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김승옥 1.2.3 (1,4,3,3)

카지모도 2019. 10. 2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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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김승옥]]

<생명연습> <서울,1964년..> <서울의달빛...> <김수만씨..> <염소는..>

 

 

<생명연습>

-김승옥 作-

 

***동우***

2015.12.17 04:12

 

김승옥 (1941~ )의 데뷔작 '생명연습'은 1962년도 신춘문예 당선작.

김승옥의 대표작들은 거의 20대 초 중반에 생산된 것들... 그는 분명 천재였다.

그때 내게 김승옥은 하나의 전율이었는데, 그의 언어를 사람들은 '감수성의 혁명'이라고 하더라만 내게는 '감수성의 적출(摘出)'이었다. 예리한 메스로 도려내는듯한.

그로 인해 나의 자폐적 성장통의 몽롱한 기호들은 비로소 몸을 얻어 피흘리기 시작하였다.

이 소설의 배후에 짙게 깔려있는 '아버지의 부재'

김승옥의 '아버지의 부재'는 좀 더 프로이트적이랄까... 여타 소설가 이문열과도 김원일과도 이문구와도 김성동과도 다른 것이었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근친상간적 욕동, 거세공포... 그리고 수퍼에고에 의한 윤리적 갈등.

어머니의 남자관계, 형의 폐병 치료비를 위해서라던지, 죽은 아버지의 환영을 찾아라던지...

안일한 자기합리화에 기대지 않는다.

형은 어머니를 죽이자고 끈끈한 음성으로 나와 누나를 꾀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를 죽이자는 끈끈한 음성... 어쩌면 나도 가지고 있었을까.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이 한 마디로 얼마나 기막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과정 속에는 번득이는 철편(鐵片)이 있고 눈뜰 수 없는 현기증이 있고 끈덕진 살의가 있고 그리고 마음을 쥐어짜는 회오(悔悟)와 사랑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봄바람처럼 모호한 표현이 아니냐고 할 것이나 나로서는 그 이상 자세히는 모르겠다.>

폐허의 성곽(城郭), 먼지쌓여 음습한 지하실이거나 다락방...

그런 분위기의 자기세계를 가지고 있는듯한 사람을 만나면 나 또한 어쩐지 좋아져서 쩔절 매었었다.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버린 선교사, 그리고 애란(아일랜드) 선교사의 마스터베이션.

<흥청대는 항구의 여름 밤과는 상관없이 바위처럼 고독한 자세 하나가 우리의 눈 앞에서 그의 기나긴 방황을 시작하고 있다. 그렇게도 뛰어넘기 힘든 조건이었던가. 일요일에 교회에서만 선교사를 대하는 신도들에게는 도대체 상상될 수 없는 그래서 무수한 면(面)을 가진, 아아 사람은 다면체(多面體)였던 것이다. 바람은 소리없이 불어오고 잎들조차 이제는 숨을 죽이고 이슬방울들이 불빛에 번쩍이면서 이 무더운 밤이 해주는 얘기에 귀를 기울일 때 나의 등에도 누나의 등에도 어느 새 공포의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들끓는 카오스적 성의식과 거세공포.

그 시절 섹스는 나누는 것이 아니라 범하는 것이고 범해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젊은녀석들, 들끓는 카오스적 성의식은 필경 요함빈! 최음제의 위력을 과도히 신앙하였을 것이다.

성적 분방함이 허여(許與)되는 요즘 세상에야 여신의 멘스따위 입에 올릴 나이브한 소녀 있으랴.

얼마전 우연히 유튜브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지상열이 사회보는 '노모 쑈' 라는 프로, 처녀들이 둘러앉아 노골적으로 나누는 너무나 너무나 적나라한 섹스에 관한 얘기들과 액션들...이제 섹스는 공기와 같은 자유재(自由材)가 되어 버렸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더라도 나는 궁금하다.

작금의 젊은이들에게는 이 소설 '생명연습'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하고.

확신컨대, 그들 감수성으로도 결코 고리타분하지는 않으리라...

 

 

<서울,1964년 겨울>

-김승옥 作-

 

***작은물결***

2011. 08. 29

 

언제 읽었던 책인지 가물가물하네요...ㅎㅎ

 

***<동우>***

2011. 08. 30

 

작은물결님은. 나와는 상당한 세대차가 있으니 김승옥의 언어가 낯설테지요.

나보다 연배이신 어머님 지혜님은 어느 정도 느끼시리라.ㅎㅎ

한번 읽어 보십시오.

김승옥의 언어.

세대를 떠나 나는 굉장히 통유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아마 작은물결님 이해 못할 정서도 쬐끔 있으리로다. ㅎ

지혜님, 어머님과도 세대차?

그러나.

어머님과 지혜님과의 언어는 스스럼없으리로다.

 

***후니마미***

2011. 08.29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동우님의 새로운 책읽기 권고

 

***동우***

2011. 08. 30

 

짧은 것들, 강렬한 것들.

그런 것 골라 올리려고 하는 Reading Books.

내게는 후니마미님. 홍명희의 '임꺽정'의 텍스트 파일이 있답니다.

‘사계절 판’ 방대한 분량의.

임꺽정처럼 재미있는 소설이 세상에 있을까요?

재미로서는 아마 우리나라 최고의 소설일 겁니다.

이 소설의 재미를 우리 리딩북 독자들과 나누어 읽을려면 몇회 정도 나누어야 하려나?

이미 모두 읽으셨을테지만.

언제, 내 불로그 임꺽정 카테고리 만들어 매일 일정 분량 올릴 생각도 있습니다.

참 재미있다오.

 

***후니마미***

2011. 08. 30

 

저는 임꺽정 읽다 말았습니다 7-8년 전에 더 이상 읽을 수 없어서 언젠가 읽게 될까 했어요

다른 이들이 좋다는 소설이었는데 제겐 왜 그런지 알 수 없습니다

긴 호흡을 받아들이지 못한 탓일까요

조금씩 읽어 보면 또 어떨지요

책으로는 읽지 못했던 문장이 임꺽정이나 수호지 같은 대하소설이었습니다 ㅎㅎㅎ

 

***저녁산책***

2012. 06. 16

 

동우님! 제목이 제가 태어난 해랑 가까운 듯하여 읽어보았습니다.

이 남자들이 겪는 겨울이 따뜻하지 않은듯 하여. 좀 애잔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토요일을 앞둔 밤이라 좀 느긋해서 이렇게 빈둥거리며 오랜만에 놀다갑니다.

감사합니다^^

 

***동우***

2012. 06. 18

 

저녁산책님.

김승옥의 언어는 우리 시대 하나의 아이콘이었답니다.

저와 같은 감수성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지요.

