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12 1992. 8. 1 (토)
하기휴가.
휴가 전일, 다소 느슨해진 일과중에 찌는듯한 거리에 나간다.
엔도 슈사꾸의 '예수의 생애', 김성일의 '성경과의 만남'등 2권의 책 사고 양희은과 나나무스꾸리의 테이프를 산다.
살인적인 더위.
4일간의 휴가를 앞둔 퇴근, LD찬씨와 다시 시내로 나가 용문각에서 팔보채 시켜 놓고 백알을 마신다.
영도로 돌아오면서 다시 레코드가게 들러 모차르트의 '호른 협주곡', 책방 들러 '동양문화사 下卷'산다.
16613 1992. 8. 2 (일)
엔도 슈사꾸의 '예수의 생애'는 하나님으로서의 이미지는 모두 거세해 버리고 오직 인간의 예수로서만 접근하여, 모든 불쌍하고 가엾은 것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에 가득찬 표정의 예수를 그려낸다.
아아,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서도 얼마나 애틋하고 쓸쓸하신 분인가.
어제도 거리에서 마주친 껌팔이 노파, 고무판을 댄 배로 엎드려 기면서 동정을 구하는 불구자, 육교에 엎드려 두 손을 내미는 어린아이.
거기에서 애틋하고 쓸쓸하여 마음이 아픈 예수를 본다.
생각컨데 바늘로 내면의 어느 곳을 찌르는 그 아픔은 바로 예수의 아픔이었음을.
산, 새벽산에 으른다.
부르도자로 밀어버린 산자락의 드넓은 택지.
일요일 새벽, 아무도 없이 텅 빈 공간에 감도는 정일함, 여백의 그 충일한 정서.
나는 이와 같은 고독의 청결한 느낌의 정일함을 사랑한다.
16614 1992. 8. 3 (월)
바람불어 다소 선선한 일요일, 교회에서 돌아오는 英이를 기다렸다가 J는 김밥을 말고 튀깁닭 사들고,우리 네 식구는 차가 정체되어 장사진을 이룬 도로를 걸어서 태종대에 간다.
숲 그늘에 자리 펴 둘러앉아서 싸들고 간 음식을 먹고 나는 소주를 한병 비운다.
그리고 숲에서 나와 자유랜드라는 유원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
청룡열차, 바이킹, 다람쥐집, 그네, 유령의 집....
불과 몇초 남짓 스릴을 즐기려고 위락기구 앞에 줄을 선 사람들.
여름은, 좌우간 행락으로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유행하는 계절이다.
집에 돌아 와 다시 맥주.
그런데 아뿔사, 몸살.
으슬으슬 한기가 들며 머리를 세우기가 힘들 정도.
월요일, 어쨌든 일찌거니 일어나 세수부터 해치운다.
16615 1992. 8. 4 (화)
英이 동광약국까지 올라가서 지어 온 약을 먹고, 이마에 차거운 수건을 얹어 찜질을 하고 누워 있었더니 시나브로 열이 내리고 한기도 가시고 입맛도 돌아온다.
육체란 이토록 의지가 박약한 물건이다.
몇알의 약으로도 병은 물러가고, 순간의 병으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J는 英이와 시내나가서, 英이의 안경을 맞추고, 英이는 엄마의 생일 선물을 앞당겨 양산을 사고, 또 내 몫으로는 남녀 듀엣으로 부른 찬송가 테이프를 사서 돌아온다.
접촉과 대화, 관계의 지속적인 부딪침만이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다.
귀찮다, 번거롭다, 무섭다고 관계의 부딪침을 회피하여 자기중심적으로만 관계를 몽상함은 참으로 어리석은 관계의 방기이다.
어쩌면 나의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
내 몽상적인 신앙관에 그 원인이 있을 것.
현실 속의 십자가, 저 눈에 보이는 교회당에 몸으로 가서 마음으로 부딪칠 일이다.
