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前-
-글로리아 네일러 作-
그대, 꿈의 나라 아메리카에 사는 흑인하고도 여성이라는 인간의 삶을 아는가.
권컨대 이 책을 읽어보고, 시간나면 영화 ‘컬러퍼플’을 감상하라.
흑인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세 사람의 흑인 여성작가가 있다.
첫째 ‘토니 모리슨 (Toni Morrison, 1931~2019)’을 꼽을수 있겠다. <1993년에 흑인 여성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
그 다음 세대의 작가가 엘리스 워커(Alice Walker, 1944~ )다. <그녀의 대표작 ‘컬러퍼플’, 소설 못지않게 영화는 감동적이고, 스티븐 스필버그는 가히 거장(巨匠)으로서 손색이 없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글로리아 네일러 (Gloria Naylor, 1950~2016) <이 책은 그녀의 대표작이다>
책부족의 이번 달 텍스트, 흑인 여성작가 ‘글로리아 네일러’가 쓴 장편소설,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The Women of Brewster Place)
가슴 시리면서 아름다운, 참으로 훌륭한 소설이다. <백인 여성이라면 흑인여성의 삶에 대하여 이토록 절절한 페이소스를, 이토록 깊은 리얼리즘을 이만큼 천착이나 할수 있었으랴>
포옥 빠져들게 하는 내러티브, 1960년대 미국 북부의 어느 도시,‘브루스터플레이스’라는 지명(地名)의 빈민가에 살고 있는 일곱 흑인여성들의 역정과 삶에 관한 이야기.
잔잔한 감동의 여운을 남기는 독후의 뒷맛.
그리고 마음에 스며드는, 자분자분 들려주는 '글로리아 네일러' 목소리의 톤.
문장은 유려(流麗)하고 문체는 서정적(敍情詩)이었으며, 민음사 책의 번역도 좋았다.
흑인, 빈곤, 여성.
이 세가지 주제는 만만찮은 이슈를 지닌 것들이지만 그에 대한 작가의 사회의식이 두드러지게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작가의 경향성(傾向性)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해설을 보니 '사회적 리얼리즘' 기법으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언급이 있던데 내게는 전혀 그렇게 읽혀지지 않았다.
나로서는 '사회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짙은 '서정적 리얼리즘'으로 읽었다.
소설에 내재된 함축적인 의미를 내가 간과하여 잘 못 읽었던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서정적 리얼리즘으로 읽었던 것에 나는 만족한다. <다시 펴들어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에게서 사회적 리얼리즘을 눈 부릎떠 다시 살펴 볼 마음은 전혀 없다.>
흑인, 빈곤, 여성.
세 단락으로 주제를 나누어 쓰련다
[흑인에 대하여]
1960년대 초반에 ‘말콤 엑스’가 살해되었고 후반에 ‘마틴 루터 킹’이 피살되는등 어느 때보다 흑인들의 인권의식이 고양되었던 시대를 소설의 시점으로 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주제의식은 편만한 당위(當爲)의 색감으로서 소설의 분위기를 물들이고 있을 뿐이다.
흑인을 얘기하고 있지만, 작가의 목소리가 웅변은 아니었던 것이다.
** 벤 **
등장인물중 드물게 등장하는 남성중 하나인 ‘벤’은 늙은 알콜중독자다.
불쌍한 젊은 흑인여성을 보면 젊은날 헤어진 딸이 생각난다.
딸 생각에 잠기면 그의 귓가에서는 언제나 종소리가 울린다.
수정 구슬과도 같이 맑고 투명한 종소리.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빠?”하는 딸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그는 견디지 못한다.
술을 마셔야 한다.
술을 마셔야 그 종소리가 멎는다.
술이 취하면 언제나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찬송가가락을 노래한다.
“노래하라. 천국가는 마차여.”
남부에서 살 적, 젊은 날의 벤.
