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4 1996. 9. 1 (일)
俊이와 전화로 몇마디 대화를 나누고, 토요일 오후 퇴근하여 잠시 대면도 하였다.
경성대 부근 P/C 방에서 알바이트 하는 모양.
오후 3시부터 9시까지, 하루 2만원 받는다고.
칩거하여 우울해 있는 꼴보다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학교의 전공이나 성적 문제는 아무리 지금 궁구해 보고 계획해 보아야 소용없는 일이다.
군대생활 2년, 군대를 생각하자.
청춘의 2년이란 얼마나 황금같은 시간들이냐.
더구나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특수조직 속에, 자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복종이 지배하는 사회, 조직적으로 관리당하고 그것에 대응하는 자기관리를 터득해야만 생존할수 있는 사회.
그 사회 속에서의 무사하고 보람있는 2년의 세월만을 생각하자.
또한 나 역시 俊이를 향한 오도된 선입관과 방법의 오류가 있다면 이를 숙고하여 바로잡을 시간으로서의 2년도 짧지 아니하다.
그 2년동안 이 사회는 또 얼마나 변해 있을지도 예측할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저 지금은 2개월여후 입대할 아들놈의 건강한 관리와 애정에만 신경을 쏟자.
'자, 될 수있는대로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가슴은 약간 뒤로 젖힌 듯 하여 눈을 감고 감은 눈은 저 아래 會陰을 바라보시오. 회음이란 고환과 항문 사이에 있는 결혈을 가리키는 한의학 용어인데 선도에서는 우리 몸의 중심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믿지요.'
-송기원 '인도로 간 예수'-
18015 1996. 9. 2 (월)
일요일 새벽.
늘 나 홀로 맞이하는 새벽.
꿈지럭거리며 신변잡사를 처리한다.
아침밥을 챙겨먹고 영도도서관으로.
오후2시 까지 열람실 박혀 회계원리를 공부하고 민법책도 좀 들여다 본다.
이제 믿을 수 없는 기억력을 대신할 기억술을 활용하는 것.
기초결합 연상법, 이것은 많은 기초의 사물을 설정해 두어야 한다.
내게 익숙한 사물들의 영상이나 개념을 상정하여 거기에다 기억코자 하는 내용을 붙들어매는 것이다.
회계원리는 부산 피난때 윤소앗과를 시작으로 내수동, 외갓집, 정능, 자하문밖, 보생의원, 훈련소, 군의학교, 종교대, 3육군병원, 청학동,태림아파트까지의 이미지들을.
원가회계는 선박의 구획으로, 민법은 할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가족 친척들의 서열 순서대로.
'감은 눈으로 會陰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감각은 물론이거니와 마음이나 생각마저도 자신의 가장 아래로 내려보내는 수행법이오... 그렇게 눈을 자신의 가장 아래에 준채 의식도 전혀 거기서 떠나지 않게 하는게 이 수행의 요령인데,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려운 수행법의 하나요.'
-송기원 '인도로 간 예수'-
18106 1996. 9. 3 (화)
俊이와는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는다.
녀석이 깨어 일어나기 전에 나는 출근하고, 내가 퇴근하여 잡든후에야 녀석은 돌아오기도 하여서지만 저나 나나 의도적으로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俊이의 아비를 행한 감정모체의 진실은 아마도 부끄러움과 원망과 미움...
내가 회계원리를 공부하는 까닭을 녀석은 짐작할수 있을까.
회계학이라는 학문이 그다지 난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식놈에게 증명코자하는.
늙은 아비도 하는데 젊은 너도 할수있다는 시기심 유발과 독려의...
또는 내가 직접 가르처주고 싶다는...
동기부여와 창의성 불모의 땅인 직장, 요즘 들어 더욱 자심하게 그것들이 괴롭이는 그런 곳에서, 俊이는 제발 그런 식의 밥벌이에 모가지가 매이지 않기위한... 그 소망을 녀석은 알수있을까.
