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똥파리 전,후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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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똥파리>

2012년 8월 26일 포스팅

 

영화 : 똥파리

개봉년도: 2009년

감독 : 양익준

출연 : 양익준, 장만석, 김꽃비

 

도서 :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 (LASS DIE KINDHEIT HINTER DIR Das Leben endlich selbst gestalten)

저자 : 우르술라 누버 (Ursula Nuber ,1954~ )

한국 출판연도 : 2010 년도

 

1.

 

양익준(각본,연출.주연)이 만든 독립 극영화 '똥파리'

똥파리는 별명 그대로 양아치 용역깡패인 '상훈'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 그가 휘두른 칼에 맞은 여동생, 여동생을 업고 뛰는 상훈, 상훈을 뒤쫓다 교통사고가 난 엄마.

엄마와 누이는 죽고 아버지는 교도소로 갔고,

그를 키운건 8할이 폭력이었다.

쌍욕은 일상어가 되었고 폭력은 일상사가 되었다.

어쩌다 술 한잔하여 설움 비스무리한게 북받치면 출소한 아버지의 거처를 찾아간다.

씨발놈아! 개새끼야! 하고 제 아버지에게 욕설을 퍼부우며 두드려 패는, 자신도 제어 불능한 똥팔이의 걷잡을수 없는 분노.

가정폭력이 만든 괴물 똥팔이.

 

그대, 똥팔이의 현실을 보라.

영화에 난무하는 똥팔이의 쌍욕과 폭력과 그 분노를.

영화 한켠에 숨어있는 똥팔이의 고통과 슬픔을..

잘 만든 독립영화. 똥팔이를 경험하는건 귀중한 학습이다.

웹하드나 유튜브에서 쉽게 구해 볼수 있으리니, 한번 보시라.

그리고 그대의 새끼들을 반추해 보라.

 

2.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

심리학자 우르술라 누버 (Ursula Nuber)가 쓴 책이다,

동경의 멜론님이 한국에서 구해주기를 부탁한 책.

“나는 인간의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등 성장기의 체험이 그 후로 오랜 동안의 삶을 속박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우리의 어린 시절에 입은, 그래서 상흔으로 남은, 그러나 봉인 해 버린, 어쩌면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는 상처가 지금의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그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준다고 하는 이 책을 꼭 읽고 싶다.” -멜론-

동경 들어가면서 아들녀석이 들고갔다.

아비의 위탁으로 이 책을 멜론님에게 전달하기 전, 새치기하여 먼저 읽었던가 보았다.

필경 제목을 보고서는 멜론님과 같은 동기유발이 있었을 것이다.

내 아들놈에게도 부모로부터 받았음직한. 어린 시절의 아픈 것들 내면 어딘가에 남아 있지 않겠으랴.

공감 하는바 많았던지 메모를 남기면서 이 책을 읽었다고 하였다.

 

심리의 어느 영역엔가 깊이 박혀있는 성장기의 정신적인 상처들.

그것은 영혼이 아파하는 가시이고 현재 자아(自我)의 부정적인 부분을 발아시킨 씨앗이라고 한다.

성장기의 트라우마에 대하여 일반화된 정설로서 인식하고 있는 바가 우리에게는 있지 싶다.

자아가 충격으로 겪었던 경험은 의식(意識)이거나 무의식(無意識) 속에 상흔(傷痕)으로서 남아 있다는 것.

그것은 부정적인 신념체계를 이루어, 어른이 된 후 심각한 성격적 결함으로 작용한다는 것.

일상중 엄습하는 그 '기분'이라는, 느닷없이 찾아오는 불안 초조 우울 분노와 같이 어두운 정서를 유발하는 근원이라는 것.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

뒤늦게 나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수월하게 읽혔지만, 내 자식들과 그리고 내 손주들의 ‘무언가’에 대하여 깊이 밟히는 책이었다.

노파심 슬몃 고개를 들어, 하릴없이 생각을 깊게 하였다.

이 책이 성찰(省察)을 요하는 바는 다음 짧은 문장에 함축되어 있음직 하다.