김승옥이 회심한 그 글을 읽고 더욱 이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
먼 남쪽바다에 태풍, 그 전초병으로 어제부터 불어대는 바람이 창문을 마구 흔들어 댄다.
휴가 마지막 날, 회사 나가보려 한다.
16616 1992. 8. 5 (수)
어제 오전 회사 돌아본다.
2공장 쇼트기 라이너 교체공사는 Y.H.동 과장 감독하에 순조롭게 진행, 본사 FLOATING DOCK의 배전설비 증설공사는 다소 지연되고 있다.
비디오 '베어'빌려 돌아온다.
장 자크 야누 감독의 곰 이야기.
훈련시킨 곰의 연기로서 한편의 서정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한 흔적은 역력하지만 월트 디즈니 솜씨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생각보다 못한 영화.
작은 처남, S기 와 함께 오다.
참 나만큼이나 재미없는 친구, 작은처남 J희.
왼종일 TV 앞에 앉아 있다가 돌아가다.
모차르트, 시골의 게으른 황소 울음처럼 호른이 길게 운다.
16619 1992. 8. 8 (토)
태풍의 전령, 세찬 바람이 으르렁대는 새벽.
벌써 며칠째 숙면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마음은 그다지 무겁지 않다.
머릿속과 몸뚱이가 아무리 무거울지라도 마음의 중심에 밝은 빛 한줄기 간직하고 있으면 능히 마음은 가벼울수 있다.
진지하고 세심하게 성경을 처음부터 다시 천착코자한다.
소설을 읽듯이 재미롭게 성경 전체를 섭럽하여 조망하고, 두 번째는 좀 더 분석적으로 접근하여 지식화하고, 마지막으로 그 말씀 안에 내가 삼키어지고자 하는 소망.
나의 신앙은 충동적이고 감성적이며 신비롭게 다가 왔었다.
그것은 어쩌면 내 기분의 축에 따라 춤추는 감응이었을 것.
커다란 오류.
이성적인 방법으로, 논리적인 방법으로 어프로치하노라면 그 분은 필경 나를 맞으러 나오시리라.
오늘 어머니 생신, 만 칠십삼세.
어머니 태어 나신지 일만육천육백육십사일 째.
어머니의 여생,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실 아아, 어머니의 남은 여생.
이 어리석고 고집스레 완고한 핏줄들은 그 여생에 한조각 기쁨이 될 수 없다는...
어머니 가신후 피눈물나는 회오로 몸부림칠 때...
나의 하나님, 이 관계들을 돌보소서.
16620 1992. 8. 9 (일)
어머니 생신, 어머니 곁에 모두 둘러 앉다.
감사....
어머니를 중심한 관계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다면, 그것은 사소한 감정의 엇갈림같은 극히 진부하고 속되고 저급한 어떤 느낌의 것일 뿐이다.
태풍 제니스는 소멸하였는데도 일요일 아침, 몹씨 바람이 분다.
TV의 좋은 프로그램 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관한 다큐멘타리 '오스카의 영광'
헐리웃- 그곳은 가히 꿈의 고향이다. 꿈의 창고이다.
과학이 만들어 낸 장르중에서 영화만큼 인간에게 환상적인 행복을 심어준 것도 없을 것이다.
영화- 어린 시절, 정능의 어느 방에서 밀짚모자의 테두리에서 얻은 필름조각을 갖고 놀았던 그때.
햇빛에 투과되어 나타나는 천연색 그 신비로운 색감의 아름다움에 내 영혼은 실로 감동으로 떨었었다.
그래서 나는 셀로판지를 구해다가 물감으로 개칠하여 그것을 전지불로 비추어 영상을 나타나게 하는 놀이에 홀로 얼마나 몰두하였던가.
아메리카 문화의 상업성과 저속성으로 아무리 영화를 폄훼할지라도 내게 영화는 숙명적인 매혹의 대상이 아닐수 없다.