'단전호흡이라면 혹시 복식 호흡같은 것인가요?'
'얼핏 생각하면 비슷하겠지만 사실은 저혀 다르오. 복식호흡은 그야말로 배로 하는 호흡이고 거기서 끝나지만 단전호흡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자기자신을 발견하는 수행으로 들어가는거요. 그래서 예로부터 흔히들 단전호흡을 성명쌍수라고 하지요"
-송기원 '인도로 간 예수'-
꿈- 책상 설합 속의 징그러운 짐승, 자기보다 커다란 잠승을 잡아 그 살을 파먹는다.
서울고모댁, 목욕탕, 중인환시리 똥누기.
이른바.. 본능과 육체의 컨디션과 죄의식이 혼합된 꿈의 파노라마.
18107 1996. 9. 4 (수)
부서장회의중 Sh씨 들어와 오만한 자세로 앉아서 일방적이고 형이하학적 언사를 긴시간 농한다.
회사가 비슷한 규모의 조선소로부터 자꾸만 뒤처지는 까닭은 과연 누구의 직무유기 탓이란 말인가.
업무량이 없다 없다라는 한탄으로 지엽적인 내핍만을 부르짖고 앉았으면 장땡이란 말인가.
어떻거든 가동률을 높인다는 방향설정은 없고.
이제 Sh씨로부터 소외된 P상무, 그도 그 나름대로 딴 춤을 추고있으니 나의 곤한 처지는 사뭇 가중된다.
俊이 통화를 하고나서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내려놓은채 외출.
하루 종일 통화중 신호..
찬찬하지 못하고 매우 충동적인 俊이의 이런 면.
일종의 충동조절장애?
俊이의 성격을 위하여 기도하자, J 여.
18108 1996. 9. 5 (목)
10월 17일 논산 제2훈련소 입소 확정.
드디어 내 아들도 군대에 가는 것이다.
일종의 리버럴리스트 흉내의 폼을 잡고 군대의 한시절을 썩는다는 표현으로 비아냥거리는 것 같아도 나는 군대의 가치를 폄하지 않으련다.
아비짜리가 가르쳐주지 못하는 집단의 교육기관으로서, 더불어 부대끼고 경쟁하며 협력하며 생활하여야 하는 그곳이 아들놈에게 가치가 없을리 없다.
그리고 사나이로서 국방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한다는 수행하였다는 자긍심과 자부심도 ...
10월 17일이라면 29년전 바로 내가 입영한 날이다.
바로 그 날 俊이도 입영하는것, 참 감개가 깊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수 없다.
논산은 예전에는 보병 훈련소인데 이제는 특과병 훈련소이고 훈련소로서 근 50년의 노하우가 있으니 최상일 것이다.
퇴근하며 자식놈 군대 보내는 아비짜리는 착잡한 흥에 겨워 술을 마신다.
18109 1996. 9. 6 (금)
요즘 확실히 회사업무에 소홀하다.
회사에 대한 의욕상실과 俊이의 문제를 비롯한 여러 사안에 신경을 빼앗긴 탓이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된다.
좋으나 싫으나 녹을 타 먹고있는 곳인데.
여러 건의 밀린 사안들이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彦이 어느새 훈련을 마치고 어제 J 에게 전화하였는데 씩씩한 목소리로 통일전망대 부근의 부대에 배치받았다고.
박두성씨 아이도 나약하고 내성적이던 아이가 군대에 가더니 아주 딴판의 어른이 되어 제대를 앞두고 있다고.
SJ엽 의 아이는 벌써 제대하여 복학하기전 현장 노동판에서 일을 하고 있고...
