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은 병장기 가진 장교를 보고 화적으로 여기는지 초간한 데서는 천방지축
도망질들을 치고 가까운 데서는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들 하였다. 장교 하나가
어떤 여편네를 알아보고 “
자네 놋점거리 괴똥이네 아닌가?” 하고 물으니 그 여편네가 장교 앞으로 한두
걸음 들어서서 뻔히 보다가 “아이구 이게 누구시오? 우리는 화적놈을 만난 줄
알았소.” 하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대체 웬일들인가?” “아이구 웬일이라니
요. 장터에 화적 든 걸 모르시오?” 그제는 여러 사람이 장교들이 묻기를 기다
리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지껄이는데 그중에 “읍내 들어온 화적이 수가 얼만지
모른답니다. 장터는 그 동안 도륙이 났을 겝니다.” 호들갑을 떠는 사람도 있고
“화적이 읍내 들어오며 바루 옥으루 가서 옥 앞에 관군과 접전이 났는데 관군
이 여지없이 패했답니다.” 곧이 들릴 만한 소문을 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장교들
이 피란꾼들에게 들은 말을 들은 대로 와서 옮기어서 좌우병방은 듣고 옥 앞에
서 접전 났단 말 외에는 준신하지 않으면서도, 그래도 혹시 원님이 도망하였나
장터가 도륙이 났나 미심하게 생각들 하여 군사를 끌고 읍내로 들어오기 전에
먼저 사람을 보내보려고 영리한 장교를 두어 사람 고르는 중에 순령수 둘이 급
한 걸음으로 읍내서 나왔다. 그 순령수들은 좌우병방에게 급히 회군하란 군수의
영을 받아가지고 가사리로 나가는 길이었다. 좌우병방이 번갈아가며 순령수들에
게 물어서 읍내 사정을 자세히 들었다. 좌우병방이 군사들을 끌고 가사리로 나
온 뒤 얼마 아니 있다가 화적 한 패가 파옥하러 들이닥쳐서 옥을 지키던 군사들
이 막으려고 한즉, 화적 중에 환도 가진 괴수가 단신으로 내달아서 순식간에 군
사 칠팔 명을 꺼꾸러뜨려서 군사들은 접전할 생의도 못하고 새떼같이 흩어져 버
렸었다. 화적들은 거침없이 옥을 깨치고 옥에 갇힌 도적들을 꺼내어 미리 준비
해 가지고 온 말들을 태우려다가 박가의 부녀는 말을 타나 길가는 장창이 심하
여 말을 타지 못하는 까닭에 환도 가진 화적 괴수가 졸개 몇을 데리고 동리존위
집에 가서 동네 보교를 뺏어다가 길가를 태워가지고 읍내서 남쪽으로 풀려나갔
는데, 군수가 좌우병방에게 급히 회군령을 놓은 것은 화적의 뒤를 쫓으려는 것
이었다. 좌우병방이 즉시 읍내로 들어와서 군사는 삼문 밖에 머물러놓고 순령수
들과 같이 관가에 들어와서 군수께 패전한 전말을 아뢰고 정죄할 사이도 없이
군수가 좌우병방더러 빨리 화적의 뒤를 쫓아가서 길가와 박가의 부녀를 도로 뺏
어오되 만일 뺏어오지 못하면 군율을 당할 터이니 그리 알라고 영을 내리어서
좌우병방은 엄령지하에 두말 못하고 삼문 밖으로 물러나왔다. 좌우병방이 육칠
십 명 군사를 거느리고 홍살문 밖으로 나올 때 우병방이 좌병방을 돌아보며 “
화적패가 남쪽으루 갔다니 계촌 아니면 현암으루 나갔겠지.” 하고 말하니 “글
쎄 모르겠네. 먼저 계촌 나가서 물어보구 그 다음에 현암으루 올라가세.” 하고
좌병방은 대답하였다. “우리가 물어보구 다니는 동안에 화적패가 멀리 가버리
면 어떻게 하나.”“간 종적이나 탐지해 가지구 들어오지 별수 있나.” “길가
하나만이라두 도루 뺏어가지구 들어와야지 빈손으루 들어오면 우리는 죽는 사람
일세.” “설마?” “설마라니, 이 사람 무슨 소린가. 패전한 죄에다가 죄수를
놓친 죄까지 겸쳐 뒤집어쓰구 군율을 면할 수 있겠나, 생각해 보게.” “한칼에
칠팔 명 군사를 무찔렀다는 화적패의 괴수가 장사요 검객인 꺽정이란 놈일 걸
세. 지금 우리가 뒤쫓아가서 길가를 뺏으려다가는 우리두 그놈의 칼에 죽기가
쉽지 않겠나.” “군율에 죽느니버덤은 도둑놈 칼에 죽는 것이 잘 죽는 죽음일
세.” “제 명에 못 죽기는 마찬가지지. 잘 죽는 죽음이란 다 무엔가.” “우리
가 도둑놈 칼에 죽으면 처자는 살지만 만일 군율에 죽으면 처자까지 못 사네.”
