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월든 前後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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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2012년 6월 2일 포스팅-

 

<월든> -前-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作-

 

‘헨리 데이빗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1817~1862)’의 ‘월든 (Walden)’

아주 오래 전, 아내가 내게 읽기를 권하였던 책이다.

저자거리에 찌든 속물 남편, 꼭 한번 읽을 가치가 있다고 여겼을테지만 그 때는 후루룩 훑어 보고서는 그냥 덮어 버리고 말았다.

늙어 다시 찾아 읽는 ‘월든’

법정스님의 무소유에서처럼 빳빳하게 풀 먹인 잿빛 승복의 고아한 결기.

더불어 생각의 실천이 녹아있는 현실적 액추어리티.

 

150여년전,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출판된 '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가 2년 동안의 '월든' 숲 속 생활을 유려한 문체로 써내려간 400쪽 가까운 분량의 책.

시정(詩情) 넘치는 아름다운 문장의 글이었다,

미문(美文)이 자아내는 싯적(詩的) 감흥과 더불어 어떤 아지못할 신비감이 글을 읽는 내게 엄습하였다.

소로가 묘파한 월든 숲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신령스러움, 일종의 범신론적(汎神論的)인 느낌.

'월든'의 무성(茂盛)한 자연 속에서는 하나로 통일된 거대한 섭리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는듯 하였다.

편만한 우주만물과 영혼과의 교감, 동화되는 일체감...

편안함이랄까 익숙함이랄까 풍족함이랄까 안도감이랄까 고양감이랄까....

 

문득 ‘헨리 데이빗 소로’는 ‘유니테리언’(Unitarian: 캘빈의 삼위일체 교의를 부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지(無知)한 나, 인터넷을 뒤진다.

소로의 사상이라는 초절주의 (超絶論:-超越主義- transcendentalism).

초절(超絶)이라는 생경한 단어, 아마 칼뱅의 절대적 신학개념을 넘어섰다고 하여 超絶이라고 칭하는 듯.

미국은 물론이고 후대의 간디, 톨스토이, 루터킹, 만데라등에게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는 '소로'의 초절주의.

한세기전, 인간성이 죄의식으로 한없이 찌그러들어야 했던 ‘주홍글씨’의 고장 뉴 잉글랜드, 바로 그곳에서 싹튼 사상이 초절주의라고 한다.

초절주의의 오의와 연원과 배경과 영향에 관하여 지껄이기에 내 지식은 모자르다.

일절(一節)을 베껴 단순무구하게 정의하련다.

<초절주의의 낙관론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에게 확장된다. 뉴잉글랜드의 특수한 산물이지만 이는 유럽 낭만주의 운동이 미국의 한 지역에서 뒤늦게 꽃피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성보다는 감정과 직관을 앞세우고, 사회보다는 개인을 더 찬양하며, 전통과 관습의 모든 구속을 무시하면서 자연 속에서 새로운 기쁨을 찾고자 하는 정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소박하게 영위하는 삶.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자연(숲과 호수와 초목과 네발짐승과 날짐승과 물고기와 흙과 공기와 하늘과 계절과 비와 바람과 눈과 얼음과 해와 달과 별과...)은 실로 경탄스러울이만큼 아름다웠다.

그 자연은 뭇 생명들을 양육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은 심오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니까 '소로'의 자연은 그저 오감이 느껴서 묘사한 피상의 아름다움이 아닌 것이다.

자연 속에 파묻힌 한 존재로서 살았던 사람만이 도달한 오의(奧義), 그 경지에 이르러 묘파(描破) 해낸 아름다움이었다.

소로가 자연 속에서 영위하였던 삶의 양태.

그건 바람먹고 구름똥 싸는 신선처럼, 유유자적한 사념이나 관념을 농(弄)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노동과 오락과 사색과 독서의 세월이었지만 말이다.>

먹고 입고 자는 일상생활의 효용을 생각하고 물질적 손익을 따지는(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함의 삶이었던 것이다.

내가 접하는바, 범박(汎博)해 마지않는 흔한 자연예찬은 과객인 시인묵객(詩人墨客)의 일필휘지 취흥에 겨운 붓놀림이기 십상이었고.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을 배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그만하면 족하도다’고 읊조리는 낙향 선비의 안빈낙도(安貧樂道)는 고답적(高踏的) 위선의 폼잡기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소로’는 시인 ‘이태백’적 감성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미문(美文)속에 담았지만, 그 내면에는 엎드려 곤충을 관찰하는 ‘파블로’의 과학적 이성이 언제나 살아 있었다.

우뇌적 '관찰'과 좌뇌적 '직관'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아름다운 글로서 어떤 삶의 가능태를 우리에게 증명하여 보여 주었다.

그런 삶 속에서 우러난 그의 사유, 그것은 빛나는 지혜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인간이란 얼마나 자연과 조화로운 존재인지.

자연과의 일체감에서 우러나오는 경이로운 감정이란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

산 것들의 모습은 그대로 자연에 투영된 모습.

대지와 식물과 나무와 잎, 호수와 강, 곤충과 네발짐승과 날짐승과 물고기... 자연의 골격조직과 섬유조직과 세포조직들...

자연이 표상하는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로운 것인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근원적 섭리가 은유하는 상형문자. '소로'는 '샹폴리옹'(로제타석의 옛 문자를 해독한 언어학자)을 언급하기도 한다. 자연이 표상하는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언어학자..>

 

자연이 생명들에게 웅변하는 바 그것.

생명은 죄(罪-칼뱅의 무시무시함)일수 없고, 산다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는 것.

애면글면 오로지 먹기위한, 또는 소유를 위하여 감수하는 고통은 섭리가 인간에게 강요한 방법론이 아니라는 것.

존재의 삶을 살라는 것.

소유의 삶이란 인간 스스로 선택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삶의 방식.

목숨이란 결코 굶어죽거나 얼어죽거나 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

예수의 말씀이 그러하지 않은가.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섭리는 먹여주고 키워준다는 것.

한날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는 것.

