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필갑 아우>
***동우***
2011.04.15
1999년 그 무렵은 내게 무척 힘든 세월이었다.
전전(前前)해 직장을 그만두었고, 그 다음해에는 어머니와 영결(永訣)하였고.
어줍잖은 돈 몇푼은 어줍잖은 장사를 한답시고 다 까먹었고, 이것저것 어줍잖은 자격증들을 따가지고서는 부동산을 한답시고 예제 쫓아다니고는 있었지만 어줍잖이에게 세상은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가슴 속은 늘 찬 바람 이는 시베리아 벌판, 나는 발호(跋扈)하는 경제논리에 대하여는 도무지 가리사니를 잡을수 없었고 정처없이 허우적거리는 한낱 숫보기에 불과하였다.
남들에게도 IMF의 암울한 시대였다지만 그 시절의 비수는 내게 더욱 날카로운 듯 했다.
심신의 궁핍은 스스로 비참하였고 관계들은 살갑지 않아 세상 살 맛을 차츰 잃어가고 있어 일상은 매우 어두운 색감으로 칠해진 나날이었다.
더욱이 내 성품은 세상에 대하여 나약하였고 관계에 대하여 강인하지 못하였다.
운명론적 팔자관으로 한숨이나마 제대로 쉬었을랑가.
그 즈음. 두루두루 모든 것들이... 아프게 내 현실을 찔렀다.
그런 나와 기질이 전혀 다른 친구가 있었다.
옛 직장 후배 박필갑(朴必甲).
그도 벌써 할비가 되었는데도 수십년 동안 언제나 나는 그의 ‘행임(형님)’이다.
필갑이는 나와 기질이 전혀 다른 친구.
수십년 느끼건대, 삶은 그에게 언제나 긍정이었고, 삶에 대하여 언제나 적극적이었다.
늘 씩씩하였고 자기 인생을 제 품에 껴안아 다룰줄 아는 친구였다,
나는 평소 필갑이가 뉘에게던 찌푸린 모습을 본적이 없다.
언제나 유쾌하였고 누구에게나 씩씩하고 다감하였다.
그의 유쾌한 설레발이 없었다면 직장 친구들인 이욱규, 이광섭, 서정엽, 박상무 등과의 연계는 진작 끊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1999년도.
그 즈음 필갑이도 나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늦은 밤 휴대폰 너머로 흐느끼는 그의 음성. (그때 나도 생맥주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행임(형님), 행임...”
오열(嗚咽)에 잠겨 말을 잇지 못하는 목소리.
그때 필갑이는 서울 원자력병원에서 말기암과 싸우고 있는 아내 곁을, 사업도 팽개친채로 낮밤없이 줄곧 지키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날 밤 병실을 잠시 벗어나 병원 근처 어느 식당에서 홀로 쏘줏잔이라도 기울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아내, 환용이 엄마는 난소암이 임파선으로 전이되어 부산의 의사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만사휴의(萬事休矣).
지아비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으려 하지 않아 지어미를 보듬어 안고 서울로 달려갔던 것이다.
원자력병원의 방사선치료로 머리카락은 다 빠져버리고, 백혈구가 모자라 이제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토록 늠름하였던 사나이가 늦은 밤 저토록 흐느끼는가.
그 두어달 후인 11월 중순.
환용이 엄마는 그예 남편과 두아들 덩그러니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부산대학병원 상청에서 마주한 필갑이.
속으로야 통곡하고 있을지언정 여늬때처럼 그는 범상하고 씩씩하였다.
수십년 지기이지만, 나는 필갑이의 일상에서 절망의 포즈란 본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현재에 충실한 면모를 잃지 않았다.
상처(喪妻)하여, 지독한 슬픔을 지니고 있을때 조차도 필갑이는 그러하였다.
아내 떠나고 줄곧 홀아비인 필갑이.
두 아들은 홀아버지에 의하여 서울의 좋은 대학 졸업하여 좋은 직장 들어가 장가들어 손주까지 아버지에게 안겼지만, 아들의 권유 마다하고 부산 영도의 덩그런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다.
