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도 든 두령이 결박지운 사람들에게 와서 “주인놈은 어디 갔느냐?” 하
고 묻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모릅니다.” 하고 대답하니 “이놈아, 모르다니
될 말이냐!” 하고 환도 등으로 그 사람의 어깨를 내리쳤다. “아이구 아이구!”
“거짓말하면 죽일 테다. 바루 대라.” “작은집에 가셨나 봅니다.” “작은집이
어디냐?” “바루 옆집이올시다.”
첩의 집에 가 있던 박선달이 큰집에 화적 든 것을 알고 급히 낭속과 동네 장정
을 불러모아서 몇은 읍내 관가에 좇아보내고 나머지는 도끼나 몽치나 있는 대로
손에 들려서 큰집으로 들여보냈다. 미련한 촌것들이 천둥인지 지동인지 모르고
선다님의 분부만 어려워서 한떼로 몰려들어오다가 바깥마당에 있는 화적 한 패
에게 혼들이 나는데, 그 패의 두령 둘이 하나는 쇠도리깨를 가지고 하나는 창을
가져서 빨리 도망 못하는 쇠도리깨에도 얻어맞고 창에도 찔리었다. 환도 든 두
령이 밖에 나와서 쇠도리깨 가진 두령과 창 가진 두령을 사랑으로 들여보내고
두 두령이 거느리고 있던 졸개들을 데리고 박선달의 첩의 집을 찾아왔다. 박선
달이 진작 물계를 알아차렸던들 어디로 피신할 것인데, 첩의 집에 두었던 재물
을 마루 밑에도 집어넣고 검부나무 속에도 파묻느라고 첩하고 둘이 부산하게 돌
아다니는 중에 환도 든 두령이 삽작 안에 들어섰다. 삽작 밖에 세워둔 사내 하
인들은 말할 것 없고 집안에서 시중 들던 아이년들도 어느 틈에 다 도망하여 박
선달과 첩과 단둘이 남아있었다. 박선달이 그중에 떡국이 농간하여 환도 든 두
령 앞에 나와서 부들부들 떨면서 죽어가는 소리로 “우리는 박선달 집에 붙여
사는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니 그 두령이 박선달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번 껄껄 웃고 졸개들을 돌아보며 “이눔을 묶어라.” “저년두 묶어라.” “집
에는 불을 질러라.” 하고 연거푸 분부하였다. 졸개들이 숙마바로 박선달과 그
첩을 묶어놓고 앞뒤 처마에 불을 질러서 불이 타기 시작한 뒤에 환도 든 두령은
졸개들더러 “연놈을 끌고 가자.” 분부하고 졸개들의 앞을 서서 박선달의 큰집
으로 들어왔다. 안에 있던 활 가진 두령까지 나와서 네 두령이 느런히 사랑 툇
마루에 걸터앉아서 박선달을 주리틀리라고 거조를 차릴 때, 또 두령 하나가 단
신으로 밖에서 들어오는데 그 두령은 한편 손에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들었을
뿐이고 다른 병장기는 가진 것이 없었다. 그 두령이 환도 든 두령 앞에 와서 “
그 동안 읍내루 뛰어간 사람이 몇인지 수가 없소. 혹시 불급되리다. 얼른 가시
우.” 하고 말하니 환도 든 두령이 곧 활 가진 두령과 둘이 같이 밖으로 나가서
졸개를 한 패 거느리고 동네 한복판을 짓치고 나가니 또 다른 한 패가 동구 밖
에 있다가 와서 합세하였다. 그 화적떼가 읍내를 향하고 몰려오는데 얼마는 중
간에서 떨어지고 그 나머지는 모두 읍내 턱밑에까지 다 와서 어두운 속에 형적
들을 감추었다. 읍내로 간 두령들이 박선달 집에서 나간 뒤에 남아 있는 두령
셋은 박선달 집 식구 처치할 것을 공론하였다. 손에 주머니 가진 두령이 “광
하나를 치우고 안팎 식구를 다 집어넣은 뒤에 광문을 닫아 걸구 불을 질르세.”
하고 발론하니 쇠도리깨 가진 두령은 대번에 “그거 좋군.” 하고 찬동하는데,
창 가진 두령은 고개를 외치며 “박선달은 죽일 놈이지만 그 나머지 식구야 무
슨 죄가 있나.” 하고 찬동하지 않았다. “망할 놈의 씨알머리 남겨둘 것 무어
있나.” “너무 말살스러운 짓 할 것 없어.” 둘이 옥신각신 말마디나 좋이 한
끝에 박선달의 부자들만 광에 집어넣게 되었다. 광채에서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
하여 안팎채에 다 불을 질렀다. 사랑마당에 남은 사내도 사람살리라고 악들을
쓰지만, 안마당의 여편네와 아이들 우는 소리가 악머구리 우는 것 같았다. 두령
셋이 잠깐 서로 의논하고 불꾸러미 든 졸개들을 각각 나누어서 거느리고 불 붙
은 박선달 집에서 몰려나왔다. 창 가진 두령은 맨 뒤에 나오다가 자기 거느린
졸개들을 바깥마당에 멈추어놓고 혼자 다시 안마당에 들어가서 여편네들 동인
줄을 창열로 툭툭 끊어주며 "산으루들 도망해라." 하고 말까지 이르고 나왔다.
