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 세 사람이 골 어귀 가까이 왔을 때 마주 오는 장꾼 하나를 만났다. 손가가
"벌써 장이 파했소? " 하고 물으니 그 장꾼이 "아니오. " 하고 한마디 대답한
뒤에는 다시 말을 묻지 말라는 듯이 외면하고 세 사람 옆을 지나서 가며 흘낏홀
낏 뒤를 돌아보다가 남쪽 새래동 길을 들어가다 말고 돌쳐서서 여보 여보 하고
불렀다. 세 사람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중에 맨 뒤에 있는 막봉이가
자연 말을 묻게 되었다. "왜 그러오? " "댁들 어디루 가우? " “그건 왜 묻소? "
"탑고개에 곽오주 나섰습디다. 맨몸 같으면 모르지만 물건짐 지구는 갈 생각 마
우. " "곽오주가 누구요? " "곽오주 성명을 모르는 것 보니까 난데서 오는 이가
분명하오. 이 앞 탑고개에 쇠도리깨 가진 무서운 도둑놈이 나섰습디다. 쇠도리깨
도둑놈 곽오주라면 이 근방에서는 뜨르르하우. " 하고 장꾼이 말을 그치자마자
삼봉이가 나서서 "쇠도리깨 도둑놈이 나선 것을 지금 보구 오는 길이오? " 하고
묻고 손가는 그 뒤를 이어서 "참말 나섰습디까, 거짓말 아니오? " 하고 다져 물
으니 "거짓말이오? 내가 거짓말할 까닭이 있소. 곽오주는 나더러 오는 행인에게
말 말라구 합디다. 그래서 내가 말 안하구 가려다 댁들의 물건 빼앗길 일이 딱
해서 일껀 말해 주는데 거짓말이라니 거짓말루 생각하거든 가보구려. " 하고 그
장꾼이 불쾌스럽게 말하였다. 손가가 "미안하우. " 하고 사과한 뒤에 "쇠도리깨
도둑놈이 혼자 나왔습디까? " 하고 다시 물으니 그 장꾼은 "오가란 늙은 도둑놈
하구 둘이 나왔습디다. " 하고 대답하였다. "댓가지 도둑놈은 나오지 않았습디
까? ”"댓가지 도둑놈을 아는 것 보니 청석골 도둑놈의 선성은 들었구려. 댓가지
도둑놈은 보이지 않습디다. " 손가가 장꾼에게 말을 더 묻지 않고 삼봉이와 막봉
이를 보고 "되었네 되었어. " 하고 허허 웃었다. "얼른 갑시다. " "어서 가세. " "
가세 가세. “ 세 사람이 서로 재촉하며 부리나케 걸어가니 그 장꾼은 세 사람
이 다 정신들이 온전치 않거니 생각하여 "멀정한 미친 사람들이로군. " 하고 혼
자 중얼거리었다. 손가가 장꾼에게서 쇠도리깨 도적의 소식을 듣기 전에는 은근
히 걱정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쇠도리깨 도적을 못 만나게 되면 막봉이가
적굴을 찾아가자고 고집을 세을 터이니 이것이 한 걱정이요, 쇠도리깨 도적을
만나더라도 댓가지 재주 가진 도적과 함께 만나게 되면 막봉이 형제의 원력만
가지고 원수를 갚게 될는지 모르니 이것이 또한 걱정이라 손가는 속으로 걱정하
느라고 걸음까지 느릿느릿 걸었는데 장꾼의 전하는 소식을 들으며부터 이 걱정
저 걱정이 봄눈같이 사라져서 속모르는 장꾼이 미친 사람으로 볼 만큼 싱글벙글
좋아하고 걸음도 선뜻선뜻 내디디었다. 얼마 동안 아니 가서 탑고개 밑에 다다
랐다. 손가가 걸음을 멈추고 "인제 고개에 다 왔으니 어떻게 할 것을 여기 앉아
공론 좀 하세. " 하고 막봉이 형제를 돌아보니 삼봉이는 대번에 "그렇게 하세. "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막동이가 고개를 외치면서 "지금 의논할 것 무어 있소.
