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설국 전,후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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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설국> -前-

-가와바타 야스나리 作-

 

***동우***

2009년 11월 24일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 康成, 1899~1972)의 설국(雪國).

1937년 처음 간행된 이래 내용 보강을 거쳐 1948년에 완전판이 공개되었고, 작가는 1968년 이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

 

오래전.

탐미와 허무의 서정이 가슴 저미게 아름다운, 작가의 계산적 플롯으로 아주 잘 짜여진 이상적인 한편의 소설로서 읽었었던 ‘설국’.

노벨상 운운하는 평판에 쏠리는 얇은 귀에다가, 설익은 나이의 설익은 감성이 보태졌으니 당시 내가 읽고 느낀 '설국'의 미학(美學)은 상당히 왜곡되었을게다.

책부족의 텍스트로 다시 읽은 ‘설국’.

예전의 느낌은 작금의 느낌과 여일(如一)하지 않았고, 기승전결 뚜렷한 플롯이 잘 짜여진 소설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눈 세상.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 부빈 눈에 화안하게 들어오는 신천지.

백색으로 통일된 세상은 기적같은 경이로움이다.

지난 저녁까지만 하여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도회(都會)의 칙칙한 비주얼이었는데.

눈(眼)뿐이 아니라 오감이 환호하는 청랑하게 신비한 기분..

강설(降雪)은 나 사는 부산 땅에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5,6년에 한번쯤이나마 만날 수 있을랑가.

아들놈 강원도 군대생활에서의 눈은 그리도 끔찍한 악몽이었다는데, 아비는 겨울이 되면 늘 올해에는 눈이 내릴까하는 설레임이 있다.

 

눈세상의 아름다움.

그러나 우리는 예견한다.

쌓인 눈이 녹아 내리기 시작하면 드러나는 눈(雪) 후(後)의 추한 그림을.

눈이 녹아 흘러 내리는 구정물, 차츰 모습을 드러내는 못생긴 등걸과 쓰레기들, 사물의 검은 본연의 꼬라지들.

그것들은 눈에 덮히기 전보다 더욱 슬프고 추한 몰골들로 여실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정결한 백색의 통일성과 눈 녹은 다음의 추한 광경.

르노와르의 부드러운 터치가 그린 복사빛 뺨 어여쁜 소녀의 배후에 은근히 비추이는 에곤 쉴레의 해부학적 여체의 면모.

 

이 이중성이란 살아있는 것들의 본질이다.

살아있는 것들의 본래적 성질이란 변(變)한다는 것.

생(生)과 변(變)은 동의어다.

영원할수 없는 육체란 아름다우면서 추하다.

정신이나 영혼 또한 다르랴.

계절은 순환하여 꽃은 또 피고, 지난해처럼 단풍은 물들고, 작년처럼 눈은 내리지만, 모든 산(生)것들은 노쇠하여 추함을 드러내고 이윽고는 소멸하고야 만다.

 

헛됨, 덧없음.

역설의 의미가 예 있다.

아름다움의 진면목.

생명의 배후에 그 덧없음이 없다면 산 것들은 아름다울수 있을런가.

히말라야의 만년설, 녹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돌덩어리의 기막힌 아름다움은 가짜배기 아름다움의 포름이다.

밀로의 비너스에게 죽음은 없다.

불후의 가치를 자랑하는 그 육체에 대하여는 아무도 성욕을 느끼지 않는다.

눈 맛의 아름다움일 뿐, 절실한 아름다움은 거기에 없다,

절실한 아름다움.

'설국'은 만년설이 아니라서 관념의 히말라야는 없다.

관념을 극복한 아름다움이 진짜배기 아름다움이다.

살아있는 주검이라야 아름답다.

죽어가는 삶이라야 비로소 아름답다.

한 여름 비키니 젊은 여인의 굴곡진 볼륨의 오브젝트는 관념이 동하지 않는다.

육체가 동하는 지나친 아름다움이 거기에는 있다.

