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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부활 (2부, 42) -톨스토이-

카지모도 2021. 11. 1.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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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네플류도프는 그가 찻간에서 미처 나오기도 전에 작은 방울을 여러 개 단 준마를 서너 필씩 단 호화로운 마차가 역 구내에 머물고 있음을 보았다. 비에 젖어 거무스름해진 플랫폼에 내려서자, 일등차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값진 날개깃을 단 모자를 쓰고 비옷을 입은 키가 크고 살찐 귀부인과 사이클 운동복을 입은 후리후리하고 다리가 가는 청년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청년은 값진 목걸이를 한 크고 살찐 개를 데리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비옷과 우산을 든 하인들과 마부가 마중나와 있었다. 이 사람들에게는 살찐 귀부인을 비롯해서 긴 코트 자락을 한 손으로 받들고 있는 마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신감과 유복함이 엿보였다. 이 일단의 둘레에는 부유한 사람에게 아첨하는 비굴한 사람들로 담이 이루어졌다. 빨간 모자를 쓴 역장을 비롯하여 헌병, 여름이면 언제나 기차가 도착할 때마다 구경하러 오는 러시아의 옷차림을 하고 구슬 목걸이를 목에 건 야윈 처녀, 전신 기사, 그리고 남녀 승객들이 모여들었다.

네플류도프는 개를 데리고 있는 청년이 코르차긴의 아들인 중학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살찐 귀부인은 공작 부인의 동생이었으며, 코르차긴 일가는 이 동생의 영지로 이사 온 것이다. 빛나는 금줄이 쳐진 역무원 옷을 입고 장화를 신은 여객전무는 문을 열고, 필리프와 흰 에이프런을 두른 수화물 운반부가 접는 가마에 얼굴이 긴 공작 부인을 태워 운반하는 동안 정중한 태도로 문을 붙들고 서 있었다. 언니와 동생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공작 부인이 사륜 마차를 타고 갈지 포장 마차를 타고 갈지 의논하는 프랑스어의 대화가 들렸다. 파라솔과 상자를 든 곱슬머리 하녀를 맨 끝으로, 행렬은 역의 출구 쪽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그들과 만나 또 작별 인사를 하기가 싫어서 출입구까지 가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일행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공작 부인과 아들, 미시, 의사, 그리고 하녀가 앞장을 서고 늙은 공작은 처제와 함께 뒤에 남았다. 네플류도프는 떨어져 있었으므로 그들이 주고받는 프랑스 말이 드문드문 들려올 뿐이었다. 그 대화 속에서 공작이 말한 한 구절은, 간혹 있는 일이지만 그 음성이나 어조가 웬일인지 네플류도프의 기억에 그대로 남았다.

"오, 그 사람은 정말 상류 사회의 인간이야. 상류 사회의 인간이라고." 공작은 크고 오만스러운 소리로 그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 공손한 차장과 짐꾼들을 데리고 처제와 함께 출구 쪽으로 나갔다.

마침 이 때 어디서인지 역 한모퉁이에서 짧은 털외투에 인피 짚신을 신고 배낭을 짊어진 노동자들의 무리가 플랫폼에 나타났다. 그들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첫 번째 찻간으로 달려가 들어가려고 했으나, 곧 차장에게 내쫓기고 말았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발을 멈출 새도 없이 서로 발을 짓밟으면서 앞을 다투어 다음 찻간으로 가서 찻간의 모서리와 문에다 배낭을 부딪치며 올라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딴 차장이 입구 쪽에서 그들의 거동을 보고 몹시 야단을 쳤다. 찻간에 올라탄 노동자들은 곧 그곳에서 허둥지둥 뛰쳐나와 여전히 가벼운 걸음걸이로 네플류도프가 타고 있는 그 다음 찻간으로 몰려갔다. 차장이 또다시 그들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더 앞으로 가볼 셈으로 발을 멈췄는데, 그 때 네플류도프가 안에 아직 자리가 남아 있으니 들어가라고 말했다. 그들은 말을 듣고 들어갔다. 네플류도프도 뒤이어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재빨리 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꽃모양의 모표를 단 채 있는 모자를 쓴 신사와 두 부인이 이 찻간에서 노동자들이 자리를 잡는 것은 자기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고 열을 내어 그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20명 가량이었는데 늙은이도, 젊은이도, 모두 햇볕에 새까맣게 그을어 지쳐 버린 듯한 메마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 자기들이 잘못했다고 느낀 양 곧 배낭을 걸상과 칸벽과 문턱에 부딪치면서 찻간 복판을 빠져나가 더 앞으로 가려고 했다. 이 세상의 끝까지라도 가라면 가고 앉으라면 못 위에라도 앉을 듯싶었다.

"어딜 가는 거야, 지금 너희들 있는 자리에 앉아 있으란 말야!" 그들과 마주친 딴 차장이 외쳤다.