'性命雙修란 간단하게 설명하면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다는 말이오. 즈러나 이 간단한 말은 그 깊이를 헤아릴수 없을 정도요. 여기서 性이란 자기자신 안에 있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자 생명의 근원인 어떤 자유를 가리키는 말로서 바로 수행의 요체가 되지요. 또 命이란 글자 그대로 생명을 뜻하는데 성이 정신의 수행이라면 이 명은 육체의 수행으로 바로 호흡법을 일컫지요.
만일 이 성과 명 둘중에 어느 하나만 치우쳐 닦는다면 그건 단전호흡이라 할수 없는거요. 이 둘이 하나로 어우러져야 비로소 자기자신의 기가 열려 우주의 기를 받아들일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인도로 간 예수-
18110 1996. 9. 7 (토)
KPE 또 오작.
SB-425의 UPPER DECK의 고장력 강판에 그만 오작을 냈다.
LANSKI와 DATA 디스켓과의 불일치, 계약금액에서 200만원 공제하기로 하였지만 만일 고장력강판의 여유분이 없었다면 200만원쯤의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공정 문제가 터질뻔 한 것이다.
한달 열흘 후면 俊이는 입대한다.
11월 말경이면 훈련소 수료.
내년 이맘때쯤이면 쫄병은 면하겠고, 또 1년만 있으면 제대다.
거기까지만 생각하는 것이 요즘 나의 세월 감각이다.
나도 J도 나이들어 오십을 넘기고, 시집갈 英이의 나이같은 것은 뒷전.
俊이의 제 인생의 성공적 살기가 관건인 이 까닭은 녀석이 하도 염려스럽기 때문만 일까.
'아니 단전이라기 보다는 단전으로 호흡을 하면서 바로 그 호흡을 바라보는 거요. 그렇게 호흡을 바라보면서 머리나 마음에 상념이 떠오르면 그 상념들을 모두 단전으로 끌어내리고 이번에는 호흡과 상념을 동시에 바라 보지요. 이 때 자칫 상녑들을 단전 자리에 내리지 못하거나 그만 상념에 빠져들면 전혀 호흡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물론 생각만이 아니고 실제로 호흡이 안되는거요. 만일 상념들과 호흡이 단전에서 잘 어울어지려면 그야말로 무아지경에 빠지게 되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머리나 마음이 비워지고 단전과 그 단전에 드나드는 호흡만이 남는데, 그걸 바로 단전호흡이라고 일컫는거요.'
-인도로 간 예수-
18111 1996. 9. 8 (일)
우리나라 경제가 심각한 모양이다.
우리 회사는 경영무능으로 그렇다치더라도, 조선업계는 그중 심각한 양상인데 감량경영을 표방하고 대규모감원등의 제목들이 경제신문의 지면을 어지럽힌다.
토요일.
소주마시며 비디오 '아폴로 13'
톰 행크스주연.
S.F가 아닌 잘 만든 우주영화.
영화를 보면서 내용과는 상관없이 문득 떠오르는 단상 하나.
옛날 암실을 운용하여 사진에 매진할 적에,피사체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테크닉으로 '노출심도'라는 것.
FOCUS를 얕게 설정했을때, 초점을 맞춘 지점의 사물들 외에는 모두 흐릿한 실루엣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정작 초점을 맞춘 선명한 주제는 버리고 그 흐릿한 실루엣의 영상만을 취하는 것.
이런 경우가 비유적으로 현실의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물론 이런 단전호흡은 호흡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소. 단전호흡ㄹ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단전행공이라는 갖가지 자세도 아울러 익혀야 하지요. 이 단전행공의 자세는 삼백육십여 동작이 있는데 이것들만 익히는데도 몇 년은 족히 걸려요. 이 자세는 하나하나가 참아내기 힘든 일종의 고행자세이지만 이 자세[만 익히면 결국 고통의 감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자신의 어떤 조건을 넘어서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요. 그렇게 단전호흡을 단련시켜 가다보면 어느새 자기자신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 생겨나 있기 마련이오'
-서울로 간 예수-
18112 1996. 9. 9 (월)
일요일.