차츰 변화할 것이므로, 늙어 이윽고는 죽어갈 몸뚱이이므로 끔찍하게 어여쁜 것이다.

 

변화가, 소멸이 이중노출로서 투명하게 비추이는 순간.

생명의 어여쁨이 극에 달한 지점.

산 것의 어여쁨에 대한 환희와 이윽고 스러질 것에 대한 허무함.

그 이중성.

그 감성을 문장의 그림으로 그린, 감각적이고 투명한 소설 ‘설국’.

투명함은 그러나 몽롱하다.

허무와 어여쁨이라는 두 개의 영상의 겹쳐있는 투명함이란 몽롱한 영상이다.

설국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문장으로서 그린 그 몽롱한 그림.

 

인간이라는 존재.

뉘라 아는가, 그 정체를.

왔다가 가는 존재임은 분명한데, 도무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몽롱한 투명함이고 투명하여 몽롱한 그것.

샤갈도 유트릴로도 피카소도 마티스의 감흥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키요에(浮世畵)의 감각도 아니지만 지극히 일본적 정취가 느껴지는 문장의 그림.

 

나는 이번에 번역이 다른 세편의 ‘설국’을 읽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민음사)>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니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환해졌다. 신호소에서 기차가 멎었다. (S출판사)>

<지방의 경계에 있는 긴 터널을 빠져 나가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진 듯했다. 신호소에 기차가 멎었다. (H출판사)>

설국의 문장, 특히 소설을 여는 세 절(節)의 문장은 일본어가 지닌 독특한 운율이 제대로 살아있는 명문장이라고 한다.

이 소박한 몇 음절의 문장이 무에 그리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관념미(觀念美)의 문장이 그릴수 있는 그림은 있을 법하다. <직장생활, 일본인 상대가 많은 업무여서 딴에는 열을 내어 일본어를 공부하였는데, 그 수준이란게 일본에서는 오히려 버벅대는 외마디 영어가 편할 지경이었으니, 나로서는 일본어의 깊은 맛을 알리가 없다. 그나마 자주 접하고 있는 일본일뿐더러, 어린시절부터 내 어머니는 고가 마사오의 기타선율의 정취에 잠기고, 문예춘추를 정기적으로 구독하는등 일본문화에 심취하셨던 분인지라 일본적인 색채는 내게 알게 모르게 심득(心得)되어 익숙한 편이다.>

 

국경(國境).

일본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의 고향을 내 ‘나라(쿠니-國-)’라고 하여 명치유신 이전 일본의 봉건적 자취가 그대로 진한 지방색으로 남아 있다.

터널의 이편의 입구를 들어선 기차는 기인 터널을 씩씩대면서 달린다.

군마현과 니카타현의 경계의 터널.

터널을 벗어나자 홀연 마술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아침과 밤은 하늘에서 내려오지만, 눈(눈) 시상의 밤은 땅으로 부터 하얗게 솟아난다.

비현실적인 몽환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다음의 문장도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역장님, 동생을 잘 돌봐 주세요. 부탁이에요."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높은 울림이 고스란히 밤의 눈을 통해 메아리쳐 오는 듯 했다. (민음사)>

<"역장님, 동생을 좀 잘 보살펴 주세요. 부탁이에요." 애련할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높은 울림소리가 밤눈에서 그대로 메아리쳐 올 것만 같았다. (S출판사)>

<"역장님, 동생을 좀 잘 돌봐 주세요. 부탁이에요." 슬플이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높은 울림 그대로 밤의 눈 속에 메아리가 되어 울려 올 것만 같았다. (H출판사)>

 

병든 사내를 진정으로 간호하며 건너편 좌석에 앉아있는 청순한 인상의 처녀, 밑바닥이 하얘진 몽환적인 심상에 울리는 영롱한 목소리.

저릿하게 만드는 투명한 아름다움을 나 또한 시마무라처럼 느낄수 있을듯하다.

민음사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는 좀 상투적이다.

