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악의 교전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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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악(惡)의 교전(敎典)>

2012년 6월 25일

 

보름전쯤부터 내습(來襲)한 감기몸살.

호되게 앓았다.

으레 그러하듯 이 불청객은 이번에도 나를 초토화 시켰다.

남들은 감기몸살 쯤 수월하게 겪더만, 유독 내게는 악귀형용(惡鬼形容)으로 유별을 떠는게 내가 치르는 독한 놈이다.

내과다 이비인후과다 다녀봐야 소용없고, 이 점령군은 숙주(宿主)의 진을 죄다 빼 먹은 다음에야 제풀에 지쳐서 슬몃 물러가고는 한다.

인후(咽喉)를 꽉 움켜 쥐고 있는 기침, 게다가 왼쪽 눈두덩이는 결막염으로 시큰시큰 부어 올랐고, 극심한 변비로 부글거리는 뱃속.

몸뚱아리 컨디션이 하 엉망인지라, 기분이라는 놈은 바닥을 기면서 고약스런 암울함이 한동안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몸이 아프니까.

'에고'의 좁디좁은 우물에 갇혀 끙끙대는 내 마음밭 또한 징그럽다.

내가 아프니 세상이 아프고, 스스로 징그러우니 만사가 징그럽다.

안팎의 징그러운 것들, 달랬다가 얼렀다가 노여웠다가 체념했다가..

우울, 의기소침, 자기연민은 곧 자기혐오를 불러오고..

그런것들과 나는 한동안 교전(交戰)중이었다.

침중(沈重)함이 찾는 도피처, 그나마 음악이고 그나마 책일랑가.

하릴없이 자리펴 누워 머리맡 FM 음악을 들으면서 이것저것 읽었다.

뭐라해쌓도 병와독서(病臥讀書)는 추리소설이 제격이다.

다소라도 기분을 긴장케 하여, 몰입성이 좋기 때문에 잠시라도 육신의 곤혹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엊저녁부터는 기침도 한결 잦아들었고 결막도 많이 가라앉았다.

새벽에는 변기에 앉아 독수리도 만족스럽게 잡았다.

어젯 밤 자리에 누워 ‘미야베 미유키’의 추리소설 ‘이유(理由)’를 펴들었는데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내리 독파해 버리고 말았다.

조금전 화장실에서 650페이지에 이르는 두터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밤을 꼬박 지샜던 것이다,

추리소설의 마력이 그러하다.

‘이유(理由)’는 1960년생인 여류작가 '미야베 미유키'가 쓴 120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미여사로 불리는 '미야베 미유키'는 일본에서는 그 평가가 '무타카미 하루키'에 버금간다는 작가. (장르문학 불모의 우리나라에 비하면 놀라운 현상이다.)

 

1996년 6월 2일 비바람이 몰아치는 한밤중.

동경의 고급아파트(우리나라로 치면 도곡동 타워팰리스쯤)에서 일가족 4명이 살해 당하였다.

아파트의 원주인은 자취를 감추었고 죽은 네가족의 정체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사건은 4개월후 해결되었다.

<“자석이 쇳가루를 끌어 모으듯 ‘사건’은 많은 사람을 빨아들인다, 폭심지에 있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제외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 이를테면 각자의 가족, 친구와 지인, 근처 주민, 학교친구나 회사동료, 나아가 목격자, 경찰의 탐문을 받은 사람들, 사건현장에 출입하던 수금원, 신문배달부, 음식배달부 등등..”>

미상(未詳)의 보고자인 화자(話者)가 사건과 직간접의 여러 관계자와 인터뷰한 르포르타쥬 형식으로 소설은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화자는 소설적 긴장이 함축되지 않은, 매우 안정된 어조로 얘기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설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한꺼풀 한꺼풀씩 의혹을 벗겨 가면서, 독자로 하여금 차츰차츰 사건의 진실에 접근케 하여 결국 극적 반전으로 '아하!'하고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정통적 추리소설의 기법이라면, '이유'는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지않았다.

소설은 다핵심적(多核心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테면 직열(直列)이 아니라 병렬(竝列)의 기법이다. (주인공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도 아니하고.)

