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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부활 (2부, 20) -톨스토이-

카지모도 2021. 9. 28.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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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튿날 마슬로바의 사건 심리가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네플류도프는 대심원으로 갔다. 그는 벌써 몇 대의 마차가 멈춰 있는 대심원 건물의 장엄한 문 앞에서 변호사와 만났다. 장엄한 본관 계단을 통해서 2층으로 올라가자, 구석구석까지 죄다 알고 있는 변호사는 재판법 제정 연대가 새겨져 있는 왼쪽 문으로 갔다. 기다란 첫 번째 방에서 외투를 벗고, 심의원 전원이 모였다는 것과 맨 마지막 의원이 방금 들어갔다는 것을 수위로부터 듣자 파나린은 하얀 와이셔츠의 가슴팍이 보이는 연미복에 넥타이를 맨 채 유쾌하고 자신있는 태도로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방 오른쪽에는 큼직한 옷장과 테이블이 있고 왼쪽에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었는데, 마침 이 때 가방을 겨드랑이에 낀, 제복을 입은 의젓한 관리가 내려왔다. 이 방에서 먼저 눈에 띈 것은, 흰 수염을 길게 기르고 신사복에 회색 바지를 입은, 장로같이 생긴 노인이었다. 그 옆에는 두 명의 관리가 공손히 서 있었다.

백발의 노인은 옷장 곁으로 가더니 훌쩍 어디론지 사라졌다. 이 때 파나린은 자기와 똑같은 연미복에 흰 넥타이를 맨 한 동료 변호사를 보고 곧 그와 쾌활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방청인들은 모두 합쳐서 15명이 있었는데 그 중 두명은 여자였다. 한 사람은 코안경을 쓴 젊은 여자였고, 또 한 사람은 백발의 노파였다. 신문의 명예 훼손 사건의 공판이 있는 탓인지,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 대부분은 신문사 관계의 사람들이었다.

근엄한 제복을 입고 볼이 불그스름하고 잘생긴 정리가 서류를 한 손에 들고 파나린에게로 다가오더니 그가 관계하는 사건이 무엇인가를 묻고, 마슬로바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자 무엇인지를 기입하고 물러갔다. 이 때 옷장문이 열리면서 그 속에서 장로같이 생긴 노인이 나타났다. 그러나 양복을 입지 않고 반짝이는 금속 기장을 가슴에 달고 금몰이 달린 옷을 입고 있어서, 그 법복 차림은 흡사 새를 연상케 했다.

이 우스꽝스러운 복장에는 그 노인 자신도 당황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여느 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입구와는 반대쪽의 문을 열고 허둥지둥 들어갔다.

"저 사람이 베 씨입니다. 모두들 존경하고 있지요." 파나린이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이어 그는 네플류도프를 그의 친구에게 소개한 다음 그의 가장 흥미있는 사건, 즉 오늘의 소송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심의는 곧 시작되었다. 네플류도프는 방청인들과 함께 왼쪽 법정으로 들어갔다. 파나린도 다같이 방청석으로 정해져 있는 칸막이 저쪽으로 갔다. 페테르부르크의 변호사만 칸막이 앞의 테이블 곁으로 갔다.

대심원의 법정은 지방 재판소보다 좁았고 구조도 간단했다. 심의원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는 녹색 나사가 아니라, 금몰을 박아 넣은 빨간 비로드가 덮여 있는 점만이 지방 재판소와 달랐다. 그리고 다른 재판소에서도 다 비치해 놓은 거울과 성상과 황제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다. 여기서도 역시 정리가 "개정!"하고 장엄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일제히 기립하고 법복을 입은 심의원들이 입장하여 등받이가 높은 안락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의젓한 태도를 보이려고 애쓰면서 테이블 위에다 팔꿈치를 괴었다. 모두가 지방 재판소와 똑같았다.

