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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부활 (47) -톨스토이-

카지모도 2021. 8. 22.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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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마슬로바를 데리고 온 간수는 테이블에서 물러나와 창턱에 앉았다. 네플류도프에게는 드디어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처음 면회 왔을 때 그녀에게 중요한 일, 즉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항상 자기를 책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말하리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녀는 테이블 한쪽에 앉고, 네플류도프는 그 반대쪽에 앉아 있었다. 방 안이 밝았기 때문에 네플류도프는 처음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의 얼굴과 눈, 입술 언저리의 잔주름, 그리고 부석부석한 눈을 똑똑히 바라볼 수가 있었다. 전보다 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창가에 앉은 희끗희끗한 구레나룻을 기른 유대인인 듯한 간수들에게는 들리지 않고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테이블 너머로 상체를 굽히고 그는 입을 열었다.

"만일 이 상소가 성공하지 못하면 황제에게 청원해 봅시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겠소."

"이러기 전에 처음부터 버젓한 변호사를 대기만 했더라면......."하고 그녀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요전번 변호사는 정말 바보였어요. 나한테는 듣기 좋은 말만 했거든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만일 그 때 제가 당신과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결코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글쎄,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모두들 나를 도둑년으로만 알고 있잖아요."

'오늘은 좀 이상하군.'학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그가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하자 다시 그녀가 말을 꺼냈다.

"저 좀 할 말이 있어요. 우리들 방에 할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다들 놀라고 있어요. 정말 좋은 할머니인데 역시 아무 죄도 없이 아들하고 둘이 갇혀 있거든요. 불을 질렀다나 봐요. 그 할머니는 내가 당신과 잘 아는 사이라는 걸 알고," 마슬로바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더러 당신에게 이야기를 해서 아들을 불러 내어 물어 봐 달라는 거예요. 매니쇼프라고 한 대요. 어떡하시겠어요? 들어 주시겠어요? 정말 좋은 할머니예요. 한 번만 보시면 억울하다는 걸 아실 거례요. 수고 좀 해주세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고는 눈을 내리깔고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좋아, 해보자."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했으나, 그녀의 누그러진 태도에 점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내 일로 당신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소. 전번에 내가 얘기한 것을 기억하고 있소?"하고 그는 말했다.

"여러 말씀을 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었더라?" 여전히 생글거리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 대며 그녀가 말했다.

"내가 당신한테 용서를 받으러 왔다고 그랬지." 하고 그는 말했다.

"내가 자신의 죄를 속죄하겠다는 것은,"하고 네플류도프는 말을 이었다. "말로써가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써 속죄하겠다는 거요. 당신과 결혼하려고 결심했단 말이오."

그녀는 얼굴에서 별안간 놀라는 기색이 보였다. 그 사팔눈은 까닥도 하지 않고, 보는지 안 보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을 던졌다.

"지금 와서 그럴 필요가 어디 있어요?"그녀는 화가 난 듯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꼈소."

"어떤 하느님 말씀이세요? 당치도 않은 말씀만 하시네요. 하느님이라고요? 어떤 하느님이죠? 벌써 그전에 하느님을 찾으셨어야 했어요."하고 그녀는 입을 벌린 채 말을 끊었다.

네플류도프는 그제야 비로소 그녀의 입엣 풍기는 강한 술냄새를 맡고 그녀가 흥분한 이유를 알았다.

"진정해요." 그는 말했다.

"왜 진정하라는 거예요? 취한 줄 아세요? 그래요, 난 취했어요. 그렇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요." 그녀는 느닷없이 빨리 말하곤 홍당무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난 징역수고 매춘부예요. 그러나 당신은 귀하신 공작님이시잖아요? 나 같은 것에 몸을 더럽힐 필요는 없으세요. 공작 아가씨한테나 가세요. 나의 몸값은 10루블짜리 지폐 한 장이면 그만이에요."

"당신이 아무리 지독한 말을 해도 내 마음은 조금도 모를 거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네플류도프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얼마나 가책을 느끼고 있는지 상상도 못할 거요."

"가책을 느낀다고요!"하고 그녀는 심술굿게 흉내를 냈다. "그 때는 가책을 느끼지 않아서 백 루블짜리 한 장을 틀어넣어 주셨군요. 아, 그렇죠, 그것이 내 몸값이었죠."

"알고 있소, 잘 알고 있소, 그러니 지금에 와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이제 다시는 당신을 버리지 않으려는 거요." 그는 되풀이했다. "한 말은 꼭 실행하겠소."

"실행을 해요?"그녀는 이렇게 뇌까리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카추샤!" 그는 그녀의 손을 쥐면서 말했다.

"돌아가세요! 나는 징역수고 당신은 공작님이세요. 이런 곳에 볼일이 없으실 거예요." 화가 나서 얼굴빛이 변한 그녀가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이렇게 외쳤다. "당신은 나를 미끼로 해서 자신을 구원받으려 하는 거죠." 그녀는 가슴속에 숨겨 왔던 모든 말을 단번에 쏟아놓으려는 듯이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나를 노리갯감으로 만들어 놀고, 저 세상에서까지 또 나를 미끼로 자신을 구하려는 거죠! 보기도 싫어요. 그 안경도, 기름진 더러운 상판도, 다 보기 싫어요. 어서 가요, 가!" 그녀는 발딱 일어서서 이렇게 외쳤다.

간수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왜 이렇게 떠드는 거야? 자기 분수를 지켜야지."

"내버려 두십시오."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혼 좀 나야 알겠어?" 간수가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내버려 두십시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간수는 다시 창가로 물러섰다.

카추샤는 다시 자리에 앉아 눈을 내리깐 채 조그마한 두 손의 손가락을 꼭 끼어 쥐었다. 네플류도프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당신은 나를 믿지 않는군."하고 그는 말했다.

"저와 결혼하시겠다는 말을요?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세요. 오히려 목을 매어 죽는 편이 낮겠어요. 이것이 저의 대답이에요.!"

"어쨌든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하겠소."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이제 나로서는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녀는 덧붙이고는 구슬프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듯 했다.

그녀는 눈을 들어 놀란 듯이 그를 바라보고는 눈물에 젖은 두 눈을 목도리의 한끝으로 닦아냈다.

간수가 다시금 다가와서 시간이 다 되었다고 일러주었다. 카추샤는 일어섰다.

"당신은 지금 흥분해 있소. 가능하면 내일 또 올 테니 잘 생각해 봐요."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간수의 뒤를 따라나갔다.

"애야, 넌 이제 팔자가 피었어." 감방으로 돌아오자 코라블료바가 마슬로바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너한테 홀딱 반한 보양이야. 그이가 온 동안만은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해. 그이는 반드시 구해 줄거야. 돈 많은 사람이야 무슨 일인들 못하겠어?"

"그야, 그렇지." 건널목지기도 노래라도 부르는 듯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가난뱅이가 결혼하자면 힘들지만, 부자는 마음만 먹으면 즉석에서도 할 수가 있거든. 우리 마을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서......."

"그런데 내 이야기는 해보았어?"하고 할머니가 물었다.

그러나 마슬로바는 그들에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침대에 드러누운 채 사팔눈으로 한구석만은 쏘아보면서 저녁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괴로운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네플류도프의 말은 그녀를 옛날로 돌아가게 했다.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이해도 못한 채 증오에 사로잡혀 떠나 버린 그 세계로 말이다. 그녀는 이제껏 살아온 세계를 벗어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의 생생한 기억을 가슴에 안은 채 살아가기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밤이 되자 그녀는 다시 술을 사서 동료들과 함께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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