“어린 시절 자체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된 후 어린 시절을 보는 눈이 인생을 결정한다.”

성장기, 특히 사랑하는 사람(대부분은 부모)으로부터 입은 상채기는 매우 크다.

그에 대하여 이 책은 비교적 건강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심리적 환원주의의 입장에서 ‘성장기에 입었던 정신적 트라우마’라는 명제를 도출하였는데 그 해법의 논거(論據)에 있어서는 심리학적 결정론에서 사뭇 벗어나 있다는 느낌이다.

 

지금 안방 할미 곁에서 새벽잠 취해있는 비니미니.

부모의 주말여행으로 맡겨 놓은 두 손주.

어제부터 할비 할미는 비니미니와 놀았다.

손뼉치며 깔깔대고 뺨을 부비대다가 때로 칭얼대고 서로 새암도 부린다.

아기들의 숨결은 날 것으로 마냥 따순 순정(純情)함이다.

거기에는 호오(好惡)의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기쁘고 느꺼울 뿐 그 감정에는 꾸밈 한톨 있지 아니한 것이다.

순수한 수동(受動) 덩어리, 주는대로 스미는 영혼.

그리는 대로 그려지는 백지장, 떨구는 대로 번지는 증류수, 담구는 대로 젖는 보송보송한 스폰지.

좋은걸 주면 약(藥)이 되고 나쁜걸 주면 독(毒)이 될 뿐이다.

그 毒은 트라우마라는 상채기를 남겨 불행한 영혼으로 이끄는 것들이다.

 

어린 것들 해맑은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 중얼거린다.

독(毒)은 말고 약(藥)만 섭취하여라.

몸과 마음에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되는 것들로 채워지거라.

그것으로 모쪼록 행복한 영혼 누리며들 살거라.

 

어미아비야, 어린 것에게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라도 (흔히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약이라는 당의정으로 포장된) 행여 독을 주지 말아라.

먼 훗날 어른이 된 아기들아, 혹여 내면에 그 독이 느껴지걸랑 그것을 뱉어 내어라.

 

할비, 이 책을 중심으로 좀 지껄이려 한다.

 

3.

 

아이에게는 또 하나의 아이가 있다.

그 아이가 바로 ‘내면아이’다.

내면아이는 쉽게 ‘공포’와 ‘불안’을 느끼고 상처받는 아이이다.

내면아이의 상처는 성인이 된 후 변용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책에서는 이와 같이 어른의 내면에 숨겨져 있다가 변용된 모습으로 나타난 아이를 ‘내면아이’라고 칭하고, 그것을 "내면아이의 구덩이에 빠졌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내면아이’의 공포와 불안이 활성화 되어 데포르마숑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 ‘내면아이’는 정신질환적 문제까지도 야기한다.

불안장애, 경계성 인격장애, 조울증, 공황장애, 자폐증....

성적폭력이나 학대를 겪은 ‘내면아이’는 매조키스트나 사디스트등 변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내면아이가 '병적인 동일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도 흔한 일이다.

아버지의 폭력에 희생당한 아이의 어른이 된 후의 폭력성(영화 ‘똥파리’를 보라.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아들의 폭력을), 술꾼 부모가 끔찍하였던 아이가 어른이 된후 똑같은 술꾼이 된다거나.

자신을 박해하고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과 똑같아지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또는 그 박해자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병적인 동일시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뇌조직 뿐 아니라 면역체계에도 작용하여 생물학적 흉터를 남긴다.

천식, 피부병, 알레르기에 걸리기 쉬운 체질등....

 

전쟁이나 대형사고 또는 끔찍한 범죄, 부모나 형제가 살해 당하는...따위.

이런 현장을 겪었거나 목격하였던 아이가 갖게 되는 정신적 트라우마는 말할 것도 없이 치명적인 것이다.

반드시 집단이나 개별적으로, 정책적 사회적 정신과적 ‘열린 치료’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이와 같이 비상태적(非常態的)인 경우는 상정하지 말기로 하자.

 

아이에게 공포와 불안을 야기하는 주범은 대부분 부모들이다.

