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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3권 (12)

카지모도 2022. 11. 9.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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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현의 흉한 심장이 말할 수 없었다. 낭속을 시켜 저의 형을 욕 보이고도 오

히려 부족하여 또 달리 욕보일 것을 생각하였다. 정렴이가 아침 자리 속에서 말

하기 전에 약 한 첩을 먹는 버릇이 있으므로 정현은 이것을 기회삼아 형을 약으

로 욕보이려고 작정하고 파두를 구하여 몸에 지니고 틈을 엿보다가 어느 날 식

전에 상노가 약을 안쳐놓고 뒤를 보러 간 틈에 그 파두를 약에 넣었다. 정렴이 약을

먹고 나서 뒷맛이 다른 것을 괴상히 생각하여 상노를 불러서 "무슨 약을 달였느

냐? “ 하고 물은즉 상노는 도리어 그 묻는 것을 괴상히 생각하며 "일상 잡수시

는 약이지 무슨 약이에요. " 하고 대답하였다. 얼마 아니 지나서 정렴이는 복중

이 괴란하기 시작하여 일상 먹는 약이 아닌 것을 짐작하고 상노더러 약 찌끼를

가져오라 하여 헤치고 살펴보니 재료에 없는 파두가 많이 들어 있었다. "네가 약

을 달일 때 왔다 간 사람이 없느냐? ” "없습니다. " "그러면 약을 달이다 두고

어디를 갔었느냐? “ "가기는 어디를 갑니까. 잠간 소피 보러 간 일밖에 없습니

다. " 정렴이는 약을 알고 또 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집에 구하여 두는 약재가

거의 구비하였다. 그 약재 중에서 생황련을 꺼내서 즙을 내어 먹고 그 위에

날콩즙을 내다 먹은 까닭으로 파두독이 곧 풀리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두어 차

례 설사는 면치 못하였다. 정렴은 파두의 묘맥을 짐작 못하지 않으므로 상노를

나무라지 아니하고 "이 다음 약 달일 때는 자리를 뜨지 마라. " 하고 신칙할 뿐

이었다. 정현이는 파두의 효험이 신통치 못한 것을 보고 "여기 어디 비상독도 푸

나 보자. " 하고 맘을 독하게 먹었다. 상노아이가 조심하여 약 달일 제 자리를

뜨지 아니하므로 틈을 얻기가 용이치 못하다가 어느 날 일이 공교히 되느라고

개 한 마리가 신짝을 입에 물고 꽁지를 샅에 끼고 마당가로 살그머니 지나가는

것을 상노가 보고 생각 없이 약을 짜다 말고 쫓아내려갔다. 정현이가 이 틈에

비상 봉지를 짜놓은 약째 털어넣고 한두 번 휘휘 저어놓았다. 상노가 신짝을 들

고 돌아서 오다가 정현이와 마주쳐서 "나으리 식전 일찍 웬일이십니까? ”하고

인사하니 정현이는 "큰나으리를 좀 보이러 왔더니 아직 아니 일어나셨구나. " 하

고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가버렸다. 정렴이 그 약을 먹고 보시기에 남은 약

찌끼로 비상이 든 것을 알았다. 정렴이가 둘째아우가 왔다 간 말을 상노에게서

듣고 어이없어 하는 중에 정작이 백씨에게 아침 문안을 왔다가 이것을 알고 "이

런 변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께 여쭐랍니다. 아무리 아버지시라도 이것이야

가만둘 리 없으실 터이지요. " 하고 급히 나가니 정렴이 나가는 아우를 불러서 "

이애, 떠들지 마라. 창피하다. 아버지께 아시게 하면 무엇 하느냐? 맘만 상하시

게 할 뿐이지. 아예 떠들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냉수 한 그릇이나 내보내라. "

하고 이른 뒤에 당여지를 작말하여 냉수에 타서 먹었다. 정작이가 안에 들어가

서 녹두죽을 쑤어 달라고 하여 손수 들고 나오니 정렴이 이것을 보고 "녹두죽을

아니 먹어도 관계없다. 신석 해독제로는 여지말이 신약이다. 여지말을 먹었으니

염려 마라. " 하고 여지말의 신효를 말하여 주다가 "녹두도 해독이 된다니 잡수

어 두시지요. " 하고 어린 아우가 권하는 바람에 정렴이는 녹두죽까지 먹어 두었

다. 여지말의 효력으로 정렴이는 비상에 죽지 않았으나 얼마 동안은 음식을 잘

먹지 못하였다. 정렴이 둘째아우의 소행을 괘씸히 생각하나 어떻게 조처할 도리

가 없어 자기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서울이 수선하니 시골 가서

있겠노라고 말하고, 그 뒤로는 과천 청계산과 양주 과라리로 넘나다니고 별로

서울집에 오지 아니하니 정현이는 저의 꾀로 시원하게 형을 쫓았다고 생각하였

다.