내가 앞장설께 따라들만 오시우. " 하고 곧 손가 앞으로 나서서 주적주적 걸어갔
다. 삼봉이가 어이없어 하는 손가를 돌아보며 한번 웃고 겅중겅중 막봉이 뒤를
쫓아가니 손가는 하릴없이 그대로 삼봉이 뒤를 따라갔다. 막봉이 뒤에 삼봉이,
삼봉이 뒤에 손가 셋이 줄느런히 서서 고갯마루까지 거의 다 왔을 때 쇠도리깨
가진 젊은 도적이 늙은 도적과 같이 언덕 위에 나서서 내려다보며 "이놈들 게
섰거라! " 하고 호통을 질렀다. 막봉이가 걸음을 멈추고서 삼봉이와 손가를 돌아
보며 도적놈이 쫓아내려오도록 도망질치는 시늉을 내자고 수군수군 말하여 세
사람이 일시에 돌쳐서서 오던 길로 달아나는데 짐들이 무거워서 가쁜 모양으로
일부러 허덕허덕하였다. "이놈들 도리깨 맞구 뒤어지구 싶으냐! " "목숨은 살려
줄 테니 진작 짐짝들 벗어놔라! " 도적의 뒤쫓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우르르 들
리니 세 사람은 모두 허둥지둥하는 체하였다. "이놈 죽어봐라. " 도적이 맨 뒤에
가는 막봉이를 노리고 쇠도리깨를 둘러멜 때 막봉이가 별안간 돌쳐서려 머리 위
에 떨어지는 쇠도리깨를 한 손으로 붙잡았다. "이놈 봐라! " 도적이 도리깨를 확
잡아채었다. 예사 장정만 같아도 도리깨를 놓치지 않으면 앞으로 고꾸라졌을 것
인데 막봉이는 끄떡 아니하고 꿋꿋이 서 있었다. "힘꼴이나 쓰는 모양이다. " "
주제넘은 놈 같으니. " "네가 안 놓구 배길 테냐! " "안 놓을 테니 어쩔 테냐? "
막봉이와 도적이 서고 쇠도리깨를 빼앗으려고 잡아당기기 시작 할 때 삼봉이와
손가가 짐들을 벗어버리고 대어들어서 막봉이를 거들어 주려고 하니 막봉이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이놈은 내게 맡기구 늙은 놈이나 가서 잡우. " 막봉이의
말끝에 삼봉이와 손가가 산 밑에 내려와 섰는 늙은 도적에게로 쫓아가니
늙은 도적은 물계가 좋지 못한 것을 보고 다시 언덕 위로 올라가서 쫓아
올라오지 못하도록 물박 같은 돌덩이를 내려굴렸다. 삼봉이가 큰 돌덩이들을
집어서 언덕 위로 던지는데 조약돌로 팔매치듯 하여 늙은 도적 섰는 앞에까지
가서 떨어졌다. 늙은 도적이 돌도 내려굴리지 못하고 숨는 것을 보고
삼봉이가 손 가와 같이 아우성을 치며 쫓아올라가니 늙은 도적은 똥줄이
빠지게 도망질을 쳤다. 삼봉이와 손가가 늙은 도적의 뒤를 얼마 쫓다가
말고 돌아와서 본즉 막봉이는 아직도 젊은 도적과 쇠도리깨로 줄을 당기는 중이
었다. 삼봉이가 가만가만 도적의 뒤에 가서 "이놈! " 하고 소리를 질러서 도적이
움찔하는 틈에 막봉이가 쇠도리깨를 빼앗아서 벼락같이 도적을 내려쳤다. 막봉
이의 내려치는 도리깨에 도적이 머리를 맞았으면 해골이 부서져서 더 맞을 나위
없이 요정이 났을 것이고 어깨를 맞았으면 죽지배가 으스러져서 적어도 팔병신
이 되었을 것이지만 도적이 마치 맞게 가로뛰어 피하여 도리깨가 허공을 내려치
고 떨어졌다. 삼봉이와 손가는 도적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뒤를 막아싸고 막봉이
는 다시 도리깨를 꼬나잡고 앞으로 대어들었다. 도적이 막봉이를 향하여 손을
내저으면서 "내 말 잠깐 듣구 나서 덤벼라. ” 하고 씩씩하며 말하니 "무슨 말이
냐 말해라. " 하고 막봉이가 발을 멈추었다. "오늘은 고만두고 내일 모레 이맘때
여기서 다시 만나서 네가 죽든 내가 죽든 한번 해보자. 쇠도리깨는 그 동안 네
가 맡아라. " "내가 고만두기 싫은데 네 말 듣구 고만두랴? 해볼 맘이 있거든 시
방 해보자. " "보아하니 너두 사내자식이 시방 해보자구 말하기 부끄럽지 않느
냐. 너희가 셋이니까 나두 내일 모레 셋이 와서 해볼 텐데 그래 너희 셋이 나
하나하구 시방 해보잔 말이냐! 예끼 순 뻔뻔한 자식 같으니. " "다른 사람은 얼씬
못하게 하구 나하구 너하구 단둘이 해보자. 이까짓 놈의 도리깨 다 소용없다. 내
가 맨주먹으루 네놈을 때려 눕히지 못하면 성이 길가가 아니다. " 막봉이가 도리