의도하지 않았건 불가피하였건 간에 말이다.

‘내면아이’에 대하여는, 빈부나 교양이나 지적수준을 막론하고 이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다.

부모의 이혼이나 별거, 또는 부모중 한사람의 죽음은 어떠한가.

어린 목숨이 겪는 ‘이포크 포인트’(epoch point)적 상황이 정서에 가하는 충격은 엄청나게 큰 것이다.

‘내면아이’는 부모의 이혼을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우울증이나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늘 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게 된다.

특히 어머니와의 ‘분리불안’에 따른 공포심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고 한다.

어린 것을 두고서는 이혼하지 말라.

그리고 죽지도 말라.

 

간과(看過)하기 쉬운 일견 소소한 것들, 무심코 행해지는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것들에서도 내면아이는 아파한다.

부모끼리의 소소한 다툼, 자신을 향한 거친 듯한 언행, 익숙한 것들의 일시적인 결핍, 편애(偏愛)의 분위기, 환경의 변화....

그로부터 ‘내면아이’가 느끼는 슬픔 (주로 버림받는 공포와 불안에서 비롯된)은 매우 깊다.

부모가 좋아하도록 방긋거리는 것은 일종의 방어기제, 버림 받지 않으려는 어린 것 나름대로 처세(處世)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내면아이’는 공포와 불안으로 숨 허덕이며 슬프게 흐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반복강제가 되면 스트레스는 더욱 가중되어 ‘내면아이’는 점점 ‘외면아이’로부터 소외되어 잠재의식 속으로 숨어든다.

그리하여 하나의 부정적인 신념체계가 형성되어 고착되고 만다.

정신적 저항력을 기르지 못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 그 신념체계에 따라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의 결핍은 내면아이로 하여금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만든다.

고독한 성격이 되어, 좀 자란 후에는 친구도 없어 ‘왕따’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무관심 속에 성장한 아이는 사랑과 협력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의 삶에는 이 우호적인 힘이 없다. 문제에 부닥치면 자신의 어려움을 과대평가하거나 남의 호의를 빌려 난관극복의 의지를 갖지 못한다.” -알프레드 아들러-

 

자신에게 자주 화를 내고 혼내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가진 아이는 어떻거든 부모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내면아이는 어떻게 해서든 혼나지 않는 방법을 찾아 그것이 하나의 신념체계를 이루어 성장하게 된다.

어른이 되어 내면아이의 구덩이에 빠지게 되면 그 신념체계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속마음을 숨켜라’ ‘무엇이든 끼어들지 마라’ ‘타인의 눈치를 보고 거기에 너를 맞추어라’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지나친 기대와 일등주의를 강요하는 부모를 가진 아이는 압박감과 긴장감이 기질이 되며, 오로지 성과주의자가 되기 쉽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자기 정체성에 관한 오도된 인식이 ‘내면아이’의 퍼스낼리티에 각인되는 것도 문제이다.

‘내면아이’가 반복적으로 듣게 되는 평가.

‘너무 이뻐(공주병)’ ‘못생겼어(열등감)’ ‘얘는 성깔이 있어(독종)’ ‘순둥이야(겁쟁이)’ ‘머리는 그다지 좋지 않아(열등생)’ 등등...

 

‘내면아이’가 안정되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그는 자기신뢰에 넘치며 타인과의 원만한 관계 속에서 일상을 영위한다.

‘내면아이‘가 불안정한 사람은 어린 시절의 불행한 경험과 성인의 삶 간에 연관성을 갖고 있는 사람, 어린 시절의 불안감이 평생 따라 다니는 사람이다

 

상처입은 ‘내면아이’가 있더라도 이를 극복한 사람이 있다.

내면아이의 상처를 극복하여 자아존중감을 회복한 사람.

‘내면아이’에게는 의외로 건강한 면이 있어, 저항력과 회복력이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내면아이’가 스트레스의 압력으로 부러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하여 주자는 것이다.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탄성에 의하여 회복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상처는 받았으되 그 불행한 경험이 긍정적인 경험으로 상쇄되면 상처는 깊어지지 않는다.

