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6. 8

카지모도 2016. 6. 25.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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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3  1996. 8. 1 (목)


휴가 첫날.

땡볕의 거리를 J와 함께 나선다.

부평동 양키시장에서 코오롱 크린스 3통, 일본산 참깨.

국제안경점- 다중초점렌즈는 내 시력의 열악함으로 4십만원을 호가하여, 압축 렌즈의 돋보기를 맞춘다. 이것은 3만 5천원.

어머니 옷을 산다는 J의 꽁무니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짜증을 낸다.

여자쇼핑의 수행이란 피곤한 노릇이다.

세명약국- 기모타부, 정로환,비오티스.

문우당서점- '티벳 사자의 서'

자갈치-땅콩 한됫박, 오징어 한축, 멸치 한박스.

俊이 방의 선풍기.


호정횟집 가시버시 마주 앉다.

회를 곁들인 식사, 나는 물론 소주 한병.

보따리 보따리의 산 것들을 J와 나누어 들고 끙끙대며 돌아오다.

한더위 속 가시버시의 데이트.


英이의 전화는 俊이 받았다.


18074  1996. 8. 2 (금)


英이 떠난지 3일째.

俊이는 오전 집에서 뒹굴다가 오후들어 외출.

J와 함께 비디오 영화.

'파 엔드 어웨이'

탐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 이 영화로 나중 부부가 되었다.

아일랜드, 지주의 딸과 소작농의 아들, 미국, 보스톤 그리고 오클라호마의 신천지...

남자, 신분, 용기, 사랑 그리고 땅. 멜로드라마적인 요소에다 몹씬등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썩 감동적인 영화는 아니다.

'흔들리는 여자'

돈 안들이고 재미있게 만든 심리 공포 영화.


18075  1996. 8. 3 (토)


J와 俊이 올림픽에 열광하다.

나도 때로 환성을 지른다.

체조선수들의 시범경기는 정말 흥미롭다.

예술과 스포츠는 이런 경우 확연한 구분이 있을까.


오후, 베란다 내 좁은 공간에 선풍기 틀어놓고 책상 앞 앉아서 소주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매미소리와 툇마루가 있는 적요속의 분위기는 아닐지라도 내 한낮의 일락은 풍요롭다.


루시앙 골드만 '계몽주의의 철학'

배리되는 두가지의 주제, 계몽주의와 기독교의 장에 흥미가 끌려 읽기 시작하였는데.


아뿔사! 나의 기독교는 지금 어디로 갔는가.

나의 신앙은 이토록 부박한데다 자꾸 기독교에 배리되는 변설에 휩싸이려고 하니 나의 기독교는 장차 어찌 하려는가.

기독교는 잃을지라도 나의 하나님, 나의 예수님, 나의 성서만은 놓지 않으리라.


18076  1996. 8. 4 (일)


휴가 3일째.

집안에서도 더위는 숨이 막힌다.


'론머맨'

사이버의 세계, 가상 현실의 인격이 실제의 인격이 되어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창조된다.

신적인 능력을 가진 사이버 인간.

이와 같은 공상이 어쩌면 현실로 도래하는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英이 돌아오다.

햇빛에 타고 땀에 젖은 그 얼굴은 어떤 요란한 화장을 한 여자의 얼굴에 비길바 없이 아름답다.

지리산 그 넓은 산자락에 안겼다 돌아온 내 딸.


올림픽 여자 핸드볼.

덴마크와의 결승전.

정말 아슬아슬한 경기, 연장전 끝에 패배.


18078  1996. 8. 6 (화)


첫출근.

英이도 첫출근.


올림픽 끝났는데, 마라톤의 이봉주는 아깝게 은메달에 그치고 말았다.


어릴때 지도를 좋아하던 아이 俊이.

세계 곳곳의 모든 수도들과 도시들을 주르르 꿰고 있던 아이인데 지금은 예전의 1/10도 꿰지 못한다.

무언가 제 소질을 파악하여 능력을 북돋아 주지 못한 또 하나의 안타까움.


제법 선선한 아침 저녁.


18079  1996. 8. 7 (수)


만일 에어컨이 없는 한여름의 사무실이었다면 어찌할번 하였을까.