어여쁜 소녀의 영롱한 목소리의 아름다움이 슬프다는 느낌을 자아 낸다는걸 뉘 모른다고,

슬픔에는 슬픔과 더불어 어떤 가엾음의 느낌이 함축되어야 옳은 표현일 듯.

원작의 단어가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이 경우에는 삼성판의 ‘애련할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가 내 기분에는 상당히 맞는다.

 

으흠, 번역의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원작의 언어는 물론, 그 나라의 문화 역사 사회에 능통하고 해박한 사람이 원작을 곱씹고 곱씹어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 연후에 비로소 원작과는 다른 자국(自國)언어의 새로운 감수성에 맞는 문장을 만들어내야 하는 그 지난한 책무...(그야말로 껌값 정도.. 우리나라 번역문화의 현실이란 참담하기 그지없다는 걸 알지만.)

 

2.

 

시마무라는 비현실적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농세(弄世)의 폼으로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

그렇지만 세상을 사는 방법이 시니컬할지라도 그의 의식에 위선은 없다.

그에게 내재된 이중성의 근본은 그러니까, 허무이다.

뼛속 깊은 허무주의.

<서양의 인쇄물에 의지하여 서양무용에 대해 글을 쓰는 것 만큼 편한 일은 없었다. 보지 못한 무용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이보다 더한 탁상공론이 없고 거의 천국의 시(詩)에 가깝다.>

작가는 자신의 문학을 시마무라가 서양무용을 얘기하듯, 그렇게 추상적인 것으로, 냉소적인 것으로 고뇌하는바 있었을런지.

소설의 주인공 시마무라는 필경 고종명(考終命)하지 못할 사람, 뒷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자살이 엿보인다.

 

<거울 밑바닥에는 저녁 풍경이 흐르고 있었는데, 결국은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영화의 이중 노출처럼 움직이는 것이었다. 등장인물과 배경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은 투명한 덧없음이요, 풍경은 저녁 어스름의 희미한 흐름이어서, 그 두 가지가 융합되면서 현실세계가 아닌 상상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더구나 아가씨 얼굴 한복판에 산과 들의 등불이 켜질 때는, 시마무라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슴이 미어지게 설렐 정도였다.>

<그러한 때 그녀의 얼굴 속에 등불이 켜졌던 것이다. 이 거울의 영상은 창 밖의 등불을 지워버릴 만큼 진하지는 않았다. 불빛도 영상을 지워버리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불빛은 그녀의 얼굴 속을 흘러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밝게 비치지도 않았다. 차갑고 먼 빛이었다. 자그마한 눈동자의 언저리를 반짝 밝히면서, 결국 아가씨의 눈과 불빛이 겹쳐진 순간, 그녀의 눈은 땅거미의 흐름 사이에 떠 있는, 요염하게 아름다운 야광충(夜光蟲)이었다.>

 

이 그림은 얼마나 몽환적인가.

유리창 너머 투과된 풍경과 유리창에 반사되어 비추이는 영상, 그 이중노출.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버스 유리 창밖 도시의 야경, 그리고 유리창에 비추인 술 취한 내 얼굴.

그 몰골은 때로 몹시 추악하고 때로는 다소 이뻐 보였는데, 그 때 내 심상의 색갈은 어떤 것이었을까.

현실이며 또한 환각의 오브젝트, 이중적으로 묘사한 초현실적인 그림.

비치는 것과 비추이는 것이 하나의 감광지에 투영되어 만들어내는 몽롱한 영상.

사진을 할 적, 암실에서 그런 이중노출의 영상을 여러번 시도하였었다.

만족할만큼 성공한적은 없었지만. (요즘에사 포토샵의 레이어로 얼마든지 실험이 가능할터이지만)

생각건대 '설국'은 그 이중노출에 성공한 소설이다.

나는 시종, ‘설국’을 그러한 이중성, 그 몽롱함으로서 읽었다.

 

<여자의 인상은 이상할 이만큼 청결했다.