위험과 스트레스를 제거하지는 못하지만 이것을 효율적으로 다룰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누군가와 동앗줄같은 안정적 정서관계를 맺고 있으면 어느 정도 상쇄가 가능하다.

언제나 곁에는 한사람 이상의 변하지 않는 수호천사가 있다는 느낌을 ‘내면아이’가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꼭 어머니가 아니라도 좋다.

조부모나 연상의 친척이나 형제자매나 선생님이나 목사님이나.

 

또한 ‘내면아이’에게 다른 성취감을 맛보게 하여 주는 것이다.

긍정적 자아상을 형성할수 있는 어떤 것.

칭찬과 격려에 의한 감성의 고취.

반장으로 뽑혔다던가 하는 현실적 성취감.

 

다른 하나는 아이의 창조적 재능을 이용하는 것이다.

‘내면아이’가 몰두 할수 있는.

그림 글쓰기 음악 독서 춤추기등...

 

유아기.

구순기(口脣期) 항문기(肛門期) 성기기(性器期) 식의 프로이트의 성결정론(性決定論)이야 아무러면 어떤가.

3살까지의 유아기에 관한 것은 여기에서는 무시하기로 하자.

'리비도'운운의 심리학적 이론이야 우리에게는 어차피 현학적인 추상인걸.

3살~10살 무렵이 가장 중요한 시기다.

독립심과 자기존중감은 바로 이 시기에 싹튼다.

분노하거나 화를 낼줄 알고 자신의 의지를 인식한다.

싫은 것을 예스라고 말하기 힘들고 자신의 의지를 주장한다.

이런 것들이 억압되면 ‘내면아이’는 상처를 받는다.

수영, 자전거, 숲속 뛰놀기등으로 ‘내면아이’의 스트레스를 풀어 주어라.

책을 읽게 하라.

좋은 영화를 보게 하라.

악기를 배우게 하던지 등으로 창조적 재능을 개발토록 하라.

아이한테 기쁨과 용기를 줄수 있는 방법을 잘 생각해라.

넌 자신을 지킬수 있어... 넌 아니요라고 할수 있어... 넌 스스로 결정할수 있어...

 

그 이후 사춘기 시기.

이 시기에 관한 책들 널려 있을 것이다.

천학(淺學)의 내가 여기에 무엇을 더 하랴.

 

-계속-

 

 

4

 

어른이 된 후.

‘내면아이’는 의식 표면 밑에 숨어 있다가 어떤 종류의 심한 스트레스가 있으면 느닷없이 나타난다.

현실에서 가압(加壓)된 스트레스가 불안감과 공포심을 자아내어 내면아이가 활성화 되는 것이다.

모종(某種)의 신념체계로 무장되어 있는 내면아이가.

이를테면.

폭군의 아버지, 무조건 야단치고 혼내기만 하는 가부장적 아버지로 인하여 어린 시절 고통스러웠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 이순재처럼 뚜렷한 철학관(哲學觀)에 의한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무조건적으루다 가정을 압도하려는 아버지)

아버지 앞에서는 늘 숨죽이며 전전긍긍하였던 어린 날.

어떤 어려운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면 그 암담한 정서에 젖어든다.

그의 내면아이가 활성화 되어 의식 표면으로 떠오른 것이다.

아버지라는 빙벽(氷壁) 앞에 마주 선 듯한 그 완강한 좌절감.

(아버지 앞에서 늘 그러 하였듯이.. 난 이 상황을 도저히 이겨낼수 없어..)

그의 내면아이는 체념(무조건적 복종)하거나 모면(용서의 간구, 거짓 아부, 도망)하려는데 너무나 익숙한 아이이다.

내면아이의 신념체계는 도피주의와 패배주의로 고착되어 있다.

어떻게 해서든 상황을 극복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 신념체계 앞에서 정신적 저항력은 무력할 뿐이다.

상황과 정면으로 맞선다면 너끈하게 극복할수도 있으련만, 그가 선택하는 것은 굴복이거나 회피뿐이다.