그리나 필갑이는 외롭다거나 의기소침하여 구석에 박혀있는 그런 스타일의 사내가 아니다.
그에게는 도무지 그럴 겨를이 없는 것이다.
언제나 무엇엔가 푸옥 빠져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죽자, 필갑이는 달리기 시작하였다.
마라톤.
수십회 풀코스 참가하여 아마추어로서는 상당한 기록을 보유하였는데 그 뿐이랴.
울트라 마라톤이라니.
시간 단위가 아니라 날밤 새워 달리기, 200km이상을 달리는 익스트림 스포츠.
제주도며 어디며 전국방방곡곡 그의 발길 닿지 않은 울트라 코스는 없을 것이다.
어느날 필갑이는 내게 얘기하였다.
‘행임, 극기(克己)라는게 어떤건줄 아슈? 극심한 고통 속에 치솟는 아드레날린. 진짜배기 극기란 순수한 쾌감 바로 그것이라오. 행임, 나는 항상 강인한 육체를 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오.’
나는 언제나 필갑이가 부러웠다.
생각하는 척하면서 멈칫거리고, 사유가 깊은 척 하면서 회피하고, 미치도록 하고 싶으면서도 짐짓 헛기침이나 하는, 나 따위는 천래적으로 갖지 못할 강인한 육체와 서슴없이 돌진하는 행동주의자의 면모.
어쩌면 자신과 다른 기질의 인간이라서 수십년 동안 ‘행임’으로 나를 부르고 있는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필갑이처럼 나이답게, 나이따라 다양한 취미를 즐기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그는 한 곳에 몰입하면 끝장을 보고야 만다.
거의 프로의 경지까지 이르도록.
1970년대.
나도 젊었지만 필갑이는 더 젊었던 그 시절, 사이클은 만만치 않은 물건이었다.
그러나 필갑이에게는 돈따위 시간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자전거에 미쳐 몇푼 안되는 그의 수입은 죄다 자전거에 쏟아 부었던 것이다.
자전거 다음에는 탁구였다.
당시 탁구는 그닥 인기있는 스포츠가 아니었지만 필갑이는 탁구에 빠져 들었다.
출근전 퇴근후 그의 행적은 무조건 탁구장이었다.
나도 다소 라켓은 잡을줄 알았지만 필갑이에게는 족탈불급, 그는 실로 선수급이었다.
장년이 되어서는 테니스에 미쳤다.
필갑이가 이끌었던 아마추어 테니스클럽(동백테니스클럽)은 부산서는 막강한 실력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기상하여 출근하기전 그 짧은 시간 그는 테니스 코트에서 (영도 동삼동 테니스장의 나이트는 그가 주도하여 만들었다) 땀을 흘렸다.
사교댄스에도 빠졌었다.
나이트클럽 플로어, 여자를 리드하여 나비처럼 춤추는 그를 보고 나는 감탄하여다.
그로 인하여 나도 댄스를 배우려고 마음 먹기도 하였는데 늘 그렇듯 작정으로만 끝나 버리고 말았다.
엔지니어로 중국에서 일할 적.
중국땅 그린피가 얌전하여 그랬던지 골프에 흠취하여 그곳 필드를 누볐었는데 그러나 골프 하나만은 어떤 수준에 오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골프는 필갑이 최초로 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장르였을 것이다.
누군가 내게 ‘당신 취미가 무엇이오?’라고 물으면 나는 난감해지고는 한다.
아무리 끄집어 내려 해봐도 취미가 무엇인지 스스로도 도무지 내 세울게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고안해낸 답변인즉슨 그저 심상하게 답하는 ‘술이요’였다.
취미를 묻는 따위 촌스런 어정쩡함에 술이상 약효있으랴.
한때 영화에 빠졌었고, 한때 연극에도 빠졌었고, 한동안 사진에도 빠졌었으며 한시절 클래식 음악에도 빠졌었는데 취미라고 내세울만한게 그리도 없었을까.
스스로가 부끄럽다.