발가락 밑의 움쑥 들어간 곳까지도 깨끗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여름의 산 풍경을 보고 온 자신의 눈 때문인가 하고 시마루라는 의심했을 정도였다.>

시마무라의 이중성은 좀 유치하다.

그는 자신의 욕정을 풀어줄 다른 게이샤의 소개를 구마코에게 부탁한다.

여자의 몸을 욕망하면서도 구마코에게서는 짐짓 우정(友情)의 감정을 토로하는 시마무라의 이중성은, 그래도 위선은 아니었다.

<그 제안에 기가 막힌 구마코에게

“당신과는 깨끗하게 사귀고 싶은거야”

“당신과 육체관계를 맺으면 끝장, 오래 계속할수도 없을거구”>

그러나 구미코가 소개하여 준 다른 게이샤를 내친 시마무라.

그리고 ‘안돼 안돼’하면서도 몸을 열어주는 구미코.

<“안돼 안돼. 친구로 사귀자고 당신이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제가 나쁜게 아니에요. 당신이 나쁜 거에요. 아니에요. 지셨어요. 당신이 약해요. 제가 이긴거에요.”

라고 중얼거리면서 기쁨을 참느라고 옷소매를 물었다.>

청결한 인상의 구미코이지만 육체의 내부에는 불같이 타오르는 정염이 있었다.

이중성, 청순함에는 또한 관능이 숨어있어 또한 몽롱한 어여쁨이다.

 

그리고 요오코.

어느날 밤, 요오코는 시마무라에게 동경에 데려가 달라고 조른다.

<“아가씨네 집 사람이 좋다면”

“집안 사람이라고 해야. 철도에 나가 일하는 동생 하나 밖에 없으니까, 제가 결정해도 되요.”

“도오쿄에 무슨 연고가 있어?”

“아아뇨”

“저 사람과는 상의했어?”

“고마짱(고마코)말씀이에요? 고마짱은 미우니까 말하지 않아요.”

“고마짱은 제가 미치광이가 될 거라는 거예요.”>

그리고 자신의 처지가 애달파 흐느껴 울음을 터뜨리는 요오코.

그렇지만 그 순간이 지나자 백팔십도로 변하여, 탕속에서 애련하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지없이 해맑게 노래를 부른다.

역시 가지런하고 반듯한 청초함과 흐드러진 광기가 이중적으로 투사되고 있는 요오코.

파토스가 내재된 로고스의 저릿한 아릅다움이란 마찬가지 몽롱함이다.

 

아, 그러고보니 구마코와 요오코는 동일한 여자일수도 있겠다.

구마코의 음란함과 요오코의 청순함은 대비가 아니라 이중성의 앙상블.

구마코에게는 요오코가 있고 요오코에게는 구마코가 있다.

시마무라에게 있어서 구마코와 요오코는 이중노출로 투사된 동일인이다.

둘의 겹친 영상, 그 몽롱함을 향하여 함몰적 도취에 빠져드는 시마무라.

요오코를 보면서 구마코의 살(肉)을 그리워 하는 시마무라.

 

-계속-

 

 

 

<설국> -後-

-가와바타 야스나리 作-

 

***동우***

2009년 11월 24일

주체나 대상이나 덧없이 변하는 인간.

양편을 오가면서 어느 순간의 경이로운 미적인 대상을 향하여 함몰하는 도취.

그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니다.

<곰과 같은 굳고 두꺼운 가죽을 가졌더라면, 인간의 관능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사랑한다.>

슬이 취한 어느 밤, 구마코는 시마무라에게.

<“자! 돈벌이다.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 무서운 강짜에요. 아세요?”

“누가?”

“죽일거에요.”

“그 아가씨도 거들어주고 있더군!.”

“술병을 들고와서 복도 구석에 서서 말끄러미 엿보고 있는 거예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당신, 그런 눈이 좋으시죠?”

“한심스런 꼴이라고 보고 있었던 게지.”>

이 심한 질투는 실은 구마코 자신의 오오코를 겨냥한 강짜이다.

