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논어를 읽기 전>
-정춘수 作-
***동우***
2013년 9월 3일
내가 본, 장이머우(장예모 張藝謀, 1950~) 감독의 영화.
붉은 수수밭, 진용(秦俑), 국두(菊豆), 귀주 이야기, 인생, 영웅, 황후화...
장이머우의 미장센에는 색깔이 짙다.
붉은색과 황금색.
그러나 영웅이나 황후화와 같은 웅대한 스케일의 화려한 스펙타클 영화는 내게는 별로였다.
눈맛은 황홀하였지만.
내가 최고로 꼽는 그의 영화는 인생, 붉은 수수밭, 귀주이야기, 국두...
장이머우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총감독을 맡아 개막식을 연출하였다.
그 잔치 마당에 그는 화려하게 공자(孔子)를 부활시켰다.
엄청난 물량, 공자의 제자로 분한 수천명의 인력을 동원한 몹씬으로
문화혁명 때 그토록 타도의 대상이었던 공자.
지금은 세계 곳곳에 공자학원(孔子學院)을 세워 중국문화를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한다고하니.
시대와 나라를 지배하는 이념이라는게 이토록 허망하다.
역사의 아이러니, 어디 한둘이랴마는.
정춘수의 책, ‘논어를 읽기전’
아시다시피 논어(論語)는 공자님으로 표상되는 대표적인 유학경전이다.
그리고 ‘천자문’ ‘동몽선습’ ‘통감절요’ ‘소학’ ‘내훈’ ‘명심보감’, 이 6권의 책은 논어를 읽기 전 반드시 독파하여야 하는 <독파정도가 아니라 심화하고 체화하여야 하는> 옛 선비사회의 검인정(?) 교과서였다.
나로서는 천자문을 좀 들쳐보았고 명심보감을 잠간 독습(獨習)한적 있을 뿐이지만, 작금에는 거의 잊혀진 책들일런지... <여름철이면 지리산 청학동 서당에 아이들 몰리고 한자능력검정시험 어쩌구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듯 하여 반갑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 책부족 '정춘수'님. (後로는 '저자'라 함).
책날개에 있는 저자소개.
[저자 정춘수는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1993)를 마쳤다. 전공은 현대 문학이지만 뒤늦게 한자와 한문의 묘한 맛에 빠져서 줄곧 그와 관련된 책과 콘텐츠를 생산해 왔다. 현대인의 삶에 남겨진 한자와 한문의 흔적을 발견하고 모으고 재가공한 뒤 글로써 나누는 일에 남모르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 ‘한자 오디세이(2003), ‘만화로 즐기는 한자 오디세이 1 2 3 (2003, 2004), ‘한 줄로 익히는 초등한자’(2008), ‘한자만 좀 알면 과학도 참 쉬워’(물리2006, 화학 2007), ‘마법천자문 고사성어-고급편’ 전3권 (2008, 2009) 등을 짓거나 편집했다.]
한문(漢文)의 깊은 맛을 아는 저자로서는 옛 교과서(千字文, 童蒙先習, 通鑑節要, 小學, 內訓, 明心寶鑑)의 개념과 지식을 요즘의 그것과 맥을 잇고 싶었을 것이다.
외피의 형해(形骸)가 아니라 옛 사람들이 갖추고 지향코자 하였던 윤리 미덕이나 철학적 소양의 컨텐츠로부터 현대인들에게도 절실할만한 가치를 찾아내어, 그 교합점에 대하여 쓰고자 하였음을 책 머리에서 저자는 밝힌바 있다.
생각건대 저자의 의도는 성공하였다.
여섯권의 한문고전의 내용은 상당히 방대하였을 터인데, 저자는 영리하였다. <'내훈'은 한글로 씌어졌다, 이 사실도 처음 알았다>
엄청난 분량의 컨텐츠를 개괄 조망하여 개론서의 맛뵈기의 방법을 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현대적 사유(思惟)>가 머무는 대목에 집중하였다.
그 부분을 발췌 요약하여 저자의 지적(知的)색감으로 각색한 친숙한 언어로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저자가 들려주는 내용들은 한중일 동양 3국 뿐 아니라 서구까지 아우르는 문화사적 인문교양으로서도 매우 유익하다.