'양들의 침묵'비디오 빌려다가 본다.
英이 지적하는 대로 극장에서 보는 영화와 TV 화면으로 보는 영화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두운 곳에 앉아서, 눈 앞을 가득 메운 스크린에 눈은 고정되고, 귀는 오직 영화의 사운드만 들리는, 영화를 보기 위하여 몇시간을 바친다는 의도를 갖고 보는 것과, 산만한 공간에서 느슨한 자세로 좁은 모니터로 보는 영화가 어찌 같을수 있겠는가마는, 영화관에 가본지가 언제였던지...
英이 주장하는 바대로 비디오로 보아서 그런지 '양들의 침묵'이 아카데미를 휩쓸었다는 사실은 석연치 않다.
화면은 성실하였고, 연기도 인상적이었고, 구성도 탄탄하였지만.
16621 1992. 8. 10 (월)
꿈- 어머니 형 媛이 등장하는 긍정적인 색채,
어머니는 나를 목사를 시키려고 무슨 장로교 노회에 가서 면접시험을 보라고 한다.
형은 집사들과 모임이 있다고 나와 함께 가서 술을 마시잔다.
교인이 무슨 술이냐고 하였더니 술들을 아주 즐긴다고.
媛이와 교회 단체와 함께 우이동 소풍, 깡패들이 등장하는데 느닷없이 그 두목은 김대중이다.
월요일.
이제 여름은 한풀 꺾였는가, 선선한 바람이 분다.
16622 1992. 8. 11 (화)
올림픽 폐회식 직전, 바르셀로나 몬주익 메인 스타디움에 마라톤의 선두주자가 들어선다.
한국의 황영조, 스물두살.
40여 KM를 2시간 10여분 동안 달려서 드디어 56년만에 마라톤에 우승한 황영조 선수.
모두 기립하여 환호하는 가운데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감동적인 순간.
아시아의 한구석, 강원도 산골 마을의 소년, 그 승리의 드라마는 한국인을 누구나 내셔널리스트로 만들고 만다.
올림픽 폐회식.
불꽃놀이의 장관.
호세 카레라스와 대중 여가수가 부르는 올림픽 주제가.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미끈한 팔을 드러낸 그녀의 아름다움.
16623 1992. 8. 12 (수)
직원들과 시내에서 회식.
중화요리가 오히려 경제적이다.
먹을 것도 있고.
호황의 노래방이라는 곳은 이제 새로운 필수 어울림 공간이다.
반주에 맞추어 노래들을 부르고 나면 스트레스 해소도 되고 술들도 깬다.
반주는 있을리도 없고, 술집에서 혹은 거리에서 어깨동무를 하며 소리쳐 노래 불렀던 옛 젊은이들의 노래는 얼마나 리버럴하였던가.
아마 지금 그리하면 무슨 경범죄로 끌려갈 것이다.
그래서 답답한 공간에 갇힌채 전자음악의 반주에 속박된 노래를 부르게 한다.
12시 임박하여 택시 잡아타고 허겁지겁 돌아온다.
英이이 성적표.
미적분학은 F의 권총을 차고, 영어 하나만 A+인채 나머지는 모두 B.C 학점.
英이는 대학이라는 걸 크게 착각하고 있는게 아닌지 모르겠다.
옛날 내가 착각하였던 것 처럼.
16624 1992. 8. 13 (목)
어제, 내리 쏟아지는듯한 비.
해갈은 좀 되었을까.
산을 깎고 택지를 만든 곳에서 시뻘건 황토물이 범람하여 도로를 덮어버리고 바다로 흘러 들어가서 바닷물마저도 싯뻘겋게 만들어 버린다.
비는 그치고 늦여름의 아침 해가 떠오른다.
업무량이 서서히 소진되고 있다.
따라서 점점 신경질적이 되고 있는 윗 사람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9번과 11번.