깨를 내던지고 곧 삼봉이를 바라보면서 "형님은 손서방하구 저리 가서 구경만
하우. 아예 호성두 지를 생각 마우. " 하고 말하였다. "오냐 그래라. 등에 진 짐
이나 벗어놓구 해봐라. " "암, 짐은 벗어놓지요. " 막봉이는 형의 말을 듣고 그제
야 짐을 벗어버리었다. "더 할 말은 없겠지? " "그럴 것 없이 우리 씨름을 해보
자. " "이놈아 씨름은 다 무어냐? 너 같은 무도한 도둑놈은 주먹으루 때려죽일
테다. " "나하구 무슨 원수졌니? “ "네 도리깨에 병신 된 매형의 원수두 갚아야
겠지만 그버덤두 네 손에 죽은 어린애들 원수를 갚아줄테다. 이놈아 대체 어린
애는 왜 죽이니? " 막봉이가 말을 그치고 바로 도적에게 대어들어서 싸움이 시
작되었다. 이 동안에 삼봉이와 손가는 짐짝들과 쇠도리깨를 한옆에 치워놓고서
두 사람의 싸움을 구경하였다. 황소 같은 사람 둘이 서로 달라붙어서 후닥닥거
리고 싸우니 싸움이 황소 싸움보다 더 무서웠다. 주먹과 발길이 왔다갔다 하는
중에 막봉이는 도적의 상태기를 움켜쥐어 앞으로 끄숙이고 한주먹으로 등줄기를
우리는데 도적은 두 주먹으로 막봉이의 양편 갈비를 쥐어질렀다. 막봉이가 상태
기 쥔 손을 놓으며 곧 등줄기 우리던 주먹으로 도적의 복장을 되게 내질러서
도적은 잠깐 비슬거리다가 마침내 뒤로 나가자빠졌다. 막봉이가 바로 도적의 복
장을 밟고 서서 ”이놈!“ 하고 내려다보니 도적은 눈을 스르르 감고 치어다보지
아니하였다. 막봉이가 삼봉이와 손가를 손짓하여 불러온 뒤 "형님 원수를 어
떻게 갚을 테요. 맘대로 갚아보우. " 하고 도적을 손가에게 내맡기니 손가는 얼
른 가서 쇠도리깨를 들고 왔다. 그러나 쇠도리깨가 너무 무거워서 손가는 둘러
메려다가 못 둘러메고 지팡이삼아 짚고 서서 도적의 머리와 얼굴을 발로 짓밟았다.
도적이 자빠질 때 일시 정신을 잃었더라도 내내 잡아잡수 하고 가만히 누워
있을 까닭이 없다. 도적이 일어나려고 허위적거리는 것을 삼봉이가 눌러서 꼼짝
못하게 하고 손가는 이를 악물고 쇠도리깨로 도적의 몸을 함부로 짓찧었다. 도
적은 머리가 깨지고 살이 터지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도적이 사지 펴는
것을 삼봉이가 보고 "그러다가 아주 죽이겠소. " 하고 손가의 손을 붙잡았다. "
죽이면 어떤가? " "죽이면 어떻다니 여보 고만두우. " "자네 살인죄 당할까봐 걱정
인가. 화적을 등시타살한 것은 살인이 없다네. " 하고 가르쳐 주는 말본으로
말하니 막봉이는 증을 벌컥 내며 "고만두라거든 잔소리 말구 고만두어요! " 하고
손가가 쥔 쇠도리깨를 빼앗아 내던졌다. "그러면 자네는 어떻게 할 셈인가. " "
무얼 어떻게 한단 말이오. 고만 내버려두구 가지. " "그래 이 흉악한 도둑놈을
뱀 설죽이듯 하구 가잔 말인가? “ "그만하면 원수두 갚구 버룻두 가르쳤지. 아
주 죽일 맛이 무어요. " "자네가 오늘 식전까지두 무도한 도둑놈은 잡아 없애야
한다구 말하지 않았나. 홀저에 맘이 변한 걸세그려. " "맘이 변했소. 변했으니 어
떻단 말이오. " 이때까지 잠자코 있던 삼봉이가 나서서 "이애 그럴 것 없이 도둑
놈을 묶어서 송도루 끌구 가자. " 하고 말하니 막봉이가 "송도 가서 어떻게 할라
우? " 하고 물었다. "금도군관인지 포도군관인지 도둑놈두 못 잡구 나라 요만 처
먹는 놈들을 갖다주어 보자. " "그러면 우리 상급 줄 것 같소? " "상급은 못 먹
더라두 우리 이름은 나지 않겠니? " 삼봉이의 말에 막봉이가 딴소리를 아니하고
또 손가도 좋다고 말하여 도적을 끌고 가기로 작정되었다. 세 사람은 거짓짐들
을 풀어서 흙과 돌을 떨어버리고 채롱과 농삼장만 모아서 걸머지게 만들고 다
죽어가던 도적을 잡아 일으켜 앉히고 짐 동였던 밧줄로 뒷결박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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