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87. 9

카지모도 2016. 6. 2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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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16 1987. 9. 1 (화)


새벽기도.

J와의 관계회복, 그녀의 회심, 그녀가 구사하는 언행이 여성다움으로 느낄수 있도록 나의 눈과 마음을 변화하여, 가정이 화목한 것이 긍정적이고 밝은 아이들로 키우는 첩경이고 이것은 부모의 최고선으로 인식해야 함을 J와 나 공히 인식할 것.


J가 변치않고자 한다면, 옛 언행을 불변으로 고수하여 고정관념으로 고집하고자 한다면, 이 가정의 회색빛 드리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화목의 근거는 설 땅을 잃고 말 것이다.

사랑의 가정이란 개념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가정을 위한다는 어떠한 명분도 당위성을 잃게 된다.

되는 대로 살 뿐이다.

J를 비롯한 아이들은 그들대로 나름의 색채로서 살면 되고, 나는 이곳 가정을 역시 직장과 같이 견뎌내야 할 또 하나의 현장으로 인식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사춘기라서 그러하겠지만 갈수록 다정함을 잃어가는 딸, 부모의 눈치 속에 갈수록 내성적이고 소극적으로 변해가는 것만 같은 아들.....

부모의 해악은 지금 아이들을 오염시키고 있다.

지금 내게 어떠한 장애-영혼의 고양이나 인격의 도야나 마음의 온유나 사고의 긍정과 적극성이나 어떤 소망에 장애가 있다면 그것은 직장의 문제도, 물질적인 문제도, 육체적인 문제도, 정신적인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따뜻한 가정의 결핍이다.

J의 고정관념, 언어의 구사, 사소한 동작... 개선과 상승을 도시 생각치 않으려는 정신적인 게으름. J는 수구파,보수꾼,극우주의...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그녀의 영혼에 접목한다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시도일까?

그녀는 하나님의 예정하신바 그 사람이 아니란 말가?

이 모든 것들이 기도의 주제이겠건만, 응답을 기대치 못하는 메마른 부르짖음, 안타까움에 눈물은 흐를지언정 공허한 메아리.

그러나 나의 방법은 틀려 먹었을지라도 하나님이 내게 행하시는 방법은 옳을 것이다.

그 분은 먼저 나의 시각을 변케 하실 것이고, J의 언행 어느 구석에서 이쁜 점을 찾아내게 하실 것이고 그러한 나의 느낌을 확대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그녀의 언행에 대하여 참을성과 포용성의 버릇을 갖게 하실 것이다.

그런 내 관대함에 비추인 자신의 결점을 깨닫고 시나브로 말씨와 행동이 변화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변화하는 그녀의 인격을 존경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드디어는 온유함을 획득하고, 화목을 획득하고, 가정의 사랑을 획득할 것이다.


하나님 나의 아버지. 아내를 변케 하소서, 먼저 나를 변케 하소서.


신인현 '기도드리는 법' 그 중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

"첫째, 정욕으로 쓰려는 기도.

둘째, 마음에 죄악을 품은 기도.

셋째, 용서하는 마음없이 드리는 기도.

넷째, 잘못된 부부관계에서 드리는 기도-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가까운 이웃이 나의 아내요 나의 남편이다. 서로 화목해야 한다면 제일 먼저 부부의 화목이요, 서로 용서해야 한다면 제일 먼저 부부끼리의 용서요, 두사람이 합심해야 한다면 제일 먼저 부부의 합심이 있어야하고, 함께 기도해야 한다면 부부가 먼저 함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기도의 응답 역시 마찬가지이다. 부부가 불화중에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 범죄에 있어서도 부부 공동의 힘은 얼마나 큰가. 하와의 범죄와 아담의 타락, 이세벨과 아람왕, 헤롯과 헤로디아, 아나니아와 삽비, 한사람이 범죄하는데도 부부의 힘이 크게 작용하듯이 구원의 문제,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도 부부의 힘이 크다.

부부관게의 비정상, 이는 성경에서 밝히 말하고 있듯이 기도의 응담을 받지 못하는 최대의 원인인 것이다.

다섯째, 사랑이 결핍된 기도."


<밤>

아침 저녁은 서늘한 9월이지만 낮의 볕은 아직도 뜨겁다.

바쁜 하루 일과.

현장의 관리방법- 재래적인 노가다의 방법, 주먹구구의 방법,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감각적인 방법, 은 개선될 수가 없는 것일까?

고위 관리자란 사람들이 이러한데 어찌 변화를 꾀할수 있으랴.