유난스레 더위를 타는 내게는 끔찍한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 작열하는 현장에는 에어컨이라는게 있는가.

두꺼운 작업복의 소매와 발부리를 꽁꽁 여미고 안전장구를 첩첩이 착용한 저 일꾼들의 여름을 생각하면...

나 역시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현장을 누벼야했던  그때의 여름.


J가 형네 전화하니까 哲이가 받는데, 형내외는 교회의 여름 수양회 갔다고.

같은 하나님을 응시하는 가시버시, 신앙의 품질이 얕을지라도 그 가시버시는 충분히 아름답다.

내일이 어머니 생신인데.

그것에 대한 무슨 계획과 의논없는 맏아들의 무성의함은 맏이 아닌 우리라고 하여 다를바 없다.

음식점에서 밥 한그릇 뚝딱 먹고 흩어지는 날로 전락하는 望八의 어머니 생일.


융의 심리학 책 두권 산다.


18080  1996. 8. 8 (목)


일기장 새 노트의 첫장을 펼치는 오늘이 어머니 생신.

1919년생이시니 태어나신 해를 제외한 만 일흔일곱이시다.

태어나신 해에 3.1운동이 있었고,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부터 두해가 지났을 뿐이다.

그 무렵에는 슈바이처도 간디도 레닌도 트로츠키도 프로이트도 융도 샤갈도 스트라빈스키도 에드워드 토마스 로렌스도 맹렬하게들 살고 있었다.

이제 20세기도 저물어가는 1996년, 일흔일곱의 노인은 결코 당신께서 희생하여 주지 않았던 작은 아들과 함께 세기말의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칼 구스타프 융, 그는 나를 확 빨아들인다.

본능, 충동과 억압으로서의 리비도를 말하는 프로이트보다, 그가 피력하는 원형질로서의 신비한 역동적 리비도는 훨씬 나의 기질에 맞는 듯 하다.

나의 기질 따위가 무슨 문제일까마는 나의 기질이 확 쏠리는 그곳에 진리가 있음직한 까닭은 내 심리학적인 자질을 믿는 때문이다.

무언가 내 속 어딘가에 꽁꽁 숨어있을 일종의 집단무의식의 어떤 부분이 그렇다는 긍정의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


곧 여름은 스러질 것이고.

나는 융에게 기대어 무언가 나를 통일하여 파악하고 정돈할수 있는 단서를 찾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18081  1996. 8. 9 (금)


칼 구스타프 융.

그가 설파하는 퍼스낼리티의 구조.

그 이상야릇한 정서나 기분, 내가 일찍이 경험하였던 무엇에서도 근거를 찾을수 없는 그것들은 나에게 유전적으로 내재된 아득한 조상이 경험하였던 기분일 것.

융의 집합무의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나에게 접근한다.

또한 무의식이 퍼스낼리티를 형성하는데 작용하는 그 역동성에 대한여도.


어머니 생신.

유나백화점 앞, 그랜드 뷔페라는 음식점에서 군대간 彦이를 뺀 식구들 모인다.

보험에서 몇푼 돈을 번 J가 음식값을 계산하는데 형수는 볼이 다소 부었다.

어머니를 중심한 관계들에 있어서 어느 틈새에 내재된 갈등구조.. 여자들.. 못남...


18082  1996. 8. 10 (토)


융으로 인하여.

내 정신세계를 파악하고 꿈을 이해하고 내 정신적인 문제점을 도출하여, 내 내면의 조화와 통일을 꾀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설득하는데 있어서 그가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느껴지므로.


확실히 나의 페르소나는 무의식의 어떤 이미지에 비하여 과장되고 혼돈되어져 있다.

젊었을때에 비하여 페르소나의 과잉은 덜 할 것이지만 그래도 이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내면의 진실은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꿈은 얼마나 잔챙이들인가.

그러나 이러한 잔챙이 꿈들의 패턴별 집합 속에는 어쩌면 큰 의미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저 오리무중일 뿐이다.

큰꿈과 개꿈.

개꿈은 아무리 모아도 큰꿈이 될 수는 없다.


