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치누아 아체베 作-
***동우***
2011년 12월 30일
아프리카의 비극.
나이지리 출신의 작가, ‘치누아 아체베(Albert Chinua Achebe, 1930~2013)'가 1958년에 발표한 소설.
예이츠의 시에서 따 온 소설의 제목,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돌고 돌아 더욱 넓은 동심원을 그려나가
매는 주인의 말을 들을 수 없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중심은 힘을 잃어
그저 혼돈만이 세상에 풀어헤쳐진다.
-예이츠 ’재림‘->
아프리카.
니제르강 하안의 ‘우무오피아’부족의 ‘이보’마을.
‘오콩코’는 이보 마을의 유지였고, 언제나 자기의 존엄성을 관리하는 늠름한 사나이였다.
이미 어린 나이에 아홉 마을을 아우르는 씨름판에서 씨름왕의 영예를 얻었으며 다른 부족과의 싸움에서는 발군의 용기를 과시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부자여서 두 개의 곳간에 ‘얌’이 가득하였고, 세번째 부인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 오콩코이지만 그는 한량(閑良)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우노카'는 음악과 맛있는 음식과 술과 친구를 좋아하였고, 게을러 터졌으며, 누구에게나 헤벌레하는 사람좋은 망나니였다.
그래서 아버지 우노카는 언제나 가난하였고, 부족으로부터 아무런 칭호도 얻지 못하였다.
이웃들로 부터 ‘아그발라’(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면서, 아무런 칭호도 없는 남자를 이르는 말)라고 멸시를 받으면서도 홍야홍야하는 밸이 없는 사나이였다.
오콩코의 아버지 우노카는 그렇게 흥청망청 한세상 살다가 빚만 잔득 남겨 놓은채 죽었다.
일찌기 그런 아버지 슬하에서 오콩코는 분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으리라.
그리하여 오콩코는 아버지를 닮지 않고자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길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일생을 살았으며, 아버지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증오하는 감정에 스스로 지배 당하기를 갈구하였다.
그 감정은 오콩고가 평생 지니고 살아야 했던 ‘두려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실패와 유약함에 대한 두려움, 아버지를 닮은 것처럼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오콩코를 부지런하고 피로를 모르는 강인한 남자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바위같은 의지의 사나이가 되어, 자수성가의 성공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그는 불같은 성격으로 집안 사람들을 두렵게 하였다.
유약한 장남 ‘은워예’를 호통과 매로 다스렸다.
그래서 은워예는 나중에 침울한 성격의 청년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느날 장터에 만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였다.
<‘우무오피아 크웨누’ 저 무지한 짐승의 아들들이 감히 우리 우무오피아의 딸을 죽였다!>
이웃 부족인 ‘움바이노’의 일족에게 우무오피아의 여인이 살해 당하였던 것이다.(고의가 아니라 과실에 의한 살인이었다)
부족의 대표가 되어 움바이노에 최후 통첩을 하는 오콩코.
<청년과 처녀 각각 한명을 배상으로 보내는 것과 전쟁 중 하나를 택하라.>
우무오피아 부족은 전쟁과 주술에 능하고, 무당과 주술사들은 영험하여 모든 이웃이 두려워 하는 부족이었다.
움바이노는 열다섯 남자아이와 젊은 처녀 하나를 인질로 보냈다.
그 남자아이 '이케메푸나'는 오콩코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이케메푸나는 수년 동안 오콩코의 집에 살면서 점점 한 가족으로 동화되어 갔다.
오콩코의 장남 은워예는 형처럼 그를 따랐고, 그는 오콩코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유약한 아들 은워예는 이케메푸나의 영향으로 남자다운 아이로 변해 갔고, 오콩고는 두 아이를 바라보면서 자못 흐뭇해 하였다.
어느날 신탁이 있었다.
<우무오피가 그 아이를 죽이기로 결정했네. 숲과 동굴의 신이 그렇게 말씀하셨네. 관례대로 아이를 우무오피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그곳에서 죽일 것이네. 저 아이가 자네를 아버지라 부르네. 아이의 죽음에 자네는 손대지 말게.>
<오콩고가 이케메푸나에게 달려가자 “아빠, 사람들이 날 죽여요! 라는 외침이 들렸다. 두려움에 휩싸인 오콩코가 자신의 도끼를 빼 소년을 내리쳤다. 그는 자신이 나약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두려웠다.>
아들과 같았던 이케메푸나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오콩코는 이틀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꼬라지가 못내 부끄러웠다,
<언제 이렇게 덜덜 떠는 늙은 여자가 되었는가? 전쟁의 무훈으로 온 아홉 마을에 그 이름을 떨쳤던 나였는데, 어린 아이 하나를 더한 것으로 이렇게 산산조각 날수 있는가? 오콩코 너는 이제 정말 여자가 되었구나. 오조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느냐?>
연이어 오콩코에게는 또다른 불운이 닥쳤다.
