을 우리는 가끔 본다.

그러나 음악에 중독이 된다는 것은 동시에 음악에 귀머거리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여기에 음악을 듣는 이들의 심적태도나 준비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홍난파-


俊이의 방학- 무언가 한가지 기능을 습득하는 고등학교 1학년의 여름방학이기를 열망하는 아비의 마음을 俊이는 몰라주고 있다.

기타라는 악기 하나라도 익혔으면 하는 바람인데, 어미는 그런 문제에 대하여는 도통 관심이 없는 듯 하고...


16601 1992. 7. 21 (화)


습기먹은 무더위, 그러나 어제는 처음 가동하는 에어컨 바람으로 무더위를 느끼지 못하다.


어제 MBC '인간시대'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세명의 락그룹.

그들의 노래라는 것은 랲송이라나 무어라나하는 염불외듯 씨부려대고 격렬한 리듬감이 시끄러운 노래.

무슨 체조를 연상케 하는 춤사위.

그들에게 십대들은 열광한다.

아스팔트 킨트, 인스탄트 식품에 익숙한 감각만을 추구하는 세대.

내게는 도무지 그 아이들에게서 영혼이라던가 인생의 진실을 생각하는 진지한 자세는 엿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그런 그룹을 향하여 온 존재를 흔들어 대는듯한 그 풍조를 이해할 수가 없다.


늙은이- 나는 이제 구닥다리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다 아무런 인간적, 사회적, 자아성숙의 성취에도 실패해 버린 허깨비 늙은이..


16602 1992. 7. 22 (수)


SB-392 진수, 무더위 속에서 땀을 흘리며 진수작업을 하는 작업복 입은 단하의 무리들과 성장을 하고 가슴에 꽃을 꼽고 앉아있은 단상의 무리들.


英이 어제 기타 사다.

제법 고급품.


16604 1992. 7. 24 (금)


종말론의 기승.

어린 선지자라는 아이, 그 아이의 예수 재림 계시에 미쳐 날뛰는 광신도들.

세상이 곧 끝장 나는 판에 공부는 해서 무엇하고 가족은 있어 무엇하느냐고 모든 걸 집어 팽개치고 광신의 최면 속으로 쓸려 들어가는 사람들.

아, 어째서 성경은 자의적 해석의 여지를 그토록 많이 남겨 놓았는지.


어제 俊이의 남방 윗주머니에 있던 학원수강증을 J는 그대로 세탁기에 넣어 돌려서 수강증은 가루가 되어 버렸다.

俊이가 다시 학원에 가서 사정하였으나 재발급은 안된단다.

여하튼 J의 섬세하고 찬찬치 못한, 거칠음은 알아주어야 한다.

그에 대하여 한마디하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는다.

자신에 대한 비난은 참아내지 못하는 J이므로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16605 1992. 7. 25 (토)


올바른 가정교육으로 아이들을 올곧게 키울수있다는 것은 매우 어려웁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 지난함은 마음에 사무친다.

예전- 대가족의 가정에서는 전통과 위계질서에 의한 무언의 교육으로 한 인격을 훌륭히 교육할 수가 있었다.

이제 핵가족으로 객체화되어버린 가정에서는 부모가 이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그들의 능력은 역부족이다.

무슨 가치관도 정립되어 있지 않을뿐 아니라, 사회를 이루는 보편적이고 일관적인 가치관 역시 사라진지 오래이다.

각 가정마다 알아서 할내기이다.

뚜렷하게 정립된 가치관이 없는 부모들에게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고 도박이다.


俊이의 그 삐딱함이 염려스러운 아비짜리.


英이의 기타 솜씨는 일취월장, 뛰어난 음악성을 갖고 있는 딸네미.

어젯밤 함께 기타에 맞춰 가요를 불렀는데, 아빠의 음치적 박자감각에 핀찬을 퍼붓는 딸년.

미상불 나의 박자감각에는 문제가 많다.


열대야, 설친 잠.

3시 일어나 에스겔, 기도.


아침부터 태양은 이글거린다.


16606 1992. 7. 26 (일)


닥종이 인형을 만드는 여자, 김영희가 쓴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 읽는다.

사별한 한국 남편에게서 낳은 세아이를 데리고, 열네살 연하인 독일 총각과 재혼하여 거기서 또 두아이를 낳아 독일서 살고 있는 예술가.

한 굳센 여자의 뚜렷한 주관에 의한 역정의 드라마가 있을법하지만, 의외로 평범하고 수더분한 한국여자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


새벽,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회.

지구의 저편에서 이 땅 모두가 잠든 새벽에 잠과는 또다른 잔치를 벌이고 있구나.


16608 1992. 7. 28 (화)


통증-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는 야릇한 그 통증.

때때로 나를 찾아와 하루를 정말 피폐하게 만드는, 이제는 낯익은 그 통증.

오른 팔은 우릿하게 쑤시고, 허리부근에는 또 무어라 표현 못할 우릿한 아픔이 있고, 머리속은 정말 말못할 쑤심이 있다.

구체적인 날카로운 통증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어떤 고통이라는 미지근한 늪 속에 잠겨있는 느낌.

이 증세는 언제나 회색수면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따뜻함의 결핍과도 관계가 있어, 가정이라는 곳의 살벌함에 대한 절망감 역시 이 증세와 관계를 맺고 있다.


간밤에는 숙면을 이루었는가?

글쎄, 꿈- 10층으로 증축하는 사무실, 그 고층의 공사장에서 나는 아래를 향하여 고함을 처지르고 있었다.


16609 1992. 7. 29 (수)


어머니께 가다.

英이는 먼저 가 있고, 나는 8시 조금 넘어 족발과 수박 사들고 간다.

장년 사나이 회억의 심연, 그 심연의 어떤 혼돈의 회오리 속에서 나는 어머니를 사랑한다.


俊이 녀석의 이상한 성격.

성적표를 여태까지 감추고 있었는데, 성적이 나빠서가 아니다.

영어과목은 전학년 1등을 하였다.

그게 쑥스러웠던 것이다.


16610 1992. 7. 30 (목)


김성일 '땅끝에서 오다" 읽다.

추리소설의 수법으로 성경의 내용에 어프로치한다.

좀 과장되고 동기의 설정도 작위적이지만, 나는 이 소설을 통하여 분석적인 자세로 성경을 대하고, 소화하는 성실한 방법론을 배우게 된다.


어머니를 생각하고, 또한 그 대칭으로서의 형을 생각하고.. 그리하면 종장에는 내 내면 어떤 자의식의 성감대를 건드려 내 그 못생김에 몸을 떤다.


그렇다. 나의 사랑은 요원한 것이다.

나의 신앙이란 보통의 신앙인의 발가락 때만큼도 못한 것이다.


16611 1992. 7. 31 (금)


백남준- 무욕 무애한 어린애의 얼굴, 옛날 귀에 익었던 어눌한 서울 말씨, 검은 멜빵에 소매 단추를 채우지 않은 너펄거리는 흰 와이셔츠, 검은 운동화.

그가 추구하는 비디오 예술이라는 것을 나는 아름답다고 느끼거나, 그 의미를 이해 할 수는 없으나 나는 그의 모습 만으로도 그의 예술을 느낄수 있겠다.

"갈수록 사람들에게는 욕망의 대상이 없어지거든.

그래서 결국 고등사기꾼인 예술가는 욕망을 창조하는 사람이야."

백남준은 어딘가 걸레스님이라는 중광과 닮은바 있다.


내일부터 4일간의 하기 휴가.

내 꿈꾸는 휴가, 그 단란한 꿈의 색깔을 J는 엿볼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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