 

5

유관, 유인숙, 윤임의 집에서 몰수한 노자와 비자를 소위 공신들에게 사패로

내릴 때에 정순붕은 수훈 공신이라고 다른 일등공신 명색들보다 수많은 노자,

비자를 차지하게 되었다. 정순붕이 집안 권속을 데리고 안대청에 앉아서 새로 생긴

노자, 비자의 현신을 받는 중에 나이 어린 비자 하나가 눈에 뜨이었다. 그 인물이

어여쁘게 생길 뿐 아니라 그 거동이 현저하게 남과 달랐다. 옛 상전을 생각하고

질끔거리는 사람도 없지 아니하고 새 주인을 꺼리어서 질끔거리지는 못하더라도

낙심한 모양으로 풀기 없는 사람이 많았는데, 어린 비자는 낙심한 모양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상글거리기까지 하였다. 순붕이 그 비자를 앞으로 불러 내세우고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 "갑이올시다. " "나이는 몇 살인고? ”

"열네 살이올시다. " 짧은 대답일망정 똑똑한 말소리가 귀엽게 들리었다. 순붕은

대답을 들어보려고 짐짓 말을 묻기 시작하였다. "너의 옛 상전은 누구이냐? “ "인숙이

올시다. " "옛 상전의 이름을 부르는 법이 있을까? " "나라의 죄인이라 휘하지

못합니다. " "너는 옛 상전을 생각하는 맘이 없느냐? ” "오늘날부터는 새 상전

뫼실 일을 생각하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 능란한 말대답에 놀란 순붕이 갑의

사람을 신통히 생각하여 뜰 위에 올라서라 하고 자세히 바라보니 입가에는 어린

양이 떠돌고 눈 속에는 총명이 가득히 괴어 있었다. 갑이는 유판서의 부인이 딸

같이 여기고 길러놓은 아이종이라 손길에 곱게 자란 표가 드러났다. 순붕이가

이것을 살펴보고 "이때까지 험한 허드렛일은 해보지 못했구나? 방 심부름했

느냐? “ 하고 물은 뒤에 "내게서도 방안 심부름을 해라. " 하고 갑이의 소임을

정하여 주었다. 순붕이 옆에 섰던 아들 현이를 돌아보며 "고년, 참 똑똑하다. "

하고 갑이를 칭찬한즉 현이가 "그 나이에 똑똑한 품이 작이와 비등합니다. " 하

고 저의 부친 칭찬에 붙좇아 찰하였다가 작이가 얼굴빛을 변하며 "형님이 아우

를 너무 사랑하셔서 모든 데다 똑똑하다고 내세우십니다그려. " 하고 불쾌히 말

하여 순붕이는 "네가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똑똑하단 말을 듣지 않지. " 하고

허허 웃었다. 갑이가 처음 얼마 동안은 안방에서 방안 심부름을 하였는데, 백령

백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아니하는 중에 더욱이 순붕의 비위를 잘

맞추어서 나중에 갑이는 사랑방에 나가서 순붕의 손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순붕

의 입에서 말이 떨어질 때 지성으로 말을 좇아 행하는 것은 고사하고 말이 없을

때 짐작으로 뜻을 받아나가는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가령 순붕이가 "다리 좀 쳐

다오. " 하고 말할 때 밤이 늦도록 졸지 아니하고 다리를 칠 뿐이 아니라 순붕이

한두 번 거북하게 트림만 하면 어느 틈에 생강차를 달여 내오고 순붕의 얼굴에

잠간 피곤한 빛만 보이면 얼른 일어서서 퇴침을 갖다 머리맡에 놓아주었다. 말

하자면 갑이는 순붕의 입의 혀 보다도 더 잘 노는 셈이었다. 이삼 년 지나서 갑

이의 나이 열육칠세 된 뒤로는 순붕의 총애가 갑이 한몸 위에 쏟키어서 특별히

사랑하던 상노 계놈이란 아이까지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벼슬로는 좌의정이고

나이로는 환갑이 지난 순붕이가 계집아이종 갑이가 없으면 낮에 밥을 달게 먹지

못하고 밤에 잠을 편히 자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순붕의 앞에서는 감히

갑이의 말을 헐뜯어 말할 사람이 없었는데 어느 때 정렴이가 집에 다니러 왔다

가 "갑이는 미간에 살기가 있으니 너무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 하고 조용히 그

부친에게 말하였더니 "나는 네가 보기 싫으니 곧 시골로 가거라. " 하고 역증을

내어서 정렴이는 다시 두말 하지 못하고 그 아우 정작이에게 이 일을 말하고 그

부친의 침혹한 것을 한탄하였다.