이 소설의 대사를 차용한 '언어유희'도 한때 유행하였었지요.

 

***행복끼니***

2012. 06. 18

 

와우~~카바이트 불빛, 참새구이~~

참으로 추억의 단어가 됬네요~~

카바이트냄새가 기억나는거같아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동우***

2012. 06. 25

 

행복끼니님.

연배가 어떻게 되시는지 모르겠으나, 카바이트 불빛과 참새구이의 정서를 아시는 분이시니.

반갑습니다.

행복끼니님도 한주의 시작.

행복하시기를.

 

 

<서울의 달빛 0장>

-김승옥 作-

 

***동우***

2013.07.29 04:55

 

근자(近者), 김승옥을 올린 김에 1977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서울의 달빛 0장'을 올립니다.

저 세태적 풍경들은 1970년대 만의 모습은 아닐겝니다.

세상의 시선을 온 몸으로 열망하는 현대여성의 육체성(?)이랄까, 성의 자본화랄까....

그런 건 작금의 세태에서 한층 더 세련되게(?) 신랄한 바 있지 않을까요?

화장(化粧)에다 분장(扮裝)에다 변장(變裝)의 경지까지.. 눈을 코를 턱을 이마를 가슴을 급기야 성기까지 자르고 꿰메고 붙이고..

우리나라 온 외국인들에게는 놀라운 풍경이라지요?

본디 나름나름 어여쁜 웅녀(熊女)들이건만, 그런 법석은 식을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여자는 '잡아먹는 돼지고기'가 아닐터인데 스스로 남자에게 맛있는 고기만 되면 장땡이라는 듯.ㅎ

남성성이 그리워 하는 여성성의 본질이 필경 그런 곳에만 기반하는건 아닐터인데 말입니다.

아내.

고향은 오리지널 한 것.

<그렇다. 그것은 여행이었다. 가는 곳마다 고향과 비교해 보듯 여자마다 아내와 비교해 보곤 했다. 그러나 모두가 고향과 닮았으나 아무데도 고향은 아니듯 모두가 아내를 닮았으나 아내는 아니었다. 실제로 며칠이고 머물고 싶어 붙잡은 여자가 마침내는 비용만 축낼 뿐 어느 순간에선가 역시 타향이라는 깨달음만 안겨 주는 것이었다. 나의 타향을 자기의 고향으로 가진 사람들이 있듯 나에겐 타인인 그 여자들을 고향으로 갖고 있는 남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치는 동안 배치가 다르고 가꿈이 다르고 규모가 다를 뿐 결국 모든 곳이 집과 길과 숲과 냇물 둥으로 이루어져 잊음을 알게 되듯 그 마을의 생활 속으로 들어갈수 없고 또 뻔해서 들어가기도 싫은 여행자에게는 여행의 시작에 느꼈던 기대와 흥분도 이내 잃어버리고 지저분하나마 익숙한 고향 거리에 대한 향수만 짙어갈 뿐이었다. 마침내 향수의 고통으로써 허전한 여행자는 아무리 잘 꾸민 도시에서도 지저분한 고향의 모습과 닮은 구석을 발견했을 때만 우두커니 발길을 멈춘다.>

성의 독점적 소유를 전제한 아내라는 존재, 그것이 기반하는 바가 또한 순결이데올로기일까요?

옛 아내에게 성(性)의 과점(寡占)을 요구하는 저 비열한 욕망은 또 어찌해야 합니까?

통장을 찢는 한영숙의 저 자존(自尊)만은 아름답습니다만.

월요일입니다.

좋은 시작을.

 

 

<김수만씨가 패가망신한 내력>

-김승옥 作-

 

***동우***

2016.01.24 04:35

 

휴일, 김승옥의 꽁트 한편.

<사람마다 약한 부분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나봐. 그 약한 부분이 그 사람 인생을 예정에 없던 엉뚱한 꼴로 망가뜨려버리는 것 같아. 어떤 사람은 권력에 약하고 어떤 사람은 돈에 약하고 술에 약한 사람, 도박에 약한 사람, 색정에 약한 사람. 그런데 난 과부한테 약했어.>

과부만 보면 불쌍해서 견딜수 없는 사나이.

사람마다 마음이 약해지는 부분이 적어도 하나씩 있다지만, 김수만씨가 패가망신한 저 내력이 이해가 좀 되시나요?

난 이해가 갑니다.

예전에, 늙은 거지만 보면 불쌍한 마음이 북받쳐 견디지 못하는 사람을 알고 있었거든요.

그는 그런 거지를 만나면 정말 가진 것 몽땅 털어놓습니다. 언젠가는 입고있던 점퍼를 거지 앞에 벗어던지고는 냅다 도망치는 그를 목격한 적도 있지요.

지하도나 육교에 엎드려 있는 거지가 무서워서 (자신을 제어할수 없으니까) 일부러 먼길을 둘러서 가곤 했지요.

그에게도 필경 무슨 내력이 있었을겁니다.

저 김수만씨, 결국 자신의 아내를 '우리집과부'로 만들어 동정의욕을 불태우고 있습니다그려.ㅎ

 

옛날 유머.

어떤 식인종이 자기 부모를 잡아먹고는 엉엉 통곡하더랍니다.

"난 이제 고아가 돼 버렸어'하면서.. 하

 

권해 드릴것 있어서, 다른 얘기 하나.

'홍정욱'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 있으실겁니다.

하버드 출신의 훤칠한 미남에다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하였던, 왕년의 미남배우 남궁원의 아들이기도 하지요.

예전에 7막7장이라는 홍정욱의 책을 읽고 그의 금수저(환경과 타고난 재능과 외모)를 부러워한 적이 있었지만, 정치를 할 적에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국회의원을 그만 둔 후 헤럴드 미디어 회장으로 있으면서 지속적으로 출판하는 책들을 보면서 홍정욱이라는 인물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인문고전을 널리 퍼뜨려 우리나라 척박한 문화풍토를 진작코자하는 그의 노력..

정치꾼 나부랭이들은 꿈꿀 염도 갖지 못할, 깊고 아름다운 뜻을 품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재클래식스, 우리나라와 동서양을 망라한 인문고전을 벌써 90권째 발행하였구요.

외국책은 번역에 있어서 늘 아쉬운 편이었는데, 올재 클래식의 책들은 정말 정성들인 최상의 번역으로 느껴졌습니다. (당근, 모두 읽은 것도 아니고 내 수준에서 그렇다는 말이겠지요만.ㅎ)

이번 발행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데 아니마',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 그리고 동양고전 '시경(詩經)' 과 '문심조룡(文心雕龍)'.

책값은 두께(페이지분량)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권당 2900 원.