 

신념체계는 자신에게 적합한 것만을 선별적으로 선택하여 지각(知覺)한다.

이른바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bias)에 의한 선택적인지(選擇的認知-selective perception-).

뻔히 예견할수 있더라도 불행에 익숙한 내면아이는 불행을 선택해 버리고 마는, 신념체계란 이토록 비이성적인 심리적 매커니즘인 것이다.

 

그렇다.

내면아이의 신념체계는 현재의 긍정적인 힘을 몽조리 빼앗아 가버리고 만다.

<‘내면아이’의 ‘구덩이’에 빠지는>것.

바로 그것이다.

 

일상중 흔히 나타나는 까닭모를 극심한 불안감이나 우울감도 많은 경우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 기분.. 낯익은 이 기분은 어떤 손님인가.. 어렸을 적 본적이 있는 손님.. 어둠 속에서 울었던 기억...그때는 정말 무서웠지... 들어주는 사람도 없었지...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었어...그때 찾아 온 낯익은 손님...어릴때 부터 익숙한 이 기분...)

그 옛날 ‘상황적 기분’에 빠져 버리는 것.

지각(知覺)을 하건 아니하건, 어린 시절의 반복강제로서 형성 고착된 신념체계가 작용하는 것이다.

 

이 책의 중요한 팁은 바로 ‘내면아이의 구덩이에서 벗어나는 얘기’들에 있다.

 

먼 훗날의 비니미니야. 그리고 지금 어린 것인 아이들아.

성장하여 어른들 되어, 혹여 내면아이의 구덩이에 빠졌을 때 이 말을 기억하라.

 

용기를 가져라. 두려워 말거라. 굴복하지 말거라.

내면아이는 달랠수 있고 극복할수 있고 뱉어 낼수 있느니라.

 

먼저 지적하는 바.

‘심리적 환원주의의 단순성’을 경계하라.

이것이 어쩌면 가장 먼저 성찰하여야 할 과제일 것이다.

이것은 선입견으로 자리잡고 있는 '심리'라는 암시에 걸려든건 아닐까 점검하라는 말이다.

어찌 어른이 된후 행동방식이나 문제의 모두가 어린 시절의 경험에 기인한 심리적인 매커니즘의 작용으로만 설명 되어질 수 있겠는가.

생물학적 유전적 사회환경적 경제적인 여러 요인은 무시하려는가 말이다.

 

현대인은 과도하게 심리학(psychology)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무의식’은 너무나 과대포장되어 있는듯 하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그러한데, 미국 소설이나 영화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유럽쪽보다는 심리적 인과(心理的 因果)로 구성된 서사구조가 많다)

그러나 ‘무의식’이라는 것은 아직은 현학(玄學)의 심해(深海)를 헤엄치는 미지의 생물이다.

분명 그 존재를 감지하고는 있지만, 우리의 오감(五感)이나 추론(推論)으로 감각하여 그 인과(因果)를 인식하기에는 아직은 미지의 것이다.

 

이 책에서는 작금의 심리학적 교육학적 이론들을 간단하게 소개하여 주고 있다.

<현대심리학은 우리 인격 상당부분이 유전자에 각인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즉 어린 시절의 경험보다는 유전적 기질이 중요하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대개 본질적으로 생후 5년간의 특수한 교육방법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어린 시절이 인생의 방향을 절대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어린 시절에 겪운 트라우마 때문이 아니라 그 후에 가해지는 지속적인 억압 때문에 주로 비뚤어진다. 트라우마의 부정적 작용이 결코 불가피하거나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경험의 영향은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인격발달에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구나.

인간이 어디 오로지하게 유심론적(唯心論的)인 존재란 말가.

유물적 역사적 사회적 생물적 생리적 실존적 환경적인....인간의 본질.

인간의 존재론에 관한 논의는 아직은 아득한 경계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를 무비판적으로 ‘내면아이’의 탓으로 돌리지는 말거라.

여러 측면에서의 종합적인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내면아이'의 아픔은 대체경험을 통하여 충분히 상쇄(相殺)할수 있다는 점이다.