이 책을 읽고나서 지적대화(知的對話) 질펀한 주석(酒席)같은데서 좀 으스댈만 하리라.
'논어를 읽기 전' 이 책을 얘기하기 전에, 한문(漢文)에 대하여 옆길로 좀 새자.
1960년대 다녔던 중동(中東)중학에서 나는 한글전용 주창자(主唱者)인 '최현배'선생의 교재로 ‘우리말본’을 배웠다. '이름씨'니 '어찌씨'니 '그림씨'니 (명사,부사,형용사) 하는 낱말들은 귀에 익은 편이다.
그렇지만 나는 한글전용에 대하여는 적극 반대하는 입장임을 분명히 밝힌다.
'배꽃계집큰배움터'가 무어람, '이화여자대학교(梨花女子大學校)'가 가독성(可讀性)이나 해독성(解讀性) 어느 모로 보나 월등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적극 동감하는바, 다음은 작가 '김훈'의 말이다.
<철학을 우리 모국어의 언어적 질서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국어는 서정시를 쓰기 좋은 것입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처럼. 그 외에는 신뢰하기 어려운 글자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생각이었으면 좋겠는데, 틀린말이 아닐 것입니다.>
<난 한문이 가지는 언어적 긴장을 매우 좋아합니다. 모국어의 문화적 능력을 별로 신뢰하지 않아요. 나는 내가 내 모국어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 모국어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빈약하고 형성과정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한자의 긴장감을 좋아합니다. “최근접 거리”란 말이 갖는 긴장감은 “가장 가까운 거리”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나의 편견은 올바른 것이 아니길 바라는데, 나는 그렇게 씁니다. “칼이 들어가 적을 살(殺)하였다” 라고 쓰지 “칼이 들어가 적을 죽였다”고 쓰지 않습니다. “죽였다”고 말할 때는 연민이라든지 죽임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지저분한 인간의 정서가 느껴집니다. 조선시대 병법은 다 “살(殺)”이라고 나옵니다. 살(殺)하는 것은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동작을 의미하는 기술용어입니다. 이걸 비난하더라도 그걸 쓸 수 밖에 없는 내적 필연성을 가지는 것이죠.>
<한국어를 쓴다는 것은 조사를 쓴다는 것입니다. 한국어를 읽는다는 것은 조사를 읽는다는 것이죠. 한국어는 조사에 의지합니다. 조사를 읽지 않고는 문장을 이해할 수 없어요. 형법에 보면, “타인(他人)을 기만(欺瞞)하여 재물(財物)을 편취(便取)하는 자를 사기(詐欺)라 한다”란 표현이 있는데, 한국어는 조사 뿐입니다. 남을 속여서 돈을 뺏어먹는 자를 사기라 한다고 하면, 의미 규정력이 떨어집니다. 조사 얘기를 더 하겠습니다. 흔히 “재벌 총수 아무개씨가 몇 월 몇 일 어디에서 자살했다”고 씁니다. 이때 “아무개씨는” 이라고는 쓰지 않습니다. 정책을 발표할 때는 “재벌총수 아무개씨는 ...” 이라고 씁니다. “는”과 “가”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국문법 책들을 뒤져봤는데, 설명이 없었습니다. 신문은 주격조사를 뒤죽박죽해서 씁니다.>
<난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다양한 맛에 대응하는 인간의 언어가 없다는 것에 대해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프랑스어 교수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프랑스인들은 포도주의 맛을 표현하는 독특한 언어가 있었어요. “구조가 튼튼하다, 미끈거린다, 뒤뚱거려서 불안하다”는 표현을 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없는 어휘죠. 포도주를 마실 때도 어휘의 무력감을 느끼는데, 그러면 술맛 다 떨어집니다. 하물며, 이 시대의 복잡하게 얽힌 전체를 들여다보면 무력감을 느끼죠. 새로운 언어적 장치가 개발되지 않는 한, 우리의 글쓰기는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기 어렵습니다. 6하원칙에 매달려서는 이미지를 앞세우는 새로운 매체를 따라가기는 어렵습니다. 집에서 조선일보·국민일보를 보는데, 6하원칙을 보강하는 새로운 시도가 있을까, 그걸 넘어서는 새로운 장치의 실험, 그 결과가 있을까 하는 기대를 있는데, 아직 그런것들을 볼 수 없더군요.>
한글전용 반대에 대하여 한마디 더 하자.