그렇지만 조금도 산만하지 않아, 원근(遠近)의 차이는 있으나 어떤 입장의 인물이건 사건과 소설의 주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 것이다.

21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각 편마다 독립된 단편소설로 읽어도 충분하였다.

재미 뿐이랴.

가족관계, 경제상황, 등장인물의 성격과 사연 등에서 일본사회의 진솔한 속살이 드러나 보인다.

작가는 매우 성실하고 노련하게 아라베스크 무늬를 한땀한땀 꼼꼼하게 직조하였다.

그리하여 완성된 카페트는 매우 훌륭하였다.

단순히 범인이 밝혀지는 추리소설적 ‘성취감의 재미’에만 머물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소설로서의 문제의식, 그리고 휴머니즘의 감동이 있었다.

1960년대의 일본.

가족관계에 있어서의 동양적 감수성... 버블이 꺼진 경제상황등,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자본사회의 황량한 정신세계에서 비롯된 가족관계, 무엇보다 소년기의 자녀들에 관한 문제 제기는 참으로 신랄한 것이었다.

가출소년 출신인 살인자 ‘야시로 유지’의 가족혐오는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허영으로 가득 찬 가족 ‘고이토 노부야스’家의 아들은 반듯하지만, 그 가족 또한 해체되기 직전의 가족의 모습이고.

그에 비하여 ‘가타쿠라 하우스의 가족’과 ‘다카라식당의 가족’의 사랑과 유대감은 하나의 구원으로 표상된다.

<“우아한 사람들이 세련된 가정을 꾸리고 살 것 같은 고급아파트, 막상 들어가 보면 헛된 욕망에 휘둘린 사람들과 깨어지는 가정이 그곳에 있다.”>

<“저런 곳에 살면 사람이 못쓰게 돼요. 사람이 건물의 품격에 장단을 맞추려고 영 이상하게 돼버리는 것 같아요.”>

시방 호주 시드니에 머물고 있는 내 손주 비니미니

자본사회의 욕망과 허영에 휘둘리지 않는 부모와 진실한 사랑에 근거한 굳건한 중심을 이룬 가정.

그런 것들을 기원하는 할비.

밤을 지샜지만 좋은 책을 읽었다.

 

‘이유’와 더불어 네권의 추리소설들은 얼마 전, 우리 책부족 남양주에 사시는 호호야님께서 택배로 보내 주신 책들이다.

‘이유’와 더불어 ‘코넬 올리치’의 ‘밤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와 ‘렌조 미키히코’의 ‘회귀천 정사'.

‘회귀천 정사’에 대한 호호야님의 유려한 독후감에 혹해서 댓글을 썼더니 보내 주신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였는데)

본격문학은 물로이거니와 호호야님의 장르문학이나 장르영화에 대한 안목과 수준의 고급함은 두말하면 잔소리 일 것.

추리소설.

나 역시 젊어 한때 추리소설에 흠뻑 빠졌었다.

정통추리 외에도 법정 공포 유모어 SF등....

어린날 정능. 대본소에서 빌려 형과 읽었던 김내성의 ‘마인’을 비롯, 모리스 루불랑의 ‘괴도 루팡’에 밤을 새기 일쑤였고, 코난 도일, 에드가 앨런 포,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

아내는 버리라고 성화지만 낡아빠진 동서추리문고 백여권은 지금도 박스에 담겨 마루 구석에 처박혀 있고.

반 다인, 존 딕슨 카, 딕 푸랜시스, 렉스 스타우트, 에드 맥베인, 체스터튼, 조르주 심농, 아서 클라크...

하드 보일드 추리물인 대실 해미트, 레이먼드 챈들러, 루 아처...

요즘 작가들인 존 그리샴, 스티븐 킹, 톰 클랜시, 로빈 쿡....

일본작가들 (보잘 것 없는 우리나라 장르문학에 비하면 일본은 굉장할 정도로 대단하다), 에도가와 란포, 모리무라 세이이치, 그리고 호호야님으로부터 얻어들은 여러 작가들...

특히 내가 경외하여 마지않는 세 작가가 있다.