나는 취미를 위하여, 몰입하여 낮밤을 잊고 시간을 투자한 적도 거금을 쏟아 부은적도 없기 때문이다.
나의 취미란 것은 취미가 아니다.
취미란 것을 위하여 나를 온통 투신한적 호리도 없다.
청나라사람 원굉도가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내뱉는 말이 무미건조하고 면목이 가증스런 세상사람은 모두가 벽(癖-취미-)이 없는 사람들이다. 만약 진정으로 벽이 있다면 그 속에 푹 빠져 즐기느라 성명과 생사도 모두 좋아하는 것에 맡길 터, 수전노나 관리 노릇에 관심이 있을까 보냐? 세상사 힘겨운 속박에서 벗어나 가증스런 속물의 면모를 부셔야 비로소 벽이 있다 할 것이다.”>
저것은 커녕 나는 애호가 수준이나마 되었을까.
딜레탕뜨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지경이니.
아 나의 어정쩡함이여.
내 인생이 그러한 듯 하여 새삼 서글프다.
엊그제 (2011년 4월 12일 밤),
모처럼 부산문화회관 대공연장의 음악회를 관람하였다.
'아마빌레 색소폰 오케스트라 (Amabile Saxophone Orchestra)'의 제10회 정기연주회.
오케스트라는 오케스트라인데 현(弦)이 없는 오케스트라.
관악기와 타악기와 몇 건반악기로 이루어졌는데 관악기의 대부분은 색소폰이었다.
테너색소폰, 소프라노색소폰, 알토색소폰, 베이스색소폰....
현의 섬세함이나 피아니시모의 섬세함은 느낄수 없었지만 웅장하고 아름다운 화음을 연출한 공연이었다.
시방 나는, 그 음악을 얘기하고자 함이 아니다.
50여명의 단원들은 대부분 아마추어 연주자들, 평균 연령이 53세라고 한다.
그리고 무대 두 번째 줄 알토파트에 필갑이가 앉아 있었다.
진작 알고는 있었지만 나로서 그의 연주는 처음 들었고, 그 음악은 아마추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훌륭하였다.
연습의 땀 냄새가 확 느껴지고, 열정의 붉은 것들이 확 끼쳐진다.
특히 필갑이의 그것은.
나는 나이 들수록, 딜레탕뜨에도 못미치는 취미 비스무리한 그것이나마 하나 둘씩 색이 바래고 있는데.
너는 저토록, 내닫는 육체는 건강한 땀을 듬뿍 흘리고, 선율에 실은 너의 감성은 저리도 정열에 가득하구나.
부러움은 부러운 것이로되.
언제나 나를 고무(鼓舞)하는바 적지 아니 하단다.
필갑아우, 자네는.
++++
***송현***
2011.04.15 08:28
회한이나 가버린 세월 따위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전진이신 분을 기분 좋게 보았습니다.
제가 느끼는 동우님은 그 이상 이십니다~
어제 여의도 윤중로의 벚꽃도 좋았지만
바라보이는 샛강 푸르름의 버들숲이 더욱 운치가 있었습니다
***┗동우***
2011.04.20 06:49
"윤중로의 벚꽃도 좋았지만, 샛강 푸르름의 버들입도 운치가 있었다."
필갑아우도 기분좋아 하시면서 동우도 높여주시는.
역시 옛적 멋스런 풍취 가득한 송현님 비유의 칭찬에 입을 헤벌죽합니다. ㅎ
***향편***
2011.04.15 09:46
'나도 필갑아제 처럼 살고 싶다' 생각이 스치는 동시에 나를 내가 알아서 정신을 차립니다. 저는 그런 사내가 아니란 걸 그리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나를 알아 다행입니다. 하지만 저는 차도 마시고 책도 좋아하고 술 자리도 좋아하고 달리기도 종종하고 음악도 즐기니 뭐~ 이만하면.. 위안을 삼으나 청나라 사람 원굉도가 말한 벽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것들 뿐이라 이애 아쉬움이 생겨나네요.
