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마지막 4중주>
***동우***
2013년 10월 16일
영화 : 마지막 4중주 (A Late Quartet)
개봉일 : 2013년 7월 25일
감독 : 야론 질버먼
출연 : 크르스토퍼 웰컨,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캐서린 키너, 마크 아이반니
근자(近者)에 감상한 가장 괜찮은 영화.
'야론 질버만' 감독의 '마지막 사중주' (A Late Quartet)
음악도 아름다웠고 내용도 아름다운 영화였다.
영화의 모티프는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14번', 또한 이 악곡을 플롯으로 삼았다고 한다.
수준높은 음악애호가 저녁산책님은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음악적 디테일을 높게 평가하였는데 나처럼 딜레당트의 눈과 귀에도 그 점이 여실해보였다.
지휘나 연주나 노래 등, 전문음악가의 소리를 입혀 배우가 대신하는 연기에 있어서 깜쪽같은 눈속임을 하는 것이 헐리웃 시스템의 음악(뮤지컬)영화다.
그러나 노래하는 입모양이라던가 연주하는 손사위에서 미묘한 어긋남이 노출되어, 전문가의 눈과 귀에는 어느 구석 허방이 적발되기도 한다.
물론 나처럼 음악에 일천(日淺)한 아마추어는 실제 배우가 노래하고 연주하는걸로 깜박 속은채 스크린에 몰입하게 되지만.
영화 '마지막 사중주'는 저녁산책님 말씀도 있었거니와 영상으로 구현된 음악적 디테일에 있어서는 어떤 음악영화보다도 완벽하였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주인공인 ‘푸가 현악4중주단’의 4명의 멤버.
그들을 연기한 것은 모두 음악과는 무관한 전문배우들이다.
크리스토퍼 웰큰(피터役),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로버트), 캐서린 키너(줄리엣), 마크 아이반니(다니엘).
내 눈에, 그들이 음악을 다루는 연기는 조금의 어색함도 없어보였다.
맨처음 활이 현(絃)에 닿기 직전, 극도로 농밀한 긴장감을 표출해 내는 순간의 연기라던가.
활을 들고 서로의 눈빛 싸인으로 서서히 소리를 이끌어내는 폼사위라던가.
자신들의 악보(Score)에다 써 갈긴 악상기호와 메모같은 것들에게서 느껴지는 각자의 고집과 버릇. 그런 개성적 캐릭터의 창출(創出)까지도.
연주하지 않을 때 조차도 음악의 대가(大家)들 다운 무게감의 포스가 느껴질 정도였다.
네 사람의 배우들은 프로 음악가로부터 섬세하게 교습(敎習)받아 집중적으로 연습하였을 것이다.
베토벤의 14번 1악장 도입부 아다지오, 관객의 눈과 귀에는 그대로 배우 ‘마이크 아이반니’ 자신이 뽑아내는 선율이었다.
그 소절(小節)만을 얼마나 지독하게 연습하였을까 상상이 된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다양한 앵글로 포착하는 활을 켜는 손과 손가락과 몸짓과 표정들.
전문연주자의 손놀림도 몽타주로 삽입 되었을테지만, 그 자연스러움은 내가 본 음악영화중 최고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실내악의 가장 기본적 구성인 현악4중주.
실내악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독주자(솔로)의 소리와는 다르다.
독주자가 오케스트라나 다른 연주자와 협연으로 만드는 앙상블과 실내악의 앙상블은 같을수가 없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피터가 지적하였듯.
독주자는 매번 다른 도시에서 다른 지휘자나 다른 오케스트라와 불과 서너번의 리허설로 한 두곡을 연주할 뿐이다.
콘체르토는 솔로는 솔로대로 오케스트라는 오케스트라대로 음악적 개성을 주장하여 개인기를 뽐내도 무방한 장르.
오히려 독주자의 소리가 개성을 잃고 오케스트라에 묻혀버리면 그 독주는 실패한 것.
음끼리 함께 어울려 노닐다가도 때로 대립하여 싸움도 해가면서 개성적 기교를 뽐내는 것이 독주자의 소리다.
그러나 실내악은 독주악기처럼 튀는 개인기는 금물이다.
대등한 관계에서 나오는 소리의 조화로움, 앙상블.
실내악의 생명은 바로 그 앙상블이다. <그래서 서로 개성이 강한 피아노와 바이올린 2중주는 실내악에서 제외되는 걸로 나는 알고 있다.>
'푸가 4중주단’은 자그만치 25년 동안 동일한 멤버가 3천번의 콘서트를 한, 연조깊은 4중주단이다.
오랜 세월의 담금질로 만들어 낸 앙상블.
연조깊은 앙상블이야말로 푸가 4중주단을 지탱해주는 근원이고 푸가사중주단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실제는 ‘브렌타노 현악4중주단’의 연주라고 한다)
그런데 팀의 리더격인 첼리스트 피터에게 갑자기 파킨슨병이 찾아왔다. <‘푸가4중주단’은 가장 젊은 연배인 ‘데니얼’의 제안으로 만들어졌지만, 첼리스트 피터는 가장 노령(老齡)으로 멤버의 정신적인 기둥이다.>
병으로 인하여 첼로의 현을 다루는 운지(運脂)가 점점 자유롭지 못해 가는 피터.
