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나다니엘 호오돈]] -1- (1,4,3,3,1)

카지모도 2020. 6. 2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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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나다니엘 호오돈]]

<목사의 검은 베일> <젊은 향사 브라운>

 

 

<목사의 검은 베일>

-나다니엘 호오돈 作-

 

***동우***

2013.04.24 05:08

나다니엘 호오돈(1804~1864)의 유명한 단편소설 '목사의 검은 베일' 포스팅합니다.

 

흐음, 주홍글씨 'A', 그리고 후퍼목사의 검은 베일..

무슨 은유일까요, 후퍼 목사의 검은 베일은.

 

당시 뉴잉글란드 주민의 삶을 지배하였던 프로테스탄트, 캘비니즘...

청교도주의의 내재적 한계.. 인간의 본성과 죄의식.. 슬픈 죄의 비밀.. 수치심..

검은 베일은 그러니까 청교도적 자아와 무의식적 자아와의 갈등과 고뇌를 의미함일까.

 

나 역시 잘은 모르겠으나 그냥 깜냥껏 생각해 봅니다.

내게 드리워져야 할 검은 베일...

 

***Christina***

2013.11.22 22:54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동우***

2013.11.23 08:30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젊은 향사 브라운>

-나다니엘 호오돈 作-

 

***동우***

2014.12.29 04:57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사회.

17세기 뉴잉글란드 보스톤 일원 미국 동북부는 칼뱅이 이른바 성서정치를 펼쳤던 제네바와 다를 바 없었다.

생각건대 권위화(authoritarianism)된 칼뱅의 이데올로기는 파시즘이다.

세르베토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화형에 처하고 똘레랑스를 외치던 카스텔리오를 박해하는등, 캘비니즘은 불복종을 용납치 않는다.

 

완벽하고 절대적인 신에게 불완전한 인간은 자신이 지닌 최상의 것을 신에게 투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정작 자신은 끊임없이 죄의식을 반추해야 한다.

그런 피학적 무의식이 사디즘 매조히즘적 희열을 동반하는 청교도적 광신으로 발현되는 것은 아닐까.

아서 밀러의 '크루서블', ‘주홍글씨에서의 헤스터 프린의 늙은 남편 칠링워드. 사찰에서 혹은 불교의 나라 성지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치는 일부 기독교 광신도의 이른바 땅밟기.

훤한 대낮의 근엄 경건한 모습들은 단일한 이데올로기에 압도되고 조작되어 짓는 어색한 몸짓인가.

 

깊은 밤중 숲속, 인간 본성에 깃든 악마적 야수성을 비로소 드러낸다.

<서로의 마음에 의지하여 그대들은 아직까지 선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환상에서 깨어난 것이다. 악이 인류의 본성이며, 악이야말로 너희들의 유일한 행복이어야 하느니라.>

 

억압된 자유의지와 양심이 데포르마숑되어 꿈 속에서나마 인간의 내면을 간파하고 그것을 환상으로 보여준다는 것인지.

그리하여 침울한 인간으로 살다죽었다는 향사 브라운.....

 

다음은 이문열의 작품 해설입니다.

 

++++

<죄악에 가득찬 악몽.>

-이문열-

 

환상적으로 드러낸 원죄의식 혹은 인간 내면의 악마성 이른바 '전기적 오류'가 될지 모르지만, 흔히 [젊은 향사 브라운]은 나다니엘 호손의 어두운 가문사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조부는 세일럼의 마녀재판 때 무자비한 선고로 악명 높은 윌리엄 호손 판사였다.

하나님을 우러르고 악마를 쳐부순다는 명분 아래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 처형하고 박해한 조상들의 반이성적 행위는 실제로 호손의 정신에 강하게 원죄의식을 심어부었던 듯하다. 그의 외롭고 자폐적인 일생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도 스스로 가문의 이름을 바꾼 일에 잘 드러난다.

호손은 원래 Hathorne이었던 성의 철자에 w를 덧붙여 Hawthorne으로 바꾸어 썼다.

이 작품에서 젊은 향사 브라운이 그날 밤 환상적으로 목도하고 체험한 것은 인간의 내면에 깃들인 악마성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세상은 거룩함과 사악함, 천사와 악마가 정연하게 나뉘어져 있지만 밤의 어둠과 신비적 공간에서 연출된 것은 그것들의 섬뜩한 뒤얽힘이었다. 그리고 그같은 진실에 대한 그의 반응이 짧고 삭막한 후일담의 형태로 얘기를 맺는다.

평소 마을에서 그들의 선을 향한 의지와 용기로 이름높던 이들이나 경건한 신의 사람으로 불리우던 이들이 진작부터 악마의 사람으로 분류되어 저주받고 기피되던 이들과 실은 한통속이 되어 세상을 이끌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틀림없이 젊은 브라운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존경하는 조상들이며 믿고 사랑하던 아내까지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되면서 그 충격은 낙담과 상심으로 그를 미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이 땅 위에 선이란 것은 없다. 죄악이 곧 선이 아닌가. 자, 악마여, 이 세상은 바로 그대의 것이다."란 그의 절규는 바로 그같은 낙담과 상심의 표현이다.

그런 브라운에게 날이 밝은 뒤의 세계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세계는 다시 둘로 나뉘어져 겉으로는 신을 믿고 선을 구현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는 이미 그 뒤어 감추어진 어두운 진실을 목도한 사람이었다.

그날 밤 이후 그가 엄숙하고도 슬픈듯한 표정으로 침울한 생각에 젖어있는 사나이가 되어버렸고, 세월이 흐른 뒤 우울한 임종을 맞게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이 작품에서 작가가 자신의 원죄의식을 세상 모두에게로 확대함으로써 가문의 어두운 역사가 주는 부담을 줄이려 한 게 아닌가 하는 혐의를 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찌하랴, 세상의 참모습은 브라운이 그날 밤 본 것과 더 가까운 듯 하니. 싫더라도 우리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악마를 아무도 부인할 수는 없으니.

여기서 젊은 브라운이 그날 밤 보았던게 실제로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의 설명처럼 어떤 악마적이고 신비한 힘에 의한 연출이든, 작가의 어두운 열정이 빚어낸 일련의 가상이든, 또는 우연찮게 꾸게 된 악몽이든 인간의 내면에 깃들인 악마성을 드러내보이는 기법으로서의 환상과 기상은 실로 빛나는 데가 있다.

그것이 작가의 고전적인 문체와 어울려 오히려 주제를 압도하는 느낌마저 준다.

나다니엘 호손은 미국 단편의 확립자이자 미국이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작가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12년간이나 독서와 명상에 잠겨 보낸 세월이 그르 큰 작가로 기르는데 밑거름이 된듯하다.

우리에게 는 장편 [주홍글씨 (정확한 번역은 '진홍글자'여야 한다는 말도 있다)]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이 책의 첫머리에 놓임으로써 [성장과 눈뜸]편에서 그의 단편 [큰바위 얼굴]을 싣지 못한 아쉬움을 달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