'제품은 그를 만드는 사람의 인격 이상은 되지 않는다.'는 격언은 System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부서 혹은 어떤 회사의 업무의 품질은 그 부서의 장 혹은 그 회사의 사장의 인격 이상은 되지 않는다.

나의 직장- 줄줄히 Yes Man의 나래비, 자수성가한 Owner의 사고체계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조직.

현도반 반장에 대한 반원들의 반란, 그들을 집합하여 놓고 들려준 나의 얘기가 이해되었기를.


나의 메마름이여.

가을의 들녁을 걷고 싶다.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뭇잎 썩어가는 냄새를 맡고 싶다.

나의 거짓들을 관조하면서 쓴 웃음을 짓고 아주 조용하게 노래를 부르고 싶다.

어제 본 TV드라마 '날개 84'.

언제나 웃으면서 긍정적으로 열심히 인생을 즐기듯이 살아 온 고아 소년. 그러난 그는 행글라이더를 타고 먼 하늘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 세상을 아무리 자기 것으로 껴안고 사는 듯이 보여도, 그는 결국 다른 별의 사람이었다.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듯한 나의 그리움.

때로 익숙하게 휩싸이는 그 감정.

나의 별, 내가 떠나 온 그 별은 어디일까?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일까?

도무지 알지 못하며, 구체적으로 끄집어 표현할길 없으면서 때로 나를 휩싸고 나를 아름답고 슬프게 하는 이것은 떠나온 나의 별을 향한 그리움인가?

소녀의 센티멘탈은 분명 아니건만.


14817 1987. 9. 2 (수)


맑은 날씨.

현장에 내려온후 과도한 피로 탓인가, 과도한 음주 탓인가.

또다시 맹렬하게 아파오는 뒷꽁무니.


사무실에서 잠시라도 책을 꺼내 한귀절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 형편없이 줄어든 독서량.

그러나 책상 서랍 속에 숨겨진 보물, 작은 성경과 카잔차키스. 화장실은 훌륭한 독서실이다.


부장의 정대리를 대하는 비열함, 강한 자에게는 민망할 정도로 꼬리를 흔들고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이빨을 드러내 으르렁거리는.

저속한 성품이다. 그런 사람이 약삭빠르고 능력있어 보이며 대우를 받는 풍토의 회사.

그에게 거슬러 이를 지적하여 맞서기에는 나 또한 너무나 범속한 속물.

그런 다수의 부정의한 풍토 속에 서있는 자신을 문득 느끼는 순간, 방관자의 고통이 잠시 양심의 가시를 건드릴 뿐 용기는 없다.

그러나 정대리의 어리석음이 또한 싫다. 그의 이기주의도 상당한 수준인데.

차라리 스스로 사직을 하던가, 해고를 하던가..

이 문제는 또하나의 괴로움이다.


14818 1987. 9. 3 (목)


새벽기도.

성경을 펼첬으나 감동은 없다. 톨스토이 참회록을 펼첬으나 역시 감동은 있지 아니하다.

나의 기도는 다만 간구 뿐이다.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의 요건만 갖추고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덕목은 조금도 없는 기복신앙의 기도일 뿐이다.

철저한 죄인임의 자각, 가슴을 쥐어 뜯으며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참회, 고독하고 불완전한 인식에서 우러나오는 실존의 한계.... 그 때의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십자가... 평화, 감동.. 감사의 생활과.. 온유와 경건...

아, 내게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이다. 우연히 이 땅에 대포알 던져지듯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만약 그러한 존재라면 우리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없게 된다. 그냥 원하지도 않게 이 땅에 태어나서 살다가 무덤에 묻혀 썩어가는 존재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귀한 계획과 섭리 속에 지어내신 존재이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이다. 형상은 곧 속성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과 사랑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거룩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과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 인간은 사명의 소유자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위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인간은 이렇게 정복하고 다스리는 적극적인 사명의 소유자이다. 환경에 패배당하는 소극적이고 운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는 존재이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의 기쁨의 대상이 되고자하는 욕구가 있다. 어릴 때는 부모의 기쁨의 대상이 되고자 하고 성장함에 따라 선생님의 기쁨, 친구들, 애닝, 아내, 남편, 자식의 기쁨의 대상이 되고자 한다. 그것이 잘 안될 때 마음에 갈등이 생기고 비교의식과 열등감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다. 다른 누군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나는 적어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에게 있는 운명적인 요소는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다." -야훼의 밤 '창세기 강의중'-


무슨 의지가 있어 英이를 그토록 英이 답게, 俊이를 그토록 俊이답게 만들었단 말인가? 다시 확신하거니와 그것은 나의 의지도 J의 의지도 아니었다.