바야흐로 ‘푸가4중주단’의 오랜 세월 구축한 그 앙상블이 흐트러지려 하는 것이다.
피터는 누구보다 푸가4중주의 소리를 사랑하는 사람.
물러나는 자신 대신 다른 첼리스트(한국계 ‘니나 리’가 실제로 출연하여 연주한다)를 영입하여 깨어진 앙상블을 어떻거든 복원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허지만 다른 멤버들, 피터의 은퇴결심을 계기로 인간적인 욕망과 갈등들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피터'를 연기한 ‘크리스토퍼 웰컨’
내 인상에 박힌 그의 이미지는 냉혈한이었다. (러시아 룰렛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디어 헌터’, 타란티노 영화에서의 킬러, 배트맨의 악당....)
그런데, 연륜이 만든 부드러움일까 아니면 크리스토퍼 웰컨의 뛰어난 연기력일까.
그 싸늘한 에메랄드 눈빛에서 살기가 사라졌다.
살기는 커녕 음악을 진정 사랑하는 예술가의 눈빛, 인생의 의미를 헤아리는 온화하고 지혜로운 노인의 눈빛이었다.
바이롤리니스트(푸가4중주단의 제2바이올린) '로버트'역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그는 '다우트'에서 메릴 스트립과 대립하는 불꽃연기를 보여 준 배우이고 얼마전 '머니 볼'이라는 영화에서도 그를 보았다.
다른 멤버들은 25년 동안 만들어 낸 소리의 흐트러짐을 우려하지만 로버트는 연주자의 개성을 강조한다.
"연습만 죽어라 한다고 완벽한 연주를 할수 있는게 아냐. 데니얼, 너는 네 해석대로만 베토벤을 연주하려 하고 있어. 새로움을 추구해야 해."
자신의 파트 제2바이올린이 데니얼의 제1바이올린을 받쳐주는 역할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는 그는 이 기회에 데니얼과 파트를 바꾸어 보자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두들 피터의 와병이 걱정스럽고 푸가4중주단의 앙상블을 염려하고 있는 판에 말이다.
로버트는 가장 세속적이고 생활인적인 면모의 캐릭터이지만 음악을 떠나서는 가장 인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아내(줄리엣)로 부터 무시 당했다고 느낀 그는 조깅 친구인 플라멩코 댄서와 바람도 핀다.
그의 그런 소외감과 열등감을 부각시키고저 영화에는 격렬한 정사장면도 있다.
비올리스트 '줄리엣'으로 분한 '캐서린 키너'.
어딘가 진 시몬즈의 인상이 있는데 어떤 분은 영화 속 그녀처럼 늙고 싶다고 한다.
그녀는 스승 '피터' (의 음악)을 존경하고 사모한다.
피터가 떠난 '푸가 4중주단'은 그녀에게 의미가 없다.
'데니얼'과 바이올린의 파트를 바꿔보고자는 남편 ‘로버트’의 욕심.
하필 피터가 아파 물러나는 이 타이밍에 드러내는 남편의 그런 제안이 어이없고, 음악의 앙상블을 생각지 않는 남편의 욕심이 못마땅하다.
평소에도 그녀는 남편 '로버트'를 좀 경멸하는 듯한 포즈가 없지 아니하다.
로버트와 줄리엣의 딸 '알렉스'.
"엄마에게는 비올라가 더 소중해요. 엄마에게 나는 언제나 음악 다음이었지요. 차라리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요!"
알렉스가 꽁꽁 감추어 왔던 엄마에게의 원망과 미움이 또한 폭발하여 불협화음을 이룬다.
순전히 그때문은 아니지만 '알렉스'는 자신의 바이올린 선생이기도 한 '데니얼'과 사랑을 나눈다.
'데니얼'을 연기한 '마크 아이반니'는 낯이 익지 않은 배우이다. (쉰들러 리스트등 여러 영화에 출연하였다는데)
동구 쪽에서 이민이나 망명으로 미국에 온 음악가라는 설정이었는데, 미국적 스노비즘에 물들지 않은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 불타는 인물이다.
그에게 바이올린을 교습받는 알렉스에게 기교가 아니라 베토벤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베토벤을 읽도록 권하는 데니얼.
알렉스가 그에게 반한 이유도 그의 음악을 향한 순수한 열정에 있었을 것이다.
동료의 딸 알렉스와의 불장난이라고 여기는 피터는 데니얼에게 충고한다.
"욕망에만 맡겨버리는 짓은 부끄러운 거야. 삶의 앙상블을 파괴하는 행동은 그만 둬. 데니얼."
"안돼요. 알렉스를 포기할수 없어요"
음악에 대하여는 리더 피터에게 순복하는 꽁생원 데니얼이었지만, 알렉스를 향한 사랑에서는 그처럼 대범하고 진지하였던가 보았다.
로버트, 줄리엣, 데니얼 각자 나름대로 표출되어 어지럽히는 세사람의 갈등과 불화.