“그러구 보면 우리는 죽으러 가는 사람 아닌가. 집에들 가서 처자의 얼굴이나
한번 다시 보구 가세.” “우리가 집에 다니러 가면 군사들두 뿔뿔이 다 갈 테
니 그걸 어떻게 다시 모을 텐가. 그런 소리는 입밖에 내지 말게. 사중구생이라니
죽을 작정하구 가보세. 혹시 살 도리가 있을는지 누가 아나.” “아이구 나는
모르겠네. 자네 요량대루 하게.” 좌우병방이 서로 지껄이는 중에 동리 장터 끝
까지 다 나왔아. 피란 안 가고 남아 있는 장터 백성 서너 사람이 어느 집 앞에
몰려섰는 것을 보고 혹시 화적의 간 방향을 알까 하고 불러다가 물어보니, 서너
사람이 다같이 가현으로 나갔다고 가리켰다. “계촌이나 현암으루 나가지 않구
정녕 가현으루 나가드냐?” “개울 건너서 가현으루 가는 걸 저희들 눈으루 봤
습니다.” 좌우병방이 군사를 몰고 가현으로 나왔다. 가현 사람에게 화적의 종적
을 물어서 화적이 동네에 들어오지 않고 개울물을 끼고 위로 올라갔단 말을
듣고 개울 옆 작은 길을 횃불로 비춰본즉 여러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다. 횃불
을 없애고 그 뒤로는 논틀밭틀을 헤아리지 않고 쫓아오기 시작하여 내동 앞길에
서 멀리 화적들의 떠드는 소리까지 듣고, 마침내 청량산 뒤 산상골 근처에서 화
적의 뒤를 가까이 쫓아오게 되었다. 화적이 뒤쫓기는 줄 깨달은 뒤에는 두 패로
갈려서 한 패는 앞으로 나가고 한 패는 뒤로 돌아섰다. 칠 팔 명 화적이 우뚝우
꾹 선 것을 어렴풋이 바라보고 좌우병방은 곧 군사들을 길로부터 길 옆 논 속에
까지 벌려 세우고 활 가진 군사를 시켜서 활을 쏘이었다. 화적 한둘이 꺼꾸러지
는 듯 다른 화적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중에 화적 하나가 뛰어오는데 손에 휘
두르는 것이 분명히 칼이었다. “쫓아오는 놈을 쏘아라.” 살이 맞지 않는지 칼
로 받아버리는지 그 화적은 별로 지체도 않고 뛰어오며 “이놈들 죽어봐라.”
하고 호통을 질렀다. 좌병방보다 다기진 우병방이 먼저 창을 들고 내달으며 “
모두 함께 달려들어라.” 하고 소리치니 좌병방 이하 여러 장교와 군사들이 창
과 칼을 내두르며 전후좌우로 그 화적에게 달려들었다. 그 화적은 비호 같았다.
동에서 번쩍 서로 닫고 서에서 번쩍 북으로 달았다. 사방에서 연해 나는 악소
리 중에 간간이 아이쿠 소리가 섞이어 나는데, 아이쿠 소리 나는 곳에는 반드시
사람 하나가 자빠지거나 꺼꾸러졌다. 화적의 칼에 찔리거나 찍힌 것이다. 여러
사람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화적이 가까이 대어들지 못하도록 칼이나 창을
내두르기만 하는데, 우병방만은 화적을 노리고 앞으로 나가면서 창끝을 놀렸다.