<“저 애를 당신이 울렸군요.”

“그러고보니 확실히 좀 미친 것 같더군”

“남의 일을 그렇게 보면 재미있어요?”

“당신이 말했잖아? 미치광이가 될거라고. 당신한테서 들은 말이 생각나자 분해서 울었던가 보던데.”

“그럼 좋아요.”

“들어간지 십분도 못되어 탕 속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더군”

“탕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건 그 애의 버릇이에요”

“당신을 잘 돌봐 달라고 진심으로 부탁하던데”

“바보같으니. 하지만 당신은 그런 말을 나에게 이르지 않아도 되잖아요.”

“일러? 당신은 저 아가씨 얘기만 나오면 어째서 그러는지는 알수 없지만. 이상하게 억지를 부린단 말야”

“당신, 저 애를 갖고 싶어?”

“그봐, 그런 말을 하고 있어.”

“농담이 아니에요. 저 애를 보고있으면 장차 나의 고된 짐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웬일인지 그래요. 당신도 짐짓 그 애가 좋다고 여기고, 그 애가 하는 짓을 잘 관찰해 보세요.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게 될 거에요.”

하고 구미코는 시마무라의 어깨에 손을 얹고 정답게 기대어 왔으나 갑자기 고개를 내젓더니,

“아니에요. 당신같은 사람의 손에 걸리면 저 애는 미치광이가 되지 않아도 될는지 몰라요. 내 짐을 가져가지 않겠어요?”

“어지간히 해두라니까”

“취해서 주정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저 애가 당신 곁에서 귀여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난 이 산골에서 신세를 망치는 거예요. 뒤 죽은 듯 고요한 아주 좋은 기분이죠.”>

구마코 자신의 내면에 동거하는 요오코.

구미코의 요오코를 향한 미묘하고 극심한 갈등.

 

대화는 대개 이런 식이다.

한 사람의 대사에 대한 상대방 리액션의 대사는 언뜻 보기에는 심한 비약이고 추상적인듯 하지만 그렇지 않다.

곰곰 씹어 읽어보면 행간의 자연스러운 상황이 눈에 보이고 말하는 사람의 감정상태가 자연스럽고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어떤 아련한 색감으로 감성을 자극한다. (이 짧은 소설을 숙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샤미센, 찌지미, 료오칸, 탕, 게이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엑조틱한 일본적 서정 속에서도 아릿한 허무의 현이 울린다.

<눈 속에서 실을 뽑고, 눈 속에서 옷감을 짜며, 눈 녹은 물로 씻고, 눈 위에서 바래는, 실 뽑는데서 부터 옷감을 다 짜기까지, 모두 눈속에서 이루어지는.. 눈오는 북국의 처녀들의 손으로 짜는 설국 찌지미라는 옷감.>

<시마무라에게 매달리는 구마코에게도 뭔가 근본 태생이 신선한 것이 있는성 싶었다.

그 때문에 고마코의 몸 안에 뜨거운 한 곳이 더욱 시마무라에게는 가엾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러한 애착은 한 장의 찌지미 만큼의 확실한 형적도 남기지는 못할 것이다.

찌지미는 공예품 중에서도 수명이 짧다 하더라도 50년이 훨씬 넘도록 색도 바래지 않고 입을수 잇지만, 인간의 습관이란 찌지미만큼의 수명도 안된다고 멍하니 생각하며..다른 남자의 어린애를 낳은 어머니가 된 고마코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라....

고마코가 안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시마무라는 자신이 살아 있지 않은듯한 가책이 심하게 몰려왔다.

고마코의 전부가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오는데도 시마무라에게선 아무것도 고마코에게 전해지는 것 같지 않았다.>

백색과 붉은 색의 채도감이란 상당히 강렬한 것이다. (이것도 순백과 붉음이 겹치는 이미지의 몽롱함..일장기가 그러한지...)