하지만 저는 이것 저것 놀아보다가 말렵니다 ㅎㅎㅎ 어느틈엔가 동우님처럼 멋있는 분이 될 수 있을거란 희망을 하면서요. 이도저도 특징할 것이없다,는 동우님의 다양한 즐김이 제겐 맞는 것 같습니다^^ 전 동우님 따라 할래요~
***┗동우***
2011.04.20 06:57
하하, 향편님.
우리같은 사람은 필갑아제처럼 할려면 우선 육신이 못 따라 갈겁니다.
필갑아우, 술도 무척 잘 먹는데, 잠도 별로 없고 시간을 쪼개 그토록 끊임없는 혹사를 견디는 육체를 축복처럼 갖고 있지요.
울트라 마라톤이라는 거.... 그 나이에 말입니다.
다만 나이들어 머리는 훌러덩 벗겨 졌답니다. 하하
향편님도 내 과에 속하는듯.
하하 향편님.
향편님 괜히 그러시는데, 참 멋은 없지요.
***후니마미***
2011.04.16 01:54
에너지의 증폭이 수직으로가 아니라, 수평으로 매우 넓어 동우님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필갑이님 따라 하기가 어려운 노릇이지요 ?
아시면서도 보아온 인생이 있어 고무되는 바 크신 줄 알겠습니다.
그런 분들은 제 모양으로 잘 살아내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주위 사람들에게 주는 시너지 효과도 큰 듯 하고요.
그러나 제가 보기엔 그 커다란 에너지만큼이나 남에게 보이지 않는 내면의 아픔이 클 것 같습니다
아프기에 그토록 달리고 춤추고 빠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외양은 그 얼굴이 줄거움의 것을 하고 있기에 스스로도 모르고 다른 이도 잘 느끼지 못하는 슬픔을 깊게 감출 수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도 저런 분들을 보면,
우리의 슬픔이 사실 너무 얕은 데 있어 쉽게 들키는 게 아닌가도 싶습니다
감추지 못하는 것은, 이 사람 자신의 덕없음 같거든요
필갑님, 훌륭하신 분이시고 그 분이 행님으로 모시는 동우님은 더 깊은 분입니다.
동우님 자신은 마다하는 인상이겠지만 위의 향편님 댓글처럼 우리 책부족 사람들에게 비친 동우님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남에게 보이는 자신과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
지금 읽고 있는 불멸의 어느 구절을 베껴 온 것입니다 ㅎㅎㅎ
읽고 계시죠?
이번 책은 너무 좋습니다.
두 번 쯤 읽어야 할 듯도 합니다.
***┗동우***
2011.04.20 07:01
후니마미님.
필갑아우 덕에 덩달아 나도 올라갑니다 그려. ㅎ
밀란 쿤데라의 '불멸'
소소한 삶의 디테일, 존재의 양상들.
그 표정과 그 몸짓과 그 느낌을 바라보는 그윽한 작가의 눈길은 여실한데.
지금 2부정도쯤 읽고 있는데, 이 소설의 독후감은 무척 어려울듯.
나도 한번쯤 더 읽어야 할듯 합니다.
***서민정***
2011.04.17 01:23
정말 멋진 분입니다.
심리학수업에서 배웠던 가장 이상적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네요.
그런 분과 친분을 오랫동안 유지하시는 동우님도, 알게 모르게 다른 분야에서 이 분께 영향을 미치고 계시리라 짐작합니다. 보통 우정이라고 하는 것은 상호작용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라서 한 사람만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거든요. ^^
***┗동우***
2011.04.20 07:07
서민정님.
멋진 친구이고 스스로의 삶의 양태에 자족하는건 분명하지만, 본인은 이상적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상적 삶이란 그 누구에게나 피안으로만 바라보는 어떤 것, 요원한것 아니겠수? ㅎ
나도 저에게 끼치는바, 어떤 긍정적인 게 있었다면 기쁘겠습니다만.
참, 서민정님.
부군 레이몬드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미국 땅에서 다시 시작하는 우리 서민정님의 새로운 전공의 공부, 한단계 마치심도 아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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