백인 집에 청소하러 다니는 어린 소녀 절름발이 딸, 백인의 성적 노리개가 되고 있다는걸 짐작하면서도 벤의 마누라 엘비라는 불구의 딸이 그나마 밥벌이라도 할수 있다는게 고맙기만 하다.
그리고 벤은 무능력한 남자, 마누라에게 꼼짝 못하고 쥐어 사는 검둥이일 뿐이다.
<엘비라가 물었다.
“어저께 우리 딸이 일을 잘 했지요?”
“그럼 잘 하고말고. 껍질을 벗겨놓은 쥐새끼처럼 집을 아주 깨끗하게 청소해 놨어. 올 농사는 잘 될 것 같은가?”
“그저 좋구먼요. 클라이드씨. 좋고말고요. 나리가 우리에게 빌려 준 여분의 땅에 대해서도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
백인 남자는 입을 크게 벌려 담뱃진으로 찌든 치아가 드러나도록 껄껄 웃었다.>
부모를 무척 사랑하지만 자기가 그동안 부모에게 부담스러운 짐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무엇 때문에 자기보고 클라이드씨 집에서 계속 일하라고 했는지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적은 쪽지 한 장을 달랑 남겨 놓고 어느 날 딸아이가 사라졌다.
딸아이는 만일 그런 식으로 자기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면 돈을 더 많이 벌수 있는 멤피스로 가는 편이 좋을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딸은 멤피스에 가서 창녀가 되었다.
소작인 계약권을 잃게 되고 아내 엘비라는 딴 남자의 품으로 가버려, 아내로 부터도 버림을 받은 벤.
벤은 북쪽으로 올라와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아파트 허드레 일꾼으로 살아가면서 어린 창녀가 되어버린 그 옛날 딸의 영롱한 목소리를 잊으려고 허구헌날 술을 마시는 것이다.
** 키스와나 브라운 **
백인 뉘앙스의 본시 이름 ‘멜라니’를 버리고 스스로 아프리카적인 이름 ‘키스와나’로 개명한 급진적 흑인인권운동가인 먹물 처녀.
그녀는 브루스터플레이스의 매가리없이 살아가는 흑인 여성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그들의 연대를 꿈꾼다.
‘린든 힐스’라는 중산층 동네에 사는 키스와나의 어머니 브라운부인이 빈민가를 찾아 딸과 대면하였다.
<“이런 사람들 틈에서, 이 거리와 건물이 너무 누추하고 낡았잖아. 얘야. 굳이 네가 이렇게 살 필요는 없잖니?”
“가난한 사람들은 이렇게 살잖아요.”
“멜라니. 너는 가난하지 않아.”
“아니에요, 엄마.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엄마’예요. 엄마가 가진 것과 내가 가진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요.”>
<“엄마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거예요. 안 그래요? 그놈의 부르주아 학교들은 반혁명적이었어요. 내가 서 있을 자리는 평등과 더 좋은 공동체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 거리였단 말이에요.”
“반혁명적이라고!”
브라운 부인이 목청을 높였다.
“멜라니. 그래 네가 말하던 혁명이 지금은 어디 갔니? 캠퍼스에서 함께 소리 지르고 시위하고 먼지를 일으키던 그 모든 흑인 혁명가들이 지금 어디에 갔지? 어디로 갔는지 말해 봐. 그 사람들은 지금 마호가니 액자에 학위증을 넣어 벽에 걸어 놓고 나무 패널을 댄 사무실에 앉아 있단다. 시에서 관심도 두지 않는 이쪽 지역 도로에 난 구멍 때문에 혹시라도 자동차가 상할까봐 여기로는 자동차를 몰지도 않을걸.”>
<“투쟁의 열기가 사라진 다음 손에 남은 것이라고는 새로운 연방법 몇 조항뿐이었지. 아직도 이 나라에서는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많은 장애물과 맞서 싸워야 하잖니. 멜라니. 혁명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네? 그저 두 손 놓고 우리 흑인들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무관심하란 말인가요.”