16625 1992. 8. 14 (금)
영이 책 '주라기 공원' 읽다.
호박에 박혀있던 모기의 화석에서 공룡의 유전자를 갖고 공룡을 재생한다는 S.F 소설.
이것이 그냥 공상과학 소설적인 흥미로서만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섬뜩한 면이 있다.
DNA 구조가 규명되어 생명의 복제나 변형이 가능해진 현금의 과학수준.
이런 생명공학의 기술이 자본주의의 속성과 손을 잡게되면 가공할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그저 공상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생명의 창조라는, 신의 영역에까지 바야흐로 침입한 인간, 끝간데 없는 교만의 극은 과연 어디일까.
낙원의 도래인가, 나락의 구렁텅이인가.
16626 1992. 8. 15 (토)
퇴근할 무렵, 많은비 내리다.
육고기 뷔페라는 곳, 직원들과 그곳에서 아귀아귀 고기를 먹어댄다.
시장바닥처럼 번잡한 홀에는 고기굽는 연기와 열기가, 계속 돌려대는 에어컨의 냉기를 삼켜 버린다.
먹는 문화의 번성, 다만 먹는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
이것도 하나의 뚜렷한 풍조의 문화임이 분명하다.
그곳을 나와서 YH동 과장과 JS영 과장만 동반하여 노래방.
그래, 차라리 노래방에서 목청껏 소리라도 지르면 어느만큼은 시원해 진다.
비 흠뻑 맞으며 택시타고 12시 넘어 돌아온다.
마루에 앉아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들으며 또 2병의 맥주를 마시고 쓰러져 잠이 든다.
연휴의 첫날, 광복절.
날씨는 잔뜩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는다.
16627 1992. 8. 16 (일)
꿈- 회사사람들, KO훈,SJ엽,LB걸등.
동삼동은 동삼동인데 아주 낯선곳, 술집.
동삼교회는 바다 가운데 건축중, 손철수등장. 거기에 주라기공원이 가미된 아주 바라이어티한 내용.
7시경, J와 태종대를 간다.
바다 안개 자욱한 숲, 새소리.
이른 아침인데도 입구의 상점들은 벌써 손님끌기에 바쁘다.
서울서 내려온듯한 젊은이들이 끼리끼리 무리지어 순환도로를 걷는다.
J에게 복국이라는 걸 먹여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렸으나 문을 연 곳은 없다.
俊이는 J석 이와 독서실, 英이는 교회 다녀와서 학교로.
16628 1992. 8. 17 (월)
일요일 오후.
내 방에 앉아서 英이가 부탁한 동아리의 로고를 디자인 한답시고 끄적여보고, 주라기공원 읽으면서 술을 홀짝인다.
편한 잠.
J의 생일.
내 아내, 해로하여 같이 호흡하고 함께 죽어 갈 여자.
흐린 날씨, 바람이 분다.
기도.
16629 1992. 8. 18 (화)
'주라기 공원' 하권에서의 끝부분은 영화화를 의식하였는지 서스펜스로 점철된다.
태풍 캔트호 북상중, 아마 내일 새벽쯤엔 한반도 관통할 듯.
英이는 내일 과 M.T를 떠난다고 하는데.
어제 저녁, J는 웬일로 기독교에 관해서 묻는다.
신앙의 싹이 돋는가.
차츰차츰 빈약하지만 내 머리속 지식창고를 개방하여 오직 성의를 가지고 J에게 공급하자.
그리하여 가시버시 함께 기쁨과 소망과 진실한 삶을 살아내자.
새벽, 아우성치는 바람소리.
기도드린다.
아내의 구원. 사랑..온유..
16630 1992. 8. 19 (수)
태풍 캔트는 일본 규슈를 관통하면서 세력이 많이 꺾였을 뿐아니라 방향을 틀어 동해로 빠져 나갈 전망이어서 부산에는 별 영향이 없을 거라고 한다.