 

‘내면아이’는 생각보다 건강하고 저항력이 있다.

부러지지 않으면 된다.

일시적으로 구부러졌더라도 탄력성에 의하여 곧 회복할수 있다.

상처는 받았으되 그 불행한 경험이 긍정적인 경험으로 상쇄된다면 상처는 깊어지지 않는다.

위험과 스트레스를 제거하지는 못하지만 이것을 효율적으로 다룰수는 있다는 말이다.

 

긍정적인 경험.

뉜가의 수호천사역, 자아의 실현, 성취감등...

 

아이에게 일시적 스트레스가 있더라도 어미는 굴복하고 좌절하지 말라.

끊임없이 아이에게 대체경험의 것들을 제공하여 주라.

이에 대하여 앞 편에서 말한바 있으므로 그치련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기억’의 정체에 관한 것이다.

‘기억속의 사실’은 ‘사실 그대로의 사실’인가.

혹 각색된 것이거나 픽션은 아닐까.

 

‘기억’이란 이야기(fiction)이고, 어쩌면 ‘사실(fact)’이 데포르마숑된 꿈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내가 잘 써 먹는 문장인데, 작가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말이다.

<사람은 이야기하기 위하여 산다. 삶은 한사람이 살았던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하여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다.>

'나의 현존재'란 '이야기되어 지는 나의 삶'이다.

이야기는 축적된 기억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의 컨텐츠는 사실(fact)이 축적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억된 것이냐'하는 것이다.

마르께스의 아포리즘은 문학적 수사(修辭)로서 절창(絶唱)의 아포리즘이다.

또한 기억에 관하여 심리학적 통찰이 깃든 적실한 레토릭이다.

 

기억은 ‘사실(fact)’과 다르다.

사실이 섞이고 과장되고 왜곡된 그림으로 뇌리에 새겨진 것이 기억이다.

 

감정과잉은 어린아이의 특질이다.

경험한 사실(fact)은 아이의 정서에 의하여 다른 것으로 해석되어 기억된다.

당시 아이의 정서에 여과되어 왜곡된 그림으로 각인되기 십상이다.

기억속 초등학교의 드넓은 운동장은 사실 얼마나 좁다란 공간이었는지, 멱감던 강(江)이 사실은 시내(川)에 불과하였다던가....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언젠가는 버림 받을거야’라는 내면아이의 신념체계를 들여다 보자.

이것은 어느 날의 기억이 만들어낸 왜곡된 사실일수 있다.

‘나가 놀아! 그렇게 울면 넌 내 딸 아니야!“’라는 한마디는 당시 몹시 우울하였던 내면아이의 정서에는 ‘내 딸이 아니다’라는 한마디만이 비수로서 꽂혔을 것이다.

그 기억이 하나의 신념체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도렴동 고모댁에서 화장실 앞에 묶여 있던 개가 나를 물었고 나는 척추에 광견병 주사를 맞았다.

그 주사는 정말 죽을만큼, 끔찍하게 아팠던 것이다.

오랜동안 내 뇌리에는 산(山)만한 블독에게 수없이 물어 뜯긴 기억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후로 나는 큰 개만 보면 (개 짖는 소리만 들려도) 병적인 공포에 사로잡혀서 식은 땀이 났고 오금이 저렸다.

그러다 먼 훗날 사진 속에서 그 개를 대면하였는데 그 개는 한 마리 중강아지였고, 그리고 나는 종아리를 살짝 물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개에 물려서 피가 났기 때문에 겁이 난 어머니는 아들에게 광견병 주사를 맞혔던 것이다.

그 주사의 끔찍한 아픔이 개에 투사되어 사실을 왜곡하여 기억하였던 것이다.

나는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 사실을 인지(認知)한후 내게는 병적인 개공포가 사라져 버렸다.

 

오래전 보았던 TV다큐멘터리가 생각난다.

어릴 적 외국으로 입양되었던 청년이었는데, 그는 ‘생모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성장하였다.