“물론 너는 계속 싸울수 있겠지. 그렇지만 체제 내에서 싸워 나가야 하겠지. 왜냐하면 그 체제와 소위 부르주아 학교들이 앞으로도 여기에 오랫동안 존재할 테니까. 멜라니. 빈민가에 살아야만 사회상황에 관심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니? 네 아버지와 나는 지난 25년 동안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에서 설립 위원으로 일했다.”
“아, 또 그 얘기.”
키스와나는 짐짓 혐오감을 드러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게 관심을 가진 거란 말예요? 흑인 공화당원들을 위해 쓰레기 같은 소리나 쏟아 내는 그런 굴종적인 중도파 엉클 톰이요!”>
브라운 부인의 다음 대사는 의미심장한 아메리카 흑인의 의식구조가 아닐런가.
<“너는 알지 못해. 언제나 넌 극단으로 몰고 가서 나비를 독수리로 변형시키는 환상의 세계에서 늘 살고 있잖니. 인생살이는 그런 것이 아니야. 산다는 건 현재를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란다.
현재 나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결코 불평하지도 간청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던 자존심 강한 사람들의 혈통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 살아남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혈통을 통해 내가 배운 건 검다는 것이 아름다움도 추함도 아니라는 거야. 검다는 것은 바로 그 자체란다! 그것은 곱슬머리도 아니고 곧은 머리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것일 뿐이지.”
키스와나는 엄마의 뺨을 타고 흘러 내리는 두 줄기 눈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 모습은 눈물과 혼합되어 엄마의 구릿빛 피부로 스며들었다.>
<그때 불현 듯 엄마도 자신이 항해해야 할 삶의 바다를 앞서 지나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키스와나는 전혀 새로운 길을 걸어 가는 것이 아니다. 결국 소파에서 단지 60센티메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여정이 끝날지도 모른다. 키스와나는 자신의 과거이자 미래인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난 절대로 공화당원은 되지 않을 거예요.”>
키스와나는 어머니에게 공감하였지만, 고작 “그렇지만 난 절대로 공화당원은 되지 않을 거예요.”라는 말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슬픈 흑인이념가일 뿐이었다.
[궁핍에 대하여]
‘브루스터플레이스’가 하나의 블록(block)을 말하는 것인지 4동(棟)인가의 아파트 단지를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하나의 단절된 구획의 동네임은 틀림없다.
옴니버스 구조의 소제목의 모두(冒頭)는 새벽으로 시작하여 종장(終場)은 석양으로 끝난다.
새벽과 석양은 브루스터플레이스라는 동네의 태동과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
로레인은 동성애자라라는 이유로 성폭행을 당하여 공황상태에 빠지고 거의 미쳐가는 정신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준 벤을 벽돌로 내리쳐 죽인다.
구역파티가 열리고 여인들은 브루스터플레이스를 막고있는 단절의 벽돌(로레인이 미친 상태에서 벤을 내리쳐 죽인 벽돌)을 허물고 벽돌을 던진다.
구역파티에는 ‘오늘은 브루스터. 내일은 미국’이라고 쓰인 깃발이 나부낀다.
그리고 비가 쏟아지고 브루스터플레이스는 죽어 간다.
법정명령과 퇴거통지서, 전기도 가스도 수도관도 끊겨 버렸다.
거리가 죽어가는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늘을 덮개로 삼고 떠나가는 관을 따라 애도하며 걷는 이도 없다.
계절풍이 불어와 사람이 살던 냄새도 사라지고 먼지나 그을음이 무명의 수의가 되어 감싸고 있다. 오로지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다
내 어줍잖은 먹고사니즘 강의과목중 하나인 부동산학개론에 인근지역의 수명현상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일정한 구역의 생명 사이클을 말하는 것이다.