무언가 역사하는 의지가 실제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면 英이가 그토록, 俊이가 그토록 태어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 내게 오십시오. 당신의 능력으로 이 영육을 채우셔서 두렵지 말게 하십시오. 감사하게 하십시오. 절대로 당신을 이제 놓지지 않겠습니다.


14819 1987. 9. 4 (금)


어제 몹시 취하다. 12시 넘은 귀가.

퇴근 무렵의 술의 유혹은 대단핟다. 땀흘린 일과 후의 술.

그토록 늦게 까지 마셔대고도 결근한 사람 하나 없으니 현장은 체질들인가 보다.

게다가 고된 현장의 하루, 나도 견디어 낸다.


英이.

"아빠도 어렸을적 용돈이란거 받아 봤어?" "그 때 기분이 어떤데?" "흰 봉투에 넣어 줘." "만원은 너무 많아, 오천원쯤."

예쁜 내 딸.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설하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다. 그리고 인간에게 에덴을 맡기시면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다. 먹는 날은 정녕 죽을 것이라고. 이렇게 선악과를 두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절대적인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다. 인간이 에덴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나무가 바로 선악과이다. 에덴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인간은 다만 청지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에덴을 다스리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질서를 위해 선악과를 두셨다. 바로 여기에 인간 행복의 비결이 있다. 하나님과의 질서를 지킬 때 비로소 에덴은 나의 것이 된다. 그러나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나님과의 질서를 파괴하면 에덴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인간들이 행복을 상실한 가운데 엉겅퀴와 가시덤불 속에 있는 것은 바로 이 질서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악과의 절대적인 질서 속에서 인간이 무한한 행복과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신다. -야훼의 밤 '창세기 강의중'-


14820 1987. 9. 5 (토)


망칙한 꿈.


현대조선 또다시 극렬한 노사분규. 시청난입, 방화, 파괴 게다가 살상까지.

자제해야 한다. 중장비까지 동원해 거리로 나와 경찰 저지선을 쉽게 돌파하였다면, 이제 탱크가 나서는 상황이 되면 어쩌겠나?

빌미를 주어서는 안된다. 어떤 수구파, 보수꾼, 청결강박자, 권위주위자, 유교사상가 따위가 나서서 칼을 빼어든다면 어쩌겠나?


저녁무렵부터 부슬부슬 내리는 비.


"짐승으로부터 인간으로의 오름길을 따라가려면 고통이 가장 위대한 길잡이임을 우리들에게 가르처 준 것은 바로 그 회초리였다." -카잔차키스-

인간을 각성시키고 상승시키는데 회초리라는 물건은 매우 효율적인 기능을 발휘할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습관의 노예- 습관을 고치는데는 강제적인 제재없이는 어렵다. 군대를 보라.

이 방법은 야만적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간파하는 사람들은 이 방법을 사용한다.


14821 1987. 9. 6 (일)


비오는 일요일.

휴일의 한가함을 노려 혓바늘 기습하다.


밤새 꿈에 뒤척인다.

번지는 암세포, 죽음이 닥처오고, 경찰에 쫓기는 상황... 엇저녁 CBS의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한 강유일씨의 간증이 소재가 된듯한 꿈.


갑자기 어느 날, 나에게 혹은 내 가장 가까운 누구에게 돌연 죽음이 찾아온다면.

전혀 예기치 못한 죽음.

나의 죽음을 예비하라. 또한..

아, 이를테면 어머니의 죽음을, 아내와 아이들의 그것을 나는 현실 속에서 견뎌낼수 있을까. 나는 도저히 감당해낼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정말 굳센 인간이 아니다.

죽음을 예비하라. 죽음에 익숙하여 저라.

상승하라. 神의 정신을 좇아 높이 솟아 올라라.

나의 실존이 한 점 박테리아처럼 보이는 곳까지. 하나님의 프리즘을 통하여 나의 실존이 관조될수 있는 곳까지.


"뱀이 여자에게 접근하여 대화로써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말라 하시더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금지하는 하나님, 인색한 하나님으로 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못하도록 구속하는 하나님인양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물이 든 여자가 대답합니다. 그 대답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무한한 자유에 대해서는 별로 강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금지사항을 덧붙이면서까지 크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자세가 흐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여자는 죽을까하노라고 상대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히브리원어를 보면 더욱 잘 알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강조할때는 같은 의미의 단어를 두 번 반복합니다. 정녕 죽으리라고 번역된 이 히브리어를 그대로 직역하면 죽음을 죽으리라고 해야 합니다." -야훼의 밤 '창세기 강의중'-


심층 깊은 곳에, 나의 아득한 선조들이 태어나고 죽고, 그 탄생과 죽음들이 나의 깊은 곳에 아득한 기억으로 축적되어, 그 영혼 깊숙히, 이제 나로하여 피어나는 소망.