올재 클래식 회원 가입하시면 출판정보를 받아볼수 있습니다. (공짜 전자책도 제공합니다)

금방 매진되니까, 주문은 그 점을 감안하시고.

http://www.olje.or.kr

날이 춥습니다.

좋은 휴일을.

 

 

<염소는 힘이 세다>

-김승옥 作-

 

***동우***

2016.07.05 04:29

 

'김승옥' (1941~ )의 '염소는 힘이 세다'

귀머거리 할머니, 골골하는 어머니, 열일곱살짜리 누나..그리고 부재(不在)하는 아버지.

비에 젖어 시꺼먼 판잣집, 끊임없이 들리는 강물소리, 식은 땀 나는 홍수의 꿈에서 벗어나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깨끗하고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건만.

전후(戰後), 가부장 나라의 텃밭에서 고작 열두살 짜리 남자아이는 '염소는 임이 세다'고 중얼거립니다.

염소는 힘이 셉니다.

염소가 죽고나자 이제 집에는 힘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힘 센 것은 죄다 집 밖에 있는 것들입니다.

무시무시한 바깥 세상에 대하여 하냥 무섭고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소년 정민이.

염소는 정민이의 반어적 메타포일테지요.

염소고기의 비린내에 소년은 구토합니다.

식물성 공포, 육식성 폭력 앞에 구토하는 '한강'의 '채식주의자'처럼.

1950년대 말이거나 1960년대 초.

그 무렵 종로통 파고다공원 청계로 숭인동 동대문 일원의 저 회색 풍경화를 나도 좀 기억하고 있습니다.

중동중학을 다녔던 내 황량한 나와바리였지요. 독고(獨孤)의..

그리고 세상 가득 (선생도 학생도) 暴이거나 權이거나 金이거나 緣이거나 무어로든지 힘 센 놈이 장땡이었던 부당한 폭력적 색채...

여러모로 남보다 약해 빠졌던 나 또한, 내면과의 부조화와 열패감으로 신음하였지 싶습니다.

그리하여 영화이거나... 뭐 그런 쪽으로 도망 가 뒷전으로 숨어 들었을테지요.

저 소년 정민이는 필경 힘이 세어졌을겁니다.

강인하게 한세상 잘 살아내어 지금쯤 힘있게 늙어 있을겁니다.

줄곧 약해 빠졌던 나는 여적 요 모양 요 꼴이지만.

 

 

 

-독서 리뷰-

 

[[김승옥]]

<그와 나> <차나 한잔> <환상수첩>

 

 

<그와 나>

-김승옥 作-

 

***동우***

2016.02.17 00:26

 

김승옥(1941~ )의 ‘그와 나’

기차간에서 어금니를 간질이고 있는 해방감을 경계하라.

서울대학교 교복을 입을때까지 벗지 않으려는 고등학교 검정 교복.

고딩과 대딩과의 과도기, 다른 종류의 틈입은 불안하다.

질서와 제도의 표상, 기성의 제복 속이 안전빵이다.

 

인생이란 얼마나 조심스러운 것이냐.

인생에서 중요한 이 단계를 뒤죽박죽으로 헝클어놓지 말라.

하찮은 한개의 못, 불가시적인 작은 우연이 인생을 조지는 수가 있다.

이 경쟁사회가 마련해 두고 있는 제도에서 벗어났다간 개죽을 쑤는수가 있단 말이다.

 

이상주의여, 래디컬이여.

I believe we must invent our future and we can do it. 라고?

아서라 말아라.

 

<이제야 나에게는 그 데모와 나와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도락이 아니라 반드시 실패했어야 할, 내가 20년 동안 믿고 의지해왔던 것을 송두리째 파괴시켜버리려는, 실패했어야 할 반드시 실패했어야 할 나의 적이었다. 그리고 제 맘대로 나의 몫의 내일까지 발명하겠다고 호언하는 그 친구 역시 나의 적인 것은 분명했다. 또는 그에게 있어서 나는 그의 적이 분명했다.>

 

가난한 수재(秀才)여.

자네의 ‘쁘띠 부르주아'를 부끄러워 말지어다.

 

내가 훔친 여름.. 젊은 놈들.. 개별적 인식...열등감.. 죄의식..영일이의 치질같은..

자네의 자의식에 겨운 그런 것들을 나는 사랑하노라.

'국립서울대학교'의 마크 (ㄱ과 ㅅ과 ㄷ이 조합된)는 내게 까마득한 것이었지만, 자네는 내게 공범의식의 위무감(慰撫感)을 준다.

 

'그'는 내게 너무 크다.

무섭고 버겁다. ㅎㅎ

 

 

<차나 한 잔>

-김승옥 作-

 

동우

2016.03.14 04:26

 

김승옥의 '차나 한 잔'

2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작가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라는군요.

소시민의 가정과 사회에서의 샐활모습, 1960년대의 그런저런 정서를 한번 들여다 보십시오.

 

그 시절 사회생활의 커무니케이션은 대개 다방에서 이루어지곤 하였지요.

"차나 한 잔 할까요?"

요즘 "언제 밥이나 한번 먹읍시다"의 뉘앙스...

 

참, 어제 바둑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한판 이겼더군요.

정체모를 안도의 한숨이 나옵디다그려. ㅎㅎ

 

한주의 시작, 밝은 출발을.

 

***동우***

2016.03.15 04:42

 

김승옥은 서울대(불문과) 다니면서 실제로 신문의 연재만화를 그렸습니다.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김성환 화백과의 교우도 돈독했다고 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프리랜서 만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그의 의지도 의도도 개입되지 않은 전혀 우연이었지만, 신문 연재만화를 그린 고정수입으로 그런대로 살만합니다.

그런데 그 일거리가 떨어져나가, 막막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두 팔로 아내의 상반신을 껴안았다. 그러면서, 앞으로 자기도 아내를 때리게 될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앞으로 다가올, 아직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무서워져서 그는 울음이 터질 뻔했다. 그는 아내를 껴안고 있는 자기의 팔에 힘을 주었다.>

 

도시에서 비비적거리고 사는 쁘띠 부르주아의 회색빛 자의식..

 

1960년대, 거의 모든 주거공간은 아파트(공동주택)가 아닌 일반주택이었지요.

방귀소리도 나누는, 장지문 하나 사이로 다른 가정과 이웃하여 생활하는 건 예사였습니다.

그래도 어느새들 은밀한 시간을 갖고서리 아이들은 잘도 만들어냈지요. ㅎㅎ

 

또한 남성제위께서는 좀 부러워하실랑가.

저리도 남편에게 꼬박꼬박 공대하는 그 시절 아내들의 모습.ㅎ

 

'차나 한 잔 하실까요?'