성장기-성숙기-쇠퇴기-천이기-악화기
도시개발로 어떤 지역이 개발되면 이와 같은 순서를 밟아 활짝 폈다가 이윽고 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파트의 수명현상도 역시)
성장기와 성숙기는 그 동네가 가장 삐까번쩍한 시기이고 쇠퇴기에서 슬슬 낙후되기 시작하여 천이기(遷移期)의 극심한 퇴락(거의 슬럼화)을 거쳐 완전 방기(放棄)하여 공동화(空洞化)에 이르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쇠퇴기 쯤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재개발이나 재건축 얘기가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재개발이 성공하면 새로운 주택과 완벽한 기반시설-인프라-을 갖추어 다시 성장기와 성숙기의 번영을 누릴수 있다.)
여기에 ‘침입’과 ‘계승’이라는 개념이 접합(接合)된다.
‘침입’이란 어떤 인구집단 또는 토지이용의 형태에 새로운 이질적인 수준의 인자(因子)가 개입되는 현상이고, 그 침입으로 인하여 기존의 이용주체가 새로운 이용주체로 변화하는 것이 ‘계승’이다.
이 과정을 여과과정이라고 하는데, 보통 고소득층의 인자가 저소득층의 침입으로 인하여 계승 대체되는 하향여과가 일반적이다. (재개발이 있다면 저소득층의 인자는 쫓겨나고 고소득층이 침입 계승하는 상향여과가 이루어 지기도 한다.)
‘브루스터플레이스’도 이러한 수명현상을 거쳐, 소설의 시점은 천이기의 주민들에 관한 얘기인 것이다.
소설에 3세대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성장기 성숙기의 제1세대 주민들은 이른바 WASP(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였을 것이다.
쇠퇴기의 제2세대, 소설속 ‘검은 머리에 보드랍고 기름진 피부를 지닌 지중해 연안의 사람들’이라는 묘사는 아마 가톨릭을 믿는 이탈리아인이나 히스패닉이 아니었을까.
천이기의 제3세대가 바로 브루스터플레이스의 흑인들.
소설의 빈곤은 바로 천이기 주민의 빈곤이다.
가난하지만 인정을 나누는 동네 ‘브루스터플레이스’는 천이기의 동네.
‘있는 집 문은 잠겨 있고 없는 집 문은 열려 있다.’
있는 사람들은 담을 높이 쌓지만 없는 사람들은 싸리 울타리로 부엌 숟가락 숫자를 엿볼수 있다.
우리나라 달동네의 아이들에게는 동네친구가 있지만 고급아파트 아이들에게는 동네친구라곤 없다.
성숙기의 주민인 WASP는 동네를 벗어나 클럽을 만들어 즤들 끼리끼리 놀지만 천이기의 우리 흑인여성 제위는 동네 안에서 여자들끼리 마음을 나눈다.
흑인 여자들은 자기네 남자를 욕하고 괴롭히고 신처럼 떠받들고 함께 공유했다.
그 놈의 사랑 때문에 남자가 집세를 버는 걸 도와주기 위하여 남의 집 부엌에서 열심히 행주를 문지른다.
소설이 끝난 후.
흑인 여성들은 동네가 공동화되기 전에 브루스터플레이스를 떠났을까, 혹은 키스와나의 주도(主導)로 재개발조합을 결성하여 재개발을 시도하였을까.
투기꾼들 개입 못할 완벽한 조합을.
‘브루스터플레이스’의 가난은 절대적 빈곤이 아니다.
하이라키(hierarchy)의 구조로서 파악되어야 할 상대적인 궁핍이다.
빈곤에 대하여도 역시, 작가의 어떤 경향성은 뵈지 않는다.
작가는 사회적 약자의 모습에 르포르타쥬의 돋보기를 들여다 대지 않았다. (60년대, 빈곤에 대한 미국의 사회적 장치도 소설 곳곳에서 눈에 띄기도 한다.)
