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선하여 주는 사람이 많이들 받으라고 권하건만도 한 되, 두 되 되풀이로 받는
집이 많아서 모두 합하여 소금 너덧 말밖에 펴먹이지 못하였다. 많이 팔게 해주마고
말한 사람이 미안한 생각이 있던지 막봉이를 하룻밤 쉬어가라고 붙들어서 자기
집에서 묵혀주고 봇들을 올라차면 흥성이 있을 듯하니 올라가 보고 봇들 가서
남은 소금을 못다 팔거든 적가리까지 가보라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구브내에
서 봇들이나 봇들서 적가리나 다같이 몇 마장씩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막봉이는
그 사람의 말을 좇아서 가보기로 작정하고 이튿날 아침 뒤에 구브내서 봇들로
올라왔다. 한나절 돌아다니며 소금 댓 말믈 못다 팔고 동네에 둘도 없는 주막집
에 와서 소금 주고 바꾼 곡식으로 다시 술을 바꾸어 먹는데 소금은 조금 팔고
술은 술명히 먹어서 봇들서는 곱는 장사를 하였다. 막봉이가 적가리 가서 잘
참을 잡고 해가 거의 저녁때 다 된 뒤에 봇들서 나섰다. 촌탁배기에 배가
부른 막봉이가 껙껙 트림을 하면서 길을 가는 중에 마주 오는 사내 여편네 두
사람을 만나서 심심풀이삼아서 "적가리가 여기서 얼마나 되나요? " 하고 말을
물으니, 사내가 으레 대답할 것인데 사내는 딴전을 보고 여편네가 "얼마 안 되
네. " 하고 대답하였다. 여편네가 나이는 지긋하여 보이나 얼굴이 동글 납작하고
입술이 얇은 것이 수다스러을 상호이었다. "짊어진 것이 무어야? " "소금이오. "
"우리도 소금을 받아야겠는데. " "지금 따라갈까요? " "지금 우리 내외가 큰집으
로 제사지내러 가는데 따라와서 제삿밥 얻어먹을 테야? " "아니 소금을 받으시
겠다니까 따라가잔 말이지요. " "소금장수 지금 어디로 가나, 적가리로 가지? "
“적가리 가서 잘 참입니다. " "그럼 내일 우리 집에 오게나. 이 위로 올라가자
면 길에서 들여다보이는 산 밑에 있는 외딴집이 우리 집이야. " "적가리 못미천
가요? " "못미치구말구. " "소금을 얼마나 받으실는지 지금 가는 길에 갖다 두구
갈까요? " "안 되어, 안 되어. 지금은 우리 집에 우리 딸 귀련이가 혼자 있어. "
사내가 상을 찡그리며 "길에서 수다 부리지 말구 어서 가세. " 하고 재촉하여 여
편네가 사내와 같이 가다가 말고 돌아서서 "여게 소금장수 총각! " 하고 불렀다.
막봉이가 "왜 부르시우? ” 하고 몇 걸음 쫓아가니 "우리 집에 들리지 말고 바
로 적가리로 가게. " 당부하지 않아 좋을 당부를 하여 막봉이는 "녜, 잘 알았습
니다. " 하고 게트림을 내놓고 곧 돌쳐서서 걸음을 성큼성큼 떼놓았다.