소망이 있음, 죽음을 넘어선 그 무엇에 대한 소망이 있음.

죽음의 극복- 그 아득한 기억 속에 있는 소망.

어머니, 오직 길은 그 뿐인 것을. 어머니 내 어머니.


14822 1987. 9. 7 (월)


새벽기도.

새벽의 고요함. 지극히 고요한 것에느 지극히 큰 소리가 있다.


"그러자 뱀은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오히려 확신있게 거짓말을 합니다. 오히려 좋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여자가 이런 뱀의 말을 받아들이고 그 나무를 보니 이제와는 전혀 다른 나무로 보였습니다. 여자의 관점은 이제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으로 바라보던 그 나무가 지금은 탐욕의 대상으로 돌변해 버렸습니다. 여자는 그 과실을 따먹고 말았습니다.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죄의 전염은 이렇게 급속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이간은 전적으로 자기만을 바라보는 병든 자의식이 생겼습니다. 이 전에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자기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만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곧 말라 비틀어질 것으로 자기를 가리고 미화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서로의 진실을 볼수 없게 되엇습니다. 자기가 아닌 것으로 서로 만나고 접촉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피하는 도피심리가 생기고 두려움,책임전가,합리화하는 마음들이 생겨났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인간 실존에 대한 최초의 질문입니다. <네가 정말 있어야 할 곳에 있느냐? 네가 그곳에 있는 이유가 뭐냐?>하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은 인간자신이 먼저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제기하신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 하나님의 질문을 회피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결코 이 질문에서 도망갈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이 질문 앞에 엄숙히 서야 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 -야훼의 밤 '창세기 강의중'-


상헌이라는 존재물아. 너는 지금 어디 서 있는가?

네 실존이 위치하고 있는 지점은 어디인가?

인간은 그토록 굳센 존재물이 아니다.

이 질문의 울림 속에서 머리를 곧게 들고 자신만만하게 '나는 내 의지로 여기 굳세게 서 있소'라고 대답할수 있은 존재물이 결코 아니다.


존재의 의미-

억만겁의 시공 속에 다만 혼자 던지워져 있다는 그 엄청난 아찔함!

그때 나는 부르짖는다.

내 하나님! 내 존재의 주인이시여!

이 새벽.

내 존재주를 느낄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


14824 1987. 9. 9 (수)


새벽기도.

빛 속에서 이끌어짐을 받으면서도 늘 감사할줄모르고, 세상과 타인의 시선 속에 스스로를 얽매어 고통받는 불쌍한 심령. 구하여 주십시오.

아내를, 어머니를, 아이들을, 형제를.


범속함,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추한 것을 뛰어 넘는다는 것.

시야의 확대, 호걸의 눈, 대범함, 늘 절대자를 의식하는 것.

신앙의 성숙함.


그러난 세속적인 것에는 전혀 상관치 않고 오불관언의 자세를 견지한다면?

중세의 수도승처럼.

아니면, 피흘려 부딪처서 그 이면에 숨겨진오의를 찾아내어 그를 온몸으로 포옹하는 것.

그도 아니면, 적당한 미소, 유연한 처세, 위선적인 몸짓, 작위적인 사랑의 웃음을 띠면서 범속한 것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두발만, 영혼의 두발만 확고하게 하나님의 영토에 딛고 있으면?


아, 진실로 속된 직장이 싫다.

이 유치찬란한 곳에서 무슨 정신적인 고양이 있을 것이며, 하다 못해 교양의 만족따위를 바랄수 있단 말이냐.

오직 빵을 위하여 이 척박한 땅에서 버텨야 한다는 사실은 내게 커다란 비극이 아닐수 없다.

아, 그러나 나는 에고이스트. 이기심으로만 뭉쳐진 짐승.

어찌하여 그 척박함을 긍정하고 사랑할수 없단 말이냐.

진정한 비극은 바로 이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 때때로 잠꼬대처럼 외마디 비명을 질러대느냔 말이다.


<밤>

SB-321 진수.

분초를 다투는 반목제거 작업.

하루의 힘을 두시간 남짓 다 써버리다.

흙투성이 작업복과 안전화, 속옷은 땀에 질척거리고, 뻐근한 어깨쭉지.

공정을 전혀 지키지 못하는 외주업체의 사장들과 신경싸움.

퇴근길 몇잔의 술은 없어서는 안되어 얼큰한 정도로 귀가.

