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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부활 (2부, 22) -톨스토이-

카지모도 2021. 9. 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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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무서운 일이야!" 네플류도프는 서류 가방을 다 챙긴 변호사 파나린과 같이 대기실로 들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극히 명백한 사실을 형식에 얽매여서 기각하다니, 무서운 일이야!"

"이 사건은 이미 원심에서 실패한 것입니다."하고 변호사가 말했다.

"게다가 셀레닌까지 기각에 찬성하다니, 정말 무섭고 무서운 일이야!"하고 네플류도프는 몇 번이고 이 말을 되풀이했다. "대체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황제한테 청원해 봅시다. 여기 계시는 동안에 직접 제출하십시오. 제가 써 드릴 테니까요."

그 때 법의에 여러 개의 훈장을 단 왜소한 체구의 볼리프가 대기실로 들어와서 네플류도프 곁으로 왔다. 그는 네플류도프가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들어왔다.

"이런 데서 자넬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네." 그는 네플류도프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입가에는 미소를 띠었으나 눈에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자네가 페테르부르크에 와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무슨 일로 여기엔?"

"여기에? 공평한 재판을 바라고, 아무 죄도 없이 유죄 판결을 받은 여자를 구해 보려고 왔어."

"어떤 여자인데?"

"방금 판결된 사건이야."

"아, 마슬로바의 사건이군!" 셀레닌은 아까 일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근거가 아주 허술한 상소던데."

"문제는 상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에 있네. 아무 죄도 없는데 벌을 받고 있으니까 말일세."

셀레닌은 한숨을 쉬었다.

"흔히 있는 일 아냐. 그러니..."

"있을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틀림없네."

"어떻게 아나?"

"내가 배심원이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우리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자 알고 있다네."

"그럼 그 때 이의를 말하지 그랬나."하고 그는 말했다.

"이의야 말했지."

"공판 기록에 기재가 됐어야 하는데. 상소장에도 기재되어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셀레닌은 항상 분주해서 별로 사교계 출입이 없었기 때문에, 네플류도프의 로맨스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플류도프는 그것을 눈치챘으나, 마슬로바와의 관계를 구태여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판결이 엉터리라는 것은 분명하지 않나?"하고 그는 말했다.

"대심원에서는 그런 것을 말할 권리가 없는 걸세. 만일 대심원에서 원심 판결이 정당하냐 정당치 못하냐 하면서 멋대로 재판소의 판결을 파기한다면, 대심원은 맏을 만한 근거를 상실하게 되고, 정의를 옹호하느니보다 오히려 그것을 침해할 위험을 무릅쓰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네. 그건 차치하고라도 그렇게 되면 배심원의 결의는 그 의의를 상실하게 될 테니까."하고 셀레닌은 방금 심의된 사건을 생각하면서 말했다.

"나는 그 여자가 완전히 결백하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네. 그리고 이 부당한 선고에서 그 여자를 구해 줄 수 있는 최후의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최고 법정에서 완전히 불법을 확정한 셈이지."

"확정된 것은 아니야. 대심원은 사건 자체를 심의하는 것도 아니고, 또 심의할 수도 없는 걸세." 셀레닌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그런데 자네는 이모님 댁에 유숙한다고 그랬지?" 그는 화제를 돌리려고 이렇게 물었다. "어제 자네 이모님한테서, 자네가 와 있다는 말을 들었네. 외국에서 온 선교사의 모임에 자네하고 같이 참석해 달라고 백작 부인으로부테 초대장이 왔었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셀레닌이 말했다.

"참석은 했었는데, 싫증이 나서 중간에 나와 버렸어." 네플류도프는 화제를 돌리는 셀레닌한테 화가 나서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왜 싫증이 났나? 하긴, 한쪽으로 치우친 편파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역시 종교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겠나?"하고 셀레닌이 말했다.

"그건 쓸데없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아."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아냐, 그렇지 않아. 오히려 우리가 우리들 교회의 교리도 모른다는 것이 이상한 거야. 게다가 우리는 러시아 정교의 근본 원리를 무슨 새로운 계시나 되는 양 착각하고 있거든." 셀레닌은 분명히 자기가 품고 있는 새로운 종교관을 옛 친구에게 알려 주려고 성급히 언명했다.

네플류도프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서 "놀라운 알이군."하고 그는 말했다.

"아무튼, 나중에 또 얘기하기로 하세."하고 셀레닌은 말했다. "우리 꼭 만나세."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자네 날 찾아 주지 않겠나? 나는 7시 저녁 식사 때에는 언제나 집에 있다네. 집은 나제첸스카야 거리에 있네." 그는 다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갈 수 있게 되면 가지."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으나, 옛날에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셀레닌이 이런 짧은 대화에서, 현실적으론 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갑자기 아무런 인연이 없는 타인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