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作-
***동우***
2014.07.06 05:06
'조나단 노엘' (이름으로 보아 유태인일 것)
유년시절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부모 (아마 나치에 의해 끌려갔을 것), 농장생활, 군입대, 이민간 누이, 정부와 도망가 버린 아내...
다행히 이와 같은 불행한 일들은 모두 먼지가 수북이 쌓인 유년기나 청년기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 후 쉰줄의 나이되기까지 20여년 동안 조나단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이 만든 카데고리 안에 스스로 갇힌채, 조나단은 지극히 안정되고 만족한 삶을 살고 있었다.
3.4미터 길이 2.2미터 폭 2.5미터 높이의 방, 그 작은 공간은 그의 견고한 성(城)이었다.
단순한 업무의 경비원이라는 직업, 그것은 사회적 위치와 경제(박봉이지만)를 보장하여주는 지극히 만족스런 직업이었다.
그 자그마한 소유(所有)의 삶이야말로 그에게 있어서는 외적질서와 내적균형이 조화된 완벽한 삶이었던 것이다.
미래 역시 죽음이 아니고는 그 어떤 심각한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그는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비둘기 한마리가 그의 일상 속에 비집고 들어와 금속성 눈으로 그의 삶을 들여다 보았다.
그것이 조나단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새는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누인 채 왼쪽 눈으로 조나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눈, 작고 둥그스름한 원반형이었고, 갈색에 가운데가 까만 그것은 보기에 너무나도 끔찍스러웠다... 바로 그 눈이 조나단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죽을 만큼 놀랐다.>
그의 의식은 혼돈에 빠져 허둥거렸다.
그의 미래는 갑자기 절망에 가득차 버렸다.
일상적 질서는 뒤엉켜 엉망이 되어 버렸다.
빈틈없이 견고해 보였던 그의 모든 것들은 무참하게 붕괴되어 버렸던 것이다.
쥐스킨트가 묘사하여 들려주는 조나단의 심리묘사는 매우 탁월하고 인간과 인생에 대한 은유는 매우 서늘하다.
아까끼 아까끼에비치(고골리의 ‘외투’)가 생각나고 좀머씨도 떠오른다.
우리가 한사코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 하는 것들.
그토록이나 강고해 보이는 가치들.
그것들 어쩌면 그토록 허무하고 남루한 것들일런지..
***동우***
2014.07.07 04:45
조나단 노엘.
그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때문에 세상과 단절된 삶을 선택하여 자기만의 세상에 갇힌채 그것으로 만족한 삶을 영위하였던 사람입니다.
그 무엇도 자신의 세계에 틈입하는 것을 용납할수 없었으며 그 또한 자기 밖의 세상에 개입하여 그것들과 교류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일상에 침입한 비둘기로 인하여 그의 삶은 혼돈에 빠져버립니다. (새에 대한 극심한 알레르기가 있었겠지요)
<비둘기의 어떤 광채나 희미한 빛조차도 그 눈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살아 있는 흔적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할 눈이었다. 바로 그 눈이 조나단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그는 죽을만큼 놀랐다>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는 비둘기의 눈길은 그가 한번도 세상으로 부터는 경험하지 못한 것일겁니다.
여태까지 세상은 그에게 관심 한줌 없었습니다만, 그 비둘기의 금속성 눈빛은 엄청난 공포였습니다.
폐쇄된 자아의 본질을 간파 당한듯한.
비둘기 따위에 그토록 공포를 느끼는 자신, 그는 그 사실로 인하여 자기혐오에 빠져 버립니다.
비둘기를 조우한 그날, 그의 일상은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혐오로 인하여 그의 의식은 처음으로 외부와 연결되어 공격성을 띄게 됩니다.
세상에 대하여 그의 자아는 분노합니다.
스스로가 절감하는 어떤 부당함에 대하여 부자유함에 대하여.
거지와 웨이터와 자동차와 직장의 높은치들을 향한 분노..
<그런 그가 한심스러웠다. 혐오스러웠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으로 껍질을 홀딱 벗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통을 받음으로써 증오와 분노는 더 부추겨졌고, 그것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몸 속에 피를 돌게 하면서 땀구멍으로 더 많은 땀을 밀어내는 것으로 그것 나름대로 고통을 배가시켰기 때문에 그의 증오와 분노는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 그가 그렇게 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도 없었지만,그의 몸 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자기 혐오가 모자챙 밖으로 점점 더 험악하게 노려보던 눈을 통하여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가 완벽한 증오가 되어 바깥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조나단은 관념론자입니다.