俊이는 알바이트, 英이는 원주언니의 결혼식.
'아폴로 13'
실화에 바탕을 둔듯한 달착륙에 실패한 우주선의 귀환을 그린 영화.
미국적인 DETAIL로 미국적인 물량을 동원하여 미국적인 감동을 만들어 내었다.
악역은 등장치 않고 미국적 가치관의 인간만만세를 외치는 NASA이야기.
'부로드웨이를 쏴라'
그 유명한 우디 알렌의 영화를 처음 보는 것이다.
뉴욕의 영화 특히 우디 알렌의 영화는 헐리웃 영화와는 사뭇 다르다는데 내게는 그저 재미있는 영화로만 느껴진다.
꿈- 거대한 고층의 종합병원, 고소공포증. 중인환시리 배면, 똥덩이들...
18113 1996. 9. 10 (화)
俊이 이제 한달하고도 일주일이 남았다.
군대생활, 남자의 삶, 얼마나 녀석에게 조근조근 들려줄 얘기가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녀석은 아비와 단 1분의 대면도 허락지 않는다.
비는 그치고.
어머니 뵌지도 오래되었구나.
이다지도 옹색한 마음의 공간이, 메마른 관계를 만든다.
18114 1996. 9. 11 (수)
허리의 아픔, 어인 통증일까.
뼈는 이상없고 근육통도 아닌 것 같은데.
힘줄이 늘어나서일까.
요통은 병원에 가봐야 별무소용이라는데.
원인이나 알았으면 좋겠다.
어디 한약재나 다려 먹으면 효과가 있을란가.
동의보감류의 책을 읽고 그것을 참고하여 어디 구포장이라도 가서 약재라도 지어 올꺼나.
J의 몰취미.
대나무로 만든 침대처럼 커다란 의자를 어디서 얻어와 거실에 들여 놓았는데, 이건 어디 터키탕 구석에나 놓여질 물건이다.
그리고 벽에 걸려있는 편액 하나.
욕심없이 청산에 살고지고 하는 한글서예작품인데 내 보기에는 도무지 청산에 어쩌구할 그런 청아한 글씨가 아니다.
세속적 기름기가 잔득 배어있는 글씨.
그런 몰취미를 지적할라치면 경련성 신경질이 폭발하고마니 그저 눈감고 귀막고 살수밖에.
18116 1996. 9. 13 (금)
그저께는 어머니께 갔다가 맥주를 마시고 돌아와 혼곤한 잠.
허리 통증 여전.
彦이는 건강하게 군대생활.
媛이와 통화.
H이사에게 기능직 사원 누군가가 나름대로의 현장의 관리개선에 관하여 충정을 담은 편지를 보낸 모양이다.
생산부의 관리직 사원들을 모아놓고 공개한 그 내용은 옳을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혁신, 혁신이 절실함을 누군들 모르랴.
그 방법론과 경영의 비젼을 제시할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경영자.
지엽적인 것을 한사코 물고 늘어지는 자세가 아니라 전체를 조망하고 전체를 향하여 불을 붙이는 자세.
H이사 충정은 있으되 능력이 없다.
과장컨데 나, 능력은 있으되 정열이 없다.
18117 1996. 9. 14 (토)
융의 정신분석의 책들.
그 책들로는 만족할수 없는 무엇이 있다.
융 사상의 맥락은 코끼리 코를 만지고 다리를 만지고 몸통을 만지고해서 파악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몇가지 개념으로서 융을 인식한다는 것은 도대체가 불가능하다.
그의 인간성, 낙천성.
희미하게 그 냄새는 맡아질수 있으나 이해는 할수 없다.
인간의 인간성이라는 물건에 대하여 신뢰할수없다는 이 느낌은 이런 정신분석의 책들을 읽고나서 생긴 것이 아니고 나의 근본 EMOTIONAL MATRIX가 그런 것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아아, 아득한 나의 유년을 회억컨데, 나는 얼마나 절대적으로 열렬하게 나의 관계들을 신뢰하였던가.