 

숲으로 들어오기 전, '소로'에게는 이른바 문명인으로써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토록이나 이상하고 어리석게 보였나 보았다.

어쩌면 저렇게들 생각없이 살수 있는가. 어째서 사람들은 고생을 사서들 하고 있는 것일까. 왜 기꺼이 괴로움의 노예가 되는 삶을 직수굿이 받아들이며 살고자 할까. 다른 방법의 삶이 있건만.

'쌔’빠지게('쌔'는 '혀'의 사투리) 땀을 흘리면서 입는 것 먹는 것에 급급하는 삶.

아무리 그래봤자 물질적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데 말이다.

'소로'가 보기에는 사람이 가축을 부리는 것 같지만 실은 주인이 가축에게 부림을 당하고 있었다. <'가축'은 ‘제도’나 ‘환경’이나 ‘타성’같은 것들의 은유이기도 하다.>

소로에게는 그런 사람들이 어리석고 한심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부자들이나 유한계급은 별도로 치더라도, 의식주에만 함몰된 인간에게 자아(自我)는 도대체 어디에 있고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언제 한가할 것이며, 생각은 언제 하며 책은 언제 읽을 것인가.>

 

꾸부정하게 땅만 보고 무거운 바위를 끄는 피라밋에 동원된 노예와 무엇이 다른가.

이짚트의 채찍은 압제자의 것이었지만, 등짝을 내리치는 채찍은 바로 그들 자신의 것이다.

사람들은 어찌하여 자아의 자유로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소로'는 자신을 임상(臨床)으로 하여 이를 몸소 체험하고 실증해 보이고자 '월든' 숲 속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전에 지하철역의 판넬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었다. (남포동역에 지금도 걸려있을 것이다)

대략적 기억이다.

어떤 바쁜 사업가가 시골 마을을 지나다가 느긋하게 평상에 앉아 무연한 눈길로 들판을 바라보고 앉아있는 사람을 보았다.

“이보시오, 그렇게 탱자탱자할 시간에 땀흘려 일을 하면 좀 좋아요?”

“무엇이 좋은데요?”

“일하면 돈을 벌것이고, 나중에 그 돈으로 한가하고 여유있는 인생을 즐길수 있잖아요?”

“사업가양반,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다고 생가하시우? 바로 그 좋은 시간을 살고 있는 거라오.”

 

삶의 방법론에 공식(公式)은 없다.

중심을 관통하는 원의 지름은 무수하다.

제도, 전통, 관습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음과 용기없음에서 비롯된 타성일 뿐이다.

위인이나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살아 온 삶의 궤적, 그게 절대적이란 말가.

나남없이 일관되게 답습된 양식으로들 살고 있는 이것이 정품(正品)의 삶이란 말가.

허 참, 이를 어쩌나.

내가 바로 그렇게 살아 왔음을.

20세기라는 시간적, 한국이라는 공간적 삶의 양태에 무슨 표준적 매뉴얼이 있다는 듯.

회색빛 도시의 일상.

남따라 숨 헐떡이면서 그렇게 살아 왔고 그렇게 늙어 갔으니.

그런 새대가리의 눈길로 비니미니를 바라보는 할비짜리.

아이들 성장함에 따라 밟아야 할 모범적 매뉴얼을 상정해 놓고 넌즈시 그것을 열망하는 내 내면의 꼬라지를 본다.

 

어쨌거나.

'월든'을 읽고서, '소로'의 생각은 이토록 귀에 달다.

'무소유'를 설파하시는 법정스님의 말씀도 귀에 정겹다.

'소유의 삶'을 버리고 '존재의 삶'을 살라는 에리히 프롬의 생각들도 귀에는 익다.

이제 예순넘어 '듣기 쉬운 귀'(耳順)을 가졌으므로 그러할 것이다.

문제는 그 실천적 용기의 유무가 아니겠는가.

진정한 '웰빙'의 의미를 천착하는 바, 요즘 젊은이들 제법 '월든'적 생각을 하고 그런 삶 쪽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 제법 보인다.

그러나 나라는 위인의 고리타분함은 여적 아득할 뿐이로다.

 

그리하여.

이것저것 21세기적 변명을 지껄일 참인데, 아뿔사, 어제 감기몸살이 내습하였다.

나누어 쓰련다.

 

내가 40대 초반 쯤이었나, 나이 든(지금 내 연배쯤이었을까) 어떤 사내가 떠오른다.

말단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하였다는 분인데, 직장동료들과 가끔 가는 술집 (호스티스 두엇이 서비스하는 변두리 실비 맥주홀, 그때 그런 술집들이 제법 흔하였다)에서 서너번쯤 조우하였다.

그는 그러나 조금도 즐기는 모습이 아니었다. <슬도 노래와 춤도 여자도, 무엇하나 세련된 깜냥이 되지 못하는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마이크에다 대고 돼지 멱따는 소리로 부르는 노래, 땀 뻘뻘 흘리면서 흔들어대는 춤사위, 한사코 싫다는 여자에게 들이대는 그 사람의 모습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언젠가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젊은 우리에게 토로하였다.

이대로는 억울하여 죽지 못하겠다. 젊어 한번도 누리지 못한 쾌락, 죽기 전에 누리고 가자.

그리하여 그는 그토록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강박으로 행위하는 쾌락, 즐거움 한조각 엿뵈이지 않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추하였으나 한켠 이상한 슬픔이 밀려왔다.

 

이제 내가 그 나이.

욕망있다면 그 쾌락은 어떤 색감일까.

에피쿠로스의 '쾌락'.

2400년전의 철인(哲人)이 설파하는 진정한 쾌락.

자연의 본성은 고통스럽지 않은 것, 자연의 궁극적 목적은 완전한 쾌락이다.

모든 '감각'은 '참'이라는 명제, 에피쿠로스의 자연학 연구와 깊은 사유에서 도출된 결론.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 육체에 고통이 없고, 마음에 동요가 없을 것, 그것이 관건이다.

퀘레네 학파는 '쾌락은 순간이다'라고 하였지만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다르다.