불편하거나 구차한 사안에 대하여 에둘러 말하기.

'언제 밥이나 한번 먹읍시다'

어정쩡한 관계를 그러구러 유지하기 위하여 다테마에로 그냥 한번 말해보기.

 

그걸 위선이며 일종의 추파이고 회색빛 도시의 비극이라는군요.

그러나 작가는 해고시키면 차라도 한잔 나누는 인정. 동양적인 특히 한국적인 미담.. 그것을 비극이지만 따뜻한 비극이라고 느끼는 건가요.

그러나 단칼로 목을 치는 시늉으로 단호한 한마디. "넌 해고야(You're fired)" 하는 것에 비하면, 서양과는 다른 인정이 깃든 동양적인 정서입니다.

 

그런데 작금 너무 변했습니다.

요즘 정서의 트랜드는 '엣지'가 있어야 한다거나 '쿨'해야 한다거나 '시크'한 것 어쩌구 하던데 나는 그 어휘들이 정확하게 무얼 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명확하고 주체적이고 이기적이고 냉정하고 세련되고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도회적이고.. 등등의 뉘앙스로 느끼고는 있지만 말입니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어느 회사에서는 해고 통보를 휴대폰 메시지로 날리기도 하는가 봅니다.

 

요즘 젊은이들 툭하면 '인생 뭐 있습니까? 쌈빡하게 살다 가는거지요' 하고 건방지게 내뱉던데, 늙다리가 늙다리 어조로 말합니다.

"구질구질한게 있기 때문에 삶과 세상은 살만한 거란다. 이 녀석들아."

 

 

<환상수첩>

-김승옥 作-

 

***동우***

2016.07.25 04:50

 

'김승옥'(1941~ )의 초기작 '환상수첩'

젊어 한때의 초상(肖像), 그때 김승옥의 언어는 덧든 상처의 쓰라림같은 것이었습니다.

도대체가 우리는, 청춘에게 허여(許與)된 자유를 지탱할 기반자체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지요.

안팎으로 말입니다.

위악(僞惡)은 데포르마숑된 일종의 도피주의(逃避主義)였을테고.

폐색(閉塞)된 자의식이 꿈꾸는 막연한 순수(純粹)의 이미저리들.

그러나 나이 먹어가면서 알게 되지요.

그 순수란 얼마나 삶을 버겁게 하는 비순수(非純粹)인가를.

 

차츰 지껄이기로 하고.

'환상수첩', 세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덧.

1964년에 출판된, 낡아빠진 조그만 책자 한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번민기'(煩悶記, 우리말 제목은 '삶과 죽음의 대화')라는 제목의.

1903년, 열여덟살의 나이로 일본 니코에 있는 화엄폭포(華嚴瀑布)에 몸을 던져 자살한 '후지무라 미사오(藤村操)'가 남긴 기록입니다. <그의 자살 후 '게곤노 다키'(화엄폭포)는 젊은이들의 자살 명소가 되어 4년 동안 200여명이 폭포에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지금 읽어보면 한 소년의 여물지 못한 철학적 사변(思辨)의 글들.

근데 그때에는 굉장한 천재가 깊은 자기성찰로 도달한 궁극의 결론은 허무(虛無)라고 여겨져 자살하였다는.

그리하여 그가 남긴 글에서 자살의 당위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도 하였을겝니다.

그 책의 부제는 <안구(眼球)는 안구자신을 본다>입니다.

죽기 전 '후지무라 미사오'는 나무에다가 한구절 시를 남겨놓고 몸을 던졌습니다.

베껴 씁니다.

 

++++

-巖頭之感-

 

悠久たる哉天壤、

遼久たる哉古今、

五尺の小軀 を以て此大をはからむとす、

ホレ-ショの哲學竟に何等のオ-ソリティ-に値するものぞ、

万有の眞相は唯た一言にして悉くす、

曰く「不可解」、

 

我この恨みを懷いて煩悶終に死を決するに至る。

旣に巖頭に立つに及んで胸中何等の不安あるなし、

始めて知る、大なる悲觀は大なる樂觀に一致するを

 

대충 역(譯)하자면.

 

-바위위에서의 감회-

 

머나먼 하늘과 땅

유구한 과거와 현재

나 오척의 작은 몸으로 그 거대함을 재려하노니

호레이쇼의 철학에서는 아무런 진실을 찾을 수 없구나

만유의 진상은 오직 한 가지라고 말하노니

가라사대 ‘불가해(不可解)’ 바로 그것이다

 

이 한을 품고서 번민에서 벗어나고자 죽음을 결행하는 것이니

이미 바위 위에 서있음에 있어, 가슴 속에 아무런 불안도 없도다

비로소 알았으니 위대한 비관은 위대한 낙관임을

++++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랍니다.

오랜 후에 밝혀진바 '후지무라 미사오'의 자살 원인은 '실연'이었다는... 바로 그 것.

아아, 그렇습니다.

그를 자살로 내몰았던 것은 철학이 아니었던겁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의 근거는 '존재하는 것'에 있습니다.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소설과는 엉뚱한 객설이었습니다. ㅎ

 

***虹厓 홍애***

2016.07.25 20:58

 

읽으면서,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읽는 것 같습니다.

최근 며칠 그의 글을 쭉 훑었던 때문인듯도 합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존재의 가벼움이듯이

우리를 죽게 하는 것도 철학이나 사상보다 인간적인 가벼움 때문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그닥, 멋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은 그저 그렇고 그렇다는 인정은 쓰지만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동우***

2016.07.26 04:08

 

이 소설, 확실히 다자이 오사무의 맛이 느껴집니다.

홍애님 다시 꽂히시는 다자이 오사무, 그러실 줄 알았지요.

내가 그러하였듯.

 

그리고, 변심과 변신.

홍애님 댁에서 읽고, 아 우리 홍애님 이제야 철이 드는구나하였답니다. 하하하

홍애님을 향하여 내가 늘 희망하였던바 바로 그것입니다.

이기(利己)의 성을 좀 더 굳건히 쌓기.

나는 홍애님의 허약한 이기(利己)가, 친구로서 늘 슬프고 안타까웠지요.

홍애님 만고(萬苦)의 근원... 하하

그 얘기 여기서는 이쯤.

 

홍애님 SNS도 멀리 하신다니...

페이스북, 찬란한 호호야님네 네 가족의 파리통신은 어쩌려구요.

 

***송현***

2016.07.27 10:36

 

여기오면 고향같이 늘 그분들이 계셔서 좋습니다 ~ ^^

동우 오라버님, 홍애님...

존재의 가벼움이란게 참... 우습습니다

아들놈 철이 아직 안나 홍대주변을 어슬렁거리는데

이놈의 노래 가사가 아주 가볍고 웃겨서 ....