그 신뢰와 헌신적 감정 상태는 오이디푸스 어쩌구하는 것과 구강 항문 어쩌구하는 이론과는 어떤 연관도 있지 아니했다.
생래적인 나의 기질 자체가 그러하였음을 나는 확신한다.
그 신뢰에의 집착, 유아적 집착이 일관되게 나의 소년기, 청년기를 관통하여 흐른 나의 주제였음을.
그리하여 그 관계에 대한 것들이 기쁨이나 고통이나 좌절이나 소외의 씨앗이었다.
그 씨앗들이 이제 장년에 들어서서야 갈등구조가 되어 내 자아를 들들 볶아대다가 이윽고 도달한 영역은 인간성의 관계, 인간 자체는 참으로 신뢰할수 없다는 진실에 직면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라보는 저 높은 곳,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가.
아아, 육체는 슬프다.
슬픈 육체에 담겨있는 정신 또한 슬프다.
18118 1996. 9. 15 (일)
지그시 압박하는 허리의 아픔,
그 통증을 가만히 음미해보니 어째 뱃속의 상태와 연계된듯한 느낌도 있다.
俊이 요즘 얼굴 보기 힘들지만 제 딴에는 여러 가지 생각에 힘든 모양이다.
입영을 앞둔 젊은이의 착잡함이 왜 없겠는가.
더구나 무딘 감각을 가진 아이가 아닌 예민한 쪽의 아들놈이.
젊을때는 가급적 단순한 것이 좋다. 俊아.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부딪치는 것이다.
그것이 편리하다.
그러나 이게 어디 마음 먹은대로 되는 물건인가.
18119 1996. 9. 16 (월)
일요일 아침.
동삼동 아랫길의 미니공원으로 어슬렁 어슬렁 걷는다.
사들고 간 몇 개의 캔맥주를 마시며 조감으로 광활하게 펼처진 매립지를 조망한다.
북편 땅에는 BARGE등 각종 철구조물을 제작하고 있고.
아이들 어린 시절 함께 새벽 달음박질하였던 바닷가 길로 접어든다.
곳곳에 전을 벌인 작업장들. 쓰레기들.
어떤 개척지의 분위기 물씬.
한쪽편에서는 흥미로운 판이 벌어지고 있다.
철봉으로 직경 5M정도의 울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투견을 집어 넣는 개싸움.
주위에 몰려 있는 견주들, 돈을 거는 사람들.
한참을 끼어서서 구경하다.
참 다양한 세상, 내 가까운 곳에도 이토록 다양함이 널려있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벤과 세라.
니콜라스 케이지와 일리자베스 슈.
죽기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나이와 창녀.
가슴을 치는 주제이다.
상대에게 어떤 요구도, 개선을 꿈꾸지도, 변화를 바라지도 않고 어떤 영향도 행사하려하지 않는 그런 사랑.
상대의 절망을 절망 그대로 사랑할수 있는 사랑.
俊이 간밤 돌아오지 않다.
18121 1996. 9. 18 (수)
俊이 동사무소가서 영장 받아오다.
'현역병 입영 통지서'가 공식 명칭.
입영장소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제2훈련소 입소대대'
입영일시 '1996년 10월 17일 13시'
지참물 '입영통지서, 주민등록증, 병역증 (도장은 불요)
복장 '머리는 3Cm미만의 스포츠형, 간소복 착용'
俊이에게 특별히 아비가 교육시켜야 할 사항.
본적 외우기 '대교동 4가 183번지' '간단한 바느질법' '안경마련(J는 누구에게 들었는지 NBA농구선수들이 끼었던 그런 안경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토익성적표 지참'
훈련받기에는 최상의 계절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는.