순간의 쾌락이 아닌, 상태적(常態的) 쾌락을 주창한다. (자연이 그러하듯)

육체적 쾌락은 육체적 결핍(고통)의 제거이고 정신적 쾌락은 죽음에 대한 공포(고통)와 불멸에 대한 욕망(고통)을 우리의 사고에서 몰아내는 일이다.

육체적 결핍의 고통이 사라질때, 육체적 쾌락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고 그 형태가 바뀐다.

그때의 욕구는 충족되지 않아도 고통스럽지 않으므로 그것은 필연적 욕망이 아니다

그것이 고통을 야기하더라도 쉽게 몰아낼수 있기 때문이다.

몰아낼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의 헛된 생각때문이지 그것은 쾌락의 본성 때문이 아니다.

정신적 고통.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멸에 대한 욕망.

쾌락에게는 무한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결코 무한이 유한보다 행복한게 아니다.

쾌락에 무한이 필요치 않다는걸 깨닫는 것,

자연학의 오의, 인생의 한계를 배운 사람이 정신적 쾌락을 누린다.

진정한 욕망이란 쾌락을 향한 욕구이고, 그것은 자연의 본성을 향한 회귀본능이다

사려깊고...아름답고...정직하게..

정적(靜的) 쾌락과 상태적(常態的) 쾌락..

나는 염불외듯 중얼거린다.

아타락시아.(마음의 평정)

아타락시아......

 

‘소로’는 드높은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였지만, 그 검박(儉薄)한 철학의 실천에 있어서는 중국의 노장(老莊)이나 인도의 고행수행자(苦行修行者)를 방불케 한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아름답지만 그 실천은 내게 지난하다.

이순(耳順)넘은 귀에는 수월하지만 예순넘은 육체(肉體)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필부(匹夫)의 의지박약에 종속된 육체란 본시 슬픈 물건이다.

백만권의 책을 읽어 만년짜리 경륜을 쌓았으면 무엇하랴, 백년이 못가는 육신은 몹시 나약해빠진 것을.

“육체는 슬프다, 아아! 그리고 나는 세상 모든 책을 읽었노라. -멜라르메-”

어쩌랴.

‘월든’을 읽고 영혼이라도 고상(高尙)함의 만복(滿腹)을 누리기로 해야지.

그러다 어쩌면 육신도 슬몃 변하게도 되리니.

 

‘소로’는 채식주의자 였다.

인간의 본성에는 다른 동물의 고기를 뜯는걸 즐기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인류에게, 언젠가는 육식습성(肉食習性)이 사라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고대 원시인의 식인습성(食人習性)이 사라졌듯이.

동물들을 유전공학적 조작에 의하여 대량생산하고 매카니틱한 시스템에 의하여 집단사육 집단도축하여 그 죽은 살덩어리를 게걸스레 뜯어 먹는 현대의 도저(到底)한 육식문화.

마트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포장된 뻐얼건 고깃덩어리들.

지구촌 대기를 함께 호흡하였던 생명에 대한 연민은 커녕, 쩝쩝 입맛을 다시는 현대인의 야만(野蠻)을 본다면 소로는 어떻게 생각할까.

 

‘소로’의 변(辯).

<내 경우에 육식을 반대하는 실질적 이유는 그것의 깨끗지 않음에 있었다.

그리고 물고기를 잡아서 내장을 제거하고 요리를 해서 먹은 다음에도 왠지 배가 채워진 것 같지 않았다. 불충분하고 불필요한 짓이었으며, 들어간 수고에 비해 얻은 것이 별로 없었다.

약간의 빵이나 감자 몇 개를 먹더라도 그 정도는 배가 불렀을 것이며, 수고와 더러움은 훨씬 적었을 것이다. 내 나이 또래의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최근 몇 년 동안 육류 및 차와 커피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그것들이 건강에 무슨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을 알아내서가 아니라 어쩐지 마음에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육식에 대한 거부감은 경험의 결과가 아니고 일종의 본능인 것이다. 검소한 생활을 하고 검소한 식사를 하는 것이 여러 가지 점에서 더 아름답게 생각되었다. 완벽하게 해낸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나의 상상력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나름대로 할 만큼은 했다. 자기의 고매한 능력, 시적인 능력을 진정 최고의 상태로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은 육식을 특히 삼가하고 어떤 음식이든 많이 먹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육식을 그만둔 결과로 체력의 감퇴가 초래된다 할지라도 그 때문에 낙심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보다 높은 원칙에 부합된 삶을 사는 것이니까.>

<만약 우리의 낮과 밤이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그런 것이라면, 우리의 인생이 꽃이나 방향초처럼 향기가 난다면, 또 우리의 인생이 보다 탄력적이 되며, 보다 별처럼 빛나고, 보다 불멸에 가까운 것이 된다면 우리는 크게 성공한 것이다. 그 때 자연 전체가 우리를 축하할 것이며 우리는 스스로를 시시각각으로 축복할 이유를 갖는다.>

<생식력은 우리가 해이해 있을 때는 우리를 방탕케 하고 불순하게 만들지만, 우리가 절제할 때는 우리에게 기력을 주고 영감을 준다.>

<정결은 인간의 꽃이다.

소위 천재나 영웅적인 행위나 성스러움이라는 것들은 정결의 꽃이 맺은 여러 가지의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

<순결의 수로가 트일 때 인간은 곧장 신에게로 연결이 된다.>

<순결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비순결은 우리를 낙담케 한다.>

 

이른바 문명적 이기(利器)라거나 시스템에 대하여 소로의 지적은 신랄하다.

<나는 우체국이 없어도 별 불편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우체국을 통하여 중요한 연락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좀 비판적으로 말하면, 내 생애를 통해 우표 값이 아깝지 않은 편지는 한 두통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나는 신문에서도 기억해 둘 만한 뉴스를 읽은 적이 없었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백만 대신에 다섯이나 여섯까지만 셀 것이며, 계산은 엄지손톱에 할 수 있도록 하라. 간소화하고 간소화하라.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대신 필요하다면 한 끼만 먹으라.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여라.>

 

그렇지만 우리의 육체가 기억하는 것들이란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

한번 육체에 깃들고 나면 그 타성은 결코 쉽게 버릴수 없는 것들이다.