막봉이가 얼마 동안 좌우를 둘러보며 오다가 왼손편으로 산 밑에 외딴집이 있
는 것을 바라보고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큰 산을 뒤로 두고 서향하여 앉은 집
이라 석양 붉은 빛을 가득히 받고 있었다. '저 집이 그 집이군. 호젓한 집을 혼
자서 지킨다면 기집애가 어린애는 아니겠지. ' 막봉이가 기집애 혼자 있는 집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과이 없지 않은 중에 가지 말라고 당부하던 여편네의 수다
부리던 꼴을 생각하고 밉살스러운 마음이 왈칵 나서 적가리로 가지 않고 산 밑
으로 들어왔다. 솔가지 섶으로 울을 두르고 싸리바자로 삽작을 달았는데 그중에
초가 삼간이 깨끗하여 보이었다. 막봉이가 가까이 들어오자 삽작 안에 개짖는
소리가 났다. 방문 여는 소리가 나며 "저 개가 왜 짖어. " 계집애의 목소리가 들
렸다. 안으로 닫아 건 삽작을 막봉이가 흔들면서 “삽작 좀 열어주! " 하고 소리
치니 개는 꾸짖듯이 짖고 계집애는 말이 없었다. "얼른 좀 열어주. " "사람이
아무도 없소. " "사람이 없다구 말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오? "
방문을 도로 닫는 소리가 났다. "왜 대답이 없소? " 하고 막봉이가 삽작을
뒤흔드나 방문은 다시 열리지 않고 개만 삽작으로 쫓아나와서 펄펄 뛰며 짖었다.
삽작을 잘 열어주지 않을 모양이라 막봉이가 한선 벌컥 떠다 미니
삽작이 귀틀에서 떨어지며 개가 뛰어나와서 물려고 덤비다가 막봉이 발길에 차
이어 나가 동그라지더니 죽어가는 소리로 짖으며 도망하여 들어갔다. 막봉이가
삽작 안에 들어설 때 방문이 펄떡 열리며 처녀가 일어서서 내다보는데 얼굴은
덜 밉지 않게 생겼고 나이는 열팔구 세 되어 보이었다. "우리 집에 와야 가져갈
것이라군 아무것도 없소. " 막봉이를 도적질하러 온 줄로 아는 모양이다. 막봉이
가 처녀의 하는 꼴을 볼 양으로 짐짓 도적인 체하고 말하였다. "가져갈 것이 있
는지 없는지 집을 뒤져봐야 알지. " "얼마든지 뒤져보오. " 처녀의 대답이 수윌
할 뿐 아니라 처녀의 얼굴에 겁내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본래 처녀의 부모가
삼사 년 전까지 콧박재 밑에서 살 때 도적을 많이 치러서 처녀가 부모의 도적
다루는 것을 눈으로 익히 본 까닭에 지금 막봉이에게 겁없이 말대답하는 것이건
만 이것을 모르는 막봉이는 처녀가 희한하게 대담스러운 줄로 생각하였다. 막봉
이가 삽작문 옆에 소금짐을 내려놓고 봉당 앞으로 들어왔다. "어디 방 세간부터
좀 보자. " "맘대로 하오. " 처녀가 봉당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을 막봉이가 봉당
에 뛰어올라오며 팔을 벌려 가로막고 "너는 꿈쩍 말구 거기 앉아 있거라. " "나
는 밖에 나가 있을께 들어와서 실컷 뒤지구려. " "꿈쩍 말라거든 꿈쩍 말어! " "
조용조용히 말 못하고 왜 야단이오? " "잔소리 마라. " 막봉이가 처녀를 떠밀다
시피 하고 방안에 들어와서 방문을 닫은 뒤에 방 세간을 돌아보는 체하였다. 방
구석에 놓인 것은 키 얕은 밥상과 넓적한 다듬잇돌이요, 시렁 위에 얹힌 것은
헌 이부자리와 다 깨어진 상자짝이요, 벽에 걸린 것은 새까만 등잔걸이다. 윗방
으로 통한 지겟문을 열고 보니 중두리와 항아리와 바구니들이 어질더분하게 벌
여놓였는데 아랫목 편으로 조그마한 기직 한 닢이 깔려 있었다. "여기는 누자 자
는 자리냐? " "그건 물어 무어하오. 어서 뒤질 거나 뒤지지. " "뒤질 것 무엇 있
니? " "그렇기에 내가 말 아니했소? 아무것도 없다고. " "이렇게 없을 줄이야 누
가 알았나. " "뒤질 것이 없는 줄 알았으니 인제는 고만 다른 데나 가보오. " "네
몸에는 가진 것이 있겠지. " "무얼 몸에 가져요? " "아니 몸을 한번 뒤져봐야겠
다. " 막봉이가 처녀 앞에 와서 펄썩 주저앉았다. 처녀의 몸에 손을 대려고 하니
그제는 처녀의 얼굴에 겁내는 빛이 나타나며 곧 몸을 빼쳐 일어나려고 하였다.