여친에 폭빠진 놈의 노래려니 하다가

그래도 자식이라 자꾸 듣자니 또다른 깨우침을 얻습니다

<아 맛다, 널두고 왔다>라는... 노래가 있어요. ^^

 

***┗동우***

2016.07.28 11:15

 

송현님

예가 고향같다 하시니 흐뭇하게 웃습니다.

 

아드님, 그룹 사운드 '플링' 이끄는 yano (맞나요?)

준수한 외모의... 이제 새 음반 내고.

동경 멜론님의 아드님 쇼겐과 비슷한 보이스 칼라..(전에 동영상으로 보았던 기억)

 

아 맞다 널 두고왔다..

어떤 내용이길래.

유튜브 찾아보면 있을라나.

 

***동우***

2016.07.26 03:52

 

서울내기 오영빈.

서울내기 다마네기 맛좋은 고래고기..

<지방아이들은 서울아이들을 이렇게 놀려댔는데, 서울내기와 다마네기와 고래고기가 무슨 연관이 있다는겐지 여적 나는 모르고 있습니다만..>

 

죽을 용기가 없어 슬프다는, 뺀질뺀질한 서울내기 다마네기 오영빈.

그러나 나(정우)는 간파하고 있습니다.

위암같은 병이라도 걸리지 않는한 결코 죽지 않을 녀석이라는 걸.

녀석의 우물(세상과 괴리된 자기만의 세계)은 가짜배기 우물이고, 녀석의 저 현란한 위악(僞惡)은 순 위선(僞善)입니다.

위선적 위악이라... 하하 형용모순(形容矛盾)인가요?

여하튼 오영빈은 띵까띵까 잘먹고 잘 살았을것 같습니다.

 

순천 촌놈들.

윤수와 수영과 형기는 오영빈보다는 제가끔의 진짜배기 우물을 가지고들 있는 것 같은데....

 

오늘도 덥습니다.

下편 마저 올리고 지껄입지요.. ㅎ

 

***동우***

2016.07.27 04:16

 

완전무결한, 순도(純度)100 짜리 순수(純粹)라는게 존재할까.

사랑이, 평화가, 自由가. 이념이, 정의가, 善이, 公平이, 이성이, 파토스가, 公義가. 신앙이, 이념이, 행복이, 플라토닉이, 에로티시즘이, 惡이, 민주주의가, 罪가, 罰이, 절망이, 생명이, 생활이, 슬마시기가...

 

사자는 사슴을 잡아먹고, 개미는 사람 발에 밟혀죽고, 재수없는 것들은 벼락에도 맞아죽고, 어떤 년은 세상 이쁘게 생겨나고, 어느 놈은 지지리 거지자식으로 태어나고...

자연 자체가 불완전하고, 정연한 질서에 기반한 로고스가 완벽하지 않은데 인간이 불순해서는 아니 될 하등 당위가 어디 있는가.

 

<생활하는 딴 얼굴은 슬프도록 서먹서먹했다. 그러나 그 서먹서먹하다는 느낌 속에 존경의 감정이 끼어 들었다면 나는 어찌될까? 그런데 사정은 그런 것이었다. 나의 연민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 나의 가족으로 그리고 나의 스승으로 되는 까닭을 알고 보면 그렇게도 단순한 것이었다. 내가 무서워하며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있던 것은 실상은 아주 간단한 모습을 한 하나의 얼굴이었던가? 저 일상생활이란 대수롭지 않은 하나의 탈[假面]이란 말인가? 둘러써도 별 손해 없는, 과연 별 손해 없는? 철봉그네 위에서의 이씨의 표정처럼 위악(僞惡)도 없고 위선(僞善)도 없는 것이라면 한번 둘러써보고 싶었다.>

 

스스로 죽으려는 아해들아.

자기세계의 어두운 늪, 밑바닥까지 내려가 있는 자가 부러움이더냐 두려움이더냐.

생활이 던적스러움이더냐 공포이더냐.

 

폐색(閉塞)된 자아.

낄낄거리는 저 위악과 자학의 배후에 있는 것들 좀 아노니.

 

굴복이 부끄러웁다면

오염을 許하여 혼화(混和)되고 순치되고 타협하라..

 

마치 남의 인생을 공짜로 얻어서 살아 주는 것처럼 유유한... 테크니샹

한세상 한목숨, 그런 철이 들어야 살게 되느니라. 하

 

오늘도 덥습니다.

길게 지껄이려다가, 요령부득인채로 그냥..

 

***은비***

2016.07.27 08:00

 

생존을 목쉬게 울어재끼는 한여름의 매미 소리 들으며

사흘 아침을 나는 뻥 뚫린 구멍으로 입벌리고 있는 청춘들의 환상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등장인물 대부분의 자살, 죽음... 지리멸렬해 처절한 그들의 젊은날의 고뇌.

방울방울 눈물떨구는 형기에게 "살기 재미있지?" 처연하게 슬픈 이 이죽거림은 정우의 자살을 예견했던가?

 

저 슬픈 자화상들 곁에 이 시를 걸어두고 싶어요.ㅎ

 

<-散華 하고 싶던 겨울-

 

섬으로 가는 때 낀 航路는

트럼펫’이 울려서

婚禮 .

바다 위엔 假花가 날려도

나의 童貞은

한 치

한 치

움이 돋는다.>

 

그리고 내게 이 말을 보여주고 싶구요.ㅎ

 

"마치 남의 인생을 공짜로 얻어서 살아 주는 것처럼 유유한... 테크니샹

한세상 한목숨, 그런 철이 들어야 살게 되느니라. ㅎㅎ"

 

***┗동우***

2016.07.28 11:35

 

은비님.

저들 위악적 이죽거림.

찬바람 불어오는 뻥 뚫린 구멍에서 나오는..

 

왜 청춘은 정처(定處) 없어.. 스스로 괴로워.. 처연하게 슬픈 것인지..

 

어른이 된다는 것 늙어 간다는 건 어쩌면 절망하지 않으려는 필사적 몸부림의 과정이 아닌가 하는..

펄펄 끓는 순결한 원형질이 오염되고 순치되어 범속하고 천박한 것으로 식어가는게 아닐까 하는..

 

하하, 은비님.

늙어 보이는 청춘이 못보는 것들도 있겠거니와 젊어 보이는 이제 늙으니 아니 보이는 것들도 있으리이다.

 

서커스.

기억 속 센티멘탈리즘으로 포장된 처연한 리얼리즘..

 

트럼펫’이 울려서

婚禮 .

 

나(정우)의 아버지.

연두색에 빠저서, 마치 남의 인생을 공짜로 얻어서 살아 주는 것처럼 유유한..