종교는?

종교란 정신분석적으로 설명되어질수 있는 그런 대상은 아니다.

종교가 내포하고 있는 숱한 신화와 기적들, 감동적인 에피소드들은 누적된 인류 경험의 한낱 상징화에 지나지 않을수는 없다.

신앙의 감정모체가 무의식으로 대치될 수는 없다.

창조주에 대응하는 태고유형적 하나의 무의식인 피조물의식(?)은 연연하게 피조물의 집합무의식속에 간직되어 온 것이다.


18083  1996. 8. 11 (일)


어제 J 마루에서 넘어져 허리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토요일 퇴근하고 돌아온 오후, 내 방 책상 앞 앉아 책을 읽는다.

조영래 '전태일 평전'

책상위에는 소주 한병.


나보다 한살이 적은 평화시장의 재봉사.

26년전 개발독재에 철저히 희생되는 구조적 소외계층 현장의 현실.

이 참혹한 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근로기준법의 책을 들고 분신하여 죽은 노동자.

안일한 이기의 늪에 잠겨있는 인간들에게 우리도 함께 살자고 고함친 하나의 정신.

불꽃.


나는 그 시절, 사적인 한계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 공동체 의식이란 그야말로 날라리 수준.

나의 그 때 전태일은 얼마나 치열하게 사고하였는가.

그리고 자신의 몸을 불사를만큼 각성하여 행동한 것이다.

이제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전태일을 만나면서 부끄러워해야할 자격이나마 내게 있을까.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와 만능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함과 대포가 티끌이 됩니다.

죽음의 앞에는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오셔요' 한용운-


죽음은 각성된 나.. 당신은 하나의 OBJECT로서의 사상, 신념..


18084  1996. 8. 12 (월)


일요일 오전, 영도 도서관.

내게 가장 실감나는 지방자치제의 좋은 점을 꼽으라면 단연 도서관의 운영이다.

옛 대양고등학교의 5층 건물에 말끔하게 꾸며져 있는 영도도서관.

방마다 에어컨이 돌아가고 그다지 풍성한 장서는 아니지만 쉽게 접근하여 골라 뽑을수 있도록 되었다.

그보다 가장 매력적인 점은 모든게 공짜라는 것.


자료실 들어가 서가 사이를 걸으면.

도열하여 열병식을 하고있는 무수한 책들, 그 책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지식들이 미립자가 되어서 공기 속에 떠다니며 스며드는듯한 기분.


열람실 앉아서 칼 구스타프 융을 읽는다.


돌아오는 길 아카시아의 집에서 맥주, 중리의 바닷가에는 붐비는 해수욕객.


俊이와 함께 보는 '퀴즈대학'

영어문제들을 재꺽재꺽 맞추는 아들 놈.

영어에 있어서 俊이의 실력은 상찬이 아깝지 않다.

그리고 조금만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면 이리도 아비를 기쁘게 하여주는 것을 녀석은 모른다.

융의 분류법에 따르면 俊이는 '내향적 감정형'


18085  1996. 8. 13 (화)


A급 태풍 하나 올라오고 있다는데, 태풍이 지나간 후에야 더위가 가시려나.


전날 영도도서관 서가에서 뽑아 잠시 읽었던 기억술 책.

사무실을 빠져나가 남포동의 책방에서 그예 찾아내고야 만다.

이 책방 저 책방 돌아다니며 빼곡한 서가를 꼼꼼이 훑어 오래전 출판된 그 책을 찾아냈을때의 즐거움.

내게는 집념이랄까 집착이랄까 그런 것이 적은 편은 아니다.

일종의 신경증의 동인.

INFANTILE FIXATION?

혹은 항문성 고착증?


기억법이라는 것.

읽어보니 여태 사용하였던 나의 방법과 큰 차가 있는게 아니다.

나 역시 나름대로는 그 원리와 효능을 일찍이 터득하고 있는 바이지만 이 책에서 제시하는 구체적 방법론은 무척 도움이 될 듯 싶다.

속히 익혀서 俊이에게 전수하여, 제대후 녀석의 학습에 튼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바람과 내 퇴행하는 뇌세포를 대치할 방법론의 확립...