비둘기를 창밖으로 내팽개치지도 못하였지만 그의 공격성은 안으로만 잦아드는 그저 한낱 내적 분노일뿐입니다.
그는 그 분노를 외부로 표출하는, 그런 인간이 못 됩니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동으로 실행하거나 혹은 말로도 생각을 내뱉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 조나단에게서 나를 봅니다.
나 역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참아내고 안으로만 삭히는 사람 쪽이지요.
아집에 갇힌, 늘 안에서만 부글거리고 있는 용기없는 자아의 모습.
조나단처럼 내 의식의 흐름은 곧잘 중얼거립니다. 그럴 용기마저 없는 주제에.
"내일 자살해야지"
그러나 행동은 없을지라도 생각속일 망정 들끓는 리얼리즘은 관념을 변화케 하는가 봅니다.
그의 삶 속에 개입한 비둘기, 그로 인하여 세상을 향하여 발현된 분노와 공격성.
그것이 그의 닫힌 마음을 열게 합니다.
세상과의 그 심리적 커무니케이션이 그에게 자유를 선사한 것입니다.
호텔방, 그의 수면 속에서 요란한 천둥과 번개 요란한 빗소리.
이튿날 아침 호텔을 나서는 조나단은 정신세계가 자유로워졌음을 느낍니다.
<비둘기는 온데간데 흔적이 없었다. 바닥의 오물도 다 치워져 있었다. 깃털도 없었다. 붉은색 타일 위에서 바들바들 떨리던 작은 깃털도 보이지 않았다.>
좀머씨는 물에 잠겨 사라졌고, 장 그루누이는 사람들에게 잡아먹혔습니다만 조나단 노엘은 비둘기를 극복하였습니다.
***동우***
2014.07.07 05:01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Henri Cartier Bresson, 1908~2004)의 사진집 'Hear and Now'
파리로 부터 보내 온, 대판형(大版型) 400페이지 10kg은 나갈듯한 묵직한 책입니다. (페이지 사이마다 끼어진 보내주신 분 글씨가 있는 예쁜 엽서와 카드들은 부록의 기쁨)
몇시간째 들여다 봅니다.
근래 '브레송'을 좀 공부하였는데 대단한 예술가입니다.
사진예술을 통하여 철학(哲學)한 인물이자 후대의 많은 사진 작가들에게 있어 숱한 영감과 감화를 준 위대한 사상가의 풍모를 보인 사람이라고 한다지요.
오로지 소형 라이카 카메라의 35mm 필름을 고집, 인간의 눈높이를 벗어나는 시각은 왜곡된 것이라 주장하여 표준렌즈만을 사용하고, 자연의 빛만을 고집하여 결코 플래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고.
인화할 적에 결코 크로핑이나 트리밍을 하지 않고 오리지널 필름 사이즈 그대로 작품을 뽑았다고 하지요. (나도 옛날 암실작업을 좀 하였었는데 나는 확대기로 얼마나 화면을 요리조리 조작하였었는지)
무엇보다 그는 피사체에 개입하는 것을 결코 용서할수 없었다고 하지요.
결코 피사체가 카메라를 조금이라도 의식하여서는 아니된다는 것. 사진가가 파인더로 포착하는 원래의 느낌과 달라지는 그 어떠한 변형이나 조작과 왜곡행위를 용납해서는 안된다는겁니다.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그것은 '대상 자체의 본질이 가장 잘 나타난 순간', 주위와의 관계와 광선 등의 상태까지 포함해서 '광선과 구도와 감정이 일치된 순간' 즉, '대상과 촬영자의 내부의식의 일치'의 순간입니다.
그의 '결정적 순간'은 재빨리 포착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응시한 결실이라고 합니다.
그는 슬과 담배도 멀리하고 카메라의 순간 연동에 대해 평소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시간만 나면 카메라를 이리저리 사방의 사물들에 초점을 맞추는 훈련을 했고, 또 플래시 사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손으로 들고 찍을 수 있는 한계까지 훈련하여 1/4초가 자신있게 손으로 들고 찍을 수 있는 한계속도였다고 합니다.
사진집에 실린 사진들.