 

은비님.

매미소리로 여름을 구가하는 건 사람 쪽일테지요.

어릴적 파블로 곤충기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대포소리로도 매미울음소리 멈출수 없었다는..

그 매미소리를 매미는 듣지 못하지요.

그나저나, 은비님.

여기 우리동네에의 여름은 매미소리 마저 없답니다.

그저 더워요.

 

***송현***

2016.07.27 11:05

 

산나리꽃을 좋아합니다

겨울을 알토란으로 건너

한잎 한잎 철저하게 줄기로 올라

주홍색의 깨웃음 환한 열정을

온세상에 알립니다

가을날 바싹 마른 모습은 보석입니다

마치종교의 헌신처럼 .....

 

***┗동우***

2016.07.28 11:44

 

송현님의 시인의 감성.

산나리꽃에서 종교적 헌신을 보시는...

 

가을날 눈여겨 보아야겠습니다.

 

 

 

-독서 리뷰-

 

[[김승옥]]

<건(乾)> <야행> <무진기행> <역사(力士)>

 

 

<건(乾)>

-김승옥 作-

 

***동우***

2016.01.12 04:42

 

전쟁속 한 소년의 성장소설, 김승옥의 '건'(乾)

근데 제목이 왜 '乾'일까.

하늘이라는 의미(하늘乾)는 아닐테고 필경 메말랐다는 뜻(마를乾)일게다.

사춘기즈음 아이들의 순정한 영혼에 미치는, 전쟁으로 인한 상황적 폭력.

그로 인하여 메마른 감성과 위악의 몸짓으로 거칠게 성장하는 그것을 은유함일까.

한 고아 소녀의 추악하고 교활한 어른들 틈에서 살아내기 위한 전쟁통의 눈물겨운 생존전략이 생각난다.(윤흥길의 '기억 속의 들꽃')

이 소설은 그만큼 안타깝고 애달픈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또한 전쟁이 만든 아픈 상처이다.

 

볼이 유난히 붉었던 이쁜 미영이와 그림을 그리면서 놀던 아이.

 

<1학년 때 어느 날이었던가, 이상스럽게도 둘만 그 지하실에 남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불쑥 미영이를 꽉 껴안아버렸었다. 그러자 미영이는 깜짝 놀라서 울음을 왁 터트리더니 그만 무안해진 내가 손을 풀자 느닷없이 자기가 쥐고 있던 하얀색 크레용을 분명히 하얀색이었다. 내게 내밀며, 이쁜 꽃 그려봐, 하는 것이어서, 하얀색의 벽에 하얀색의 크레용으로 무슨 그림을 그리라는 말인지, 이번에는 내가 어리둥절해버린 적이 있었다. 두 볼이 유난히 빨갛던 미영이도 지금은 없다. 재작년 6?25 때 피난을 아주 멀찌감치 일본으로 가버리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미영이네 집은 우리집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데 지금은 그 집 대문에 ‘매가(賣家)’라는 글이 쓰인 더러운 종이조각이 붙어 있는 빈집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엔가 방위대도 물러가면 그때는 기어코 다시 그 지하실의 벽화들 앞에 마주 서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날 아침 나는 절망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내게는 온 시내가 푸른색의 짙은 안개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위를 엷은 햇살이 어루만지고 있어서, 전날 저녁의 그렇게도 소란스럽던 총소리, 수류탄 터지는 소리, 야포 소리들이 그리고 그날 아침의 살풍경한 시가지까지도 희미한 옛날의 기억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 동안 못 느끼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을이 이 분지도시(盆地都市)에 찾아와서 모든 것을 퇴색시켜놓았다는 느낌뿐이었다. 확실히 깊은 가을이었다.>

 

전쟁이 만든 상황으로 인하여 아이의 정서는 극심한 분열을 겪는다.

화제가 된 빨치산 시체를 자신의 가족이 독점하는게 자랑스럽고, 자신이 좋아하는 이쁘고 착한 윤희누나를 형들이 윤간하려는 음모에 동참한다.

 

<바야흐로 나는 무서운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 간단한 말을 전해주는 그런 책임이 희박한 행위로써 가담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 미영아, 너의 집을 제공하라고 한다. 매가(賣家)라는 글이 적힌 너털터털한 종이조각이 붙은 너의 집 대문 앞을 지나칠 때마다 그러나 나는 그 집이 빈집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적어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고집하고 싶다. 미영아, 하고 부르면 곧 네가 뛰어나올 것 같았었다. 아니라면 어느날엔가는 아름다운 일본의 크레용을 내게 대한 선물로 가지고 돌아와서 네가 다시 그 집에 살게 되리라는 기대를 간직하고 있었다. 너의 빈집이 내게는 용궁처럼 신비스러운 곳이었다. 나는 온갖 화려한 공상을 그곳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자, 미영아, 나는 이제 몇 분 안으로 이러한 모든 것 위에 먹칠을 해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아아, 모든 것이 항상 그렇지 않았더냐. 하나를 따르기 위해서 다른 여러 개 위에 먹칠을 해버리려 할 때.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보다 훨씬 앞서 맛보는 섭섭함. 하기야 그것이 ‘자라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영아, 내게 응원을 보내라. 형들의 음모에 가담한다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다. 미영아, 내게 응원을 보내라. 그건 뭐 간단한 일이다. 마치 시체를 파묻듯이 그건 아주 간단한 일이다. 뭐 난 잘 해낼 것이다.>

 

나의 소년 그때에도 아이들은 위악(僞惡)의 포즈를 숭배하였었다.

그러나 그 위악이란 요즘 아이들의 그것과는 색감을 달리하는 상당히 음습한 것들이었다. (이문희의 소설 '흑맥'의 색감)

도대체가 아이들 다운 문화라는게 배양될 틈 없이 죄 어른들의 나쁜것들 흉내내기였으니까.

아이들에게 합당하게 베풀어지는 배려는 사회 어느 구석에도 없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커야하는, 좀 덜 자란 어른일 뿐이었다.

번화가에는 깡패와 거지와 시라이가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고, 종삼의 분바른 여자들은 교복소매를 잡아끌었고 뒷골목에서는 패싸움과 악다구니가 일상이었고, 학생도 선생도 교실에서까지 폭력에 익숙하였다.

내게는 유년의 6.25였고 휴전이 된지 10년도 넘게 지난 무렵인지라 그때 내 의식 속에는 전혀 전쟁이라는 것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쟁의 자취는 그때까지도 나도 모르게 나를 만들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전화(戰禍)가 지나간 어지간한 세월 뒤에도 페허의 풀숲 속에는 인골(人骨)이 뒹군다.