레이 브래드버리 (‘멜랑코리 묘약’등 이 냥반의 단편들은 그냥 외워 버리고 싶을 만큼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스탠리 앨린 (이 냥반의 기발함에는 혀를 차지 않을수 없다), 그리고 아이작 아시모프 (빼어난 유모어의 SF).

 

‘코넬 올리치’의 ‘밤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운명을 예견하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어떤 은둔자가 예언을 하였다.

백만장자 ‘할란 레이드’는 몇주후 자정에 사자의 아가리 아래서 죽을 거라고.

그의 딸 ‘진’과 강력계 형사 ‘숀’이 그 날의 정점을 향하여 고조되는 긴장감을 함께 나눈다.

이 소설, 명징한 추론으로 이끌어 가는 추리기법적으로 씌어진 소설이 아니다.

몽환적인 문체와 몽롱한 분위기로 소설을 이끈다.

부조리한 실존, 산다는 건 몰락에 이르는 외로움과 두려움과 절망의 프로세스...

'느와르'적 우울함,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지독스레 회색빛이다.

시간과 죽음, 필멸의 운명에 지배 당하는 삶...

백만장자는 은둔자의 예언한바 그대로 죽음을 맞는다.

종장의 '진'과 '션'의 사랑, 그것만이 작가가 제시하는 자그마한 구원이었을까.

후기에서 본 '코넬 울리치'의 실존관(實存觀).

<"인간은 우선 꿈을 꾸고, 그런 다음 죽는다. (First you dream, then you die.)">

작가의 사후 발견된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나는 오직 죽음을 기만하려 하고 있었다. 내가 평생 확실하게 알고 있는, 나를 향해 언젠가 나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어둠을 잠시 동안이나마 극복하려고 했다.">

작가 '코넬 올리치'는 항상 자신의 삶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내쫓아 버리지를 못한 모양이었다.

추리물답지 않은 분위기 가득한 장르소설.

'밤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본격문학이라 해도 좋았다.

일종의 공범의식적(共犯意識的) 위무(慰撫)를 내게 끼쳐 주었다.

삶이란 나남없이 본시 어둡고 쓸쓸한 것이로구나.

내 에고 안팎의 징그러움이 한결 덜어졌다.

 

'렌조 미키히코'의 '회귀천 정사'

이 역시 독특한 색감의 추리소설이었다.

'회귀천 정사'는 꽃을 모티프로 하여 다섯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등나무 향기' '도라지꽃 피는 집' '오동나무 관' '흰연꽃 사찰' '회귀천 정사')

정교하게 장치된 트릭은 빼어난 추리소설임이 여실하였지만.

엑조틱한 일본적 정서, 서정적인 문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허무가 짙게 배어 있었다.

홍등가로 팔려온 여인들의 족쇄, 어린 창녀의 순정, 야쿠자의 사랑, 절집 아들이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는 기막힌 사연.

인간사 가엾음을 향한 연민의 한숨소리도 들리는 듯.

어딘가 '페데리코 페리니'의 '젤소미나'의 분위기도 떠돈다.

표제작 '회귀천 정사'

뛰어난 재능과 기교로서 시를 짓는 위대한 시인.

그러나 그가 창조한 시는 오로지 상상의 산물, 실제적 인생과 생활의 리얼리즘이 결여되어 있었다.

시인은 자신의 시에 살아있는 혼을 불어 넣고 싶었다.

가공의 노래에다 리얼리즘을 덧입혀 자신을 '불멸'의 반열에 올려 놓고자하였던 것이다.

그의, 불륜과 방탕과 연애와 정사와 자살에 이르는 행각이 모두 가짜이다.

자신의 시에다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이처럼 빼어난 소재(素材)를 일개 추리소설에 써먹어 소진하기에는 작가로서 좀 아깝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장르문학을 폄하는 시각이...일본에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문학은 본격문학에 꿀릴바 바이 없다.)

'렌조 미키히코'의 '회귀천 정사'

일본풍의 난숙함... 우아한 소설이었다.

 

'기시 유스케'의 '악의 교전’

몰입도가 굉장한 소설이라고 뉜가 이 소설을 내게 적극 권하였다.