그러나 기다리는 것은 아내짜리의 그 성난 언행, 뚱하여 흘겨보는 눈사위며, 한마디 내뱉는 언어의 섬뜩함이며, 다정과는 너무나 먼거리의 몸짓하며, 英이까지도 아비에게 눈길 한번 주지않는 쌀쌀함하며...

그예 내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의 불평스런 소리에 즉각 대응해 오는 것은 언어의 주먹이다.

곧 나는 변신하고 만다. 한 마리 삐에로여, 돼지의 가장이여, 원숭이의 아비여.

아, 아내짜리의 고정관념은 사지를 마비시킨다. 근육의 씰룩임조차도 어색한 경련으로 만든다. 그 관념은 지혜와는 정반대되는 개념.

원시인의 토템이즘, 울긋불긋한 서낭당, 서슬 퍼런 작두위의 춤사위, 무당과 요기의 섬뜩함, 마냥 낯설음, 어머니의 모음과는 정반대의 발음.

오직 적개심, 단 하나의 구호 무찔러라! 죽여라! 난 이긴다! 이기고 만다! 무찔러라! 죽여라!

아, 비극적인 자가당착, 자기모순, 고정관념은 감정의 광포함을 부르고, 지극한 낭비, 자기혐오, 절망, 자살유혹, 진리와는 담을 쌓은... 이것이 얼마나 악마적인가를 아, 깨닫는 나, 깨닫는 J는?

나의 하나님, 아이들을 보호하소서.


14825 1987. 9. 10 (목)


어느 역사의 광포한 시대를 살아남은 목숨. 피흘린 경험.

그러나 목숨의 피흘림보다 더 아픈 것은 영혼의 피흘림.

닫힌 소망으로 인한 고통.

기도없는 이 아침의 시간. 아픈 뒷꽁무니, 거북한 뱃속, 헐은 입속, 누적된 피로.

따스함이 없는 가정.

심리적인 긴박감,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는..


14826 1987. 9. 11 (금)


다소 늦은 새벽.

기도. 하여 주소서... 하여 주소서...

서낭당에 돌을 던지고 비는 노파의 기도.


하나님의 가난한 피에로- 프란치스코. 육체를 억제하고 감각의 쾌락을 거부하고 탐욕의 내적인 악마가 턱을 핥는다고 느껴지면 음식에 재를 뿌렸던 그... 가난, 복종, 순결...

복종의 심오한 의미는.

준엄한 손짓에 순종하는 것, 내면의 드높은 힘에 확신을 가지고 몸을 맡기며 그 힘들은 모든 것을 알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굳은 신념.

그 세계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 성자의 가시밭길.

그러나 나의 고통- 언제든지 타인과의 관계없이는 살아갈수 없다는 멍에. 성자는 이 시대에 가능할까?


<밤>

소주와 맥주에 취하여 돌아와 앉은 내 책상 앞.

슈베르트를 건다. 소프라노 체릴 스튜더가 노래하는 리트.

문득 소리치고 싶은 것은.. 제약인가 확산인가. 발전인가 거부인가, 금기인가 탐욕인가, 나의 하나님의 원칙은 무엇인가.

역사를 생각하라. 갈등의 역사, 전통과 진보, 원시의식과 인간의식, 명확한 대립된 두가지 객체, 늘 그것은 반복하여 싸우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에 귀결되어야 할까. 이것도 아니다. Idealist의 뜻은 현존을 짓밟을수 있다. 너무도 많이 그들은 짓밟고 지나간다. 그 분의 뜻은 미세하다. 극미의 세포에 작용하시는 하나님. 그렇지만.

하나님을 인지하게 된다는 것은 그리 간단히 무당의 신굿처럼 덮쳐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 목숨의 끝장에 가서 비로소 가슴으로, 그분을, 그 분의 인격을 느끼게 되는 무엇이다.

도식적인 아포리즘에 취한다는 것은 부끄러움이다. 나는 나의 길로서 아버지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흔들리지 않게, 하나님 아버지의 의식에 모든 것을 맡기고 굳건히 서루 있는 하나의 자세.. 신앙.

슈벨트. 슈벨트, 나의 슈벨트.


14828 1987. 9. 13 (일)


일요일 회사 나오는 길.

너무나 짓푸른 하늘. 그야말로 청색의 물감이 둑둑 듣는 듯 하다. 드문드문 피어있는 하이얀 구름은 코발트빛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완벽한 색체와 형태의 아름다움.


14829 1987. 9. 14 (월)


오늘도 번잡한 현장의 일과, 그 하루를 마치다.

일과중 문득문득 소스라치게 놀라는 때가 있다. 나의 감성은 어디로 갔는가하고.