비쩍 마른 검둥이 소년들이 해골을 주어서 그것을 차면서 축구를 한다.

흰 이빨 드러내고 활짝 웃으면서.

 

 

<야행>

-김승옥 作-

 

***동우***

2016.06.01 04:21

 

'김승옥 (1941~ )'의 '야행'은 1969년에 발표된 소설입니다.

그 시절 도심의 밤거리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겁니다.

밤문화의 모습도 그러했을테지만 무엇보다 그때에는 통금이라는게 있었으니까요.

자정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밤거리로부터 어디론가로 죄 스며 들어야 합니다.

그 덕에 당시 호텔 여관 여인숙같은 숙박업소는 성업이었을겁니다.

역설적이게도, 호모 에로티쿠스의 부정(不貞)한 일탈의 시간을 나라에서는 그런 식으로 마련해 주었다고나 할까요.ㅎ

 

산업화 도시화 자본화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도시의 숲에 파묻혀 익명(匿名)으로 사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익명 속에 숨는다는 것은 비겁한듯 하지만 실은 참으로 편리한 것이지요.

통계적으로 계량되는 수많은 사람 속의 하나인 누군가(sombody)가 되면 투명인간처럼 nobody나 매한가지였을테니까요.

 

통금부렵 밤거리, 익명의 남자와 익명의 여자는 상대에게 슬쩍슬쩍 작업을 겁니다.

술 취한척 찝쩍대보다가 아니면 말고 식으로..

통금이 임박한 밤거리는 억압된 욕망들이 익명으로서 빠져나갈수 있는 참 허술한 철조망이었습니다.

 

<가령, 그 여자는 포로 수용소를 탈출하고 싶어하는 포로를 상상한다. 그는 철조망의 한 곳이 허술한 것을 우연히 발견한다. 그것을 발견하자 그는 자기가 이 수용소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했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부부가 아닌척 거짓으로 영위하는 한낮의 직장생활.

여자는 강렬하게 어떤 구원을, 일탈을 꿈꾸면서 밤거리를 배회합니다.

여자에게는 전에 낯선 남자에게 당하였던 강렬한 기억의 흔적이 있기도 하거든요.

 

여염 여자에게 부정(不貞)이란 공포와 혼란일겁니다.

창녀에게는 그런 감정이 없을터이지만, 여자는 그런 의식마저 수렴하고자 합니다.

낯선 남자와의 섹스가 구원이 아니라 타락이라는 의식을 갖고라도 말입니다.

여하튼 섹스란 거짓이 없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 여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의 욕구를 그러한 의식으로써 포장하게 될까봐 하는 것이었다. 막연하나마 그 여자는, 만약 자기에게 공포와 혼란이 없이 그것을 한다면 마침내 의식만이 남게 될 뿐이며 자기는 파멸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여자가 바라는 것은, 그렇다. 파멸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속임수로부터의 해방이었다.>

 

통금이 있는 밤의 힘을 빌어서.

이유를 묻지않고 두려워 하지도 않으며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갈수 있는 결단력있는 어떤 남자의 손길을 여자는 열망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남편과 같은 세상 범생이들은 그것을 두려워 하여 한번 찝쩍대보다가는 이내 꼬리를 내리고 도망칩니다.

그러나 통금 임박한 거리에서 여자는 그런 비겁한 남자들을 뒤로 하고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여자는 공포와 혼란이 없어도 사내의 손에 이끌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창녀들처럼, 아니 절실하게 기도해야 할 것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처럼.

 

그릇 속의 물에 떨어진 한방울의 잉크가 번지듯이 그 여자의 안에서 번지기 시작하여 이제는 발끝까지 가득히 채우고 있는 저 쓸쓸한 느낌... (여자는 남자에게서 이런 정서를 느끼는가 본데 남자로서는 그 쓸쓸한 느낌이 어떤건지 참 몽롱합니다만..)

그렇지만 여자의 저 <무모하고 비상식적이고 반사회적>인 욕망이 당초에 그런데서 비롯된 건 아닐테지요.

 

<어느 날 직장에서 그 여자는 무의식중에 자기 남편을 향하여, 집에서 하듯 "여보!"하고 불렀다. 남편의 얼굴이 새빨갛게 굳어지는 것을 보고 그리고 남편 곁에 있던 행원들이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걸 보고서야 그 여자는 자기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제껏 그런 실수는 한번도 하지 않았던 그 여자였다. 남편이 얼른 "왜! 내가 미스 리 남편 같소?"하고 농담인 듯 끝날 수 있었지만 그 여자 자신에게 무척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연극이 탄로날 때가 온 것이다. 연극은 탄로나야 한다고 그 여자는 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부부가 아닌척 허위로 유지되는 한낮의 거짓질서로 부터 도망가서 익명의 누군가에게 억압된 관계의 욕망을 터뜨리고 싶은 그런걸까요..

성적 욕구는 없었을까요마는.

그런데 만일 코이터스(성교)가 손바닥을 마주치는 정도의 행위로 가능한 것이라면 어떠했을까.

옷을 벗지 않고도 나누어지는 쾌락, 거기에는 공포도 혼란도 없을라나. 그건 부정이 아닐랑가..

내가 뭔 말을 하는건지...ㅎㅎ

 

<꽃다발을 목에 걸고 손을 저으며 웃으며 죽어가는 종족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것이었다.>

이런 문장을 보면 내가 간과하고 있는 무언가 있을듯 싶습니다만, 나는 엉뚱한 상상이나 합니다그려. ㅎㅎ

 

 

<크리스마스 이브>

-김승옥 作-

 

***동우***

2016.12.21 04:31

 

크리스마스는 언제부터 반짝거렸다가 언제부터 그 빛이 스러졌는지.

탄일종이 땡땡땡, 설레이던 그 노랫소리 범일동 언덕 피난민 국민학교에서 처음 들었을까.

동방박사,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 성냥팔이 소녀, 스크루우지...

 

수많은 사람들이 강물처럼 밀고 밀리면서 흘러가던 다운타운의 거리.

어른이 되고나서도 한동안 크리스마스 캐롤이 마음을 들뜨게 하더니 어느 무렵부터인가, 반짝반짝은 없어져 버리더군요.

아이들 태어나 시나브로 그 애들에게 전이되었을테지요.

 

어느 핸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많은 사람 죽었던 대연각 큰불 뉴스.

그 무렵 크리스마스 이브는 유일하게 통금이 없던 날이었었지요.

바캉스 베이비와 더불어 크리스마스 베이비란 말도 생겨났습니다.

 

라보엠.

가난한 연인들.

크리스마스 이브. 다락방 열쇠를 찾다가 가난한 청춘남녀는 손이 마주칩니다.