처녀가 막봉이에게 붙들려 일어서지 못하고 겨우 돌아앉았다. 막봉이는 처녀
의 삼단 같은 머리가 거의 얼굴에 닿을 만큼 바싹 등 뒤에 붙어앉아서 무어 짚
인 사람같이 시벌시벌 지껄였다. "귀련아, 내가 너를 보려구 전위해 왔다. 도둑질
하러 온 게 아니다. 도둑놈일세 도둑질하러 오지. 나는 이십 평생에 닭서리 한번
못해 봤다. 되려 못생겼다고 웃음을 잡힐는지 모르나 그런 짓 못하는 것이 내
천성이다. 사내 대장부가 창피하게 좀도둑질이야 하겠느냐. " 도적 아닌 발명을
부옇게 한 끝에 연달아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가 도둑놈들 버릇은 많이 가르쳤
다. 광주 곤재나 용인 곧은골 같은 도둑놈들은 내 손에 어떻게 혼이 났던지 내
이름만 들어두 벌벌 떤다드라. 십여 일 전에도 송도 청석골 탑고개에서 유명한
도적 하나를 주먹으루 때려눕혔다. 그러구 또 송도서 집으루 오는 길에 파주 혜
음령이란 고개에서 도적에게 봉변하는 사람을 구해 주었다. 그때 도둑놈들 말이
나 같은 천하 장사는 저의 평생에 처음 본다구 하며 나더러 저희의 대장노릇을
해달라더라. 내가 장사루 천하에 제일 갈는지는 몰라두 나하구 비등할 만한 사
람이 별루 없을 줄 안다. 내가 장사 소리 듣는 사람을 꽤 많이 만나보았지만 양
주 사람 하나를 빼놓구는 죄다 하잘것없더라. " 또 연달아서 이야기를 내놓았다.
"혜음령서 구해 준 사람이 다른 데 사람두 아니구 안성 사람이다. 가사리 사는
부자 박선달이 도둑놈들에게 혼이 나는 것을 내가 절 한번 받구 구해 주었다.
놋대장이루 치부한 박선달이라면 안성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니까 너두 혹시
말을 들었겠지. 그자가 바루 양반 행세를 하구 뽐내다가 한번두 아니구 두번이
나 내게 코를 떼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걸른 그대루 구해 주었을 테지만 그자
행세가 밉살스러워서 아니하려는 절을 그예 한번 받구야 구해주었다. 옷 잘 입
구 행세하는 늙은 작자가 나같은 소금장수 총각 앞에 무릎 꿇고 절하는 꼴을
생각해 봐라. 삼일 안 새색시라두 웃을 일 아니냐! 귀련아, 그렇지, 우습지? “
막봉이의 발명과 자랑이 처녀의 귓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귀 밖으로 흐르는 것이
더 많았다. 처녀는 총각의 뜨거운 입김이 귀 뒤에 끼칠 때마다 스멀스멀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아서 군지러운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데 총각의 이야기를 대충
듣고 보니 총각 온 것이 곡절이 있는 듯하여 우습기는커녕 도리어 분이 복받쳤
다. 처녀가 속상해 나오는 눈물을 금치 못하고 마침내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였
다. "왜 우니? " 막봉이가 등을 어루만지니 처녀는 윗몸을 뒤흔들었다. 처녀는
울음이 쇠어서 흑흑 느끼기까지 하더니 별안간 몸을 돌치어 한 옆으로 비켜앉으
며 사설을 퍼부었다. "우리 큰아버지가 뉘게다 절을 해? 큰아버지가 절했다면 누
가 치어다볼 줄 아나. 내가 기집애라고 넘보고서 천하 장사라고 흰소리나 하고
누가 곧이들을까 봐. 큰아버지도 어쩌면 소금장수 총각에게 내 이름을 일러줄까.