18086  1996. 8. 14 (수)


SB-422 공시운전.

무사히 마치고 저녁 7시 30분경 귀환.

960HPa 의 대형태풍 '커크' 북상중.

Sh씨 방에 불려 들어가 그 책상 앞에 굳은 자세로 선채 그가 NHK 방송으로 수신하여 작성한 기상도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

방송을 들으면서 기상도를 그려낸 솜씨는 상당하다.


英이 이번 주에는 줄곧 나보다 먼저 집에 돌아와 있다.

우리 집에서 거의 유일하게 우스개소리를 재치있게 구사하는 英이의 명랑함.


J에게 50가지의 단어를 순서대로 적게하여 두 번을 내게 읽어 들려주게 한후, 그것을 순서대로 모두 암기하는 능력을 보여주다.

그 원리와 방법을 설명해 주니까 어느 정도 납득을 하고서는 俊이에게 일러준다.

俊이에게 정말 필요한 기억법이다.


태풍의 전초병.

휘저어 뛰어다니는 바람.


18087  1996. 8. 15 (목)


태풍은 일본열도로 꺾어 한반도는 조금의 영향도 끼치지 않고 지나갔다.

긴장하던 회사는 안심하고 법석을 떨던 사람들은 머쓱해지기도 한다.

태풍이라도 무더위를 쓸고갔으면 좋았으련만.

무더위는 좀채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18088  1996. 8. 16 (금)


절절 끓는 광복절의 휴일.

모처럼 英이는 집에서 개긴다.

제 신상 얘기를 시도하려고 애쓰는 아비에게 英이는 좀처럼 제 마음을 열어주지 않고, 그냥 성격좋은 딸네미의 포즈만 잡는다.

예민하고 섬세하지 못함은 제 어미를 닮았지만 둥글둥글한 사교성과 낙천성은 누그를 닮은 것일까.


광복절의 TV.

영친왕, 일본에 인질로 잡혀서 그곳 문화속에 성장하고 그곳 여인과 혼인하여 일본인으로서 살다가 광복을 맞은 왕자.

그런 역사적 사실보다 한가닥 감상은 그는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 고상하고 위엄있는 덕성의 유전... 영친왕, 방자여사에게는 그런 것이 은연중 풍긴다.

고상한 피의 유전, 이것도 무슨 집단무의식으로 설명될수 있을까.


일본 극우세력의 발호에 관한 다큐멘타리들.

극우의 부활이라는 우려의 시각은 그렇다치고, 나는 일본사회에 부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어떠한 다양성이라도 포용할수 있도록 그 사회의 사고가 열렸다는 점이다.

어떠한 유별난 개성이라도 획일적 잣대에 의하여 말살되지 않는 사회.


18089  1996. 8. 17 (토)


족장에서 HOLD바닥으로 추락하여 입원하고 있던 운반반 족장공, 백병원에서 숨을 거두다.

입사한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서른 몇의 나이.

생과 사가 이토록 무상하다.


연세대 한총련 대학생들의 과격시위.

이제 그 아이들은 박수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제는 예같지 않다.

명목도 부실하지만 사회적 패러다임도 변하고 있다.

명목이 훌륭하더라도 순수열정의 획일화란 또 하나의 도그마화한 독선이다.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제 사적인 지극히 사적인 그런 것...


오늘 J의 생일.

가만히 생각하라.

가시버시 오십넘어 서로에 상처가 되는 관계라면, 그건 말할수 없이 어리석기도 하려니와 얼마나 잔인한 노릇인가.

더 이상 서로의, 우리의 목숨을 모독하는 일이 없기를 새벽, 아직도 나의 안에 계시는 그 분께 기도드린다.


18090  1996. 8. 18 (일)


날씨는 여전히 절절 끓는다.

P상무는 요즘 건설공사에 푹 빠져있다.

건설부직원들을 들들 볶아댄다.


J의 생일,

네식구 태종대 입구의 태종가든 일실에 둘러 앉다.

갈비와 등심과 냉면, 나는 한병의 소주.

그리고 잘 꾸며놓은 그 집 정원에 앉아서 여름 저녁의 정취를 즐긴다.