너무나 메마른 감성, 느낌만이 형해화 되어 남아 서거거릴 뿐이다.

서쪽 하늘에 드리워진 핏빛 놀을 보아도, 스산한 가을 바람이 옷깃을 건드려도 낭만적인 느낌은 일지 않는다.

좋은 영화나 연극, 음악회,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 이런 것들을 향한 충동도 느껴지지 않는다. 낭만을 향한 열정이 모조리 죽어버린 듯 하다.

요즘 하늘에도 별이 빛나고 있는가.


하나님께 매달리고자 하는 나의 방식은 어딘가 잘못되어 있는건지 모른다.

풍성한 감성없이 어떻게 그 분을 느끼고 행복한 신앙인의 꿈을 꿀수 있을가.

초조, 불안.. 아, 못마땅함들.


14830 1987. 9. 15 (화)


아티반 한알까지 먹었으나 설쳐버린 잠.

포근하지 않은 이불과 한 마리 모기의 비상음도 숙면치 못한데 일조.

깨어 일어난 머리는 뻐개질 듯 아프고, 혓바늘은 여전하다.

어두운 아침, Beethoven의 Cello Sonata 걸어놓고 나의 하나님께 기도드리지만 중언부언을 벗어날 수 없다.


언젠가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깊은 산 속 기도원에 들어가 금식하며, 작정하고 기도에 매달리고 싶다.

자복과 회개, 불쌍해 빠진 내 영혼의 연민으로 울고, 희열로 울고, 기쁨으로 울고 하여

울음으로 내 안의 더러운 것들을 몽조리 빼어낼수 있다면.


아, 그 세계, 작년 날 거칠게 흔들어 주시던 그 세계, 그 거친 기쁨 속으로 다시 들어갔으면.

이 현실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이 짓누르는 혼돈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비참하지만 어쩔수 없이 목덜미를 잡혀있는 이 무례한 자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구체적 마음의 작정들 몇가지.

억지로라도 시내의 음악회나 연극등 문화를 접하도록 한다.

노가다적 음주는 가급적 삼간다.

틈틈이 어학공부를 한다.

J에게 억지로라도 마주 앉도록하여 성경의 얘기를 들려준다.

英이의 영어공부를 보살피고 예수님 얘기를 들려준다.

운동이 부족한 俊이에게 자전거를 사주어 적극 운동을 하도록 유도한다.

새벽에 깨워서 달음질을 함께 하도록 꼬신다.

어머니, 형네와의 정기적인 만남의 제도를 정립시킨다.


말은 좋지, 말이야 좋지.


14831 1987. 9. 16 (수)


한국일보의 종교 칼럼.

"사람이 신을 찾는 종교가 있고 신이 사람을 찾는 종교가 있다. 참 신앙은 행위가 아니라 관계이다. 신앙은 율법과 짐이 아니다. 신앙은 사람의 고안이나 이념이나 지적동의나 견해도 아니다. 신앙은 제도와 조직도 아니다. 절대자에 대한 절대적인 응답, 여기에서부터 신앙은 시작된다. 종교가 믿음보다 앞서는 경우를 볼수 있다. 진리를 믿기보다 어느 기관을 믿는 경우를 볼 때 서글퍼진다. 종교인은 교만하다. 종교인은 종교연구를 위해 존재한다. 신앙은 연구를 위한 것이 아니고 삶의 변화와 행로를 위한 것이다. 종교는 수단과 방법과 기술을 연구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원리에 잡힌다. 종교놀이는 진리가 아니다. 종교논쟁도 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종교에 살지 않고 능력에 산다." -전가화 '종교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


아주 흐리고 오두운 아침. 방안에 드리운 날씨의 색채는 음산하기까지 하다.

충분히 직장에 나갈수 있겠지만 하루 쉬기로 한다.

이로 인한 한가한 마음이 즐겁다.

면도기소제, 구두닦고, 목욕갔다와서, 비디오 보다가, 낮잠도 자리라.


14832 1987. 9. 17 (목)


새벽. 부끄러운 품성의 하루를 보내고나서 차마 경건을 찾지 못하다.

하루 쉰후의 출근은 언제나 발걸음이 무겁다.


서늘한 날씨, 가을이다.

그러나 마음의 풍요로움은 없다.

과도한 술값지출에 대한 부담감, 내일이 월급날.


여호와의 증인에서 발간한 책자 읽다.

여호와의 증인에는 엄격함이 있다. 성서 무오설에 근거한 문자적인 해석, 삼위일체의 부정.