혹자(或者)는 중화사대주의(中華事大主義)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치(所致)라고 하던데, 수천년 연연히 이 땅에서 문화의 골격을 이루고 인문(人文)을 창달한 우리말을 우리가 쓰는데 사대주의가 무슨 말이냐.
우리말 어휘의 부족, 의미소(意味素,意義素)의 빈약함은 긴 세월 한문(漢文)에 짓눌려 발육장애 성장장애를 일으킨 탓임은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한문은 오로지 중국 것이니까 이 땅에서 완전히 척결하자는, 이를테면 어문학적 혁명을 하자는 것인데 과연 옳은 주장일까.
우리가 쓰는 한문(漢文)은 이제 우리 어문(語文)이다.
우리 것으로 삼아서 끊임없이 진화하여 온, 漢文이 아니라 韓文이다. <영국에서 쓰는 영어는 영국의 어문이고 미국에서 쓰는 영어는 미국 것, 라틴어는 로마의 어문이고 라틴어에서 파생된 유럽어는 제각각 쓰는 나라의 것, 한문에서 파생된 '가나 (がな)'는 일본 것이고..>
한글전용도 그렇거니와, 나는 ‘과거사 청산’이니 ‘역사 재정립'이라는 말이 좀 우습게 들리는 사람이다.
당세대 오욕과 억울함이 있다면 당연히 청산하고 시시비비를 따져서 손익 결산을 해야 함을 부정하는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의 현장, 그 '삶의 자리'를 몽땅 부정해버리려고 하는 '과거사 청산'과 '역사 재정립'이다.
지사(志士)의 삶을 살지 않았던, 역사현장의 범부범부는 죄다 역사 외(外)의 사람이란 말가.
오욕스러운 부분 또한 이 땅 역사의 대목이고, 어쩌면 시대를 살아 낸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자리'야말로 역사의 현장이다.
그 리얼리즘은 엄숙한 것이다.
그 엄숙함에 대하여 관념론적 비좁은 이념으로 재단하려는 자들의 구호에 나는 식상(食傷)하다. <차라리 웅녀(熊女)의 동굴로 돌아가자고 하시지들.>
다시 '논어를 읽기전'으로.
옛 것과 지금의 것을 잇는 연결고리. 고금(古今)의 가치관(價値觀)의 교합점.
그것을 저자는 문자적(文字的) 하드웨어가 아니라 인간성이 지니고 있는 편만한 정서(情緖)에서 찾았던가 보았다.
이른 봄날 매화 숲에 들어섰을 적, <옛사람이 그토록 사랑하였던> 매향(梅香)의 성찬(盛饌)이 저자의 코에 가득 끼쳐왔을 때 고금을 관통한 저자의 감성을 한번 상상하여 본다.
오감(五感)중 후각(嗅覺)이 기억중추(記憶中樞)와 가장 깊게 연결되어 있다지 않는가.
정서적기억은 반드시 경험에 의해 각인된 것만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성정(性情)에 근원적으로 깃든 감정(感情)이란게 있는 것이다. <아름답고 더럽고 징그럽고 두렵고 좋고 싫다는.. 집단무의식(集團無意識)같은..>
그런 감정밭이야 예나 지금이나 무에 그리 다르랴.
사유(思惟)란 느닷없이 이루어지는 두뇌의 작용이 아니다.
모든 사유는 감정이 머무는 곳으로부터 발현(發現)된다.
공맹(孔孟)의 학문.
그 유가적(儒家的) 덕성(德性)이 근거하는 곳도 따지고 보면 사람의 성정이 아니겠는가.
저자는 멋진 말을 하였다.
유학(儒學)은 삶의 논리학이라기 보다 삶의 미학(美學)이노라고.
삶의 미학.
사람의 '삶의 자리'는 동물과 다르다.