자유랜드- 이런저런 오락기구앞을 기웃거리고.

얼마만의 가족 외출인지.

모쪼록 우리 서로 다정하고 건강하라 마누라여.


일요일 이른 아침, 英이는 제 회사의 주말행사, 스쿼시하러 나가고.


18091  1996. 8. 19 (월)


일요일의 하루.

TV바라기.

'퀴즈대학'. 나는 70%이상은 맞출수가 있다.

출연하고 싶은 욕심.


뮤지컬 '명성황후'

윤치호가 대원군, 윤석화가 민비, 홍경인이 고종역.

이문열이 극본을 썼다고 화제가 많은 작품인데, 무대가 아닌 TV 화면으로 보아서 그런지 별로이다.

하나씩의 시퀜스로 단절된듯한 무대도 매끄럽지 못하고

우리나라 뮤지컬에는 무언가 커다란 것 하나가 빠져있는듯한데 그 커다란게 무엇..


다큐멘타리 '오사카 스토리'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아버지에게는 한국에 또다른 처자가 있고, 남동생은 통일교도로서 한국여인과 통일교식 집단결혼, 자신은 영국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동성연애자.

여하튼 일본이기에 가능한 이야기.


18092  1996. 8. 20 (화)


연세대 천여명 농성중.

경찰은 첩첩히 에워싼채 봉쇄.

이번 한총련 지도부는 아무래도 정치감각이 둔한듯하다.

여론을 등에 업은 정부로서는 자신만만한 강경일변도.


며칠전 숨진 기능직사원.

회사는 본관의 각 출입문을 잠그고 청원경찰을 동원하여 삼엄하게 늘어 세워 놓았다.

정해진 도식.


문명인은 행복한가.

산업사회의 시민은 행복한가.

단연코 아니다. 아니다.

내게서 문명과 산업을 모두 거두어 내더라도, 나는 단연코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나.

도피할 곳이 어디란 말이냐.

이 세상 어디로 원시를 꿈꾸며 도피할수 있단 말이냐.


'슬픈열대'.

레비 스트로스여.


18093  1996. 8. 21 (수)


사망자의 유족들이 장지에 가는 길에 현장에 노제를 지내러 온다는 정보 때문에 회사는 모든 출입구를 봉쇄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10시쯤 장의차가 들이 닥치더니 이내 시신이 안치된 관이 현장 철문 앞에 내려지고, 유족들은 도로를 점거한다.

경찰이 출동하여 도로점거를 풀려고 몇 번 시도하였으나 어림없다.

회사앞 도로를 완전히 차단한채 담벽에다 스프레이로 욕지기를 써대는 그들.

결국 오후 2시 30분경 농성은 풀렸지만 그동안 본관에 있는 사람들은 꼼짝없이 3시까지 사무실에 갇혀있었다.

덕에 늦은 점심.


연세대에는 예상보다 많은 3천여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잽싼 놈들은 뒷산으로 도망가고 대부분은 줄줄이 연행되어, 궤멸되었다.

완전히 전장의 폐허가 된 연세대 농성장.

이 신세대에 있어서 이념이란 과연 공통적으로 대단한 것이었을까.

그보다는 얼키고 설킨 친구관계, 동창관계, 선후배관계, 동아리관계등에 목이 매인 사적인 동기가 대부분일 것이다.


꿈- 늙은 목사, 아버지, 어머니, 재희, 형과 회사.

이 꿈은 다소 큰 꿈일까?


18094  1996. 8. 22 (목)


비 흩뿌리는 속에  SB-423, 2공장 선대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P상무는 건설부일에 폭 빠져있는데, 집중력과 추진력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일의 진행에는 큰 힘이 되지만 그게 지나처서 때로 불거져 나오는 오류는 심각하다.

H이사는 나름대로 애를 쓰지만 그를 보필하여 도와주는 손길들은 인색하다.


숫자의 기억술.

책에 있는 방법은 한글자모에 대입하는 방법인데 나는 좀 다른 방법을 구상해 낸다.