성서란 조금의 여지도 없는 책인가. 완벽하게 성령이 역사하여 완벽한 틀속에서 이루어진, 기술자의 성격이나 인품의 헛점이 조금도 가미되지 않은 완벽한 책일까.

결코 그러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성서의 기술방법이나 표현방식은 좀 달라야 할 것이다.

성서의 위대함과 풍성함과 완벽함은 인간적인 어리석음, 허술함 어떤 여유로움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느낌이다.

논리적이고 수학적이고 독선의 완벽함은 지배할지언정 감동 감화가 우러나오기에는 오히려 역부족일 것이다.

성서는 율법책이 아니고, 법전도 아니고, 이성의 추구함으로 오의가 밝혀지는 그런 책도 아니며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다고 해석해야하는 그런 책도 아니지 싶다.


여하튼 가을이고, 나는 풍성하지 못하다.

기도없는 하루.


14835 1987. 9. 20 (일)


모처럼 쉬는 일요일.


나는 몽상가. 여행은 엄두도 못내거니와 하다못해 동네 산등성이나 바닷가에 나가는 것 까지도 게으르다. 밖을 돌아 다니는 것이 싫다. 쉬는 날 집안에 틀어박혀 한적한 고요로움 속에서 몽상이나 하고 있는 것이 좋을 뿐이다.

예전에는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그저 작정은 이렇다.

'俊아. 좀 더 크거라. 그때 아빠랑 자전거 하이킹을 떠나자. 지리산 종주도 우리 부자 함께 해보자꾸나. 음악회나 공연장도 같이 돌아다녀 보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참으로 싫어하는 성격은 아닌데, 아마도 마음맞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고독한 동물' 고독은 그 상황에서 제대로 감정모체가 만족하지 못할 때 느끼는 현상이다. 나는 요즘 홀로 있을때보다 많은 사람들 속에 묻혀있을때가 더욱 고독하다.

홀로 있을 때는 전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홀로 있을 때 오히려 어떤 충일감의 희락이 있다. 완벽한 이해와 사랑이 결핍된 관계의 군중 속에서만 고독할 뿐이다. 물리적 고독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고독만이 문제될 것이다.


주안에서의 코이노니아.

그 친교의 세계란 가장 지고의 인간관계가 아닐까?

언제인가? 내가 교회인이 되는 날은.

나의 신앙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내 보일수 있는 날. 부끄럽지 않게 어머니 앞에서 소리내어 절실한 기도를 함께 드릴수 있는 날,


14863 1987. 9. 21 (월)


Y부장의 모친 별세.

69세. 이불을 개어 이불장에 얹는 순간 갑자기 쓰러져 그길로 운명.

'영혼아.' 하고 부르시면 고만 끝이다.

많은 문상객들.


어머니의 죽음을 예비하라.


14837 1987. 9. 22 (화)


진해 천자봉 공원묘원.

마야의 아즈텍처럼 산등성이에 지어놓은 유택, 오손도손 묻혀있는 죽은이들의 저택들.

관이 내려지고, 흙이 덥혀 다져지고, 푸른 잔디로 떼가 입혀지고...

어머니, 어머니를 줄곧 생각한다.

흙이 덮이고, 흙이 덮이어.. 내 어머니가.

'너희는 흙으로 돌아가리라'

굳세게.. 그렇지, 굳세게..

형과 의논하라.

양광의 저택을 형과 함께 의논하라.

그순간 결코 통곡하지 않으리라.

기쁨으로 그날을 맞으리라.

어머니.. 어머니... 어느 낯선 땅에서 돌아가셨을 내 아버지...

그 죽은이들의 마을에서 치솟는 것은 절절한 그리움. 그리움.

싯뻘건 놀처럼 내 가슴 속 한이 없다고... 없을 거라고...


14838 1987. 9. 23 (수)


부분일식, 신비한 대낮의 어두움.

용접 흑초자를 통하여 본 태양은 초승달이다.

김명오직장, 상가집에서의 연일 음주와 밤샘의 무리함으로 쓰러지다. 메리놀 병원 중환자실.


14839 1987. 9. 24 (목)


내가 온전하게 주님께 나아가기 위하여는 밥벌이 직장의 문제를 선결해야 한다.

너무나 짓눌리는 회사안에서의 제반 스트레스들.

새벽 경건의 색채와는 너무도 배리된 일과의 색채.

정신병리학적으로 Abnormal한 나에게는 그 부담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다른 방도- 공부를 하여 무슨 라이센스를 딴다면, 이런 종류는 자신있을 것 같은데...


14841 1987. 9. 26 (토)


어린 시절, 정능.

밤 대기의 향기 충만하였던 숨바꼭질, 땅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으면 술레가 결코 찾을수 없으리라던 생각, 내 몸이 곧 바로 땅이 되고, 그 풋풋한 흙냄새.