‘브루스터플레이스’의 현장은 ‘바리데기’(황석영)의 기아(飢餓)와 인신매매가 횡행하는 북녘 어느 땅 절대적 궁핍의 현장이 아니다.
개발독재시절의 ‘어둠의 자식들’이나 ‘꼬방동네’혹은 ‘달동네’에 등장하는 군상(群像)의 암울함이 떠오르기도 하였지만, 육칠십년대 우리의 현장보다는 브루스터플레이스의 흑인 딸들이 살고 있는 현장이 내게는 훨씬 밝은 색감으로 느껴졌다.
-계속-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後-
[여자에 대하여]
책부족 올해의 주제 ‘여자읽기’로서 이 책의 선책(選冊)은 적절하였다.
내가 읽은 이 소설은 페미니즘, 여자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이 땅의 어머니 아주머니 누이들을 떠올렸다.
여성은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는 버지니아 울프.
생물학적 여성성이라는 것, 사회학적 여성성이라는 것. 정신분석학적 여성성이라는 것.
설명할수 없는 사랑과 설명할수 있는 증오.(작가의 절묘한 표현)
근거없는 페니스 우월성과 근거없는 여성기의 종속성, 그리하여 여성성의 비극성
정녕 동서고금에 편만한, 여성의 운명적 특성이 그러한가.
** 매티 마이클 **
매티의 품은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에게는 어머니와 같이 넉넉하다.
매티는 남자와 아버지와 아들 모두에게서 버림받고 다 늙어서 브루스터플레이스로 흘러 들어왔다.
남성에 종속된 여자 팔자.
삼종지도(三從之道), 여자팔자 동서가 다름없구나.
시집가기전에는 아버지, 시잡가서는 남편, 늙어서는 자식...
엄격하지만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반듯하고 바르게 자란 신앙심 깊은 매티.
그런 매티이건만 젊은 날 질풍노도의 처녀마음은 어쩔수 없었으니,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바람둥이 부치의 매력에 처녀 매티는 속절없이 넘어가 임신을 하고 말았다.
<매티는 부치의 기다란 목을 타고 물이 꿀꺽꿀꺽 넘어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그녀는 이러면 안되지 하면서도 부치의 단단한 갈색 목과 팔을 황홀하게 바라 보았다. 피부는 마치 속에 불꽃이라도 든 양 활력이 넘쳐 흘렀고 햇빛을 받아 불그스레한 광채를 냈다.>
매티의 아버지는 나 또한 딸을 키웠던 아버지로서 상당히 인상 깊었다.
산처럼 듬직한, 말이 없지만 속이 깊고 누구보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아픈 딸을 위하여 읍내에 사는 백인 의사를 데려온 일이 동네에서는 전설처럼 되었다. (검둥이가 백인의사를 왕진 오게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것인가 보다)
그런 금지옥엽의 딸인데, 누군지도 모를 씨를 잉태하였으니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였으랴.
누구 애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매티는 남자 이름을 댈수가 없었다.
‘부치’라는 이름을 말하면 아버지는 그를 죽일 것이 분명하므로.
어쩌면 아버지는 상대가 소문난 개차반 부치가 아니었다면 용서하였을지도 모르겠다.
딸을 두드려 패다가, 이윽고 아버지는 회초리를 떨어뜨리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집을 떠나 아기를 키우기 위하여 낮밤없이 일을 해야 하는 매티.
혼혈 할머니 이바 터너를 만난건 매티의 행운이었고, 소설에는 이와 같은 인정적(人情的 )관계들이 아름답게 등장한다.
남자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아들을 키우는 매티는 오로지 어머니로서만 생을 영위한다.
미스 이바가 죽고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매티는 그 집을 구입한다.
그런데 아들 ‘바질’이라는 녀석은 도무지 철딱서니 없는 놈.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경찰을 폭행하여 구속된 바질, 매티는 생명같은 집을 저당잡혀 보석금을 내고 아들을 빼낸다.