아버지 어머니가 제사 참례 갈 것까지 미리 말해 주었겠지. 심청이 나빠도 분수
가 있지. 아버지하고 사이가 좋지 못하니까 아버지를 괴롭게 하려고 이런 흉계
를 꾸민 게지, 내가 죽으면 자기에게 시원할 것이 무엇 있나. 아버지 어머니가
이 잘난 딸자식을 바라고 살려다가 큰아버지의 흉계에 죽을 줄이야 꿈엔들 생각
했을까. 내가 왜 사내로 못 났던가. 애구 분해, 애구 분해. “ 처녀의 울며불며
하는 말을 듣고 막봉이는 "인제 알구 보니 네가 박선달의 조카딸이구나. " 하고
흡사 생청 쓰는 것같이 말하니 처녀가 악이 나서 부끄럼 없이 막봉이의 말을 뒤
받았다. "내가 박선달님의 조카딸인 줄을 모르고 왔어? 참 그렇겠군. " "참말 모
르구 왔다. 알구 왔다면 알구 왔다지 내가 왜 거짓말하겠니. " "내가 아무리 어
리석어도 눈감고 아옹하는 수작에는 속지 않아. " "나를 거짓말쟁이루 아는 것은
잘못이다. 내가 난생 처음으루 수다스럽게 지껄이긴 했지만 거짓말은 한마디 한
일 없다. " "그렇지, 도둑질도 할 줄 모르고 거짓말도 할 줄 모르는군. " "파같이
올곧은 사람두 거짓말을 가다가다 더러 하지만 아까 한말은 거짓말 한마디 없
다. " "우리 큰아버지란 이가 자기보다 나이 훨씬 많은 사람에게도 좀처럼 절 않
는 이야. 노인에게 절 안 하고 큰 시비까지 난 일이 있어. 그가 도둑놈에게 욕을
보기가 쉽지 뉘게다가 절을 해? " "그래두 내게는 절을 했으니. " "거짓말로야
안성 원님의 절은 안 받을라고. " "아따, 곧이 안 듣거든 고만두려무나. " 막봉이
가 잠깐 동안 뿌루퉁하다가 곧 다시 눙치어서 싱글싱글 웃으면서 처녀의 앞으로
다가앉으니 처녀가 일변 손으로 떠다밀어서 일변 몸을 옆으로 비키었다. 흐르는
눈물 콧물을 치마 끝으로 씻고 나서 처녀는 막봉이를 흘겨보며 말하였다. "내가
큰아버지를 만나서 말 한마디를 물어보고야 죽든 살든 정할 테다. 나하고 같이
큰아버지께 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혼자가서 큰아버지를 데리고 와요. " "박선달
에게 물어볼 말이 무어냐? " "내가 무슨 말을 묻든지. " "내게 절했느냐구 물어
볼라구? " "그까지 놈의 절은 했거나말거나 내게 무슨 상관이야. " "내가 박선달
하구 무슨 짬짬이나 한 것처럼 아는 모양이지만 실상 내가 안성 와서 아직 박선
달의 코빼기두 본 일이 없다. " "곧이듣기지 않는 거짓말 고만두어. 그럼 내 이
름은 누가 가르쳐 주고 또 오늘 저녁때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집에 없을 것은
누가 가르쳐 주었어? " "옳지, 그것 땜에 의심이냐? 그건 다 너의 어머니가 가르
쳐 주었다. " "무엇이 어째? " "아까 길에서 오다가다 만나서 가르쳐 주더라. " "
거짓말 말아. 우리 어머니가 미쳤든가. " "정말이다. " "정말이 무슨 정말이야. "
막봉이가 정말을 하여도 처녀는 곧이듣지 아니하여 "너의 어머니가 가르쳐 준
곡절을 이야기할께 들어보구 말해라. " 하고 거짓말을 섞어서 그럴싸하게 꾸며대
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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