<북을 울리고 총과 포를 쏘고 남자들은 미친 듯 주변을 뛰어다니면서 나무와 동물을 보이는대로 베어 버리고 담을 넘어 지붕에서 춤을 추었다. 그것이 전사의 장례식이었다.>
부족 어르신의 장례식에서, 오콩코의 총이 오발되어 죽은 노인의 열여섯짜리 아들이 맞아 숨진 것이다.
우발적 살인은 여성형 범죄이다.
그러나 부족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지의 여신에 대한 범죄로서, 칠년동안 고향을 떠나 있어야 하는 것이 부족의 법도였다.
오콩코는 식솔을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외가의 동네로 들어가, 그곳 유지인 외삼촌 '우첸두'의 보살핌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앉아서 불운을 슬퍼하는 사나이가 아니었다.
자신만의 오비(집)와 세 부인을 위한 오비 세채를 지었다
그리고 얌을 재배하면서 열심히 일하여 타향 땅에 안돈하였다.
어느날 고향친구가 방문하여 이웃 '아마베'부족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낯선 백인이 쇠로 된 말을 타고 왔다네. 신탁에 의하여 백인을 살해하고 쇠로 된 말을 신성한 나무에 묶어 두었다네. 얼마 후 백인 셋과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마을 사람들을 몰아넣고 총을 쏴 아마베 부족은 몰살을 당하였다네.>
남부에서도 진작부터 아프리카 북부의 백인들의 행태에 대한 얘기가 떠돌았었다.
<강력한 총과 독한 술로 노예로 잡아 바다 건너로 데려가는 백인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도, 어느 누구도 그 얘기를 사실이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연이어 들리는 소식.
선교사들이 우무오피아에 들어왔다.
그들은 교회를 세울 터를 달라고 마을 어른에게 청하였다.
마을에서는 '악령의 숲'을 그들에게 내어 주었다.
악령의 숲은 문둥병이나 마마같은 아주 사악한 질병으로 죽은 모든 이들이 묻혀있는 곳으로 어둠의 사악한 힘과 기가 살아있는 곳이었다.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곳에다 집을 짓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미친 백인 남자들은 그곳에다 교회를 지었다.
주민들은 나흘안에 그들 모두 죽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다,
백인들은 처음에 소수의 개종자를 얻었는데 그들은 '오수'들이었다.
'오수'는 신에게 바쳐진 사람으로 부족에서는 제쳐놓은 신분의 사람들, 대대로 영원한 금기의 족속들이었다.
오수는 일반인과는 결혼할수도 없었고, 특정한 곳에서만 모여 살아야 하였으며 죽으면 악령의 숲에 묻혀야 했던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백인의 교회는 차츰 세를 불려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 백인의 교회에 혹한 사람들은 칭호가 없는 사람들로서 대부분은 '에풀레푸'라 불리는 가치도 쓸모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백인 교회로 몰려들었지만 부족의 지도자들에게 그것은 근심거리였다.
그렇지만 악령의 숲에서의 괴이한 믿음과 백인의 신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위무하였다.
그리고 그 개종자들은 부족의 쓰레기라 불렸다.
개종자 중에는 오콩코의 아들, 은워예가 있었고, 은워예는 다시는 아버지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칠년이란 세월을 채우고 오콩코는 고향으로 귀환하였다.
잃어버린 일곱해를 찾고자 하였으나 고향은 옛날의 그 고향이 아니었다.
백인이 웃대가리가 되어 설처대는 고향땅.
하층민이나 부랑자뿐 아니라 이제는 부자마저도 교회에 들어갔다
칭호를 둘이나 가지고 있었던 ‘우곤나’까지도.
백인들은 교회와 함께 정부도 가지고 왔다.
재판소를 세웠다,
지역의 치안판사가 주민들이 그런 법이 있는줄도 모르는 사건들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판사는 법집행의 하수인으로 법원 전령이라는 것을 두었다.
이들은 ‘코트마’라고 불렸는데, 칭호가 있는 사람들도 백인의 쫄따구, ‘코트마’가 되었다.