내면아이의 신념체계는 생모를 향한 ‘원망’과 ‘분노’로 점철되어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어른이 되어 모국에서 생모와 해후하였다.

고아원의 기록, 여러 사람의 증언, 무엇보다 그 옛날 잃어버렸던 아들을 만난 어머니의 한서린 몸부림등으로 자신이 버림 받았던게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내면아이가 간직하고 있었던 사실의 증거(證據)는 명백한 반증(反證)에 의하여 뒤집어 졌다.

더불어 내면아이의 신념체계 역시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한국 머무는 동안 함께 지내며 넘치는 사랑으로 모자관계는 완벽하게 회복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 귀머거리 게임이 등장한다.

오래 전의 TV프로그램, 허참이 사회를 본 가족오락관에서 하던 바로 그 게임이다.

다섯명 정도의 출연자가 귀에다 헤드셋을 쓰고 앞사람의 입모양을 보고서 그 말을 뒷사람에게 전달한다.

“고래 싸움에 새우 둥 터진다” 이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뒷사람에게 차례로 전달되는 식이다.

둘째, 셋째... 점점 변형되어 마지막 사람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를 말한다.

‘고래 싸움...’이라는 사실이 ‘고생....’이라고 왜곡된 것이다.

기억속 사실은 하나의 버전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혹은 섞이고 혹은 과장되고 혹은 축소되고 혹은 왜곡된 사실의 집합이 바로 기억이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언젠가 버림받을거야’라는 신념체계는 어떤 한 순간의 사실이 당시의 정서에 의하여 오도된 기억이 만들어 낸 신념체계이다.

그런데 그 신념체계를 이룬 사실의 증거(證據)는 거짓이었다.

그 후 버림받기는 커녕 아버지의 사랑을 느낀 적이 많았다면 이것이 충분한 반증(反證)이 되는 것이다.

 

반증(反證)을 찾아라.

기억속 어떤 시점의 부정적인 그림이 있어서 그것이 괴롭히거들랑 반증을 만들어그것을 내세워라.

반증(反證)의 논리를 인식함으로써 왜곡된 기억의 내면아이를 제압할수 있을 것이다.

너는 이제 어른이므로.

 

끝으로.

내면아이를 달래거라.

달랜다는 것은 내면아이가 더 이상 아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내면아이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첩경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용서이니라.

아프고 슬프게 한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하거라.

그것이 부모였다면 당시 부모의 입장이나 처지를 헤아려 보고 부모를 용서하란 말이다.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나면 내면아이는 고착된 신념체계에서 벗어날수 있다.

 

그러기 위하여 중요한 것은 ‘내면아이’와의 ‘정직한’ 대면이다.

‘나는 불행하게 성장하였어. 난 불쌍한 놈이야’식의 자기인식은 막연한 자기연민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내면아이의 슬픔이나 무서움이나 외로움에 저항하지도 말고 달아나지도 말라.

정면으로 대면하여, 그 ‘내면아이’는 또 다른 존재로서 인정하여 버리란 말이다.

어린 시절의 존재와 상황, 그 기억을 그대로 독립된 것으로 인정하라.

그리하여야 상대를 이해할수 있다.

그 아이는 지금의 내가 아니지 않은가.

어린 시절에 홀로 흐느껴 울었던 어두운 다락방.

어른이 된 지금 그 장면을 정직하게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서) 떠올려 보라.

지금도 그 다락방이 무서운가, 그토록 외로운가.

그 낯익은 외로움과 무서움은 이제는 무서운 손님이 아니다.

이제 아무런 위해도 가할수 없거든.

어린 시절의 내가 아니거든. 난 어른이거든.

이제는 무섭지 않아 외롭지 않아.

 

<슬픔을 사랑하라. 슬픔에 저항하지도 말고 달아나지도 마라. 슬프게 하는 것은 당신의 기분 일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헤르만 헤세->

<기쁨 우울 분노 깨달음은 뜻밖의 손님처럼 찾아온다. 이런 것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접대하라. -이슬람 신비주의자 루미->

 

그리고 나서 아픔과 슬픔을 주었던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하여 보아라.