‘체이스’의 ‘미스 블랜디시의 위난’이라는 추리소설을 너무나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소설에서는 ‘악’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존재하는 순수한 악’을 묘파함으로써, 대단한 엔터테인먼트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악의 교전’에서도 그런 재미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순수한 악’의 악행을 묘사한 ‘惡의 交戰’을. (그러나 제목이 ‘惡의 交戰'이 아니라 '惡의 敎典'이었는데 ’惡의 交戰‘이라 하여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하스미 세이지’라는 사이코패스 고등학교 선생의 수십명 살육행각은 그야말로 전쟁(交戰)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으므로.)

‘악의 교전’은 악을 설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사이코 패스’.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없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양심의 가책이라든지 죄책감을 찾아볼 수 없는, 모든 즐거움의 상태를 자기기준에 의해 판단하기는,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인종.

이들은 뇌구조 자체가 일반인과는 다르다고 한다.

일반인에 비해 전두엽(뇌의 앞부분)의 활동이 상당히 위축돼 있으므로 감성중추의 기능이 뚜렷하게 떨어져 있다고 한다.

고등학교 영어선생 ‘하스미 세이지’.

감정을 갖지 않은 괴물,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으므로 언제나 냉정을 유지할수 있는 명석함, 감정을 제거하고 타인의 마음을 읽어 뜻대로 조종하는 능력.

소년시절.

자신이 사이코패스임을 간파한 선생과 동료학생, 심지어 자신의 부모까지도 죽여 버린다.

스포츠를 즐기듯 살인을 일삼는 살인마.

종장에 자기 반 학생들 사십여명을 전쟁 치르듯 집단적으로 살해한다. (살해가 아니라 집단 학살)

그에게는 타인이란 자신이 지배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고, 얼마든지 대체가능한 존재이다,

타인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할리 만무한 그에게 살인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사이코패스와 보통사람과의 가장 큰 차이는 흔히 공감능력의 차이라고 한다

슬퍼하는 사람을 보고 같이 슬퍼해 준다거나 불쌍한 사람을 보고 동정심이 들지 않는 것이다.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겁에 질려 있을때, 그 사람이 겁에 질려 있음은 인식하지만 안쓰럽다거나 불쌍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이런 장애로 인해 사이코패스는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이라는 의미조차 인정하지 못하는 괴물이 되고 만다.

인류의 1%가 ‘사이코 패스’라고 한다.

그러니까 ‘사이코 패스’는 우리와 함께 섞여 세상을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이코패스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타인의 감정에 동화되지 않으니 그들은 냉정하고 명석하고 과감하여, 오히려 사회의 지도층으로 진입하기 쉬운 측면도 없지 않다고 한다.

‘양복입은 뱀’

정치가에게도 사업가에게도 ‘사이코 패스’는 존재한다.

나 아닌 것들에 대한 공감능력 결핍.

‘학원폭력’이나 ‘이지메’나 ‘왕따’.

그곳에도 ‘사이코패스적 기질’이 뚜렷하게 작용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게는 ‘사이코 패스’의 기질이 없는가.

인류의 1%가 아니라, 각 인간성의 1% 쯤은 사이코 패스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건 아닐까.

느끼건대 나남없이 인간성의 한부분에는 '사이코 패스'가 숨어 있을듯 싶다.

소소한 악행과 범죄를 우리는 저지르지 않았는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향하여 행하는 ‘뱀의 징그러움’.

그 징그러움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심한 고통을 가하지는 않았는가.

자신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부모 자식간에, 형제간에, 부부간에.

경쟁의 일상화.

‘다른 사람의 마음 헤아리고 살필 겨를 어디 있으랴’는 일반화된 풍속도.

전두엽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병리적 문제로서 ‘사이코 패스’를 파악할 필요는 없을까.

 

그러나 한켠에는 전혀 다른 인종이 있다.

감정중추가 지나치게 발달한 인종.

'다자이 오사무'같은.

지나친 양심, 과도한 죄책감.

태어나서 미안하다고 하는.

에고(ego)와의 교전(交戰).

그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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