이주일만 기다려 재판을 받고나면 과실치사가 적용되어 무죄방면이 될 뻔한 상황이었음에도 이 철딱서니 없는 아들놈은 감옥이 무서워 엄마를 버려두고 도망가 버리고 만다.
거액의 보석금도 함께 날라가 버린 것이다.
아들이 도망가 버린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면서 아들이 좋아하는 요리를 하여 상을 차리는등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일을 하는 매티의 정경을 묘사한 문장은 슬프게 아름다웠다.
<앞쪽 벽장에는 항상 걸려있던 아들의 윗도리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실내화가 놓여있을 거실 테이블 밑에 있던 아들의 휴대용 라디오도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식탁을 차린다. 아들이 좋아하는 요리. 이윽고 매티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부엌문 바로 저 건너편에 웅크리고 있는 느긋하고 고즈넉한 정적을 매티는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그리하여.
집도 절도, 가족까지도 모두 잃어 버리고 매티는 브루스터 플레이스로 흘러 들어오게 된 것이다.
** 에타 메이 존스 **
남자의 캐딜락을 훔쳐 타고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매티를 찾아 온 에타는 매티의 죽마고우다.
에타는 남자를 쫒아다니며, 남자를 통해 자신의 팔자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이용만 당하는 여인이다.
흑인 침례교회. (흑인교회 특유의 광경, 강한 비트의 찬송가에 맞추어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몽아의 포즈로 예배를 드리는.. 우리나라 어느 종파의 교회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에타는 매티를 흘꿋 쳐다 보았다. 매티는 몸을 흔들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에타는 매티의 얼굴에서 주름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을 보았다. 바로 그 순간 매티는 에타를 버려두고 자유의 세상으로 가고 없었다.>
그 교회의 목사와 정사를 나누는 에타.
그러나 몸만 내어 주었을 뿐, 에타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목사가 그녀로부터 얼른 떠나고자 했던 것만큼 그녀도 간절하게 자신으로부터 떠나려고 하는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목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에 못마땅한 표정을 살짝 드러냈다. 아무렴 어때.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마구 구겨진 자존심을 달랬다. 이런 세속적인 여자는 그래서 좋다니까.>
에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불빛과 사랑. 안식을 향해 (매티가 기다리는) 층계를 걸어 올라가면서 마음속으로 살짝 웃었다.
흑인의 현실대응에 있어서의 소극성.
그것은 뿌리깊은 체념주의가 만들어낸 슬픈 낙천주의일 것이다.
그런 낙천주의는 흑인교회와 에타에서 엿볼수 있었고, 그것이 어쩌면 구원의 은유일거라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 루시엘리아 루이즈 터너 -시엘- **
매티의 아버지나 벤과 같은 사람도 있지만 흑인 남자들은 대체로 불성실하고 게으르다. (시댁이 미국남부인 쟁님과도 공감하였지만, 일부 백인들 씨부리듯 흑인이라는 민족성자체가 게을러 터졌다는 것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다이아몬드 박사의 ‘총 균 쇠’에서 읽었듯 지구적 환경이 한 민족의 운명을 결정 짖는다. 백인은 결코 뉴기니아의 사람들에 비하여 우월하지 않다. 하물며 오랫동안 모든 사회적 환경과 상황과 제도와 조건에 의하여 그쪽으로 내몰렸던 흑인들임에랴.)
시엘의 남편 유진은 불성실하고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아이보다 자신을 챙겨달라고 칭얼대는 미성숙한 어른.
그러나 시엘은 남편을 끔찍하게 여기는 여인이다.
어린 딸 세레나를 키우며 또 임신한 시엘.
일자리를 잃은 것이 마치 아내 때문이기라도 하듯 임신한 아내를 닦달하는 놈팽이 남편짜리.
<“그러니까 이제는 빌어먹을 돈 한 푼 없는데 어떻게 살아가느냔 말이야. 그리고 애새끼까지 또 하나 생긴다니 정말 미치겠네.”