내 육체가 기억하는 그것(고기를 좋아하는 입맛)을 이겨낼 능력이 내게는 있지 아니하다.

신문을 읽지 않고 블로그를 없애고 통신도구를 없애버리고는 어두워져 답답할 나의 일상이 두렵다.

내 육체가 기억하는 그 익숙한 것들을 나는 배신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원자력발전소의 폐해를 일본에 있는 아들놈 때문에 작년에 절실하게 느꼈다.

그렇지만 원자력 발전소를 폐기하여 전력부족의 불편을 나는 기꺼이 감수할수 있을런가 자신이 없다.

유난히 더위를 타는 내게 에어컨을 없앤다면. 일주일에 컴퓨터 사용을 두어시간으로 제한한다면, 제한 송전을 하여 나의 밤이 어두워진다면.

내 육체가 기억하는 그 편리함 때문에 원자력발전소 폐기에 대하여 나는 자신이 없다.

나는 사형제(死刑制)를 원론적으로는 반대한다.

그러나 내 사랑하는 사람이 무참하게 살해를 당하였다면..

상상만으로도 나는 나의 복수심을 관리할 자신이 없다.

 

‘소로’의 고상하고 고매한 정신, 그 속살이나 더듬을 뿐이로다.

소로가 보기에 사람들은 '삶 속에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현혹되고 있었다.

그는 인생에 진짜 존재하는 것들을 찾으려 애쓴 한사람의 구도자였다.

 

소로의 변(辯).

<왜 우리들은 이렇게 쫓기듯이 인생을 낭비해 가면서 살아야만 하는가? 인생이란 그렇게 비천한 것이 아닌데 말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철저하게 현재의 생활을 신봉하고 살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어" 하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원의 중심에서 몇 개라도 반경을 그을 수 있듯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생각해 보면 모든 변화는 기적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기적은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의 인생을 조용히 보내고 있다. 이른바 체념이라는 것은 확인된 절망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 진정 존재하는 것들, 인생에 필요한 최소공약수를 탐색하고 실험하고 증명하려고 소로는 숲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 불가피하게 되지 않는 한 체념의 철학을 따르기는 원치 않았다.>

<나는 인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고 스파르타인처럼 살아,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기를 원했다.>

<수풀을 폭 넓게 잘라내고 잡초들을 베어내어 인생을 구석으로 몰고 간 다음에, 그것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로 압축시켜서 만약 인생이 비천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 인생의 비천성의 적나라한 전부를 확인하여 있는 그대로 세상에 알리며, 만약 인생이 숭고한 것이라면 그 숭고성을 스스로 체험하여 다음 번의 여행 때 그에 대한 참다운 보고를 하기 원했던 것이다.>

<내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이 악마의 것인지 또는 신의 것인지 이상하게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사람이 사는 주요 목적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한 기쁨을 얻는 것'이라고 다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숲속에서 소로는 사색과 고독을 즐기면서 영혼의 정결함을 음미하였다.

<지구의 자연을 놓아두고 천국을 얘기하다니 그것은 지구를 모독하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결하게 되고 싶으면 여러분은 절제를 해야 한다. 정결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스스로가 정결한지를 어떻게 아는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미덕에 대하여 듣고는 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몸을 부지런히 놀리는 데서 지혜와 순결이 온다. 나태로부터는 무지와 관능이 온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관능은 마음의 게으른 습성이다. 깨끗지 못한 사람은 열이면 열 게으른 사람이며, 난로 옆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며, 해가 떠 있는데도 누워 있는 사람이며, 피곤하지도 않은데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다. 깨끗지 않음과 온갖 죄악을 피하려거든 외양간의 청소라도 좋으니 부지런히 일을 하도록 하라. 천성은 극복하기 힘드나 극복되어야만 한다.>

<각개의 인간은 육체라고 불리는 신전의 건축가이다. 이 신전은 자기 나름대로의 양식에 의거해 건축되고 있으며 자기가 숭배하는 신에게 바치어진다. 이 육체 대신에 대리석 신전을 지음으로써 빠져나갈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조각가인 동시에 화가이며, 우리 자신의 피와 살과 뼈를 작품의 재료로 쓴다.>

<어떤 사람의 내부의 고귀성은 즉각적으로 그의 겉모습을 정교하게 만들기 시작하며, 비열함이나 관능은 그를 짐승처럼 추하게 보이도록 한다.>

 

소로가 말하는 외로움(孤獨)의 정체를 들어보자.

<나는 외로움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고독감에 의해 조금이라도 억눌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꼭 한 번, 그것도 내가 숲에 온 지 몇 주일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는데, 그 때 나는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 것이 명랑하고 건전한 생활의 필수 조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 속에 약 한 시간쯤 빠져 들어 있었다. 혼자 있는 것이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나는 내 기분이 정상적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했으며 이 기분에서 곧 벗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으로 느꼈다.>

<조용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갑자기 대자연 속에, 후두둑후두둑 떨어지는 비 속에, 또 내 집 주위의 모든 소리와 모든 경치 속에 너무나도 감미롭고 자애로운 우정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나를 지탱해주는 공기 그 자체처럼 무한하고도 설명할 수 없는 우호의 감정이었다.>

<이웃에 사람이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던 모든 이점이 대단치 않은 것임을 느꼈고 그 후로는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솔잎 하나하나가 친화감으로 부풀어올라 나를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흔히 황량하고 쓸쓸하다고 하는 장소에서도 나와 친근한 어떤 것이 존재함을 분명히 느꼈다.>

<나는 나에게 혈연적으로 가장 가깝거나 가장 인간적인 것이 반드시 어떤 인간이거나 어떤 마을 사람이지는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부터는 어떤 장소도 나에게는 낯선 곳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내가 보낸 가장 즐거운 시간들 가운데에는 봄이나 가을에 비바람이 장시간 몰아칠 때를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날 나는 오전은 물론 오후에도 집안에 들어박혀 쉴 새 없이 부는 바람소리와 빗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또 이 때는 이른 황혼이 긴 밤을 맞아들여 많은 사념들이 뿌리를 박고 그 나래를 펼칠 시간적 여유를 얻었다.>

 

-계속-

 

 

 

<월든> -後-

 

소로는 콩밭을 가꾸었다.