그 영상의 깊이 앞에서 겸손해 집니다.
침례교 구원파 교주, 유아무갠가 하는 사이비 사진작가.
갖은 폼을 다잡고 대포 포신같은 장비를 휘두르는 모습, 브레송을 생각하면 얼마나 역겨운지요.
너도나도 손에 카메라 하나씩들 들고 다니는 영상 홍수 시대, 뽀샵질로 얼마든지 화장하여 피사체를 왜곡시키는 시대.
브레송을 깊이 생각합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난 번 '파리 내사랑'처럼 화집의 영상을 찍어 포스팅하려는 생각은 브레송을 모욕하는듯 하여 감히 품지 못하겠습니다.
검색창에 브레송을 찍어보면 그의 몇 작품들 모니터로 감상할수 있습니다.
화집의 사진들, 더 들여다 보고 경박할 망정 좀 더 브레송을 느낀 연후에 따로 얘기하려 합니다.
***eunbee***
2014.07.07 19:18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내게 항상 감동입니다.
'비둘기'도 고마웁게 읽었어요.
브레송의 책은 대단하지요? 그 포스만으로도.ㅋ
나는 책을 사러 갔을 적에 퐁피두의 서점에서 견본으로 펼쳐둔 그 책을 잠시 뒤적여 봤을 뿐이에요.
동우님의 윗 글로 브레송을 다시 공부합니다.
책갈피 속에 더러더러 숨어있는,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풍경이 담긴 북마크는
동우님이 읽는 페이지에 꽂으시라고 아를르에서 구입했어요.
그 중 엽서 한 장에 담긴 사진은 프로방스를 떠나기 전 마지막 날 포도밭이 아득히 펼쳐진 마을을 찾았을 때
그 풍경 속과 똑 닮은 그랑 뤼, 내가 걸었던 그 길이 아닌가해서 골랐구요.
그리도 좁다란 길이 '大路'가 되는 마을들...
꿈 속에서 만난듯 아련하네요.ㅎ
사진을 공부하셨던 동우님께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무거운 책이
소중한 자리를 차지하길 바란답니다.
***동우***
2014.07.08 05:25
은비님.
사진을 공부하였다는 말씀.
공부라니 과람한 말씀이고, 브레송을 접하니까 더욱 부끄러워집니다.
일종의 도락이었지요. 아는 이들 찍어 포트레이트랍시고 만들어 주면서 폼이나 잡다 말았다우. ㅎㅎ
브레송은 처음에 그림으로 시작하여 말년에도 그림을 그렸다지요.
사진집에는 그의 그림들도 실려있는데, 무식한 내 눈에도 상당한 수준으로 보였습니다.
1955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진작가로는 최초의 개인전을 하였다는데, 그곳에서 전시회를 하였다는 구원파 교주 유 아무개라는 사이비의 허세가 더욱 괴씸하게 느껴지네요.
150대의 카메라, 온갖 첨단장비로 무장한 그의 스튜디오.
브레송이 가장 경멸하는 축일겝니다.
피사체를 응시하는 눈길, 그의 사진을 보면 볼수록 그 눈길의 퀄리티에 있어서 범부로서는 족탈불급의 경지를 아니느낄수 없습니다, 은비님.
은비님께서 부록으로 갈피마다 끼워주신 북마크들.
그 은비님 감성의 눈길도 나로서는 아득한 경지라우. ㅎ
마침 도서관에 브레송의 책 몇권이 있더군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세기의 눈' (피에르 아슬린 지음)
'브레송의 사진 에세이 '영혼의 시선' (브레송 지음)
오늘부터 읽으려 합니다.
그리고 보내주신 사진집을 다시 들쳐보겠습니다.
은비님으로부터 비롯된 내 초라한 예술안목 외연의 확대.
은비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독서 리뷰-
[[파트리크 쥐스킨트]]
<콘트라베이스> <승부>
<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作-
***동우***
2015.12.09 00:10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
이 작품에는 음악이 가득 스며있습니다.
역시 파트리크 쥐스킨트, 매우 빼어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출판된 1984년, 그 즈음부터 이 모노드라마는 우리나라에서는 독보적으로 '명계남'의 공연이 유명하지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재즈狂이듯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클래식 매니아라 하지요?
이 희곡에서 과연 그 면모가 약여합니다.
