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나의 영화 편력기 -其 13-'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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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화 편력기 -其 13->

2010년 9월 12일

 

 

컬처영화.

‘잉그마르 베르히만’(베르히만의 영화는 컬처라고 할수는 없겠으나)도 그러 하였지만 (메이저 영화를 만들기 전의) 현대영화작가 ‘데이빗 린치’의 영화는 좀 난해하였던가.

그의 영화를 감히 내가 완벽하게‘이해하였다’라고 할 수는 없네.

허지만 어느 정도는‘느꼈다’라고 할 수는 있지 싶으이.

영상에 일관되게 흐르는 impression(印象), 카프카적 분위기에 숨막혀서 내 실존의식은 참 저릿하였다는..

 

영화란 두시간 남짓동안, 어둠 속 관객의 시청각을 사로잡아 감성에 직관적으로 소구(訴求)하는 한바탕의 카니발일세.

독서라면 잠시 책장을 덮고 논리를 유츄하거나 생각을 정리할수 있고, 페이지를 되돌려 볼수도 있을 것이며, 사전을 찾거나 인터넷으로 연관된 자료를 뒤적여 볼수도 있을터이지만.

일정한 시공간적 제약 속에서 스크린을 경험할 뿐인 영화 관객의 입장이란 지극히 소극적인 것일세.

그렇지만 상상(혹은 意識)의 비약이란 측면에서 영화의 테크닉은 지대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장르의 예술일세.

무대예술 역시 시공간적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예술행위이지만 무대공간이란 물리적으로 리얼리즘의 한계가 있는 곳, 관객에게 의식의 변화무쌍한 비약을 영화처럼 요구할수는 없을 걸세. (그렇다면 현대극의 극도로 난해한 超무대적 형식은? 으흠, 그건 내 지식능력 밖...)

그러니까 스크린은, 엄밀히 말하자면 초현실적 가상(virtual)의 세계일세.

생각해 보게, 스크린을 가득 채운 클로즈업된 거대한 눈동자가 현실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건 아니지 않는가. 영화장면처럼 조감(鳥瞰)을 우리는 현실에서 체험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몽타쥬, 앵글, 각종 솟과 샷, 인서트, 플레쉬 백, 줌인 줌아웃 등등... 그런 기법으로 붙이고 떼고 늘이고 줄이고 비약하고 축소하여 현실을 왜곡하여 스크린에 그려 놓는 것이 영화일세.

현실적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지.

그런 테크닉과 다양한 표현방식의 조합으로 만든 한편의 영화, 영화 예술의 유니크한 본령이 거기 있는 것 아니겠나?

그러한 유니크한 영화적 메소드(method)는 오로지 영화작가가 관객에게 소구하고자 하는 목적에 종사하는데 있는 것일세.

그러므로 영화에 있어서 일관된 주제, 인상(印象)의 연속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네.

영화란 작가의 철학적 사유가 논리의 구조로서 전달되는 예술장르가 아니네. 

논리구조(언어라던가)로서의 전달이 아닌, 논리는 감성에 소구하는 영상언어로 환치되어야 할 것이야.

어쨌거나 영화는 철학도 아니고 잔소리도 아니고 헛소리도 아니고 책도 아니고 공부도 아니고 강의도 아니고 강연도 아니고 다만 두시간여 시청각적인 기관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감성적 체험일 뿐이로세.

영화작가는 직관에다 호소할 뿐이지.

영상으로부터 심리적 감성적으로 수렴하여 해석하는 것은 관객의 몫일세.

 

우리나라 영화감독중 칸 영화제에서 가장 각광을 받는 박찬욱 감독.

그런데 내 직관이 받아들이기에 박찬욱의 영상언어는 너무나 난삽하고, 참으로 어려우이.

박찬욱 감독의 히트작,‘친절한 금자씨’

억울한 장기수인 미인 이영애는 얼마나 근사한 캐릭터인가.

소공녀와 같은 청순한 이미지.

그러나 그녀의 오만한 냉소주의. 복수를 위한 치밀함과 잔인함.

눈썹 하나 까딱 안하고 ‘너나 잘하세요’라고 심상하게 중얼거리면서 침착하게 사람을 죽이는, 그 엄정하고도 싸늘한 독기서린 증오.

내 보기에, 영화초반의 이 매력적인 캐릭터를 그대로 밀고나가야 할 것을 영화의 후반에서 그만 망쳐 놓고 말았네그려.

후반부에서 이영애의 그 구질구질함이라니.

감독이 무얼 얘기하고자 하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그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세.