숫자의 발음과 유사한 사물의 이름을 상정하여 외우면 훨씬 더 직관적으로

기억을 끄집어내는 순발력은 내 방법이 훨씬 우수하다.


모처럼 비는 내렸건만 더위는 말끔히 걷히지 않는다.


18095  1996. 8. 23 (금)


때는 이때다하고 정부는 여론을 등에 업고 밀어붙이기.

운동권의 대량구속과 자금원을 차단하여 그 토대를 허물려고 설처댄다.

어쩌면 이런 지나친 억압과 간섭이 대학이라는 열정과 순수의 싹마저도 압살하지나 않을지.

그저 옛날 유신시대처럼 즉물적, 현실적 감각적인 대학생을 지향하게 하는것이나 아닌지 한줄 우려.


18096  1996. 8. 24 (토)


기가 막힌 일.

俊이 또 학사경고이다.


하나하나 자식에 대한 실망은 쌓여가고 이윽고는 포기에 이르려는가.

그렇다고 자식놈의 장래까지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 포기는 실낱같은 스스로의 기대를 포기할뿐.


어서 군대에 들어가 어떤 변화를 기대하여 보는 간절함.

제가 알아서 하겠다는 입영문제는 도무지 소식도 없고.


18097  1996. 8. 25 (일)


갑자기 선선한 날씨.

잔서는 그러나 9월까지 계속될 것.


곰곰 생각할수록 한심한 아들놈.

타인이나 사회를 향한, 자아와 대립하는 어떤 대상에 어프로치할 때 그 마음의 자세라는 것.

이해이든 사랑이든 배려이든 혹은 적의이든 경쟁이든 그 방법론을 구사하는 마음의 문제.

두려워 할 필요는 없으나 일단은 진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진지하게 접근하여야만 대상은 문을 열어준다.

이 자세의 어설픔이 나 역시 서툰 인간이지만.. 아, 내 아들 녀석은 너무나 심하다.


소주를 마신다.

그리고 영화비디오를 본다

장선우 감독 '꽃잎'

여자주인공의 신들린 연기, 영상과 음악.

그런데 형편없는 녹음이 영화를 망쳤다.

그리고 한 소녀의 영혼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그 동인은 굳이 광주가 아니라도 좋았다.


俊이 녀석의 얼굴을 대하면 무슨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이 스스로 겁나 애써 대면을 피하는 아비짜리.


18098  1996. 8. 26 (월)


휴일 한낮.

바람은 불지만 그래도 볕살은 따갑다.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영도도서관, 열람실에 3시간여 앉아서 회계원리 공부.

총론과 회계원리.

결합연상법이라는 기억술을 활용하여 전체의 구성을 파악하고 기억한다.

숲을 조망하고, 점점 닥아가서 나무의 무리, 더욱 닥아가서 한그루 한그루의 나무를 각개 격파하는 방식.


휴일, 그나마 도서관이라도 가지 않았더라면 나의 일요일은 몹시 우울하였을 것이다.

J는 형네 갔던 모양인데, 보험 권유룰 쌀쌀하게 거절한 큰동서에 대하여 섭섭함 가득.

이 또한 우울한 얘기다.


俊이와는 며칠째 얼굴을 마주치지 않는다.

무언가 혁명이 필요하다.

군대가 그것을 만들어 줄수 있을지.

정신의 개조, 가치관의 정립, 사내다움.


18099  1996. 8. 27 (화)


하나밖에 없는 아들녀석.

서글픈 생각에 잠겨 우울한 하루.

시험을 아예 치르지 않은 모양이다.

제 방문 앞에 붙여 놓은 메시지라는 것.

9월 입대설이 아비에게서 나오니까 부랴부랴 끄적여 놓은 책임회피와 자기합리화의 잠꼬대.


그런데 나는 어쩌면 아들놈을 너무나 폄훼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자기징벌적 무의식의 투사가 그대로 아버지라는 대상에 쏟아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용서의 포즈로 엉덩이를 다독거리는 그런 행위는 俊이에게 한가닥 남아있을 좆달린 놈으로서의 오기마저 그 싹을 밟아버리는 것이다.

어딘가 숨어있을 불씨, 그 오기에다 확 석유를 뿌려주어야 한다.