<콩밭을 가꾸는 데 나를 돕는 조수들이 있다. 이 마른 땅에 물기를 공급해주는 이슬과 비, 그리고 척박한 땅에 다소라도 남아 있는 생산력이 바로 그것이다. 나의 적은 벌레들과 서늘한 날씨,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우드척을 들 수 있다. 우드척이란 놈들은 4분의 1에이커나 되는 콩을 깨끗이 갉아먹었다. 그러나 내가 무슨 권리가 있어 물레나물과 그 밖의 풀들을 쫓아내며 그들이 옛부터 이룩해 놓은 잡초의 정원을 망가뜨린단 말인가? 이제 남은 콩들은 곧 우드척을 당해낼 만큼 커질 것이며 또 다른 새로운 적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월든’에는 우리에게 낯선 우드척(Woodchuck)이라는 동물이 자주 등장한다.

버지니아의 친구댁 정원의 창고 땅밑에도 대를 이어 가정을 꾸린 우드척이 살고 있다. <미국에서는 흔한 동물, 제이미님은 그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셨다.>

 

<내 호미가 돌에 짤그랑하고 부딪히면 그 음악은 숲과 하늘에 울려 퍼졌으며, 순간순간 무한한 수확을 거두어 들이는 나의 노동에 반주음악의 역할을 했다.>

<내가 김을 매고 있는 것은 이미 콩밭이 아니었고 또 콩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 사람은 이미 내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오라토리오를 들으러 도시에까지 나들이를 간 내 친지들이 혹 생각나는 경우에는 연민의 감정과 더불어 어떤 자부심을 느꼈다.>

<나는 때로는 하루 종일 일했는데, 맑게 개인 날 오후에는 밤매가 눈의 티처럼, 아니 하늘의 눈의 티처럼 머리 위를 비잉비잉 도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가 때때로 그 새는 하늘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갑자기 급강하해 내려왔다. 그러나 하늘의 천은 아무런 흠 없이 그대로였다.>

<하늘을 떠다니다가도 알은 사람들이 잘 찾아낼 수 없는 지상의 모래밭이나 산꼭대기의 바위틈에 낳아 놓는 작은 장난꾸러기들. 그들의 모습은 호수에서 떠 온 잔물결처럼 아름답고 늘씬하다. 마치 바람에 의하여 공중으로 떠 올려진 잎사귀들 같다.>

<자연에는 그처럼 닮은 모습들이 있는 것이다. 매는 그가 공중을 날면서 내려다보는 물결의 하늘에 있는 형제이다. 공기에 부풀은 그의 완벽한 두 날개는 바다의 털 없는 원시적인 날개들에 대응한다.>

<어떤 때는 한 쌍의 솔개가 하늘을 날면서 높이 치솟았다가는 내려오고, 서로 가까이 갔다가는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내 자신의 생각을 구현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또 산비둘기들이 이쪽 숲에서 저쪽 숲으로 약간 떨리는 듯한 날갯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긴급히 전해야 할 통신문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썩은 나무 그루터기 밑을 괭이로 파헤치다가 둔중한 몸집을 한 이국적인 점들이 박힌 도롱뇽이 나오기도 했다. 이집트와 나일 강 냄새가 물씬 나는 이놈은 실은 우리와 같은 시대의 생물이다. 내가 일을 멈추고 괭이에 기대어 서 있노라면 밭고랑 어느 곳이었건간에 이러한 소리들과 광경들을 듣거나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이 땅이 제공하는 무궁무진한 여흥의 일부였던 것이다.>

 

손수지은 소로의 통나무집.

<나는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 말고는 그 누구한테서도 괴롭힘을 받은 적이 없다. 내 집에는 원고를 넣어 둔 책상 말고는 자물쇠나 빗장 같은 것이 없었으며, 문의 걸쇠나 창문 위에 못 하나 꽂아놓지 않았다. 밤이고 낮이고 문을 잠근 적이 없었다. 며칠 동안 집을 비웠을 때도 그랬고, 심지어 다음 해 가을에 메인 주의 산 속에서 두 주일간을 보냈을 때도 그랬다. 그래도 나의 집은 사람들의 존중을 받았으며, 일단의 병사들이 그 집을 둘러싸고 지켰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존중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숲을 산책하다가 피로를 느낀 사람은 내 집의 벽난로 앞에 앉아 몸을 녹일 수 있었으며, 문학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탁자 위에 놓인 몇 권의 책을 뒤적이며 즐길 수 있었으리라. 또한 호기심 많은 사람은 내가 점심에 무엇을 먹고 남겨 놓았으며 저녁 식사로는 무엇을 먹으려고 하는 지를 알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온갖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내 집 근처를 지나 호수를 다녀갔지만 이들로부터 어떤 심각한 불편을 겪은 적이 없으며, 조그만 책 한 권 말고는 아무 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다. 그 책은 호머의 작품으로 지나치게 금박을 입힌 것이었는데, 지금쯤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의 수중에 다시 들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그 당시 내가 생활했던 것처럼 소박하게 산다면 절도나 강도는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일부 사람들이 충분한 정도 이상의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데 반하여 다른 사람들은 필요한 만큼도 갖지 못한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포프가 번역한 호머의 책들은 곧 적절하게 배포가 될 것이다.>

"너도밤나무 그릇으로 만족하던 시절에는 사람들은 전쟁으로 고통받지 않았으니."