 

시마무라와 구미코가 이제는 서로의 몸에 익숙하여져서 관능의 밤을 지새고 맞는 어느 새벽.

<야행성동물이 아침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초조하게 서성대는 것과 같은 침착성이 없는 태도였다. 요사스런 야성이 끓어오르는 모습이었다.

그러는 사이 방 안까지 밝아져서 여자의 불그레한 빰이 드러나 보였다. 시마무라는 놀랄울만큼 선연한 빨간 색깔에 홀려.

“뺨이 새빨갛잖아, 추워서”

“춥잖아요. 분화장을 지워버렸기 때문이에요. 저는 잠자리에 들면 금방 발끝까지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걸요.”

하고 머리맡에 놓인 경대를 향해

“기어코 날이 새고 말았어요. 돌아갈래요.”

거울 속에 하얗게 빛나는 것은 눈이었다. 그 눈 속에 여자의 새빨간 뺨이 떠올라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맑고 깨끗한 아름다움이었다.

이제 해가 떠오르는지, 거울 속의 눈은 차디차게 불타는 듯한 광채를 더욱 더 짙게 띄어갔다.

그에 따라 눈 속에 떠오르는 여자의 머리카락도 선연한 자줏빛이 도는 검은색을 강하게 띄었다.>

구미코와의 관능의 밤을 보낸 그 아침에 시마무라는 구마코 너머 요오코를 보고 있는 것이다.

남녀의 농밀한 성애(性愛)는 노골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구마코와 시마무라의 첫 번째 정사가 어느 대목에서 이루어 진 것인지도 모호하였다) 소설의 행간에서 읽혀지는 느낌은 지독한 관능이다.

그 행간의 관능도 내게는 역시 몽롱한 도취였다.

이제 본격적인 게이샤가 되어 그런지 더욱 농염해진 구미코를 두 번째 상봉하였을 때 둘 사이 농탕치는 대화는 처음에는 몰랐었는데 다시 읽으니 매우 음탕하다.

게이샤의 기둥서방일 다른 남자의 성희(性戱) 버릇에 관한 내용이었다.

<“담배를 끊은 뒤로 살이 쪘어요.”

뱃가죽이 두꺼워졌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더라도, 이렇게 다시 만나고 보면 떨어져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하던 친근한 정이 이내 돌아온다.

고마코는 살그머니 손바닥을 가슴에 대고,

“한 쪽이 커졌어요.”

“바보같은 소리. 그 사람의 버릇이야. 한쪽만...”

“어머나 망칙해라. 거짓말, 싫어요.”

“양쪽을 평균하게 하라고 다음부터는 말해.”>

 

3.

 

한번 훑어 읽어서는 문장이나 대사의 맥락이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모종의 작가의 의도가 읽혀진다.

그때 그때 일종의 플래시백 기법으로서 읽어야 이해가 가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그렇게 읽다보니까 어떤 상황의 그림과 대화를 나누는 등장인물의 감성의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기도 한다.

 

두 번째 상봉때의 시마무라와 구마코의 대화.

<여자는 소리없이 웃음을 머금으면서 시마무라의 손을 펴고는, 그 위에 얼굴을 갖다 대었다.

"이 손이 저를 기억해 주었어요?"

"아이, 차라. 이렇게 찬 머리카락은 처음보겠군."

"도쿄엔 아직 눈이 안 와요?"

"당신은 그때 그런 말을 했지만, 그건 역시 거짓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누가 섣달 그믐께 이처럼 추운 곳에 온단 말인가?">

손이 기억하는 여자의 몸이란 어떤걸까. (알 듯 모를 듯, 달착지근한 어떤..)

여자의 머리에 손이 닿았을 때의 차가운 느낌도 일종의 관능이 아닐까.

그에 이어지는 여자의 물음은 “동경에서는 눈이 오지 않으니 이 먼 곳까지 오신 것은 눈구경하러 오신거지요?가 깔려있는 복선이고.