그 불협화음에다 대고 일갈하는 피터의 한마디.
"너희들은 음악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
이제 물러나야 할 '피터'로서는 라스트 콘서트.
피터는 연주회장에 운집한 청중에게 자신의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니나 리'에게 첼로의 자리를 물려주고 무대를 떠난다.
이제 새로운 '푸가4중주단'이 탄생되어 새로운 앙상블을 들려줄 차례다.
4사람은 각자 앞에 놓인 보면대 위의 악보를 덮는다.
상징적이면서 감동적인 장면이다.
자신만의 기호로 자신만이 읽을수 있는, 자신만의 개성으로 충만한 각자의 악보를 덮은 것이다.
앙상블에 동화되기 위하여 덮어버리는 개성.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14번'
4개의 현에서 만들어진 소리가 하나로 섞여 흘러나오는 선율.
그 아름다움으로 청중들의 가슴에 앙상블이 넘실거린다.
영혼 가득 조화로운 음악이 흐른다.
그 옛날 어느 즈음 조선소의 현장으로 출근하기 전까지의 이른 시간, 태림맨션의 좁은 내 방에는 베토벤이 울렸다.
당시 먹고사니즘의 현장이란 내 것으로 수렴할 수 없는 끔찍함이었지만 그때의 내 능력으로는 그를 벗어날 길 뵈이지 않았다.
그 때 나는 한마리 철없는, 어린 가장(家長).
자못 비장한 기분으로 턴테이블에 LP를 얹고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던 그 시간 (많아봤자 1시간 남짓.)
딴에는 아수라같은 산업현장의 오탁(汚濁)으로부터의 감염(感染)에 저항할 백신을 주사하고 있었을런가. <음악듣는 시간의 가중치를 함께 느끼고 싶었던지 열 살도 아니 된 아들녀석을 자주 곁에다 앉혔다. 그때 아비와 함께 들었던 음악들을 아들녀석이 여태 기억하고 있어 그건 기쁘려니와 사슴같은 녀석의 눈망울은 내 기억 속의 애틋한 그리움이다.>
회억하면, 그 때 내 현실 어디에도 앙상블은 없었다.
그리하여 그 아침의 음악은 도피였을까, 힘이었을까.
아, 하일리게슈타트의 유서,...70년대 열악한 산업현장, 먹고사니즘의 아버지들은 아침마다 그렇게 베토벤이 되었던 것이다.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한번 해주세요 -한영애 ‘조율’->
두개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그리고 첼로가 만들어 내는 앙상블.
현악4중주."작곡가가 자신의 영혼 깊숙히 들어가서 가장 진실된 생각과 감정을 나타내고 싶을때 만드는 곡은 항상 현악4중주형식이야." <영화 속에서 누가 이런 뜻의 말을 했다. 피터였던가, 데니얼?>
베토벤이 삶에 대한 통찰과 불굴의 의지와 승화된 예술혼으로 만들었다는 음악 '현악사중주 14번' (Op. 131)
지금 나의 새벽, 저녁산책님댁 줄리어드 쿼르텟의 연주가 줄곧 흐르고 있다.
내 푸르른 슈베르트 그 이의 마지막, 이 곡을 듣고 닷새후 죽어 베토벤 곁에 묻혔다고 하니 이 선율 더욱 절절하구나.
쉼없이 달려야 하는 일곱개의 악장.
삐끗하여 중간에 불협화음이 있더라도 현(絃)의 튜닝은 할 수 없다.
삶을 어찌 되돌릴수 있으며 삶에 어디 휴지(休止)가 있던가.
“그래야만 하는가?”“그래야만 한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 위대한 음악가의 귀는 들리지 않았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한다.
그래야만 한다.
긍정이 되어라.
프로메테우스가 되어라.
예술의 불꽃을 훔쳐라.
그리하여 삶의 당위(當爲)를 획득하라.
오, 불멸의 악성(樂聖)이여. 위대하여라.
한살이는 필경 관계의 삶이다.
사람 사물 추상성 유한성 카오스 코스모스 부작위성 부조리 팔자 모순 로고스 파토스..애환 갈등 비탄 분노 기쁨 슬픔 질병 고통...살아있음의 불협화음. 산것들의 불협화음.
삶의 내용이 그러하다.
그래도 살아야 하는가?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치유하는 힘, 그것은 조화로움이다.
앙상블.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수 있는 힘이 있나니.
우리 영혼에 섭리(攝理) 숨어 있나니.
음악
세상에 음악이 없었다면 인류는 어쩔번 하였을까.
<그대 아름답고 즐거운 예술이여!
마음이 울적하고 어두울 때
그 아름다운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언제나 즐거운 기운 솟아나
마음의 방황 사라집니다.
누구의 멜로디일까요.
꿈결 같은 그 멜로디에
내 마음 어느덧 불타는 정열의 나라로 들어 갑니다.
때로는 그대 하프에서 한숨이 흘러 나오고
때로는 그대의 달콤하고 성스러운 화음이
더 좋은 시절의 하늘을 내게 열어 보여 주었습니다.
그대 아름다운 예술이여!
나는 그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슈베르트 '음악에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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