"그대 정치하는 사람들이여, 형벌을 쓸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대들이 덕을 사랑하면 백성들도 덕을 사랑할 것이다. 윗사람의 덕은 바람과 같고 평민의 덕은 풀잎과 같다. 풀잎들은 그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고개를 숙이게 되어 있다." -논어- 제12편 19절.>

 

들꿩, 우드척, 수달, 너구리, 도요새, 올빼미, 여우, 멧비둘기, 붉은다람쥐, 되강오리, 개와 고양이, 기러기, 붉은 개미와 검은 개미의 전쟁...

소로는 동물들의 행태를 관찰함으로서 섭리의 손길, 자연이 산것들에게 베푸는 그 법칙을 깨달았을 것이다.

더불어 그가 묘사한 동물들의 행태는 시이튼의 동물기나 파블로의 곤충기에 못지 않는 재미로움으로 가득하였다.

그건 이 책의 부록이었다.

 

이윽고 소로는 숲을 떠났다.

숲을 떠난 몇년후, 그는 '월든'이라는 책을 써 인류에게 남겼다.

 

소로는 말한다.

숲에서의 소로 자신의 생활과 자신의 생각만이 최선은 아니라고.

인생의 중심이 원심(圓心)이라면, 그 원심을 관통하는 지름은 무수히 많다.

이미 그어진 지름에 겹처 선을 긋지 말라.

구각(舊殼)의 껍대기 속에 안주하려 하지 말라.

존재를 사유하여 새로운 정신으로 새 공기를 진작(振作)하여 보라.

종속과목강문계(種屬科目綱門界, 생물의 분류) 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개별적인 존재들은 섭리(攝理) 안에서 통일적으로 관리되어 진다.

자연을 깊이 경험한 바, 편만한 손길에 의해 모두들 개별적으로 안생(安生)하고 안식(安息)하더라.

이것이 섭리가 개별적으로 목숨을 포용하는 방식이다.

너의 길을 찾아라. 너의 길을 가라. 너의 삶을 살아라.

그러면 보다 자유스러운 법칙이 너의 주변과 너의 내부에 확립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의 문장은 하나하나가 보석같은 아포리즘이다.

<나는 숲에 들어갈 때나 마찬가지로 어떤 중요한 이유 때문에 숲을 떠났다.

내게는 살아야 할 또 다른 몇 개의 인생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꼈으며, 그리하여 숲 생활에는 더 이상의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쉽게 어떤 특정한 길을 밟게 되고 스스로를 위하여 다져진 길을 만들게 되는지는 놀라운 일이다. 내가 숲속에 산지 1주일이 채 안 되어 내 집 문간에서 호수까지는 내 발자국으로 인해 길이 났다. 내가 그 길을 사용하지 않은지 5, 6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 길의 윤곽은 뚜렷이 남아 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 길을 밟아 길로서 유지되게 했나 보다. 땅의 표면은 부드러워서 사람의 발에 의해 표가 나도록 되어 있다. 마음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큰길은 얼마나 밟혀서 닳고 먼지투성이일 것이며, 전통과 타협의 바퀴 자국은 얼마나 깊이 패였겠는가!>

<왜 우리는 항상 자신의 수준을 가장 둔한 통찰력에 내려 맞추고는 그것을 상식이라고 찬양하는가? 가장 평범한 상식은 잠자고 있는 사람들의 상식이며, 그들은 그것을 코고는 소리로 표현한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鼓手)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의 천성에 맞는 여러 여건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대신 끌어다 댈 수 있는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헛된 현실이라는 암초에 우리의 배를 난파시켜서는 안 되겠다.>

<정신이 온전할 때 우리는 사실만을, 즉 실지로 존재하는 사정만을 응시한다. 당신이 의무감으로 느끼는 것을 말하지 말고 진실로 내부에서 느끼는 것을 말하라. 어떤 진실도 거짓보다는 낫다>

 

소로는 거듭 속삭인다.

가능한 한 소박하고 간소하게 살아라.

번잡한 것들을 지고 이고 살려 하지 말거라.

그것이 네 존재에 필요한 것들이라고 착각하지 말거라.

그것들은 너의 짐이다.

집채를 가구를 황금을 유행을 미식과 환락을 짊어지고서는 자연(우주)과 점점 멀어진다.

그것들이 너로 하여금 편하게 살지 못하고 편하게 죽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공중누각(空中樓閣)을 쌓아라.

토대는 섭리(자연, 우주)가 쌓아 주더라.

 

<그가 자신의 생활을 소박한 것으로 만들면 만들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욱더 명료해질 것이다. 이제 고독은 고독이 아니고 빈곤도 빈곤이 아니며 연약함도 연약함이 아닐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공중에 누각을 쌓았더라도 그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누각은 원래 공중에 있어야 하니까. 이제 그 밑에 토대만 쌓으면 된다.>

 

소로는 거듭 설파한다.

이를테면.

대자연은 한가지 이해방법으로만 파악할수 있는게 아니란다.

낡은 생각, 고리타분한 관습, 어줍잖은 문명비스무리한 것들이 만들어 낸 쓰잘데기 없는 거품들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지.

섭리는 산 것들에게 그들 나름마다 필요한 최선의 것을 먹히고 입힌다.

<마치 대자연이 한 가지의 이해 방법만을 지지한다는 듯한 태도, 또 대자연이 네발짐승과 동시에 새들을, 땅을 기는 생물들과 동시에 하늘을 나는 생물들을 먹여 살리지 못한다는 듯한 태도는 틀린 것임을 나는 증명할수 있다.>

 

이를테면.

작금의 우리의 문명적 자존심은 완벽한 근거가 있는가. 이룬 것에 대한 자기도취는 완벽하게 타당한가.

인류가 이룬 작금의 현상적인 것들이 어떻게 변할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섭리(자연)는 무궁하고 그에 따라 인지(人智)는 변한다.

이 순간 인류는 겨우 무엇을 알아 냈는가.

우주를 완벽하게 파악하였는가.

정신을 완전하게 분석하였는가.