그에 대한 시마무라의 대답은 지난 번 헤어질 때의 대사와 연결짓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지난 봄 첫 번째 만남, 흐드러진 정사 후.

<기진맥진하여 한참동안 잠자코 있더니, 퍼뜩 생각난 것처럼 칼로 찌르는 듯이.

“당신, 웃고 계시네요. 저를 비웃고 계셔.”

“웃긴 누가 웃는단 말야”

“마음 속으로 웃고 있는 거죠? 지금 웃고 있지 않더라도 틀림없이 이 다음엔 웃을 거예요.”

하고 여자는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자신의 몸을 알아 버렸으니 이제 내게 흥미를 잃고 비웃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은 그 전에 나오는 아래의 대사와 연결되어 진다.

<“당신과는 깨끗하게 사귀고 싶은거야”

“당신과 육체관계를 맺으면 끝장, 오래 계속할수도 없을거구”>

그래서 두 번째 상봉때의 대화는.

<‘내 몸을 속속들이 알아 버렸으니 새삼 나를 보러 왔 을리 없어요. 피이. 다시 이 고장을 찾은 이유는 나를 보고 싶어서가 아냐,

눈구경 하러 온 거야.’라고 하는 정인(情人)끼리의 교태어린 투정이 섞여있는 것이다.

그에 대하여 남자는 ‘정말 당신이 그리워 왔어. 전번에 당신은 비웃을 거라고 말했지만 봐, 그건 거짓말이지? 섣달 그믐인데도 불구하고 불원천리 네 몸이 그리워서 이렇게 왔단말이야.“

서로 익숙한 정교(情交)의 달착지근한 농밀함이 확 다가온다.

 

많은 대사가 이런 식이다.

전의 상황에 대한 답의 반응이 후의 대화 사이에 느닷없이 끼어든다.

그렇지만 그 대화를 나누는 그 상황적 감성을 이해하고 나면 그것은 섬세하게 독자의 심금을 건드린다.

이른바 문학이 가지는 일종의 특권이 아닐런지.

문학은 영화처럼 시간에 종속되는 예술이 아니니까.

무덤에 가려고 구미코가 던진 밤(栗)에 맞고도 화를 내지 않자.

구미코가 시마무라에게 매달리며.

<“참 당신은 순진한 분이세요. 어쩐지 슬프신게로군요.”

“언젠가는 목숨마저도 흩어지고 말거에요. 무덤을 보러 가시죠.”>

순진한 것은 순수하고 반듯한 시마무라를 지칭하는 것이고, 슬픈 것은 욕정의 시마무라를 지칭하는 절묘한 은유.

나의 비약은 로고스와, 그리고 파토스까지 닿는다.

약혼자의 무덤에 한번도 가지 않았고, 가려 하지 않는 구미코는 이렇게 말한다.

<“왜요? 살아있는 사람에겐 마음 먹은대로 분명하게 못하니까. 하다못해 죽은 사람에게 분명히 해주는 거죠.”>

곧 죽어갈 병자인 남자에게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그가 살아있을 때인 과거일 뿐이다.

지금은 육체의 쾌락을 탐닉하는 게이샤.

 

마지막 시퀴엔스.

영화상영중 고치창고에서 일어난 화재.

사람들은 화재의 현장으로 달려간다.

시마무라와 구마코도 함께 달린다.

눈과 불.

순백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붉음.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의 느낌 또한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아니다.

<“은하수를 좀 봐요. 참 곱기도 하네요.”

벌거숭이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휘감으려고 바로 거기에 내려 있다.

무서울 이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은하수가 아래로 드리워진 어두운 산 쪽으로 고마코는 달려가고 있었다.

옷자락을 걷어 올렸는지, 그 팔을 흔들때마다 빨간 속옷 자락이 펄럭거렸다.>

<은하수가 내리 쏟아지는 별밤, 저 편에서는 붉은 불꽃이 춤을 추고 낡은 가면같이 아름다운 구마코의 얼굴은 떠오르고, 눈 밭 위에 빨간 속옷은 펄럭거린다.>

소화에 여념없는 사람들 틈에 서있는 구마코는 시마무라에게 말한다.