여러 사람의 악소리들이 차차로 줄어드니 우병방이 사기를 돋우려고 “이놈이 화
적 괴수 꺽정이란 놈이다. 이놈만 잡으면 길가 같은 놈은 백 명 놓쳐두 좋다.”
하고 큰소리를 질렀다. “주제넘은 눔 큰소리 마라.” 그 화적 괴수가 우병방에
게로 달려들었다. 우병방은 창을 앞으로 꼬나들고 화적 괴수는 칼을 위로 치켜
들었다. 우병방이 화적 괴수의 가슴 복판을 노리고 창을 내지르니 화적 괴수는
몸을 틀어 창끝을 한옆으로 흘리며 곧 한손으로 창목을 잡아 앞으로 채쳤다. 우
병방의 몸이 고꾸라지자, 칼이 번쩍 목이 떨어졌다. 우병방이 삽시간에 죽는 것
을 보고 좌병방은 뒤대어 나설 생각을 못하고 슬그머니 논으로 내려가서 도망질
을 쳤다. “좌병방 도망간다!” 어떤 군사가 외쳤는지 그 외치는 소리 한마디에
군사들이 와 하고 떼도망을 치게 되었는데, 화적 괴수는 도망하는 군사들을
뒤쫓지 않고 한번 껄껄 웃은 뒤 돌아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꺽정이 이하 청석골
두령들이 달골 곽능통이의 조력을 얻어가지고 안성옥을 깨치고 길막봉이와 그
안해, 장인까지 구해냈다. 먼저 가사리 들어갈 때는 여러 두령이 다 함께 갔으니
박유복이와 배돌석이는 능통이와 작은 두목들을 데리고 동구 밖에 남아 있었고,
곽오주와 황천왕동이는 십여 명 졸개를 데리고 박선달 집 바깥마당을 지키고 있
었고, 두 패로 박선달 집 안팎을 들이친 것은 꺽정이와 이봉학이었다. 읍내로 사
람이 많이 뛰어가는 것을 보고 돌석이가 들어와서 말한 뒤에 꺽정이는 돌석이와
오주와 천왕동이더러 동네에 불을 지르라고 졸개 한 패를 주어서 뒤에 남기고,
봉학이와 같이 나머지 졸개를 끌고 동구에 나와서 동구 밖에 있던 패와 한데 합
하여 가지고 읍내 편으로 들어오다가 봉학이와 유복이는 각각 졸개 칠팔 명씩
데리고 중간에 떨어져서 길 좌우편 풀섶에 숨어 있게 하고, 꺽정이는 능통이와
작은 두목들 외에 수십 명 졸개를 거느리고 읍내 턱밑에까지 와서 길 옆 으슥한
곳에 숨어 있다가 좌우병방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사리로 나간 뒤에 읍내 들어와
서 옥을 깨치고 갇힌 사람들을 구해냈었다. 가사리 박선달 집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하여 온동네에 불을 지른 것은 막봉이의 원수도 갚으려니와 읍내 관군을 가
사리로 끌어내자는 꾀요, 관군이 나올 때는 가만두었다가 들어갈 때 앞으로 막
고 뒤로 엄습한 것은 파옥하는 동안을 만들자는 꾀였다. 이와 같은 꾀를 낸 사
람은 서림인데, 서림이는 복통으로 달골 능통이 집에 누워 있었다. 서림이가 꾀
가 맞는지 틀리는지 몰라서 고시랑고시랑하며 기별 오기를 기다리는 중에 처음
에 떠들썩하며 곽능통이 패가 옥에 갇혔던 사람들을 호위하고 들어오고, 그 다
음에 왁자하게 떠들며 이봉학이 외 다섯 두령들 패가 함께 몰려오고 나중에 또
떠들썩하며 꺽정이가 작은 두목 네 사람과 졸개 댓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다. 여
러 두령이 방에 드러눕힌 막봉이 옆에 와서 둘러앉아 들여다보고 다리도 만져보
고 하는 중에 능통이가 방에 들어와서 여러 두령을 보고 준비해 놓은 술고기로
졸개들을 호궤한다고 말하여 꺽정이 이하 여러 두령은 능통이와 같이 밖으로 나
가고 서림이 하나만 막봉이 옆에 남아 있었다. 여러 두령이 밖으로
나간 뒤에 윗목에 누워 있는 서림이가 아랫목의 막봉이를 바라보며 “내일 칠
장사루 형제 결의들 하러 간다는데 길두령 어디 갈 수 있겠소? 만일 길두령이
빠지게 되면 곽두령은 모두 형제들뿐이구 아우가 하나두 없어서 재미적어 하겠
지. 나는 도대체 의형제란 걸 재미적게 생각하는 까닭에 참례 않구 빠지기루 했
소.” 하고 이야기삼아서 지껄이니 막봉이는 말없이 큰 눈만 끔벅끔벅 하였다.