오케스트라에서 그닥 주목받지 못하는 콘트라베이스,
그 악기를 빗댄 자신의 신세 푸념과 함께 자신의 악기 콘트라베이스에 대한 애증(愛憎)의 감정.
그런 것들을 읊조리지만 그러나 저 사나이는 음악과 자신의 악기를 지극히 사랑함이 분명합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음악과 음악가들...
클래식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콘트라베이스 관련된 것들은 낯선 것 많습니다.
아까부터 나는 유튜브를 띄어놓고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숭어'를 듣고 있습니다.
모처럼 고국 찾은 따님과 시간을 온통 함께 하실 은비님, 정원에 요즘 음악소리 들리지 않지만 음악을 진정 사랑하시는 저녁산책님, 일급 음악애호가인 오래전 직장친구 오세건..
콘트라베이스, 함께 읽고 함께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동우***
2015.12.10 04:26
서른다섯의 콘트라바스트.
이 모노드라마의 배우는 대사와 연기를 아주 음악적으로 구사해야할거 같습니다.
콘트라베이스도 어느 정도 다룰줄 알아야 하고. (명계남의 연극을 보고 싶습니다)
그가 푸념하는 자신의 악기 콘트라베이스.
흡사 해로하는 조강지처를 향한 넋두리 같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구석에 처박혀 보잘것없는 몰골로 늙어가는 초라한 모습.
그건 자기자신의 모습이 투사된, 지극히 소소한 소시민적 존재인식의 슬픔일런지요.
짐짓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를 폄하고 서글퍼하는듯 하지만, 그러나 그 슬픔에는 깊은 연민과 사랑이 배어있습니다.
<이제 가 보겠습니다. 음악당으로 가서, 소리를 지르겠습니다. 그럴 용기만 있다면 말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내일 신문에서 그것에 관한 기사를 읽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저 큰트라바스트는 사랑하는 여인을 향해 정말 세라! 하고 소리를 질렀을까요?
아마 그러지 못했을겁니다.
음악, 이 세상에서 가장 정교하고 가장 아름답게 구축된 그 추상의 아름다움을 파괴할 용기가 그에게는 없었지 싶습니다.
세라를 향한 사랑, 그건 그냥 짝사랑으로 애만 태우지 않았을까요.
고전음악을 사랑하는 예술가,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재즈에 대한)
<고전 음악적인 의미에서 아름답고, 흘륭하고, 진실된 것을 지향하는 예술가로서 무정부적이고, 즉흥적인 자유분방함보다 더 금기시하는 것은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보세요.
그가 떠난 무대에는 슈베르트가 흐르지 않습니까.
영화 '마지막 사중주'에서 푸가사중주단의 리더 피터는 멤버의 불협화음에다 대고 일갈합니다.
"욕망에만 맡겨버리는 짓은 부끄러운 거야. 삶의 앙상블을 파괴하는 행동은 그만 둬. 데니얼. 너희들은 음악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
나는 첼로의 음색을 가장 좋아합니다.
처음 빠져들었던 클래식은 막스 블루흐와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이었습니다. (그리고 관악기는 호른, 모차르트의 호른 협주곡..)
베토벤의 첼로소나타는 언제 들어도 신비한 아름다움과 중후한 따뜻함으로 언제나 내 마음을 적셔줍니다.
이제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도 귀 기울여 들어봐야겠습니다.
모든 구조물에는 물리적 기초가 튼튼해야 하듯, 쥐스킨트의 말처럼 오케스트라의 사운드구조에 있어서도 콘트라베이스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가 봅니다.
그리고보니 재즈 오케스트라에서도 콘트라베이스는 빠지지 않더군요. (서넛의 세시봉 공연에서도 윤형주가 콘트라베이스 현을 튕깁디다.)
재즈, 얘기 난 김에 영화얘기 한마디.
‘위플래쉬’란 영화 보셨나요?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폭군 플랫처교수가 상당히 못마땅하였습니다.
한소절씩 끊어가면서 오케스트라 파트마다 멤버들을 무섭게 다그치는 플랫처 교수.
테크니샹의 초절기교, 무슨 신기록을 경쟁시키는 스프린터 코치같았습니다. (검은 티셔츠의 근육질 팔뚝을 드러낸 모습..)