동물이야 본능에 따름으로서 '삶의 자리'는 충일하다.
그러나 사람의 '삶의 자리'는 '실존의 자리'이면서 '관계의 자리'이다.
그 '삶의 자리'를 가장 편안하고 가장 합리적으로 가장 아름답게 만들려 하는 것이 이를테면 저자가 말하는 '삶의 미학'이 아닐런지.
윤리라거나 철학은 필경 ‘삶의 자리’로 부터 벗어 난 별개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모가 있었다 하더라도 사람의 성정에 기반한 그것.
‘삶의 미학’은 옛과 지금이 그닥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침팬치와 유전자가 96% 동일하다던데 왜 人間은 동물로 치부되지 않는가. <'동몽선습',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주제의 낙호논쟁..>
<天地之間萬物之衆 惟人 最貴 所貴乎人者 以其有五倫也>
하늘과 땅사이 만물가운데 사람이 제일 소중하고 귀하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다섯가지 윤리를 갖추고 사니까 인간인 것이다.
맹선생(저자가 칭하는 孟子)께서 말씀하시는 이른바 오륜(五倫)이다.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맹자 전(前)에 '양자'라는 사람은 '오직 자신만을 위하라'는 위아(爲我)를 말하였고, '묵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겸애(兼愛)를 주창했다고 한다. <전자(前者)는 백이숙제와 같은 은거(隱居)와 도피(逃避)심리, 후자(後者)는 세력 강한 집단이나 종교단체에 의탁하려는 세속적 심리의 근거적 이론이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웠던 역사를 개관한 맹자는 적절한 '삶의 자리'를 통찰하였다.
적절한 이기주의와 적절한 이타주의.
이것이 바로 인의(仁義)의 원칙이다.
등심원의 파문(波紋) 퍼져 나가듯 이기주의를 가족이나 친척 관계의 따뜻함으로 그러한 너그러움을 순차적으로 타인에게 확산시킴으로 의로움을 달성할수 있다는 것.
어질 인(仁) 자(字)
인간관계의 근본이념인 '인(仁)'이라는 글자. <어질, 따뜻할, 인정많을, 지혜로울 仁>
겨우 인술(仁術) 정도에나 쓰일 뿐 이제는 잊힌 글자라고 저자는 아쉬워 한다. (이름 글자로는 많이 쓰이는 것 같은데, 내 어머니의 이름도 仁자가 들어가...)
仁은 정치라는 공적 영역 뿐 아니라 선비의 일상에서 늘 살아 숨쉬던 단어라고 한다.
너그러움, 연민, 동정, 배려, 따뜻함, 박애, 인정, 의리, 용기, 예의, 공정, 신뢰....그런 의미를 포괄하고 있는 글자.
그러니까 ‘仁’은 선비가 갖추어야 할 일종의 이데아적 개념이었다고 한다.
仁慈隱惻 <어진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고 또는 이를 측은히 여겨야 한다.>
造次弗離 <남을 위한 동정심을 잠시라도 잊지 말고 항상 가져야 한다.>
인(仁)을 서양말 '휴머니즘'으로 대치하는 것은 혹 타당할런지.
그런데.
삼강(三綱)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과 오륜(五倫)에 왜 효(孝)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을까. <그리고 孝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없다는 사실.. 한참 더듬어 봤는데 정말 없구나>
孝란 인륜의 근본 대전제(天倫)라서 공맹(孔孟)께서는 생략하셨을까.
孝는 '효하는 감정'과 '효하는 형식'을 아우르는 개념이라고 한다.
부모에 대하여는 언제나 사랑과 존경과 공경의 염을 지니고 있어야 할뿐 더러 제도와 관습에 있어서도 엄정한 형식을 요구한다. <주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에 의한 사당, 가묘제, 삼년상, 제사 등등...>
효는 부모에 대한 감정 뿐 아니라 하나의 이념이다.
우리 집안, 기독교를 믿고나서 제사가 사라졌는데 나는 그게 몹시 안타까운 사람이다.
가족들 둘러앉아 하는 기도모임, 게 어디 연연히 이어져 내려 온 엄정한 형식이 있는가.
아니하면 그로써 그만이지.
