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가 온 뒤 며칠 동안 에 하루 한번 술대접을 안 받은 날도 없으나,
저녁 한 끼 죽을 안 먹은 날도 없었다. 손가가 내처 묵기 미안하여
남은 사기를 마저 팔고 가는 길에 다시 올까 하고 떠나려고 생각하던
차에 막봉이가 마침 돌아왔다. 막봉이는 엄장과 몸집이 선봉이,
작은봉이보다 배나 크고 둥근 눈과 가로 찢어진 입이 삼봉이와도 달
라서 사형제 중에 가장 거물스러웠다. 나이는 불과 스물하나밖에 안 되었건만
삼십 가까운 손가와 연 상약해 보이었다. 삼사 년 만에 만나는 손가가 막봉이의
더 노창한 것을 보고 인삿말 끝에 "인제 아주 노총각이 되었네그려. " 하고 말하
니 막봉이는 씽긋 웃는 웃음으로 말대답을 대신하였다. 손가가 온 까닭을 대강
아비에게 듣고 알았건만 막봉이는 손가를 보고 "어째 왔소? " 하고 물었다. "내
가 못 올 데 왔나? " "어기대지 말구 말하우. " "자네 보러 왔네. " "무슨 일루
날 보러 왔소. 혼인 중신해 줄 데 있소? ” "노총각이 장가들기가 급한가베그려.
" "장가가 급하기버덤 아들이 늦었소. " "자네가 실없는 말을 다 할 줄 아니 제
법일세. " "대체 무슨 일루 날 기다렸소? " "이따 밤에 이야기함세. " "밤에 할
이야기 낮에 못할 거 무어 있소. 지금 이야기하우. “ 막봉이의 말을 어기기 어
려워서 손가가 쇠도리깨 도적놈의 원수갚을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막봉이
는 이야기를 별로 귀담아 듣지도 않고 "자네 한번 나서 주게. "하고 청하는 손가
말에 "나는 싫소. "하고 고개를 외치더니 손가가 갖은 말을 다하고 삼봉이가 손
가 말을 거들어도 막봉이는 한결같이 고개를 외질 뿐이었다. 손가가 막봉이 형
제들과 큰방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중에 늙은이의 기침소리가 방 밖에서 났다.
손가는 짐짓 큰소리로 "내 일두 아니구 우리 형님 일인데 자네가 이렇게 고집을
부린단 말인가. " 하고 책망하듯 말하여 막봉이가 "뉘 일이구 내가 싫은 거야 어
떻게 하우. " 하고 대답할 때 늙은이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이애 막봉아,
매형의 원수는 갚아주기 싫드래두 매형을 한번 가보구나 오려무나. " 하고 말을
일렀다. "이담 가보지요. " "손서방하구 같이 가지 이담 갈 것 무엇 있니. " "안
성 소금 갖다 줄 데가 있어 손서방하구 같이 못 가요. " 막봉이가 늙은 아비의
말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손가는 "자네가 정 싫다면 할 수 없지. " 하고 쓴 입맛
을 쩍쩍 다시다가 "자네 싫다구 고집하는 것이 무슨 까닭인가? " 하고 물으니
막봉이는 "까닭은 알아 무어하우? 싫으니까 싫다지. "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하였
다. "까닭이나 좀 알면 좋겠네. " "맘이 쏠리지 않는 것을 억지루 어떻게 하우. "
"어째서 맘이 쏠리지 않나? " "성가시게 고지고지 캐어묻지 마우. " "쇠도리깨
도적놈이 호락오락하지 않은데다가 더구나 댓가지 재주 가진 도적놈이 붙어 있
다구 하니까 주니가 나서 그러나? ”막봉이가 손가의 말을 듣고 둥근 눈을 더
둥그렇게 뜨고 "주니, 주니? " 하고 뇌더니 “나더러 도둑놈이 무서워서 못 간단
말 아니오? ” 하고 손가의 앞으로 대들다가 다시 물러앉으며 밖에 섰는 아비를
바라보고 "매형두 보구 도둑놈들두 보러 내가 가겠소. " 하고 말하였다.
막봉이가 같이 가기로 작정된 뒤에 손가는 양주 임꺽정이를 청해서 같이 가도
록 하자고 말하고 싶으나 막봉이의 비위가 틀리어 딴소리가 나올까 겁이 나서
넌지시 늙은이를 보고 이 뜻을 말하였다. 늙은이가 일부러 아들 방에 와서 처
음에 막봉이에게 "도둑놈 잡으러 몇 사람이 가기루 작정했느냐? " 하고 물으니
막봉이는 "나 혼자 갔으면 제일 좋겠는데 셋째형이 같이 간다니까 형제 가지요.