“내가 일을 할께요.”>
그러나 시엘은 남편의 압박에 결국 임신한 둘째 아이를 유산시키고 만다.
<그러자 그녀 앞에 서 있는 남편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키가 크고 뼈만 앙상한 흑인 남자가 오만함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저서는 입을 이상하게 뒤틀고 서 있었다. 시엘은 생각했다. 이제는 아무 느낌이 없다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당신을 증오하기 시작할 거라고 내 분명히 약속하겠어. 당신을 증오할거야. 그리고 당신에 대한 증오를 더 빨리 시작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나 자신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거야. 내 아기를 구해낼 수 있을 정도로 더 빨리 하지 않은 것을. 아 세상에 이럴수가. 사랑하는 내 아가.>
이제 시엘은 하나 남은 딸 세레나에 대해서 무서울 정도로 강한 소유욕을 나타낸다.
<“당신, 거짓말하고 있어요. 말해 봐요. 거기 가더라도 일자리가 없는 것 맞죠? 내 말 틀려요?”
“이봐 시엘. 네 맘대로 생각 해. 난 갈 테니까."
유진이 시엘을 밀쳐 내려고 했다.
시엘은 가방 손잡이를 움켜 쥐었다.
“안 돼요. 못가요.”
“왜 못가는데.”
“왜냐하면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글세, 사랑이 밥 먹여준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엘이 그토록 애착하였던 딸 세레나가 감전사고로 죽고 말았다.
<유진의 출현은 그녀를 어지럽게 휘몰아쳤고 그녀의 삶을 힘들었던 나날과 시간 속으로 내동댕이쳤다. 모든 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한 달 된 아기와 함께 아픈 몸으로 홀로 보낸 좌절의 시간들. 남편이 없다고 무시하고 조롱하는듯한 사회복지사의 눈길에 한마디 반박도 할수 없었기에 느꼈던 굴욕감. 수없이 많은 날 밤마다 초대하지 않아도 가랑이 사이로 기어드는 그 생경한 욕망의 충동들. 설명이 가능한 증오와 설명이 불가능한 사랑으로 온통 짜 들어간 그물에 걸려 ‘왜, 무엇 때문에’하고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의문들.>
설명이 불가능한 사랑과 설명이 가능한 증오.
얼마나 근사한 세리프인가.
글로리아 네일러의 이 문장에 나는 반하였다.
아, 정말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남자로 인하여 불행한 여인들이여, 그 설명이 불가능한 사랑이라는 놈 때문에 그대들 이토록 핍곤한 삶을 사는가.
설명 가능한 그대들의 증오만을 삶의 찌꺼기로 남긴채.
관에 누운 아기.
<시엘의 전 우주는 자신과, 딸아이가 누워있는 좁은 관 사이의 2미터도 채 되지 않는 공간일 뿐이었다. 심지어 감미로운 선율로 그녀의 영역을 둘러싸고 위로의 효험을 발휘하시려는 하느님조차도 끼어들 공간이 없었다. 하느님은 분명히 그녀를 저버렸거나 아니면 저주하셨다. 그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딸 세레나가 죽고나서 시엘은 먹기를 거부하고 울지도 않았다.
매티가 죽어가는 동물과 같은 그녀를 돌보고 있을뿐.
그러다 비로소 시엘은 매티의 품에 잠겨 통곡을 터뜨린다.
<시엘은 잠자리에 누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매티는 눈물이 그칠 날이 있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시엘은 잠에 빠져 들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아침이 찾아 올 것이다.>
** 코라 리 **
그녀가 다닌 것은 고등학교 2학년까지. 그 때 첫아이를 임신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비가 각기 다른 아이를 일곱이나 거느린 여자.
<너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코라 리. 정말 이해할수 없어. 이런 세상에. 해마다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계속 낳다니.>
그들은 밤에 들어 와 컴컴한데서 그녀를 즐겁게 해 준 다음,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나갔다.