"또 새로운 소식이 있어요." 두 부인 중의 젊은 부인이 자신의 유창한 프랑스 말로 네플류도프의 주의를 끌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팔찌를 낀 부인은 퀴퀴한 냄새가 풍기자 노상 코를 벌름거리고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냄새가 풍기는 노동자들과 동석한 불쾌감에 무어라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이제사 큰 위험을 벗어난 기쁨과 안도감을 느끼면서, 걸음을 멈추어 제각기 자리를 잡고, 어깨를 틀어 등의 무거운 배낭을 내려 좌석 밑에 쑤셔넣었다.

타라스와 얘기하던 정원사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으므로 타라스의 옆과 앞에 세 개의 자리가 생겼다. 세 사람의 노동자가 앉았다. 그러나 네플류도프가 옆에 오자, 그의 품위 있는 옷차림에 놀라서 비켜나려고 했다. 네플류도프는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말하고, 자기는 통로의 옆좌석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나란히 걸터앉은 두 사람 중에서 쉰 살쯤 되어 보이는 노동자는, 이상하다는 듯한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젊은 노동자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보통 신사들처럼 욕을 하거나 쫓아내지도 않고 오히려 자리를 양보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놀라웠고 또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이 때문에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을 했다. 그러나 별로 아무런 흉계도 있어 보이지 않고, 네플류도프가 소탈하게 타라스와 얘기하고 있는 것을 봐, 그들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고 앉으라고 권했다. 네플류도프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동자는 처음에는 몸을 움츠리고 신사 나리에게 자기 몸이 닿지 않도록 인피 짚신을 신은 두 다리를 애써 오므리고 잇었으나, 안중에는 네플류도프와 타라스와 사귀어 얘기를 하게 되고, 얘기 도중에 특히 그의 주의를 끌고 싶은 대목에 이르면 손등으로 네플류도프의 무릎을 치기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 그는 자기의 신에 타령을 하고 이탄(泥炭) 파는 곳에서의 일을 얘기했다. 그는 거기서 두 달 반동안 일하고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나, 고용될 때에 임금의 일부를 선불로 받았기 때문에 집에 있는 동생들에게는 10루블씩밖에는 보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밥 먹는 두 시간을 빼놓고는 무릎까지 잠기는 물 속에 들어가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몹시 힘든 일입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렇지만 어느 만큼 견뎌 내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먹을 것만 제대로 주면 견딜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나빠서 말이지요. 처음 한동안은 지독한 걸 먹이더군요. 그래서 모두 불평을 했더니, 이내 먹을 것도 점점 나아지고 일하기도 수월해졌습지요."

그리고 그는, 자기는 이로써 벌써 28년째나 날품팔이를 하고 있는데, 번돈은 고스란히 집에 보냈다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다음은 형에게, 그리고 다음에는 집안 일을 돌보고 있는 조카에게 송금을 해주고, 자기는 1년 동안에 번 돈 5,60루블 중에서 겨우 담배나 성냥을 사는 용돈 2,3루블 정도밖에 쓰지 않았다고 했다.

"하긴 죄스러운 얘깁니다만 지나치게 피곤할 땐 보드카를 사 마셨습니다." 그는 죄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덧붙였다.

그는 또, 고향에서 남자들 대신 여자들이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는 이야기, 오늘 출발 전에 고용주가 모두에게 보드카를 반 통이나 사 주었다는 이야기, 친구 한 사람이 죽은 이야기, 또 한 사람의 친구는 병들어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가 말한 환자는 같은 찻간의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얼굴이 유난히 창백하고, 자주빛 입술을 한 젊은이였다. 그는 열병으로 빈사 상태에 있는 듯했다. 네플류도프는 그이 옆으로 가까이 가 보았으나, 젊은이가 너무나도 괴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나이 많은 노동자에게 키니네를 사 주라고 약 이름을 종이에 적어주었다. 그는 약값을 주려고 했지만, 나이 많은 노동자는 자기가 사 주겠다고 말하면서 사양했다.

"나는 지금까지 무척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이런 분은 처음 봤습니다. 화도 내시지 않고 자리까지 양보해 주시다니, 나리들도 천차만별이군요." 그는 타라스를 바라보고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새로운 딴 세계다. '네플류도프는 노동자들의 거칠고 뼈가 이상한 팔다리와 허름한 무명옷과, 피로해 보이나 상냥하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인간 생활의 참다운 노동의 진정한 의미와 기쁨과 고통을 맛보고 있는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 속에 자기가 끼여 있음을 느꼈다.

'바로 이것이 상류 사회다!' 네플류도프는 아까 코르차긴 공작이 한 말을 생각하면서 무의미하고 빈약한 생활밖에 모르고 무위 도식만을 일삼는 코르차긴 일가의 사치스러운 세계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미지의 아름다운 세계를 발견한 나그네의 기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