'제사'라는 형식은 '삶의 자리'를 아름답게 만든다.
조상께, 죽은 어버이께 절하는 사람들은 그 효의 형식으로써 마음이 아름답다.
편안하다. <아, 내 부모는 내 마음 속 구천을 떠돌고 내 마음은 언제나 불편하구나.>
효는 어디에서 시작할까.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몸뚱이나 터럭 살갗까지 다 부모에게 받았은즉 이를 함부로 망가뜨리거나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니라라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의 몸을 귀히 여기는 것.
그것은 곧 부모님이 키우고 길러 준 수고를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다.
<豈敢毁傷>
부모께서 낳아 길러 주신 이 몸을 어찌 감히 훼상할 수 있으랴.
곧 부모에게 근심을 안기지 않는 것이 효의 본분이다.
저자는 좋은 말을 하였고 나는 공감한다.
<효는 부모 또한 고통받고 상처받는 존재라는 걸 아는데서 시작한다.>는.
하늘.
천자문은 하늘天 따地로 시작하면서 우주관을 드러낸다. <으흠, 그러고보니 동양 옛사람의 우주관은 창세기 1장이 들려주는 얘기와 동일하구나. 위에는 하늘이 있고, 가운데 땅이 있고, 아래에는 하계가 있다는 질서잡힌 세계관 -구약 P자료의 바빌로니아적 우주관->
땅이 중심이고 하늘은 땅의 근원적 도리의 표상이다.
밤하늘 성좌들은 땅 위의 질서와 징조를 상징하고 있다.
신이 부여하였거나 어떤 관념과 도리(道理)가 부여한 고정된 질서의 모습이 곧 하늘이다.
어디까지나 땅과 더불어 존재하는 하늘. <17세기, 코페르니쿠스의 교설(敎說)은 교황 바울5세에 의하여 단죄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지붕처럼 땅위를 덮고있는 하늘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 하늘에는 무한한 우주공간이 펼처져 있을 뿐이다.
태양계는 우주 속에서 지극히 작은 공간이고 지구는 작은 하나의 점일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의 점에 의탁하여 존재하는 인간이란 아무래도 우주의 주인공은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이제 옛사람의 관념 속에 자리잡은 도리(道理)의 그 확고한 하늘은 없어져 버렸다.
옛 사람이 이해하고 자족(自足)하였던 그 세계관.
그것을 우리는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옛사람의 실존(實存)과 우리의 실존의 모습은 완연하게 달라져 버렸다.
인간성의 성정(性情)은 변함이 없으니, 우리의 실존은 고독과 허무와 불안과 소외로 신음한다.
마음은 늘 공허하다.
더욱 많은 '앎'은 더욱 많은 '무지'가 되었고, 그것은 중첩된 공포가 되었다
지식은 우주로 비약(飛躍)하여 하늘을 깨뜨려 버렸는데.
저 무한한 우주공간을 상상하면 그대, 자유로운가.
아니다, 나는 두렵고 공허하고 허무하다.
관념의 하늘과 도리의 하늘.
그 하늘은 허무하지 않아 아름다웠을 터인데.
天之亡我 <하늘이 날 망하게 하는구나>
항우는 유방에 몰려, 하늘을 우러러 마지막 탄식을 한다.
하늘의 뜻에다 한 목숨 순명(順命)하면서 죽는 죽음.
스스로 납득하여 숨을 거두는 유의미(有意味)함이여.
옛 사람의 행복함일찌니.
이 책의 극히 일부분에 관한 것만 늘어놓았다.
대목마다 난만하게 떠오르는 생각들 가지런히 하기에 힘이 부친다.
'논어를 읽기전'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통감절요(通鑑節要), 소학(小學), 내훈(內訓), 명심보감(明心寶鑑)
이 여섯 권의 책을 한권에 담았지만, 개괄적인 개론서가 아니다.
저자의 사유(思惟)가 조명(照明)한 옛 덕목의 알갱이들, 그리고 행간에서 빛나는 저자의 구라빨(하하, 실례)을 들어보라.
우리 부족의 책이어서가 아니라, 죄우간 교양적 재미도 생각할 꺼리도 넘친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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