오늘 공실장을 통하여 병무청과 접촉해야겠다.

俊이 10월 입대, 논산은 가능한지.


18100  1996. 8. 28 (수)


俊이 입영문제.

공실장, 병무청 모병관과 통화.

俊이의 정상적 입영일자는 12월 경.

10월 입영을 위하여 9월 10일 공실장과 다시 접촉키로.


俊이의 대학생활, 그 참담함에 대하여 너무 조급해지지 말자.

그리고 아직 어린애인 아이를 너무 나무라지 않도록 마음을 가라않히자.

근본 두뇌가 그렇다면 그것은 내 유전 탓.

성격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 역시 제 부모의 유전.

가정교육이 문제이고, 이 또한 성장교육의 관건을 쥐고있는 아비짜리의 탓이 아닐수 없다.

군대에 갔다오면 아 새끼, 확 바뀌어질런지 뉘 아랴.

심기일전, 제 앞의 세계를 확연히 인식하고, 진지함을 체득할수 있는 계기가 군대라는 통제되고 억압된 환경 속에서 엄격한 자기관리의 습성으로 얻을수도 있을 것이다.

한학기나 아니면 한학년을 몽땅 다시 시작할수도 있고, 정 안되면 전과나 편입의 방법도 있는 것이니까 우선은 녀석의 입대문제만 생각키로 하자.


융- 그를 읽으면 읽을수록 나타나는 갈등.

신앙이라는 것은 융에 이르면 무의식이라는 것으로 대치된다.

신화 원형이라는 용어로 모독 당하는 신앙.

그러나 그를 읽지 아니할수도 없다.

이원론으로 의식하자.

융은 그저 융일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깊은 위로를 주시는 분.

이토록 나약하고 고독한 마음 상황에서 융이 과연 무슨 위로를 내게 줄수 있단 말인가.

오직 그리스도만이 어루만져 주실뿐.


18101  1996. 8. 29 (목)


SB-426 천경해운의 컨테이너선 공시운전.

전화를 거는 내 쪽의 날씨는 마냥 궂기만 한데 외항 멀리 나가있는 그 쪽의 날씨는 마냥 화창하다고.

한반도는 좁은 땅덩이가 아니다.

'로빈손 크루스'의 섬은 좁을 것 같지만 그 자유의 표상이 내걸린 공간은 한 인간이 생존하는데 협소할바 하나도 없다.


俊이에 대하여 곰곰 생각한다.

아비에 대한 강박이나 어떤 원망, 이런게 분명히 있다.

정신분석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다는 내가 명색 자식놈의 정신상황을 몰라서야...


아비가 기대하고 강요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 어떤 요소가 녀석에게는 강박이 되어 아비를 미워하는 감정이 있다.

나는 이를 곰곰 궁구해야 한다.

나의 무엇이 공격적이 되어서 녀석을 강박하고 녀석은 그에 대한 방어기제로서 도피와 고립화와 미움을 키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8102  1996. 8. 30 (금)


俊이를 생각하고..

아프고 화나고 때로 가엾고...

아비짜리가 되어 자식놈 하나 확 이끌어 나갈 확연한 주관 하나 세우지 못하니... 이 답답함.


18103  1996. 8. 31 (토)


俊이가 경영정보학과에 마음을 못 붙이는 것.

컴퓨터 언어, 통계학, 회계학등 수학적인 면이 어려워서 그럴까.

이 기본적인 수학개념이 그래도 머리가 나쁜편이 아닌 俊이에게 그토록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않는다.

생각컨대 녀석의 성격 탓이다.

초반의 느낌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언제나 녀석은 대상의 핵심을 향해 풍덩 빠지는게 아니라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망서린다.

그러다가 그만 기회를 잃고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점점 쌓여 드디어는 아예 방기해버리는 경지에 까지 이른다.

그 과정에서 俊이의 심리적 갈등구조는 대단할 것.

그래서 녀석은 아마 편입같은걸 생각하는 모양인데.


俊아, 무슨 전공을 선택하던지 마찬가지란다.

원인은 네 적성이나 두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너의 성격 탓이다.

아비가 도와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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