재즈는 자유로운 영혼의 음악이라는데.. 그와 같은 채찍질로 음악이 만들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ㅎㅎ
<승부>
-파트리크 쥐스킨트 作-
***동우***
2014.05.30 05:01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 1949~ )
장 그루누이(향수), 좀머씨, 조나단 노엘(비둘기)..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기괴하지만 연민스러운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기발한 착상과 독창적인 상상력과 재미로운 서사와 우아한 문장과 치밀한 필치로 구사하는 그의 문학에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독특한 맛이 있습니다.
쥐스킨트도 그의 소설속 인물들처럼 그렇게 괴이한 작가라지요?
모든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고, 사진 찍히는 일조차 피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일에 대해 발설한 사람이면, 친구 부모를 막론하고 절연을 선언해 버리며 은둔 생활을 하는.
그러나 그의 문학은 괴이쩍지 않습니다.
삶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느껴집니다.
체스 대결, '승부'
원칙과 규칙과 통념과 인습에 순치된 늙은 체스의 고수 장.
그런 것들에 전혀 연연하지 않고 과감하고 정열적으로 파격(破格)의 체스를 구사하는 낯선 젊은이.
젊은 도전자와 같은 욕망을 갖고는 있지만 그것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구경꾼들.
<세계 최고의 대가, 체스의 사라사테!" 이제 퀸은 싸움터 한켠에서 위협하는 것도 엄호하는 것도 없이, 전혀 의미없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답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서 있었다. 그렇게 아름답게, 적들이 늘어서 있는 한가운데서 고독하고 도도하게 서 있는 퀸은 일찍이 없었다. 모든 것을 다 알면서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창백하고 냉담하고, 그리고 아름다웠다. 그 순간 그들의 눈은 촉촉이 젖어들고 심장은 따스해졌다. 자신들은 원하면서도 결코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그런 체스를 실제로 그가 두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킹을 쓰러뜨리고 패배를 인정한 젊은이는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인사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구경꾼들은 흩어지고 장은 체스를 그만두기로 결심합니다.
무언가, 삶의 가여운 모습이 아련한 여운으로 남습니다.
<창백한 얼굴에 권태롭다는 듯이 냉담한 눈빛, 그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으며, 전반적으로 풍기는 인상은 무관심, 바로 그 자체였다.>
나는 체스의 행마를 전혀 이해할수는 없지만, 혹여 저 젊은이는 체스의 촛짜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 힘, 평정심은 전문가가 아닌 아웃사이더의 초연함에서 우러나오기도 하지요.
내 바둑은 하수(下手)일 뿐더러 게임은 대부분 지리멸렬(支離滅裂)입니다.
하수들이 대개 그러하듯, 지엽에 매몰되어 끙끙거리다 보면 어느새 대마는 잡혀버리고 말지요.
전체 반상(盤上)을 조망하면서 고요하게 돌을 움직이는 고수(高手)의 평정심이 늘 부럽습니다.
호승심(好勝心)이 그리 강한 편도 아닌데 화투 당구 볼링 탁구같은 게임에서도 몰리게 되면 마음밭이 초조해집니다.
어쩌면 얼굴빛마저 달라 보일지도 모르지요.
품성이 조야(粗野)하고 경박하여 정중여산(靜重如山)의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 까닭입니다.
노름꾼들의 '포커 페이스'(속이야 어떨런지)가 나는 늘 존경스럽습니다.
똑 그 판에서 초월한 아웃사이더처럼 지을수있는 그 노련한 표정.
으흠, 그게 내가 진정 부러워 하는 살이의 기술이올시다.
***eunbee***
2014.05.31 08:39
오늘 뤽상부르 정원엘 갔어요.
모파상의 장 브리델처럼, 5월의 정원에서 미뉴에트를 산책하려구요.
봄꽃들은 모두 져버리고 이제 여름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더군요.
계절따라 다른 꽃을 피우는 일이 sceaux나 그곳이나 여간한 일이 아닐텐데 참으로 부지런해요.
내가 상상하는 미뉴에트를 추었을 만한 장소를 거닐고, 오랑주리 옆으로 갔더니,
어머나~ 체스판을 앞에 두고 대여섯 사람씩 혹은 단 둘이 앉아 열심히들 체스두기를 하는거예요.
뤽상부르 정원은 비교적 자주 가는 편인데 그간 한번도 보지못한 풍경이거든요.