‘그대의 찬 손’을 로돌프가 부릅니다.

미미는 ‘미미는 내 이름’이라고 화답송을 부르지요.

 

중학교 소년의 서럽게 돌아서는 저 결연한 기분.

저 대학생 녀석의 비이성으로 포장한 이성적인 교활함.

또한 모두 나의 것이었습니다. ㅎ

 

***하늘의 소리***

2016.12.23 00:41

 

아주 아주 먼 옛날... 그러나 화살과 같이 빠른 세월 속에 남아있는 추억을 일깨워주는구나.

196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부산에도 눈이 엄청내렸지.

중2때 한 8개월 다닌 부산 "부민교회" 중등부에서 게임을 하고 선물교환을 마친 후 새벽송을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고등학교때 상헌이 너는 크리스찬이 아니었으니까 우리 크리스마스 이브 추억은 없었구나.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부민동 언덕에 있는 장로님의 판자집. 조그만한 두칸방에서 떡국 먹던 생각. 유난히 눈에 보이던 그 방 벽 유리액자 속 화폐와 우표들...

그리고 23년후 다시 나를 부르신 주님!

결국 머리에 기름 부으시고 목회자로 살게 하시고 이제는 영원한 고향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노년 삶을 허락하시니 감사 감사!

 

***┗동우***

2016.12.24 04:33

 

부끄럽도다. 정목사,

감사도 기쁨도 가뭇한 나이롱 크리스찬은...

자네를 단번에 사로잡아 버린 하나님. 그것도 미국 땅에서.

세세한 사연 언제 들려주어 은혜를 끼쳐다오. ㅎ

 

 

<무진기행>

-김승옥 作-

 

***동우***

2013. 02. 16

 

1960년대말 도회의 뒷 그늘을 어정거리던 내게 김승옥과의 첫 대면, 그것은 전혀 새로운 바람이었다.

지극히 개별적인 젊은놈들의 소외와 방황..그런 감수성의 무드를 세련된 감각적인 문체로 매혹시켰던 것이다.

김승옥의 '서울,1964년 겨울'을 부산대 영문과 출신 선배가 각색하여 YMCA무대에 올렸는데 지방 소극장운동에서 껍죽대던 나도 새까만 말단으로 참여하였었다.

 

무진기행.

아베 코보(모래의 여자를 쓴 일본작가)의 모래는 인간을 감금하여 압살한다.

모래는 폭력의 메타포였다. 단절과 허무가 내포된,

그러나 모래에 갇힌 남자는 필경 모래에 순응하고 만다.

무진의 안개가 표상하는 바, 그것 역시 단절과 허무이지만 거기에 폭력은 없다.(모래는 유동하는 고체이지만 안개는 유동하는 기체라서 그럴까..)

안개는 오로지 감추임이다.

냉철한 도회의 관계들로 부터 도망 가 숨는.

비겁한 자신의 역정을 감추이는.

 

고향이지만 무진을 감싸고 도는 안개 속에 그의 안식처는 없다.

안개는 비겁함이고 나약함이고 무기력함이고 모순이고, 행동하지 못하는 지식인 폼을 잡는 잡놈의 몽롱한 사변이다.

 

흐음, 무진의 안개는 자기연민이다.

그리하여 김승옥의 무진은 마스터베이션 음습한 나의 골방이다.

부끄럽게도 예순넘어까지 들어가 숨는 나의 골방.

 

서울과 무진의 메타포

무진은 서울을 환상하고 서울은 무진을 부끄러워 하는 것일까.

 

뉘에게나 무진의 안개, 그런 골방 하나 지니고 있음을 나는 안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 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서울에서나 무진에서나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만난다.

뫼비우스의 띠다.

 

***저녁산책***

2013. 02. 16

 

며칠전에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제대로 읽으려고 왔다가

이 소설을 먼저 읽게 되었습니다.

 

분명 언젠가 잀었던 소설인데도 새록새록 세련된, 은유와 압축미가 반짝이는 글에 푹 빠져 읽었네요..

 

누구나가 가슴속에 '무진'과 같은 안개 자욱한 곳이 있지 않을까요.

웬지 숨고 싶고 가리고 싶은 구석...

 

순전히 제 개인적인 것이지만..제 이름이 소설에 등장해서 읽으면서 자꾸 웃음이 나왔어요.ㅎ 너무 흔한 이름인지라 늘 개명을 꿈꾸고 있는 이름이거든요.

 

동우님, 메디슨....이 소설은 영화로도 소설로도 다 보았기에 너무 좋아하는 소설입니다. 다시한번 감사말씀 올립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시어요^^

 

***동우***

2013. 02. 17

 

나와 연배의 차가 좀 나는 저녁산책님이지만, 무진기행의 안개에 공감하는 바 있으리다.

안개.

그 옛날 이봉조가 편곡한 현미의 밤안개는 얼마나 자욱한 무드였던지.

‘페이 더너웨이’의 파리(영화 ‘파리는 안개에 젖어’) 또한 자욱한 안개였지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도 안개비가 내렸던가...

안개의 알레고리는 일종의 기분인듯 합니다. ㅎㅎ

김승옥의 안개는 자의식이고 자기연민이었지만...

 

저녁산책님의 성함을 윗글의 힌트로 이제 알게 되었지요. 나는. ㅎㅎ

무진기행에는 하인숙 (河仁淑)

저녁산책님은 이인숙 (李仁淑.. url의 이니셜로 이인숙님이라고 짐작...괜찮겠지요? 이 정도의 身上 밝힘).

내 어머니는 박인숙 (朴仁淑)

저녁산책님.

인숙, 귀하고 고운 이름이라오.

 

메디슨카운티의 다리.

다시 읽어 보시고 잃지 마세요, 그 우주적 신비한 느낌을 저녁산책님. ㅎ

 

 

<역사(力士)>

-김승옥 作-

 

***동우***

2018.11.22 23:56

 

'김승옥 (金承玉,1941~ )'의 '역사(力士)'

가난한 젊은이가 하숙하였던, 대립되는 두 공간,

창신동의 지저분한 빈민가와 병원처럼 깨끗한 2층 양옥집.

무질서 불결함 부도덕이 지배하는 곳과 규칙적 생활질서가 지배하는 청결한 곳.

그렇지만 前者는 자유와 생명력이 넘치는 곳인 반면, 後者는 작위적이고 비인간적인 곳입니다.

 

1960년대 젊은이의 대립되는 두 세계에 대한 갈등 따위 작금에는 없을테지요.

당연히 後者를 선택할 것입니다.

 

빈민가 서씨가 지닌 怪力의 헛된 낭비, 그 비능률을 요즘 젊은이들 추호라도 어디 용납이나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