코라의 관심은 오로지 컴컴한 데서 즐겁게 해 주는 것들이 때때로 새로운 아기를 가져다 준다는 것이었다.
키스와나의 권유로 아이들을 거느리고 연극관람을 하는 코라.
세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
<코라는 열을 따라 키스와나에게 다가가 손을 움켜 잡았다.
“정말 고마웠어요. 너무너무 훌륭했어요!“>
질서와 밝은 쪽의 세계. 그녀는 이제 아이들을 향한 구체적인 꿈을 가지게 되었다.
** 테레사와 로레인 **
둘은 동성애자.
레즈비언에게도 역할의 구분이 있다던데, 그렇다면 아마 남자역은 테레사 였을 것이다.
로레인은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하여 주는 알콜중독자 늙은 검둥이 벤과 대화를 나눈다.
<“우리 아버지는 말이죠. 제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저를 집에서 내 쫓았어요. 제 여자 친구가 저한테 보낸 편지 한 통을 보셨거든요.”>
흑인 아버지에게도 딸의 동성애는 수치였다.
로레인은 매년 카드를 보내고 아버지는 개봉도 하지 않은채 발신지 주소로 반송을 해 버린다.
이제 로레인은 발신지 주소를 쓰지 않고 카드를 보낸다. 그리고 펼쳐 보시지는 않겠지만 아버지는 돌아 가시기전에 딸이 보낸 카드들을 펼쳐 볼거라는 꿈을 갖고서.
동성애는 브루스터플레이스의 다른 흑인 여자들에게도 지독한 경멸의 대상이었다.
이 편견이 결국 동네불량배들이 폭행과 윤간을 하여 로레인으로 하여금 정신착란에 이르게 하여 자신을 이해하였던 유일한 영감인 벤을 살해하게 하였던 것이다.
소설은 그러나 60년대의 이야기다.
나는 어제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고,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꼈다.
대한민국 땅, 그것도 군대에서 동성애 금지 규정을 철폐하자는 논란.
‘거미여인의 키스’를 읽고서 나는 동성애에 대하여 일부 마이너리티의 이상한 문제로 다루지 말고 편만한 일반론으로 다루자고 얘기하였었다.
그렇지만 나는 군대에서의 동성애 허용은 반대하고자 한다.
스물네시간 남자들만의 공간에서 남자끼리 부딪는 상황의 군대에서는 이성애자도 동성애로서 성적 취향이 발현될 수가 있다.
옛날 내무반의 경험이 그럴 가능성을 일깨운다.
동성애를 일반론으로 취급하는 것과는 별개로 굳이 후천적 동성애자가 생겨나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작가 글로리아 네일러는 토니 모리슨의 소설을 읽고서 말하였다.
<“이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고자 고군분투하는 젊은 흑인 여성에게 너의 이야기는 널리 알릴 가치가 있고 또 마음에 사무칠 만큼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되어 하나의 노래가 될수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소설을 썼다.
연대(連帶).
여성끼리의 어깨동무.
이념을 함께 하는 강철대오의 연대가 아니다.
남성들은 도저히 파악 못할 여성성 고유함으로서의 연대.
어깨동무.
우정, 사랑, 결속력.
<그렇지만 시간이라는 무대 위로 널리 흩어진 브루스터의 흑인 딸들은 아직도 희망을 품는다. 잠에서 깨어나며 그들은 한쪽 모서리에 남아 있는 꿈자락을 잔득 움켜쥔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젖은 빨래를 내다 널면서 꿈도 함께 널고 있다. 꿈은 수프 냄비로 소금과 함께 섞여 들어가고, 아기들의 기저귀에도 맴돌고 있다. 꿈은 썰물과 밀물. 썰물과 밀물이 될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브루스터블레이스는 아직도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브루스터플레이스’는 아직 죽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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