모두 태풍 비상대기하고 있는데 나는 9시경 슬며시 빠져 돌아온다.
J의 생일 선물로 S형 어머니가 선물한 책, 모리스 웨스트 '유리로 만든 세상'
칼 구스타프 융을 실명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소설인데, 소설의 소재는 실제로 융의 기록에서 비롯되었다고.
무의식- 그 캄캄한 동굴 속 풍경화가 차츰 드러나게 될 전개가 사뭇 흥미롭다.
꿈- 일본의 어느 시골을 찾아간다. 대나무다리, 냇물과 산모퉁이의 안온한 일본의 시골 풍경. 눈 덮인 산자락에 자리잡은 일본식 가옥을 지나가야하는데 그 지붕을 넘는다. 너무 미끄러워서 그만 떨어지고 만다, 일본 아낙네의 요염한 친절.
새벽, 바람은 많이 수그러 들었으나 날씨는 잔뜩 찌푸려있고 빗방울도 듣고 있다.
시편, 토마스 아 캠피스를 소리내 읽고 기도.
오늘 英이는 거제도, 해금강등으로 2박3일의 M.T를 떠난다.
16631 1992. 8. 20 (목)
SB-391 'WEAL POS'호 출항.
이외수의 소설 '벽오금학도' 읽는다.
어쨌든 이외수도 소설가로서 인구에 회자되는 작가이니까 일정 수준은 되어 있다.
특이한 감성, 감수성에만 의지하여 이룬 소설.
특이한 奇異의 세계로 인도하는 소설은 奇人이라는 이외수답지만, 뚜렷한 이유도 없이 내게 그는 어정쩡한 작가로 느껴진다.
16633 1992. 8. 22 (토)
英이 돌아 오다.
고작 4일만의 오누이의 해후이지만, 좀 더 정겨운 오누이의 만남을 연출하여도 좋을텐데 두녀석의 무덤덤한 포즈는 아비의 불만이다.
英이는 외향적이고 俊이는 내성적인 성격.
俊이에 대하여 늘 어떤 염려의 마음을 버릴수 없는 것은 성격의 그 내향성에 있는 것이다.
俊이를 좀 더 밖으로, 외부의 세계로 인도할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英이, 동아리 M.T보다는 재미롭지 못하였다지만, 얼마나 즐거웠을까.
어제, 방지시설 기초공사.
아침, 창조주를 묵상하며 늘어진 영혼을 추스린다.
16634 1992. 8. 23 (일)
늦더위.
퇴근하여 파마하다.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근 세시간여를 여자들 틈에서 죽치고 앉아있어야 하는, 그 싫은 과정을 거처야만 가꾸어지는 돼지털의 내 머리카락.
파마의 약품을 구해다가 어떻게 집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엿으면 좋으련만 J의 솜씨로는 가능하지도 않을 것.
빌 어거스트 감독의 '정복자 펠레'
좋은 영화다.
로만 폴란스키가 '테스'에서 영국 워섹스 지방의 풍광을 시정 넘치게 그려냈듯이, 빌 어거스트는 19S.기 덴마크의 풍광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폴란드에서 이민하여 온 가난한 아버지와 아들.
늙고 가난하고 비굴한 아버지 막스 폰 시도, 그 아버지의 끈에서 성장하는 소년 펠레.
그러나 필경 소년은 그 끈을 끊어버리고 상승하지 않으면 안된다.
헐리웃 영화와는 사뭇 그 정서가 다른 유럽의 영화.
이외수 '벽오금학도' 다 읽다.
동양적 신비주의, 신선 이야기- 천부경...
이외수의 미숙한 광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이 소설은 그의 어떤 성숙을 느끼게 하는바가 있다.
일요일 아침, J와 태종대 숲길을 걷는다.
버스타고 옛 보생의원 앞 진주집 해장국먹고 돌아 온 시각은 9시.
俊이 눈은 토깽이 눈.