서림이가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다시 “인제는 가는 것이 큰일인데. 길은 멀구
일행은 많으니 무슨 묘책이 있어야겠는데.” 하고 혼잣말같이 지껄일 때 능통이
가 머슴아이에게 미음상을 들려가지고 들어오고, 그 뒤에 또 꺽정이가 막봉이의
장인과 안해를 데리고 들어왔다. 꺽정이와 능통이가 막봉이를 일으켜서 비스듬
히 벽에 기대어 앉힌 뒤에 미음을 마시라고 권하니 막봉이는 꺽정이를 보고 “
미음 고만두구 술을 주시우.” 하고 말하였다. “술을 먹겠나?” “왜 못 먹겠
소.” 꺽정이 옆에 와서 앉은 막봉이의 장인은 “어느새 술이 다 무어냐?” 막
봉이를 보고 말하고 그 아버지 곁에 붙어앉은 막봉이의 안해는 “약한 몸엔 술
이 해롭지요.” 아버지에게 빗대고 말하였다. 막봉이가 장인을 돌아보며 “나 땜
에 고생하셨지요.” 하고 비로소 인사 차려 말하니 그 장인이 “네게 대면 우리
야 고생이라구 할 것두 없지. 그러나 그런 이아기는 차차하구 어서 미음이나 먹
어라.” 하고 말하여 “녜 먹지요.” 하고 막봉이는 미음 그릇을 입에 대고 꿀꺽
꿀꺽 마시었다. 윗목에 일어 앉았는 서림이가 “여보, 주인.” 하고 능통이를 부
르는데 능통이는 머슴아이 시켜 미음상을 내보내고 뒤늦게 “녜.” 하고 대답하
였다. “죽은 사람과 상한 사람이 모두 몇이나 됩니까?” “우리는 치지 말구
졸개들만 마흔둘인데 그중에서 메주고개 아이가 하나 죽구 셋 상하구 용머리 아
이가 넷 상하구 이 동네 아이는 상한 놈두 한 놈 없소.” “그것쯤은 사상이 없
느니나 다름없소.” “그렇구말구요. 관군은 죽은 사람 상한 사람이 줄잡아두 삼
사십명 가량 될 것이오.” 꺽정이가 능통이더러 “우리는 여럿들 먹는 것을 또
나가 봐야지.” 말하고 능통이와 같이 일어설 때, 막봉이의 안해가 인사성으로
일어서는 것을 꺽정이는 같이 나가려고 일어서는 줄로 알고 “우리들 들어오기
전에 이야기나 하구 기시우.”하고 말하였다. 낯선 사람이 자리에 있으면 막봉이
의 안해가 거북하여 할 듯 짐작하고 서림이도 이번에는 “나두 좀 나가 보겠소.
” 하고 같이 일어섰다. 막봉이의 장인과 안해가 다 오래 앉았기 거북하여 막봉
이와 같이 느런히 누워 있는 중에 여러 두령이 졸개 호궤를 마치고 들어와서 막
봉이의 장인과 안해는 따로 치워놓은 바깥방으로 내보내고 결의할 일과 회정할
일을 의논들 하기 시작하였는데, 서림이가 출반좌하고 말을 꺼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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