그 상대가 부모였다면 어린 시절 어머니나 아버지가 당(當)하고 있었던 시대적 상황이나 사적(私的)인 처지나 환경을.

전쟁...변혁...궁핍...관계...신병(身病)...성격...부모의 내적아이...를.

이해하고 나면 ‘용서’도 할수 있으리라.

 

아, 그러나 당사자 아니라고 말이야 쉽지.

이해가 그리 쉽고 용서란 그리 수월한가.

 

양준익이 감독 주연한 독립영화 ‘똥파리’.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의하여 누이와 어머니가 죽고 가정은 풍비박산.

그 기억은 똥파리의 내면아이로 하여금 '동일시에 의한 폭력의 체질화'의 신념체계를 만들었다.

그 내면아이에 사로잡혀 일상을 폭력에 젖어 사는 똥파리의 처참한 몰골은 실로 끔찍하였다.

내면아이의 신념체계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하지만 똥파리는 벗어날수가 없는 것이다.

똥파리의 내면아이의 신념체계는 너무나 완강하였고, 일견 ‘이해’와 ‘용서’라는 ㅊ원을 초월해 버린 회복불능의 내면아이였다.

똥파리의 내면아이의 구덩이는 너무나 깊어 아득하였다.

영화를 보면서 내 입에서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 나왔다.

 

지기중 어떤 사람은 형제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 깊었다.

노모를 부추기고 작당하여 그에게 가하여진 정신적 물질적 왕따와 모욕을 그는 잊지 못한다.

슬을 마시면, 형제들의 그 징그러움을 도무지 이해할수 없다고 내게 토로하면서 징징거린다.

그에게는 이해가 용서의 선행조건이 아닌 모양이었다.

용서는 하였으되 이해하지는 못하겠다고 그의 ‘내면아이’는 여적 괴로워 하고 있으니.

 

‘세상에 용서처럼 힘든 것이 없다’고 회자(膾炙)된다.

참으로 이해와 용서란 정신적 노고와 시간과 인내를 요하는 과정이다.

용서란 일회적 결정이 아니다.

녹았다가 다시 얼어 버리면 그것은 용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여행일지 모른다.

 

그러나 심득(心得)하라.

용서란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상대를 위하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이해하고 용서하자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과 관련이 있는 것이 바로 용서이다.

용서란 내적인 과정으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자신의 진짜 감정을 억누르고 숨긴다는 의미가 아니다.

 

용서는 자기희생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감정이 바뀌는 것 뿐이다.

일방적인 작용으로서, 상대가 개입되지 않는다.

상대의 책임을 면해 준다는 것도 아니고 잊어 준다는 것도 아니다.

상대가 용서를 알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상대의 생사여부도 상관없다.

그 어떤 조건도 없다.

 

최근 심리학은 ‘용서’라는 감정의 효능을 발견하였다.

막연한 개념으로서의 용서가 아니라, 정신적인 안정에 절대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바로 ‘용서’임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용서’야 말로 정신건강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정신적 저항력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용서는 자유(自由)의 감정이고 수용(收容)의 감정이다.

증오나 원망이나 보복심이나 희생 당했다는 생각을 품고 사는 것은 바로 독(毒)을 품고 사는 것과 진배없다.

 

용서란 진정한 어른만이 가능한 용기이다.

‘용서’로 인하여 '내면아이'는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다.

스스로 자유인(自由人)으로 해방되는,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 바로 '용서'이다.

 

'내면아이'로 부터 독립하라.

'용서'를 통하여.

 

아, 괴로운게 어디 ‘내면아이’ 뿐이랴.

인간이란 본시 어떤 종류 아픔 하나쯤 지닌채 살아가는 존재이다.

‘불안’이라는 아픔은 인간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다.

 

그러나.

비니야 미니야 그리고 아이들아.

지혜의 현명함으로 아무는 상처도 있느니.

모쪼록 너희들.

마음의 평화로움으로 행복하게 살거라.

 

할비가 두서없이 지껄였구나.

너희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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