심의원은 4명이었다. 의장 니키틴은 말쑥하게 면도를 하고 길쭉한 얼굴에 쇠처럼 차가운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볼리프는 입을 굳게 다물고 하얀 손으로 사건 기록을 넘기고 있었다. 다음 스코보로드니코프는 곰보에 뚱뚱하고 육중한, 학자 출신의 법률가였다. 네 번째인 베는 제일 마지막에 들어온 장로같이 생긴 노인이었다. 다음에 심의원들과 함께 서기관장 겸 검사국차장이 들어왔다. 그는 말쑥하게 수염을 깎은, 무뚝뚝하고 얼굴빛이 까맣고, 검은 눈에 슬픈 빛이 감돌고 있는 중키의 청년이었다. 네플류도프는 이 남자가 이상한 복장을 하고 5, 6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는데도 불고하고, 그가 대학 시절의 가장 친했던 친구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저 사람은 검사국 차장 셀레닌이 아닙니까?" 그는 변호사에게 물었다.

"네, 왜 그러십니까?"

"그 사람이라면 잘 압니다. 훌륭한 사람이죠."

"검사국 차장으로 있는데 수완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 부탁할걸 그랬군요."하고 파나린이 말했다.

"그러나 이제 와선 그럴 시간이 없군요." 파나린은 시작된 심의에 귀를 기울이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지방 재판소의 판결에 아무런 수정도 없이 채용된 공소원의 판결에 대한 상소심이 막 시작되었다. 네플류도프는 귀를 기울여, 지금 눈앞에서 행해지고 있는 심의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역시 여기서도 지방 재판소 때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점에 변론이 이르지 않고, 완전히 지엽적인 일만 문제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의되고 있는 사건은 모 주식회사 대표자의 사기 행위를 들춰 낸 신문의 사설 기사에 관한 것이었다. 네플류도프는 그 대표자의 배임 행위가 사실인지 아닌지, 사실이라면 그러한 배임 행위를 막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을 써야 하는지의 여부가 마땅히 심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이에 관해서는 하등의 논의가 없었다. 다만 그런 기사를 게재할 권리가 법률상 신문 발행자에게 있는지 없는지, 또 그것을 게재했다는 사실이 어떤 범죄에 속하게 되는지, 즉 명예 훼손이냐 중상이냐, 그렇잖으면 명예 훼손죄에 중상죄를 포함하게 되는지, 혹은 중상죄에 명예 훼손죄를 포함하게 되는지 하는 문제라든가, 그 밖에 여러 가지 법률 조문이나 판례라든가 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이해되기 힘든 문제에 관해서만 논의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사건을 보고한 볼리프가 어제 자기에게 대심원은 사건의 본질을 심의할 수 없다고 그토록 엄숙히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관해서는 분명히 공소원 판결의 기각에 유리한 듯한 보고를 하고 있다는 것과, 이에 대해 평소 소극적인 성격의 셀레닌이 격렬한 어조로 반대 의견을 진술했다는 것이다. 셀레닌이 네플류도프를 놀라게 할 만큼 열변을 토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가, 주식회사의 대표자가 돈에 대해서는 매우 치사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과 더군다나 볼리프는 이 사건의 전날 밤에 그 대표자한테서 굉장한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볼리프가 매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분명히 편파적인 보고를 하는 것을 보자, 셀레닌은 버럭 화가 나서 대수롭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서 신경질적인 의견을 말하게 된 것이다. 그 반론은 틀림없이 볼리프의 마음을 상하게 한 듯싶었다. 볼리프는 얼굴을 붉히고 몸을 떨었으나, 입밖에는 내지 않고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근엄하면서도 화가 난 표정으로 다른 심의원들과 함께 회의실로 나가버렸다.

"당신이 어떤 사건에 관계하고 있다고 하셨지요?" 심의원들이 나가자 정리가 다시 파나린에게 물었다.

"마슬로바 사건이라고 먼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하고 파나린이 말했다.

"아, 그러셨지요. 그 사건은 오늘 심의가 됩니다만, 그러나..."

"그러나 어떻단 말씀입니까?"하고 변호사가 물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사건이 저쯤 되었으니 심의원들이 판결 후 다시 출정하실지 어떨지 알 수 없군요. 그렇더라도 말은 해보겠습니다만..."

"그게 무슨 말씀이죠?"

"아무튼 말은 해보겠습니다." 정리는 부전지에다 무엇인가 써넣었다.

사실인즉, 심위원들은 명예 훼손 사건의 판결을 선고한 마슬로바의 사건을 포함하여 나머지 사건은 회의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며 처리해 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