16635 1992. 8. 24 (월)
명징하게 정의 될 수 없는 존재.
종교가 바라보는 인간은 그렇게 단순 명료한 것이 아니다.
종교의 내밀한 목소리 또한 SIMPLE한 단순체로서 인간을 정의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괴롭다.
그리하여 단순을 추구하여 나아가는 도정, 그것이 바로 신앙의 길이다.
단순 무구한 에덴의 세계에서 인간이 추방당한 곳, 그곳은 복잡성의 세계.
일요일 한낮, 매실주 마시며 '간추린 교회사'뒤적이다가 일찌거니 미역국에 밥 말아서 순대를 채운후에 침대에 눕는다.
꿈- 손철수가 자갈치시장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고, 대학생들 북적, 형도 등장...
어떤 분위기- 과거의 빛무리같은 것, 슬픔같은 것, 외로움같은 것...
내 내면 그 안을 자물쇠를 따고 삐걱거리는 문을 열어 한번만 들여다 봤으면.
나의 주님, 모든 것은 주님의 손아귀 속에 있음을.
16636 1992. 8. 25 (화)
사무실에서 전화로 바이오리듬을 물었더니, 오늘 신체 감성 지성 리듬 전부가 최고의 고조기, 바로 나의 날이란다.
실제로는 그 모두는 매우 저조한 상태인데.
육신도 처지고, 감성도 지극히 메말라서 에스프리의 향기대신에 권태로운 시궁창 냄새만 맡아 지는데.
지성쪽 역시 아무런 지적 욕구도 없고, 이성의 번득임도 느껴지지 않는데.
요는 내 삶에 중심이 없다.
사상의 논리의 생활양식의 목적의 철학의 윤리의 가치관의 중심이 없다.
중심이 없거니와 내게 닥치는 어떤 사물에 대한 호오(好惡)의 감정마저도 모호하다.
俊이, 내일 개학이라는 놈이 방학숙제에 쩔쩔매고, 피폐한 아비에게 독후감 숙제를 슬며시 의뢰하고..
이토록 계획성과 준비성이 부족한 俊이일 줄이야.
실망을 넘어서 한심할 지경이다.
내 가족들은 진실로 중심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저 되는데로, 바람에 날리는 갈대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간밤의 수면은 완전하게 설치고.
나의 하나님, 위를 구원하소서.
16637 1992. 8. 26 (수)
빈 회의실 들어앉아서 俊이 방학숙제 독후감을 쓴다.
황석영의 소설 두편, 이문열의 소설 한편, 김승옥의 소설 한편, 주라기공원의 독후감.
俊이에게는 이 소설들을 읽으라고 하여놓고.
늦은 오후 쓰기를 마치고, 낙서와 같은 글들을 P/C 앞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려 정서한다.
생각할수록 한심한 고등학교 1학년생인 내 아들.
대만 대사관의 청천백일기를 하강하면서 대사를 비롯한 자유중국 사람들 흐느낀다.
국가간의 신의는 현실적인 실속주의 앞에서는 헌신짝 같은 것.
역사의 발전은 결코 정의롭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적 역사관, 이성이라는 인간의 순수의지 따위는 믿을바 못된다.
무엇이 요즘 나를 잠 못이루게 하는가.
추적추적 비내리는 새벽.
시편읽고 카잔차키스의 아포리즘을 읽고 기도드린다.
16639 1992. 8. 28 (금)
어제 CT용의 차를 타고 서면 한일환경 사무실, 회의 마친후 한일환경 공장장의 차를 타고 두구동 현장에 가서 방지시설 구조물 검수하다.
조잡한 물건이다.
구조적으로도 그렇고 용접상태, 도색등 조선소의 눈으로 볼 때 형편없는 제품이다.
근본적인 수정은 불가할 것이지만 용접이나 도장등 재시공을 지적하다.