" 대답하며 아비를 바라보고 늙은이가 다음에 삼봉이에게 "너의 형제만 가서 도
둑놈을 꼭 잡을 수 있겠느냐? " 하고 물으니 삼봉이는 "가봐야 알지요. " 대답하
며 막봉이를 돌아보았다. 늙은이가 나중에 삼봉이, 막봉이 형제를 번갈아 보면서
"너희 매형의 일이 아니구 또 손서방의 간청이 아니면 내가 너희 형제를 가지
못하게 말렸을게다. 지금 가지 말라구 말리지 않는 대신에 너희에게 부탁할 일
이 있다. 너희 형제 외에 같이 갈 만 한 사람이 있거든 같이 가두룩 해라. " 하
고 말하니 삼봉이는 막봉이 오기 전부터 손가와 공론한 일이 있는 터이라 선뜻
"어디 같이 갈 만한 사람이 있어야 같이 가지요. " 하고 대답하며 빙글빙글 웃었
다. "양주에 천하 장사가 있다지 않았니? 그런 장사하구 같이 가면 든든하지야. "
"양주 임꺽정이 말입니까? 그 사람을 막봉이는 알지만 막봉이가 말해서 갈는지
모르지요. " "갈 때 양주를 들러서 같이 가자구 말해 보려무나. " 이때까지 잠자
코 있던 막봉이가 홀저에 입을 열어서 "임꺽정이는 고만두구 다른 사람하구라두
같이 가라면 나는 안 가겠소. " 말하고 아비와 형을 둘러보았다. "네가 남의 조
력을 받지 않구 도둑놈을 잡으면 네 직성은 풀릴는지 모르나 그 동안 늙은 아
비의 조심 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느냐? " "안 가면 고만이지요. " "간다구 말하
구 안갈 수 있니? " "다른 사람하구는 같이 갈 수 없소. " 막봉이의 고집을 늙은
이도 꺾기 어려워서 더 말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막봉이 형제만 작은 손가와 같
이 송도로 직행하게 되었다.
막봉이가 송도 와서 매부의 등신 된 꼴을 보고 또 누님의 고생하는 하소연을
듣고서는 작은 손가의 말에 분나서 올 때와 달라서 쇠도리깨 도적놈을 미워하는
생각이 없지 않은 중에 죄없는 어린 애를 악착스럽게 죽인다는 것이 종작없는
풍설만이 아닌 줄 알고는 쇠도리깨 도적놈을 기어이 잡아서 버릇을 가르치려고
마음먹게 되었다. 막봉이 형제가 작은 손가와 공론하고 도적 잡으러 갈 준비를
차리었다. 채롱 세 짝과 농삼장 세 벌을 빌기도 하고 사기도 하여 거짓짐을 만
드는데 짊어진 것이 가볍게 보이지 않도록 돌과 흙을 채롱에 담고 누가 보든지
물건짐으로 보이도록 농삼장을 겉에 쌌다. 거짓짐이 다 된 뒤에 연장 가지고 갈
공론이 났다. 칼을 좋아하는 삼봉이가 먼저 "칼이라두 한 자루 가지구 가야 하지
않나? " 하고 말을 내니 작은 손가가 "우리 집에는 식칼밖에 없구 칼을 어디 가
서 얻나. " 하고 고개를 비틀었다. " 식칼을 무엇에 쓰나. " "도끼를 갈아가지구
가면 어떻겠나? " "나무 패러 가나, 도끼를 가지구 가게. " "그럼 어떻게 하나? "
"글쎄, 맨주먹만 가지구 가잔 말두 안 되구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 ”여게 막
봉이 어떻게 할까? " “무얼 어떻게 해? " "아니 연장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는 말이야. " 없으면 못 가지구 가는 게지 어떻게 하기는 무얼 어떻게 하우? " "
연장이 없이 가서 위태하지 않을까? " "연장이 쓸데 있으면 도둑놈의 연장 빼앗
아 쓰지 걱정이오. " 손가는 고사하고 삼봉이까지 막봉이의 횐소리를 꼭 믿지 아
니하나 없으니 할 길 없어 연장은 못 가지고 가게 되었다. 금교역말 장날 도적
이 잘 나는 까닭에 장날을 기다려서 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거짓짐을 한 짝씩
짊어지고 청석골로 나가는데 큰 손가의 안해는 시동생보다도 동생들 까닭에 걱
정하고 작은 손가의 안해는 남편 때문에 근심하나 등신 같은 큰 손가는 어린 아
들과 같이 시름없이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막봉이 형제가 손가를 앞세우고
청석골로 오는 길에 "오늘 허행이나 아닐까? " "요담 장날 오지 걱정인가. " "
요담 장날 또 허행하면. " "담담 장날 또 오지. " "한 달 육장 청석골만 나오다
말게. " 삼봉이와 손가가 서로 지껄이는 말을 맨 뒤에 오는 막봉이가 듣고 "당치
않은 소리 하지 마우. 그 동안 사람이 갑갑증이 나서 죽으라구. ” 하고 타박을
주었다. "그럼 어떻게 할 텐가? " 하고 손가가 뒤를 돌아보니 막봉이가 앞으로
나오면서 "그놈들의 소굴을 탐지해서 쫓아들어갈 생각을 하지 누가 한없이 나오
기만 기다리구 있겠소. " 하고 말하였다. "소굴을 탐지해서 알드래두 경선히 쫓
아들어가긴 어렵지 않아? " 하고 손가는 삼봉이를 보고 말하는데 "그런 걸 어렵
게 생각할 테면 애당초에 원수 갚을 맘을 먹지 말지 어렵긴 무에 어렵담. " 하고
막봉이는 손가를 몰아세웠다. 중간에 끼인 삼봉이가 "그건 가보구 나서 의논할
일이야. 고만두구 어서 가세. " 하고 앞에 섰는 손가를 재촉하고 자기도 걸음을
부지런히 떼어 놓으니 참봉이 옆에 나섰던 막봉이가 다시 뒤에 떨어져서 전과
같이 맨 뒤에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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