그 시절 정능 주택가 동네의 밤은 참 재미있는 놀이터였는데.

그런데 지금 俊이의 밤은 어떠한가.

TV,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 끄적거리고, 아파트마당에서는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들리는데. 俊이의 비사교적 비활동적 비외향적인 성격이 늘 밟힌다.

나와 흡사한, 어쩌면 나보다 더한 심리적인 소극성을 갖고 있는듯하여.

어제 운동회 "아빠 달리기 5등 했다. 6명 뛰어서."


14842 1987. 9. 27 (일)


종일 비디오 영화와 씨름.

다시 보는 '콰이강의 다리'

자로 잰 듯 계산된 드라마, 뚜렷한 대결구조의 캐릭터의 설정.

알렉 기네스- 그는 이상주의자인가 아니면 철저한 현실적 실용주의자인가.

윌리엄 홀덴의 미국적인 성격에서 우직한 진실성이 오히려 느껴진다.


발톱깎고, 목욕하고, 구두닦고, 방정리하고, 라디오 고친다.

일찍 기상하여 계획한 일을 해치운다는 것은 아침녁의 만족감이다.

그러나 휴일 회사나가지 않은 사실이 저녁무렵의 엷은 불안감이 된다.

현장은 별일 없겠지...


英이의 프로필은 참으로 준수하다.

그리고 좋은 머리, 다양한 재주.

슬쩍 칭찬의 말을 해 주었더니 녀석은,

"자기 딸은 다 그렇게 보이는거야."


14843 1987. 9. 28 (월)


생각컨데 현대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 갇힌 인간들은 자기표현의 능력을 잃어버린게 아닌가 하다.

진솔한 자기 표현은 불가능한 구조 속에 살고있는게 아닐까?

어떤 도식적인 패턴의 표현으로 모든게 대치되고 안에 숨어있은 그 수많은 표현거리들은 나서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표현하기를 포기하여 버린 것이지만 그 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불행한 현상이다.

근본적으로 고독한 도시인일 수밖에. 벗은 없다. 모든 것은 도식화되어 통일되어 있고, 은폐되어 있은 자신의 자로서 남을 재고는 있으나 그 평가 자체도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란 얼마나 행복한 족속이냐?

그들은 말하자면 천상의 사람들이다. 자신을 표현할수 있은 특권을 보유하고 있는 축복받은 족속들.


회사의 일상중. 문득문득 '이사람의 이 표정은 거짓이다! 저사람의 저 말은 거짓이다! 눈가리고 아웅들을 너무나 능숙하게 연기하고 있구나!" 하고 소리지르고 싶을 때가 있다.


14844 1987. 9. 29 (화)


민방위 훈련을 가기 위한 새벽.

최귀라가 부르는 찬송이 울리고 있은 내 방.

진정 나는 이 새벽을 사랑한다.


J도 마찬가지지만 나 또한 아이들의 어떤 열망을 외면해 버리곤 한다.

어린시절의 유치한 욕망이라고 짐짓 치부해 버리고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열망에는 아이들 나름대로의 당위성이 충분히 있을것임을 생각치 않고 그것을 인정하려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부모가 자칫 아이들의 어떤 열리려는 마음을 닫히게하는 것이나 아닐까?

그에 대한 나태를 나는 나의 시간없음에 핑계를 찾고 있고, J는 그런 면에서의 천착이 게으른 까닭이다.

우리는 이것을 깊게 숙고해 보아야 한다.


<밤>

책상위에는 소주 한병, 俊이는 옆에서 레코드를 걸어준다. 쇼팽 폴로네이즈.


현장에서 나의 마음여림은, 무언의 질책에 쩔쩔매는듯한 장직장, 한마디 뱉는 내 말에 내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하는 그, 50넘은 노련한 기술자가 단지 계급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은 나를 말할수없이 곤혹스럽게 한다.

아, 나도 조선쟁이 어느덧 15년이구나.


또다시 정치판의 이전투구, 80년의 재현인가.

정녕 진정한 지도자의 풍모를 갖고있는 위인은 없더란 말인가.


14845 1987. 9. 30 (수)


"우리들은 아내나 자식, 친구에 대해 자연스런 애정을 느끼고 또한 국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사랑을 갖는다. 그리고 그 밖에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형태가 빠져있다. 그것은 복잡한 우주의 압력 밑에서 전체 속에서 개개의 구성요소 사이에서 작용하는 사랑이다. 보편적인 사랑은 심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서 완성된 최종적인 사랑의 형태이다." -샤르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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