코트마는 동족에 대하여 거만한데다가 횡포를 일삼아서 우무오피아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초기에는 쌍둥이를 버린 사람(쌍둥이는 신의 저주, 항아리에 담아 악령의 숲에 버려야 했다)이나 기독교를 괴롭힌 사람들이 갇혔다.
이들은 감옥에서 코트마에게 구타 당하고 돈을 빼앗겼다.
<그들은 우리 관습이 나쁘다고 말하네. 백인은 대단히 영리하네. 종교를 가지고 아무 말없이 조용히 들어왔네. 우리는 그의 바보짓을 즐기면서 여기에 머물도록 했네. 그들은 우리 형제들을 야금야금 손에 넣었고, 우리 부족은 더 이상 하나로 뭉쳐 행동하지 않네. 그가 우리를 함께 묶어 두었던 것들에 칼을 꽂으니 우리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네.>
그러나 좋은 점도 없지 않았다.
교역소를 세웠고, 이전과는 달리 야자유와 열매도 비싼 물건이 되어 많은 돈이 우무오피아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백인들은 학교와 병원을 지었다,
백인의 약은 효험이 있었고, 교육받은 자는 법원 전령이나 법원 서기까지도 될수 있었으며 선생도 될수 있었다.
우무오피아에서 가장 큰 죄는 ‘에구구’(마을의 장로들이 탈을 쓰고 조상의 영령이 되어 재판을 하는데 이 조상의 영령을 에구구라 한다)의 탈을 벗기는 것이다.
에구구의 탈을 벗긴다는 것은 바로 조상의 영령을 죽이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광신도가 된 무당아들 '에노치'가 한 에구구의 탈을 벗겨 버렸다.
마을은 혼란에 빠지고, 에노치는 교회로 도망가 숨었다.
사람들이 에노치의 집을 불살랐고 교회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오콩코를 포함한 여섯남자가 체포되었다.
수갑에 채워진 여섯남자들은 코트마에게 머리카락이 깎이고 등에 채찍을 맞으면서 모욕을 당하였다.
오콩코가 소리쳤다.
<“내 말대로 백인 놈을 죽였어야 했습니다.”“그랬다면 자네는 우무루에서 교수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을 거야”>
벌금을 내고 풀려나 복수를 다짐하는 오콩코.
장터에 사람들이 모였다.
<사내다운 사내는 다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의 모든 신들께서 울고 계십니다, 이데밀리께서 울고 계시고, 오구구께서 울고 계십니다!.>
그때 장터의 모임을 해산시키려고 코트마들이 기습하였다.
오콩코는 도끼를 꺼냈다.
도끼를 휘들러 코트마의 우두머리의 목을 처 떨어 뜨렸다.
<오콩코는 죽은 남자를 응시하며 서 있었다. 그는 우무오피아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군중이 다른 전령들을 도망가도록 놔 둔 것으로 알수 있었다. 사람들은 행동하는 대신 혼란에 빠져 버렸다.>
오콩코는 뒷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에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부정(不淨)한 것으로 스스로에게 죄악을 저지르는 행위였다.
그렇지만 오콩코는 백인들에게 끌려가 수치를 당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만이 오콩코가 자신의 존엄을 지킬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치안판사가 말하였다. “왜 당신들이 직접 그를 끌어 내리지 못한단 말입니까?”“우리의 법도에 어긋납니다.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그의 몸에 손댄다는 것은 부정한 짓입니다.”>
치안판사는 학자이기도 하였다.
아프리카에서 겪는 모든 것들이 그에겐 새로운 자료들이었다.
전령을 죽인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있는 읽을거리일 것이다.
그는 많은 생각 끝에 이 야만의 종족에 관한 책의 제목을 정해 놓았다.
“니제로 강 하류 원시종족의 평정”
소설은 이로서 끝났다.
이 장편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우무오피아의 부족에게서, 주인공 오콩코에게서 그 어떤 야만(野蠻)도 엿볼수 없었다.
집에 사당을 두고 조상의 영령을 받드는 행위라던가, 무당이나 주술사의 그 신탁이 야만스러운가.
서구의 마녀사냥까지 들먹일 것 없다. 믿슙니다를 외치는 현대의 신앙이라는 것도 그렇다면 얼마나 미개한 것인가.
아들같이 따르던 소년을 처형한 것이 그토록 야만스러운가.
전국시대 일본, 정치적 논리로써 이에야스는 아들을 할복케 한다.