이제 俊이도 꼭 29년전 아비가 맡았던 가을 들판의 냄새를, 나도 한몫의 사나이라는 뿌듯한 자긍심으로 들여마실 것이다.
오후 사무실에서 잠시 몸을 빼, 신선동 '제원한의원' 간다.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젊은 한의사, 그 2층짜리 한의원은 병원보다도 더 성황이다.
돈을 끌어 모으는 소리가 들린다.
이래서 요즘 한의학과가 인기인가 보다.
한의사의 손이 옆구리를 누르자 극심한 통증.
척추의 이상은 전혀 없고 신장, 즉 콩팥이 좋지 않아 나타나는 요통이라는 진단.
뱃속 장기와 무슨 연관이 있을거라 생각하였는데 과연 그럴싸한 진단이다.
물리치료, 부황, 침, 뜸으로 며칠 치료를 받으라는데 신장이라면 이런 물리적인 다스림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약을 한 채 지어 달란다.
자그만치 12만원.
술을 절제해야하는 느낌인데 한의사는 술에 대한 언급이 없다.
내 의지 또한 예사롭고.
18122 1996. 9. 19 (목)
동해안 간첩 침투, 잠수정을 타고 10여명 상륙하였는데 전군은 '진돗개하나'의 비상에 걸렸다.
요즘은 긴장이 고조되거나 할 상황은 아닌듯한데 웬일인지 모르겠다.
모르지, 이럴때 의표를 찌르는 무엇이 있는지.
김정일의 권력승계문제,식량난,권력의 역학구조....
이제 꼭 28일후 입영하는 아들놈을 둔 아비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JM교 의 자형은 육군본부 신병배속관계의 고위 군속이다.
2공장 들러 LW규 씨와 이런저런 군대 얘기를 나누는데 JM교 가 진작 자기한테 얘기하지 하는 말 한마디에 지옥에서 부처님 만난듯하다.
군대 쪽에 아무런 비빌 언덕 하나 없는 판에 얼마나 반가운지.
한약 한재.
단서인즉슨 돼지고기니 닭고기니 맵고 짜고 어쩌고하는 음식들 모두 먹어도 좋은데 다만 술만은 안된다.
나는 자꾸만 거꾸로 듣고싶은 마음.
18123 1996. 9. 20 (금)
공비 11명, 포위가 임박하자 서로 총을 쏘아 널부러져있다.
7명은 교전중 사살, 1명은 생포, 5명인가는 아직 오리무중.
어쩐 일일까. 잠수함을 태워 많은 병력을 침투시켜 어쩌자는 건지.
허술한 그들의 행적은 무얼 뜻하는지.
남북간의 긴장이 말끔이 가신 상태에서 俊이의 군대생활이 영위되어야 할텐데.
한약 먹기 시작.
기분학상인지 허리는 다소 나아진 것 같다.
인디언 섬머라던가, 한낮의 더위.
18125 1996. 9. 22 (일)
俊이는 군대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딴에는 하나하나 준비하고 단도리하는 폼이다.
생각보다 교유범위도 넓어 여기저기 만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녀석을 향한 아비의 고정관념은 섯부른 노파심과 선입관이 만들어 놓은, 아비라는 족속의 함정인지도 모른다.
허리는 실제로 많이 좋아졌다.
분석하고 자르고 쪼개어 명명백백한 실증에 의하여 치료하는 서양의학에 비하여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하여 모호한듯한 한의학이 진짜 사람을 위하는 의술인지도 모른다.
18126 1996. 9. 23 (월)
나흘째 금주중.
나흘동안이나 술을 마시지 않은채 지내는 것도 실로 오래간만이다.
비디오 영화 '신문(訊問)'
스탈린이 통치하던 시절의 폴란드, 여가수가 어느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채 연행된다.
조작된 사실의 자백을 강요, 신문하는자와 신문받는자.