 

<인류의 종국적인 자존심과 침체한 자기도취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오늘날의 세대는 스스로를 빛나는 계보의 후예라고 생각하며 자만에 빠지는 경향이 꽤 있다. 그리고 보스턴과 런던, 파리와 로마 같은 도시에서 자신들의 오랜 전통을 상기하면서 만족스러운 어조로 예술과 과학과 문학에서의 발전을 이야기한다. 각종 학회들의 보고서들과 '위대한 인물들'의 공적을 찬양하는 글들도 있다. 이것은 선량한 아담이 자신의 착함에 스스로 감격을 하고 있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래,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해냈고 거룩한 노래를 불렀어. 그것들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들이야."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그것들을 잊지 않고 있는 한 그렇다는 이야기이리라.>

<고대의 강국이었던 앗시리아의 각종 학술협회들과 위대한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젊기 짝이 없는 철학도들이며 실험가들이 아닌가?>

<여러분들 가운데는 단 한 사람도 인간의 한평생을 다 살고 난 사람은 없다.>

<지금은 인류의 역사에서 봄의 계절에 불과한지 모른다. 우리들은 우리가 사는 지구의 극히 얇은 겉껍질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면에서 6피트의 깊이를 파본 적도 없고, 공중으로 6피트를 뛰어올라 본 적도 없다. 우리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여기고 있으며, 지구의 표면에 하나의 질서를 확립했다. 정말이지 우리 인간들은 자칭 심오한 사상가며 야심만만한 존재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지금 사는 곳은 항상 마른 땅은 아니었다.>

 

'월든'의 마지막 문장.

<우리의 눈을 감기는 빛은 우리에겐 어두움에 불과하다. 우리가 깨어 기다리는 날만이 동이 트는 것이다. 동이 틀 날은 또 있다. 태양은 단지 아침에 뜨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

 

책장을 덮고 나는 사념에 잠겼다.

150년전의 사람, 소로가 살아 난다면 그가 죽은 후 지금까지 이룬 인류사적 성과와 작금 현대인의 살아가는 양태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것들 대부분은 ‘월든 숲 밖’에서 1세기반에 걸쳐서 이루어진 성과일진대 말이다.

 

아, 인류는 엄청난 파괴와 절망을 겪고, 그리하여 언필칭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졌다.

세계대전, 대학살, 핵공포, 팍스아메리카나, 국가조직, 관리체계, 공법 사법적체계, 과학발전, 지구밖 진출, 자본의 탐욕, 이기주의의 발호, 부와 가난, 커무니케이션의 범람, 노예제도 철폐, 민주. 권력의 분산, 위생환경개선, 인권신장, 의료발달, 수명연장....

아, 숨이 가쁘다.

 

19세기 중반 소로가 어둡게 전망하였던 ‘월든 숲 밖’의 미련한 인류의 생각들.

그것의 어떤 부분을 향하여 “허어, 그 생각들도 제법 괜찮은 것이 있었나 보구나”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릴 부분 없지 않을 듯 싶다.

그러나. 눈을 감고 깊숙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

그대, 행복한가.

조화로운 기쁨 속에서 그대의 삶은 그대의 실존을 살아냈는가.

 

여전히 소로의 질문들은 우리에게 유효하다.

눈부신 21세기에, '월든'적 삶의 양태는 무의미한 것인가.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의 태도를 전혀 외면하여도 좋은가.

안락과 편리함과 쾌락과 욕망과 효율을 위한 저 숱한 현대적 시스템의 장치(裝置)들.

그 장치들은 완벽한가. 영원한 것인가.

그것들에게 우리의 본질적 삶의 의미를 죄다 의탁하여 우리의 생애를 맡겨도 좋은가.

우리의 실존을 21세기 시스템에다 전면 의탁하려는가.

우주의 진리인양 절대권위의 팔짱을 끼고 있는 과학과 정치와 법률과 제도를 믿고서?

가식의 웃음을 짓고 있는 저 휴머니즘이란 것에 기대어?

 

이제 인간성에는 자연 속에서 직관으로 얻는 바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집단의 배움이나 답습이 아닌곳에서, 자연의 신비함 속에서 얻는 개별적 통찰에 등을 돌리려는가.

우리는 본시 자연의 소산이고 자연으로 회귀하는 동물이다.

우리에게 힘을 주어 자연과 균형 잡힌 행동과 사유를 할수 있는 힘.

자연 속 생명의 강물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흐른다,

신은 자연을 통해서 인간에게 나타난다.

자연은 영원히 우리를 관통한다.

 

우주와의 본원적 관계를 회복하라.

집단적 사고에서 벗어난 자립적인 개인으로서 삶과 세계를 통찰하라.

소로의 철학이다.

 

나에게 묻는다.

네 생명이 궁극적으로 얻고자 의도한 것, 그 행복을 너는 한번이라도 맛본 적이 있었니?

한번이라도 주체적으로 너의 삶을 살아 보았니?

답습과 폼잡기와 풍조와 가식과 체면과 쾌락과 욕망으로 점철된 살이의 기교들.

그곳에 너의 진짜배기 목숨이 있었다고 진정 생각하였니?

실은 모든 것이 네 ‘절망’의 몸짓은 아니었니?

절망은 기교를 낳고 기교는 절망을 낳는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아프게 엄습한다.

그런 것들, 이제 늙어 슬슬 묵은 상처의 고름으로 아프지는 않느냐?

낫살 먹어 가면서 진작 눈치는 좀 챘었고 예감하여 어딘가 늘 헛헛하였다.

맘모니즘, 헤도니즘으로는 채워질수 없다는걸,

내 별은 여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못난이의 헛소리나 중얼거렸다는 걸.

 

영적평안(靈的平安)의 갈구.

신앙적 환희의 본질.

내 밖의 것들, 자연과 우주만물과의 조화로운 감정상태.

영혼의 밸런스, 엘레강스, 하모니, 사랑, 위로, 따뜻함...

만유(萬有)와의 조화로움, 조화로움, 조화로움...

 

오, 신앙.

어디에 갔는가.

환희와 기쁨과 조화로움에 찬 내 신앙의 벌거벗은 모습은.