내 눈에 뜨이지 않았는지도 모르지요. 관심이 없었을테니.
그러나 오늘은 어제 밤에 읽은 윗 글 때문에 눈에 화악 들어 오던걸요.ㅎㅎ
[승부]에서의 그 폼잡는 젊은이를 떠올리며 두리번 두리번 찾아 보았더랍니다.ㅎ
그리고 나이든 사람이 많으니 혹여 '체스 고수, 일흔 살 가량의 적잖게 비열하고 왜소한 남자'가 있는가하고
손에 검버섯도 살펴 보았더랍니다. ㅎㅎ
우연한 일 치고는 정말 신가한 일이었어요. 체스두는 사람들을 만나다니, 바로 오늘.
소설 속에 쉴피스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왔다는 구절이 있기에 쉴피스도 가 보기로 했어요.
쉴피스 성당은 뤽상부르 미술관 바로 앞골목 길끝에 있거든요.
그곳 세인트 쉴피스 광장에서는 분수를 중심으로 천막들을 세워두고 화가들이며 조각가들이
자기 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지요.
한바퀴 둘러보고 다시 뤽상부르로 향하다가
무슨 관공서 벽에 뭔가가 프린트되어있어 보았더니,
오모나~ 랭보의 [취한 배]가 무려 100행으로 적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벽을 한참 올려다 보다가 제목만 사진기에 담아왔어요.
물론 원거리에서의 그 벽도요. 어눌한 사진이지만.
검색해서 좋은 번역의 랭보 시[취한 배] 찾으면 포스팅해 볼까요?
내 재주에 되려나요?
동우님의 [리딩 북] 때문에 치매걱정도 덜고, 이렇게 여러가지 즐겁고 신나고 놀라운 일도 생기네요.
고맙습니다. 늘~
주말 멋지게 보내세요.^^
***동우***
2014.06.01 05:04
허이구, 은비님.
언감생심 생명력 찬연한 은비님의 감성에 치매따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어디 있다고 치매운운하시우, 그래.
생 쉴피스 광장은 오늘 움베르토 에코의 글에도 나오던데. 그나저나 파리 택시 기사님들 참 웃겨요. ㅎㅎ
<한편, 파리의 택시 운전사들은 길을 도통 모른다. 생 쉴피스 광장으로 가 달라고 하면 오데옹까지 가서 차를 세우고는 더 이상은 길을 모르겠다며 승객을 내리게 한다. 그러기 전에 벌써 승객은 "어, 아저씨, 이거 왠지....." 하면서 이따금씩 까다롭게 굴었던 대가로 운전사의 긴 푸념을 들 어야 했을 것이다. 그에게 지도를 보라고 권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는 아무 대꾸도 안 하거나 참고 문헌에 관한 정보를 원했다면 소르본 대학의 고문서 전문가에게 문의하지 그랬느냐고 엉뚱한 소리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뤽상부르 숲속의 미뉴엣, 체스두는 영감님들...
귓전에 울리는 종소리.
그리고 바람구두 신은 랭보.
토탈 이클립스던가, 리어나도 디케프리오가 랭보로 분하였던 영화가 떠오릅니다. (랭보와 베를레느의 동성애는 혐오스럽던데)
내가 외우고 있는 랭보의 시가 있다오.
++++
<방랑>
구멍난 주머니에 두 손을 지르고 나는 걸었지.
헤진 외투를 걸치고 하늘 아래를 떠돌았다네.
시의 여신이여, 나는 그대의 종복.
오! 랄라, 내 꿈꾸어오던 찬란한 사람들아.
단벌 바지엔 커다란 구멍이 났고.
어린 몽상가 나는 길에다 시의 운율을 뿌렸지.
내 잠자리는 큰곰자리.
내 별은 하늘에서 다정하게 소리내고 있었지.
구월의 멋진 저녁, 길가에 앉아 별의 소리 들었지.
취하게 하는 술처럼 이마에 떨어지는 이슬방울 느끼며.
환상의 그림자들 운율을 맞추면서
한 발을 올리고서
나는 리라 치듯, 헤진 구두끈을 잡아 당기네.
++++
저 싯구중 내 입이 노상 읊는 구절.
"오 랄라, 내 꿈꾸어오던 찬란한 사람들아."
내 꿈꾸어오던 찬란한 사람중 한분이신 은비님도 멋진 주말을.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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