신문하는 자는 이념적 체제유지의 당위성을 광신하는 집단권력, 신문받는 자는 인간성의 자유를 자존심으로 신앙하는 무력한 개인.
코스타 가브라스적 영화의 분위기.
그런데 신문하는 자가 신문받는자를 연민하고 사랑하여 아이까지 만들고 자살한다.
고스타 가브라스의 영화보다 좀더 인간적 체취가 느껴지기도.
꿈- 어린 俊이의 세발자전거, 서울의 원남동 쯤, 언덕을 미끄러져 달리는 俊이가 아래편 거리의 가게와 충돌, 俊이는 멀쩡하고 서울 깍쟁이들 변상요구...
18127 1996. 9. 24 (화)
여사원에게서 빌려 화장실에서 읽어 치운 책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로버트 제임스 윌러.
로버트 킨케이드라는 50줄의 사진작가와 프란체스카 존슨이라는 사십줄의 가정주부.
우연히 마주처 짧은 사랑을 만든다.
수채화같은 소설이다.
크린트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이 출연한 영화를 봐야겠다.
술안마시고 한약먹기 어언 6일째.
허리는 나아지고 있는 듯 한데 웬 설사?
18128 1996. 9. 25 (수)
이중섭의 전기소설.
전기랄 것도 없는 치졸한 책이지만 이중섭이라는 무구한 한 인간의 체취는 있다.
유강혁이라는 화가와 이진세라는 여자아나운서가 나오는 박순녀의 소설 '영가'
그 소설의 주인공 화가가 바로 이중섭이 모델이었음을 알겠다.
이중섭의 그림, 게 한 마리가 천진하게 놀고있는 아이의 고추를 물고있다.
그 그림을 보면서 불현듯 김수영의 시 '달나라의 장난'이 연상되는 까닭은..
설사의 원인은 바로 한약.
俊이 이제 25일여.
아들놈 얼굴 본지가 언제더라..
18129 1996. 9. 26 (목)
불경기라하여도 명절은 명절이다.
선물꾸러미, 상품권이 오고가고.
조그만 사업이라도 운영하는 사람들은 여기저기 치레하느라 골이 아픈 명절.
나 역시 인사할 곳은 없으나 인사받을 곳은 있는 입장.
정작 기대하였던 곳에서는 소식이 없고 기대치 않은 곳에서 상품권이 날라온다.
주어 마다할 사람 없는데, 나는 욕심이 많은 편일까, 모자란 편일까.
C대리의 차타고 돌아와 며칠만에 덴뿌라 하나 시켜 놓고 술을 마신다.
7일, 8일만인가.
18131 1996. 9. 28 (토)
한가위.
TV를 볼라치면 흩어졌던 핏줄들이 모이느라 난리, 모여서는 다순 관계의 정겨움이 가득한 그림들을 그려내느라 야단인데.
고향이 없고, 전통이 없고, 가풍이나 가치관이 부족한 우리같은 아스팔트 킨트는 시늉만 할뿐.
어머니 곁에 옹송그려 모인 명절.
사직동의 처가.
그곳에는 오히려 따순 관계의 들썩거림이 있다.
俊이 입대전 마지막 명절.
18132 1996. 9. 29 (일)
명절이라고 내려온 제 자형을 만난 JM교 로부터 전화.
俊이 인적사항 알려주다.
모쪼록 행정 쪽으로 빠졌으면.
저녁 무렵 J와 태종대 한바퀴.
18133 1996. 9. 30 (월)
연휴 마지막 날.
직장, 진부하고 아득한 직장에서의 일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지레 우울하니.
어찌 이리도 소심한지.
닥치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걱정.
俊이의 어떤 면은 내게서 고스란히 물러받았을 성격.
이 연휴의 가을에 어디 공연장이라도 찾던지, 박물관이라도 가보던지, 아니면 가을산이라도 오르던지 할 생각은 품지를 않고서 종일을 그냥 개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