다시 서면 한일환경으로 돌아와 백창기사장과 보신탕 집에 마주 앉는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경영하는 회사의 규모가 의외로 탄탄하다.
회사 운영에 있어서 가장 큰 부분이 바로 관청의 로비여서 공사비의 제일 큰 부분을 이 로비자금이 차지하고 있다고.
꿈- 김우중, 이종찬 등장하여 조선소 상담.
돌연 멧돼지 닮은 악어가 출현하여 새끼를 번식한다.
조선소의 격렬한 파업데모, 자해하는 근로자들, 나의 역할은 엑스트라....
16640 1992. 8. 29 (토)
꿈- 내 자신의 임종이다. 죽어가는 내 방에 때로 어머니, 형, 媛이가 들어온다.
아이들은 뵈지 않으니 아마 총각때의 죽음인 모양이다.
곧 숨이 끊어짐을 스스로 느끼고 헉헉거리며 어서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린다.
예수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런데 쉽게 숨이 끊어져 주지 않는다.
꿈 속에서도 사실적으로 죽음의 느낌은 너무나 생생한데, 아마 숨이 끊기는 순간에 잠자리에서의 실제의 내 목숨이 끊기는 순간일 것이다.
꿈의 난무는 어쩌면 잠자고 있는 상태에서의 어떤 불편함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 전문가가 내 수면중의 외부적인 상태를 관찰하여 그것을 내 꿈과 대응하여 보면 이런 사실은 확연하게 드러나고 어떤 치료의 방법을 설정할수도 있지 않을까.
늦더위 기승.
동우회 모임도 불참하고 돌아와 소주 한병 마신다.
샤갈의 그림을 크레파스로 모사하여 벽에 걸어 놓으려는 계획은 여태 미루는 게으름.
16641 1992. 8. 30 (일)
맹렬한 늦더위.
사무실에 에어컨 바람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이 더위에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다.
토요일 오후, 회의실에서 곽종도와 바둑.
평정된 마음이면 바둑을 이길수 있다.
감성이 지성을 지배할 때.
이것은 스포츠신문에 나오는 바이오리듬 이야기다.
감성이 지성을 지배할 때.
그렇다, 바둑을 둘적에 호승심이 기승을 부려 냉철을 잃는 것도 감성이 지성을 지배하는 것.
평정한 마음- 가라앉은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바둑이 아니더라도 모든 행위에 있어서 절대적인 요건이다.
승리하기 위한.
꿈- WS규,PS곤,JN영,KH근등장.
나는 WS규와 벌거벗은채 거리에 서있다.그리고 중인환시리에 똥을 눈다.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는 것, 똥을 누는 것, 이 이면에는 분명히 정신병리적인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
WASHING COMPULSION, 세척강박?
16642 1992. 8. 31 (월)
또하나의 태풍이 세력을 키우며 북상하고 있다.
그 영향으로 바람이 불어 주어서 다소 낳은 느낌이지만 그래도 늦더위는 대단하다.
일요일 사무실 들렀다가 오후들어 비디오테이프 빌려 돌아오다.
'카리큘라' 미치광이 황제.
그러나 알베르 까뮤의 그것은 아닌 시시한 영화.
차츰 '유리로 만들어 진 세상'에 흠취된다.
융과 배덕의 여인 마그다의 불꽃튀는 대결과 화응이, 과연 오소독스한 융의 정신분석학의 견지에서 어느 정도 타당한지는 모르겠다.
나의 꿈은- 그 조각들을 주어 맞춰서 어떤 얼개를 만들수는 없는지.
나는 예전처럼 지식의 흥미 수준이 아니라, 내 실존의 진지한 문제로서 프로이트와 융을 읽어야겠다.
스스로에 대한 정신분석을 시도해야겠다.
그러나 신앙의 바탕 위에서, 신앙의 전제아래에서.
월요일 새벽, 피빛 아침놀.
기도.
나의 존재주, 죽음을 극복케 하시는 그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