 

6

계놈이는 갑이와 연갑 되는 아이이었다. 계놈이가 주인 대감의 몸시중 드는

것은 갑이에게 앗기었으나 그래도 상노들 중에서는 가장 신임을 받아서 다른 상

노들보다 자주 대감 사랑에를 드나드는 까닭으로 갑이를 많이 보게 되고, 또 간

간이 갑이와 서로 말까지 하게 되었었다. 순붕이는 뒤가 조하여 항문이 찢어져

피가 나는 때까지 있으므로 뒷간에 가서 더운물로 항문을 축이는 버릇이 있었

다. 그러므로 자연히 뒤가 남보다 몇 배 오래 걸리어서 급한 일이 있을 때는 며

칠이고 참고 지낼지언정 거연히 뒤보려고 생의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참는 끝에

는 더욱이 심하여서 몇 시간 동안 산부 해복하느니나 다름없는 고초를 겪은 뒤

에 쌍부축을 받고야 겨우 일어 나오고 한동안 다리를 주물리고야 간신히 기동하

였다. 순붕이 뒷간에 있을 때에 뒷물 대야를 들어가고 내어오고 하는 것은 계놈

이의 소임이었다. 어느 날 순붕이 뒤 보러 간 때 계놈이가 수건을 가지러 사랑

에 들어왔다가 갑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이애, 수건 좀 찾아다오. " 하고 말을

붙이니 갑이는 새침하고 앉아 있다가 "네가 나하고 말해 보자는 말이냐? “ 하

고 살며시 돌아다보았다. "좀 찾아주면 어떠냐? 탈나니? ” "네가 둔 걸 네가 찾

지, 왜 나더러 찾아 달라느냐? “ "내 손 좀 보아라. " 하고 계놈이가 두 손을

앞으로 내어밀면서 "지금 뒷물 놓느라고 물이 묻었다. " 하고 갑이의 눈치를 보

았다. "누가 씻지 말라드냐? ” 하고 계놈이가 흔잣말하며 두 손을 바지 뒤에 문

지르고 수건 둔 것을 꺼내려고 탁자 있는 편으로 몇 걸음 걸어가다가 갑이가 "

불쌍하니 꺼내 줄까. " 하고 일어서는 것을 보고 발을 멈추고 기다리었다. 갑이

가 탁자 서랍에서 접어둔 수건을 내어줄 때 계놈이는 받는다고 손가락으로 수건

밑에 든 갑이의 손등을 눌러보니 갑이가 선뜻 뿌리치지도 아니하고 "이것이 수

건 받는 거냐? “ 하고 계놈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계놈이는 면난하여 고개

를 숙이고 "얼른 받느라고. " 하고 중얼거리었다. 갑이가 "손가락을 못 떼느냐?

” 하고 성을 내다가 말고 "요담부터는 좀 찬찬히 받아 버릇해라. " 하고 뱅그레

웃는 것이 계놈이에게는 뜻에 맞는 뜻밖 일이었다. 계놈이가 수건을 가지고 가

서 저의 주인이 다 쓰기가 무섭게 갖다두러 다시 왔다. "아까는 잘못했습니다. "

"네가 누구를 놀리는 셈이냐? “ "놀리다니. " "그러면 무어냐? " "아니야. " "

아니라니? 이따가 대감마님 들어오시거든 여쭈어 보자. 그것이 놀리는 것인가

아닌가. " 계놈이가 눈이 동그래지며 진정으로 "잘못했다. " 하고 사과하였다. 새

침하게 앉았던 갑이가 흘저에 또 빙그레 웃으며 "꿇어 앉아 빌어라. "

하고 말하니 계놈이는 겁나던 맘이 너누룩하여져서 갑이 앞에 꿇어 앉았다. "이

애 녀석이 사내자식인가. " 하고 갑이가 계놈이의 뺨을 쳤다. 아프게 친 것은 아

니나 찰싹하고 소리가 났다. 갑이의 보드라운 손이 뺨에 닿을 때 계놈이는 손끝

발끝까지 짜르르하는 것 같았다. "이런 뺨은 밤낮 맞아도 좋겠다. " "뺨 맞기가

소원이면 더 좀 맞아보려느냐?" "자.“ 하고 계놈이가 뺨을 내어밀었다. 이리 돌

리며 이 뺨을 맞고 저리 돌리며 저 뺨을 맞다가 계놈이는 갑이의 손목을 쥐고 "

손바닥 아프지?” 하고 그 손을 들여다보니 "이애 놓아라, 남이 보면 수상하다.

" 하고 갑이는 남은 손으로 입을 막고 웃었다. 계놈이가 쥐었던 손목을 놓고 "품

앗이로 인제는 네 뺨 좀 때려보자. " 하고 웃고 "이애가 매쳤나. 누가 너같이 뺨

맞기 소원이라드냐? “ 하고 갑이가 뒤로 물러앉는 것을 "꼭 한 번만 때려보자.

" 하고 팔을 늘이어서 손으로 그 뺨을 어루만지니 갑이는 "수컷인 체하느라고

그중에. " 하고 계놈이의 손을 뿌리쳤다. 이때 영창 밖에 신발 소리가 들리었다.

계놈이가 황망히 일어나서 영창을 열고 내다보니 청지기 한 사람이 "대감 뒤보

러 가셨니? ” 하고 묻고 또 뒤를 이어 "너 거기서 무엇하니? “ 하고 물어서

계놈이는 "수건 두러 왔소. " 하고 대답하며 곧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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