 

긴 세월 살아 얻지 못하였으니 이제 늙어 후회를 한다.

영혼 어름에다가 딴 주머니 하나 차고 있었어야 함을.

떠날 즈음, 주머니 끌러 빚을 퉁치고 섭리와의 일체감으로 아름답게 죽어야 함을.

끄적거리고는 있으나 내 글조각이란 언제나 아득할 뿐.

내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를 귀띔하려 하지만 내 주제의 언어로서는 난망인지라 이심전심(以心傳心)을 꿈꿀 뿐이로다.

 

<자연은-해와 바람과 비, 그리고 여름과 겨울은-말로 표현할 수 없이 순수하고 자애로워서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건강과 환희를 안겨준다. 그리고 우리 인류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정당한 이유로 슬퍼한다면 온 자연이 슬퍼해 줄 것이다. 태양은 그 밝음을 감출 것이며 바람은 인간처럼 탄식할 것이며 구름은 비의 눈물을 흘릴 것이며 숲은 한 여름에도 잎을 떨구고 상복을 입을 것이다. 내가 어찌 대지와 교류를 갖지 않겠는가? 내 자신이 그 일부분은 잎사귀이며 식물의 부식토가 아니던가!'>

 

언제였던가, 토지문학관에서 촬영한 ‘박경리의 독자와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때 박경리가 말한 내용이 귀에 선하다.

어렴풋 그 함의(含意)를 깨닫는 순간 내 등에는 전류가 흘렀다.

대충의 기억

“한겨울 어떤 철새는 강물에 내려앉아서 밤새도록 수면에다 날개짓을 퍼득거린다... 새벽추위에 강물이 얼을까봐... 새끼에게 물고기 조반을 먹이지 못할까봐... 밤새도록 그렇게 필사적으로 날개짓을 하는 것이다... 한 목숨이 한살이 살아 낸다는 것은 정녕 엄숙하게 고통스러운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생명을 의지(意志)로 사는가, 욕망(慾望)으로 사는가... 그것이 의지라면 그 생명은 아름답다, 그것이 욕망이라면 그 생명은 추한 것이다...”

'본능'이나 '욕망'이 아니라 '의지'로서 살아 내는 생(生).

한살이 무릇 관계의 아름다움.

윤리적 삶의 태도에 기반한 박경리의 실존의식.

의지로서 살아 내는 생(生).

관계를 도외시하고 함부로 죽지말라.

삼엄한 말이다.

그래서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은 그토록 아름다웠던가.

그래서 별당아씨와 환이의 사랑은 그토록 서러웠고 어여뻤던가.

그래서 조준구나 임이네의 욕망은 그토록 추악하였던가.

 

인간성의 오욕칠정(五慾七情)에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다.

의지도 슬픔이고 욕망도 슬픔이다.

의지도 안타까움이고 욕망도 안타까움이다.

인간사.

역사도.

산하(山河)까지도.

‘나는 결국 살아 냈습니다. 섭리여 감사합니다.’

박경리가 죽음을 맞아, 그 마지막 중얼거림이 내 귀에는 이렇게 들리는듯 하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그도.

훗날 감사함과 조화로움으로 임종을 맞기 위한 준비로서 월든의 숲속으로 들어갔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견 배리된듯 보이지만 나는 박경리와 소로에게서 동일한 '윤리적 신비주의(말이 되나?)'를 본다.

그 생각을 풀어내자니 내 사유의 지력과 표현에 벽을 느껴 그만두련다.

 

'소로우'는 마흔다섯살 (1862년)에 콩코드에서 죽었다.

그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처럼 행복한 죽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고 한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상징과 은유로 포장되어 추상의 영역에 갇혀 있었던 혼돈스러운 개념인 죽음.

홀연 어느 순간 산 것들은 죽음과 맞닥뜨린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증유(未曾有)의 그것을.

바야흐로 대면하게 되는 ‘리얼리즘의 극점(極點)’인 '죽음'의 얼굴.

 

13년전, 돌아가시기 수일전 부터 내 어머니는 끊임없이 “외로워, 외로워.”하고 중얼거리셨다.

둘러 선 자식들과는 눈도 마주하지 않은채 병실 창밖 먼 하늘에 준 눈길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오로지 홀로 맞이하여야 했을 어머니만의 미지(未知)의 그것.

얼마나 고독하였을까.

또한 엄청난 공포였을 것이다.

(그때는 ‘퀀블러 로즈’박사의 ‘임종의 다섯단계’중 초기단계였을 것, 임종 직전에는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중얼거리셨다.)

 

그 옛날 농경사회의 대가족의 풍속적 그림.

임종에 이른 할아버지.

일생동안 오관(五官)에 익은 방과 이부자리, 자식 손자 며느리 가족들에 둘러 쌓여.

들창 밖으로는 초록의 들판이 보이고 새소리 들린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고, 이윽고 숨이 멎는다.

할아버지의 시신을 쓰다듬으면서 영결을 애통해하는 손주들...

 

현대인 죽음의 풍경화.

금속성 차거운 의료기구에 둘러쌓인 병실.

코에는 산소 호스가 꽂혀있고, 수시로 강심제가 주사되고.

무의식 속에 이윽고 숨이 멎는다.

잽싸게 시신은 영안실로 은폐되어 버리고 죽은이는 영정사진으로 대신하여 상청에 내걸린다.

주검은 철저하게 감추어져 추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연(自然)과 괴리(乖離)된 상태로 살다가 자연과의 부조화 속에서 죽어버려 추상의 주검으로 처리되는 현대인.

자연(自然)이 잉태하여 자연이 출산한 자연의 자식이건만 자연의 품속에서 안식사(安息死)하지를 못한다.

 

으흠, 늙은이의 센티멘탈이다.

 

'박경리'와 '소로우'

'삶'에 대한 인식이 배리되는 듯 하지만.

혹여 '월든'의 숲에 '박경리'가 겹쳐 보이는 늙은이의 영안(靈眼)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아, 진실로 원하노니 나의 그때.

조화로운 죽음을 누렸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