<“이봐요, 당신, 나를 좋은 여자라고 했지요? 가버릴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울었어요. 집에 가서도 울었어요. 당신과 헤어지는 것이 무서워요. 허지만 이제 빨리 가버리세요.”

“당신이 가면, 난 진지하게 살겠어요”>

구마코가 느끼는 시마무라가 말한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요오코같은 사람일까.

구마코가 진지하게 살겠다는 방식은 어떤 방식일까.

게이샤로서 충실한 삶일까.

 

그러나 불타는 고치창고의 이층에는 요오코가 있었다.

이층에서 떨어진 요오코.

불붙은 등걸이 덮쳐 쓰러진다.

요오코는 죽음의 경련을 일으키는데, 시마무라는 그 경련보다 먼저 요오코의 얼굴과 빨간 화살모양의 무늬가 있는 옷을 보고 있었다.

요오코를 부등켜 안고 울부짖는 고마코.

고마코는 어쩌면 또다른 자신을 끌어안고 자신의 로고스를 향하여 애닯게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희생과 형벌을.

 

소설의 종장은 이렇게 맺어진다.

<“비켜요. 비켜 주세요!”

고마코의 부르짖는 소리가 시마무라에게 들렸다.

“이애, 미쳐요. 미쳐요.”

미친 듯이 소리치는 고마코에게 시마무라는 다가가려고 했으나 요오코를 고마코로부터 받아 안으려는 사나이들에게 밀려 비틀거렸다.

발에 힘을 주고 버티면서 눈을 든 순간,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면서 은하수가 시마무라 쪽으로 흘러 떨어지는 것 같았다.>

미치는 사람은 구마코일까, 요오코일까.

시마무라가 발에 힘을 주면서 눈을 들었을때 보이는 것은 구마코인가, 요오코인가.

아니, 어쩌면 시마무라는 피상의 그녀들이 아니라 자신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살아있는 스스로에게 내재된 이중성의 허무를.

그 끔찍하도록 아름다운 허무를.

쏴아 하고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별무리의 그 아름다운 허무를.

 

생(生)과 변(變)은 동의어.

그곳, 유자와 온천의 눈은 만년설이 아니다.

눈나라(雪國)는 몽환으로서 살아있음이다.

죽음이라는 관념이 내포된 삶의 리얼리즘이다.

주검이 투명(透明)하게 비추인 산(生)것들은 서늘하게 아름다운 몽환이다.

몽롱한 형태미(形態美)의 그 포름(forme).

설국(雪國).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그 포름을 만들어 냈다.

 

지극히 일본적인, 감각적인 글을 쓰는 세사람의 작가는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모두 일본적인 허무가 깔려 있는 듯 하지만, 그러나 죽음의 미학(이런게 있다면)은 극명하게 다르다.

1948년에 죽은 다자이 오사무(1909년생).

1970년에 죽은 미시마 유키오(1925년생).

1972년에 죽은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년생).

미시마 유키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찬양하였으나 다자이 오사무를 경멸하였다.

그러나 나는, 문학은 아름다웠을지언정 자위대 본부 발코니에서 스스로 배를 가르고 죽은 미시마 유키오를 경멸한다.

인간으로 태어나 무슨 그 따위로 죽는단 말이냐.

'설국'에서 나는 익숙한 어떤 모습의 다자이 오사무를 보았다.

내 안에 담겨져 있는 나의 모습이기도.

다자이 오사무는 이중성의 그림자로서 언제나 내게 담겨져 있는데, 그 그림자 역시 네가티브의 몽롱함이다.

내 안의 다자이 오사무, 포지티브의 영상으로 얘기할수 있을런지.

언젠가는.

 

술에 깝북 취하여 눈 속에 묻혀서 죽고싶다.

얼어죽는 욱체적 고통은 없이.

그런가, 역시 관념인가.

나란 인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