메리메의 소설 ‘마테오 팔코네’에서 자신의 도덕률로서 아들을 처형하는 아버지도 있다.
숙명적 당위로서 상황에 순응하는 아비짜리의 결단은 나름의 윤리에 기인하는 것.
심지어 그리스적 장엄한 비극미 없지 아니하다.
그리고 ‘이보’마을 부족 공동체의 삶의 방식은 아름다웠다.
지혜와 유모어가 담겨있는 격언과 속담들.
풍요로운 문화와 풍습들.
노동과 휴식과 여흥을 아우르는 넉넉한 생활양식.
전통사회로서 원칙과 규율.
경건한 신앙과 엄격한 제의(祭儀).
야만은 커녕 미학이 스며있는 아름다운 문명의 마을이었다.
야만은 오히려 아프리카를 난도질한 서구(西歐) 제국주의의 칼날에 있었다.
아메리카로 팔려간 천만의 노예, 기아와 빈곤, 독재와 내전과 학살.
아프리카대륙의 비극은 제국주의가 저지른 야만(野蠻)의 산물(産物)이다.
문명이라는 미명(美名)의 탈을 썼지만 그것이야 말로 인간적 미개함이었고 욕망만이 기승을 떠는 야만이었다.
열강은 즤들끼리 쑥덕쑥덕, 즤나라 이익에 따라 아프리카대륙에다가 자를 대고 좌악좌악 직선을 그었다.
그 직선이 바로 국경이었고 종횡의 직선으로 나뉜 한칸의 영역이 곧 나라가 되어 버렸다.
오순도순 끼리끼리 잘 살고 있는 부족공동체를 마구잡이로 이합집산하여 국가라는걸 만들었던 것이다.
부족집단이 국가집단으로 바뀐걸 ‘미개(未開)에서 문명’으로의 진보라고 한다면 그건 제국주의의 개소리.
그것은 개별적 가치를 집단적 천박함과 엿바꿔 먹은 것이고, 부족적인 행복이 국가적인 비극으로 뒤바뀐 것에 다름 아니다.
‘아마존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타리를 보면서 나는 감탄하였다.
유방과 성기를 노출한채 원시적 삶을 영위하는 그들의 생활모습이 신기해서가 아니라, 나를 감탄케 한 것은 그들 눈빛과 표정과 인상(印象)이었다.
안정되고 정돈된 그들의 얼굴.
그 표정 어디에 미개한 모습이 엿보인단 말인가.
지성(知性)이 흐르는, 고도로 세련된 문명인의 얼굴이었다.
단순히 ‘순박하다’ 따위로 설명되어 질수 없는, 인간을 향하여 선(善)한 통찰력이 깃든 지성인의 얼굴이었다.
‘열대의 야만’이란 서구적 상상이 만들어 낸 헛소리다.
아마존의 오지까지 침투하는 도회의 잡것들.
그 때문에 그들 '지성의 얼굴'은 차츰 문명에 찌든 '야만의 얼굴'이 되어 갈 것인데, '아마존의 눈물'에서 나는 그것이 슬펐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구조주의의 담론때문이 아니라 ‘레비 스트로스’라는 뛰어난 지성이 느꼈던 그 슬픔을 엿보고자 꼭 읽으려 한다.
아, 열대는 그놈의 ‘문명’이란 이름의 야만적 기준에 의하여 재단되는 그것 때문에 슬픈 것이다.
나는 어떤 엉뚱한 ‘역사의 변증’을 <몽상>한다.
인류가 도달할 미래의 양태는 부족적 양태일 거라는.
국가란 어떤 형태로 존속할런지 알수 없지만, 인류가 추구하는 삶의 양식은 필경 부족적인 것일게라는.
사람의 본성이 그러하여, 역사의 변증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사랑과 믿음과 의탁이 있고 아름답게 죽을수 있는, 그 부족적 삶을 궁극적으로 선택하리라는.
부족에게로 돌아가자.
국가 집단이란 진정한 공동체가 아니다.
집단 속의 개별이란 무참한 실존적 개별이다.
존재가 너무나 고독하여 두려울 뿐인 개별이다.
집단 속의 개별은 오로지 참혹한 개별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야말로 산산이 부서졌다.
소중한 가치들이 죄 부서져 버렸다.
집단화에 현대화에 세계화에 산업화에 자본화에 도회화에 문화화에 제도화에 사상화에 이념화에.
나는 이 소설을 잘못 읽었을지 모르겠다.
부족주의의 미학만을 굳이 보려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를 굳이 부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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