무언가 감독의 의도가 있음직은 한데 나로서는 그것이 만져지기는 커녕, 끔찍할 정도로 엉망의 영화로 만들었다는 느낌뿐이라네.

세간에 상찬(賞讚) 가득한 박찬욱의 영화, ‘박쥐’에 이르러서도 나는 정말 모를세.

감독의 거창한 철학적 사유가 넘쳐나는듯 하기는 한데, 무슨 얘기인지 내게는 너무나 난삽할 뿐일세,

연기파 여배우 김해숙의 눈 희번덕거리는 요상한 모습은, 연기의 귀재 송강호를 성기까지 노출시켜가며 망가뜨렸지만, 나는 거기서 그럴듯한 의미 하나 건지지 못하였으니.

'파이란'의 최민식은 박찬욱의 올드보이에서는 스스로 힘들었을 것만 같고, '밀양'의 송강호는 박찬욱의 박쥐에서는 스스로 이상해졌을것만 같네. ㅎㅎㅎ

 

내게는 너무나 수준이 높아 어려운 영화작가가 박찬욱이라면 봉준호는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두명의 ‘상수’도 내게 편하고 좋을세.

임상수를 좋아하고, 홍상수를 좋아하네.(‘하녀’는 좀 임상수의 의식과잉이었고, 홍상수의 ‘하하하’는 리얼리즘이 좀 떨어졌다는 느낌은 없지 않지만.)

스크린에 일관된 인상을 유지하는 영화작가가 나는 좋고, 영화를 영화처럼 재미있게 만드는 사람들이 나는 좋을세.

 

요즘 영화는 요즘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옛 영화나 지껄임세.

 

*텍사스의 사인* '프랭크 시나트라' '딘 마틴' 출연. 프랭크 시나트라는 마피아와의 연관설도 끊이지 않았고 헐리웃 권력이었다는 풍설도 있었지. '폴 앵카'가 만든 노래 '마이 웨이'는 여러 가수가 불렀지만 아무래도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게 가장 좋다네.(이 노래는 내 노래방 십팔번이지.ㅎㅎ). 

*에드몬 단테스* '루이 줄단'감독.  알렉사더 듀마의 소설 '몬테 크리스토 백작', 그 옛 이름이 에드몬 단테스... 이 영화는 그닥... 

*와로크* '헨리 폰다' '안소니 퀸' '리차드 위드마크' '도로시 마론'. 유명짜하였던 서부영화. 리처드 위드마크가 옆으로 몸을 날리면서 총을 뽑는 폼은 아이들에게 한동안 유행하였지.

*007 살인번호* '션 코넬리'. 이 영화가 이언 플레밍의 소설 ‘닥터 노’였었는지, 옛 노트에 아무런 후렴없어... 좌우지간 ‘테렌스 영’으로부터 시작한 007은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카로니 웨스턴’과 더불어 굉장하였었지.

*고스트 다운의 결투* '리차드 위드마크' '로버트 테일러'

*OSS. 117' '로베르 옷센' '피어 안제리'. 007의 아류영화들, 한때 꽤 범람하였었지.로베르 옷센이나 피어 안젤리 모두 유명한 배우들이었는데, 007의 인기에는 어쩔수 없었던가 보지.

*추풍령* '김진규' 남상규의 노래 ‘추풍령’을 기억하는 사람 아직도 많을세그려. 일본영화 철도원의 분위기였는데 기억은 아슴..

*수탉같은 사나이*

*가슴을 펴라* '신성일' '임하' '김운하'가 출연한 이 영화는 다른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할터인데 나로서는 굉장히 좋게 감상하였던 영화.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현해탄은 알고 있다’를 쓴 한운사가 시나리오를 썼고 당시 젊은 대학생들의 낭만과 고뇌를 그렸던 영화. 영화에 나오는 랭보의 시, 이 영화 덕에 외웠다네. "오 랄라. 내 꿈꾸어오던 찬란한 사람들아."

*더 롱거스트 데이 (The Longest Day)* '존 웨인'등 기라성같은 배우들이 출연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그린 영화. 헐리웃 전쟁영화의 리얼리틱한 몹씬, 작금 6.25를 그린 우리 영화가 따라 잡았을까. (우리 영화 ‘포화 속으로’는 제법이었지만 서사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 옛날 실사(實寫)영화에 손색없는 현대영화의 그래픽이지만 말일세.

 

아, 속절없이 늘어놓는 나의 옛 영화 얘기들.

오소독스한 옛 영화로 부터, 우리 영화는 지금 무언가 잃고 있는게 있지 싶은데.

어떤 분위기, 어떤 정서일까...

그게 무언지 나도 모를세그려.

 

오늘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