세 두령이 동네를 위 아래 중간 세 땀으로 갈라지고 각기 돌아다니며 불을 지르
는데, 불을 못 지르게 하는 사람들은 창도 맞고 돌팔매도 맞고 또 쇠도리깨도
맞았다. 사내 아우성치는 소리, 여편네 악쓰는 소리, 아이 우는 소리, 온동네가
물끓듯 하였다. 위땀의 창 쓰는 두령과 중간땀의 돌팔매치는 두령은 어른 사내
나 혹 해치지만, 아래땀의 쇠도리깨 쓰는 두령은 우는 아이를 만나는 족족 해치
웠다. 그 흉악한 두령이 나중에는 도리깨질에 신이 났던지 집에 불지를 것도
잊어버리고 우는 아이만 찾아다니었다. 아래땀에서 중간땀으로 올라와서 돌아다
니며 죄없는 어린아이를 쳐죽이는 중에 위땀의 창 쓰는 두령이 위땀 일을 마치
고 중간땀으로 내려오다가 보고 붙들고 날쳐서 간신히 말리었다. 세 두령이 다
시 한데 합하여 동구 밖으로 나올 때는 가사리 사십여 호에 불 안 붙은 집이 없
어서 화광이 충천하였다. 읍내 가까운 가사리 동네에 화적 들었단 기별이 관가
에 들어왔을 때, 안성군수는 즉시 병마동첨절제사로 좌기하고 취군을 시키었다.
관속과 읍내 장정 수백 명이 삼문 앞에 모인 뒤에 먼저 건장한군사 삼사십 명을
뽑아서 옥을 지키게 하고 그 나머지 군사는 좌우병방을 주어서 가사리 가서 화적들
을 잡으라고 명령하였다. 좌우병방이 백여 명 군사를 거느리고 가사리로 나와서
동구 밖에서 동네 안을 들여다보니 불바다 속에 개미새끼도 하나 없었다. 화적
들이 벌써 거쳐간 모양이라 그 간 곳을 탐지하려고 병방들은 산 위에서 피란하
는 동네 백성들을 불러내리었다. "화적들이 어느 편으루 가더냐?" 여러 사람이
횡설수설 대답하는 중에 읍내 편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
가 나올 때 어디들 숨었던 게지." “우리들 나온 뒤에 읍내 들어가서 파옥하는
걸세.” “얼른 쫓아들어가세.” 좌우병방이 수어 지껄인 뒤에 곧 군사를 풍우
같이 몰고 읍내로 들어오는데, 중간쯤 왔을 때 길 옆 좌우편에서 별안간 함성이
일어났다. 선봉으로 오던 우병방이 함성을 듣고 군사를 뒤로 물리고 후진에 오
던 좌병방과 서로 의논하고 급히 활 가진 군사를 뽑아내서 길 좌우편 아우성 나
던 곳을 향하여 세우고 활들을 쏘이는데 시윗소리는 한동안 요란하였으나 살 떨
어지는 곳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좌우병방이 건장한 군사 수십 명을 골라
뽑아서 좌우편 길 옆을 나가 보게 하여 두 패가 각각 홰 든 군사들을 앞세우고
길가의 풀섶을 헤치고 들어가는 중에, 바른편에서는 난데 없는 화살이 날아와서
군사가 하나 맞고 둘 맞고 셋 맞으며 여러 군사들이 와 하고 도망하여 나오고,
왼편에서는 한참이나 아무 소리가 없더니 나중에 군사들이 아이쿠지이쿠 하며
뛰어나왔다. 군사 서넛은 한편 눈을 뜨지 못하는데 눈알 아니면 눈자위에 대꼬
창이가 꽂히고 군사 서넛은 목을 돌리지 못하는데 뒤통수나 뒷덜미에 쇠꼬창이
가 박혔었다. 안성 관속들은 길막봉이의 초사로 청석골 두령 인물의 성명과 재
주를 대개 다 짐작하는 터이라, 좌우병방이 대꼬창이와 쇠꼬창이를 보고 “청석
골 화적패에 박가 성 가진 놈이 무슨 창이라든가 줌 안에 드는 창을 백발백중
잘 친다더니 그놈이 왔네그려.” “그놈 하나만 왔겠나? 돌팔매두 오구 쇠도리
깨두 오구 천하 명궁두 오구 천하 장사두 오구 떼서리가 다 왔겠지.” “우리
안성 큰난리 났네.” 좌우병방이 서로 지껄일 때 나이 지긋한 장교 하나가 화살
맞고 겨우 도망하여 나온 군사 셋을 데리고 앞에 와서 “이것들 좀 봅시오.”
하고 살 맞은 자리를 가리키는데, 셋이 똑같이 인중이 뚫리고 앞니들이 부러졌
었다. “상처가 우연히 같은 건 아니겠지.” “천하명궁의 솜씰세.” “여기서
지체 말구 얼른 읍으루 들어가세.” “얼른 가서 읍에나 못 들어오게 방비하는
것이 상책이겠네.” 좌우병방이 읍내로 들어가려고 분분히 군사의 대오를 정돈
시킬 때 뒤에서 또 함성이 일어나며 화적 한 패가 후진에 달려들었다. 좌우병방
은 급히 군사를 휘동하여 선봉을 후진으로, 후진을 선봉으로 뒤꾸며 가지고 화
적패를 막는데, 길 좌우편에 숨은 화적이 내달아서 앞뒤로 공격할까 염려하여
활 가진 군사들은 따로 남겨서 길 양편 풀섶을 향하고 먼장질을 시키었다. 달려
드는 화적패의 사람수는 여남은 밖에 아니 되나, 그중의 하나는 창을 쓰는데 날
쌔기가 제비 같고 하나는 쇠도리깨를 쓰는데 우악하기가 황소 같고 그 외에 또
돌팔매질을 하는 자가 하나 있는데, 우스운 돌팔매가 창이나 쇠도리깨보다 더
무서워서 여러 십 명 군사가 잠깐 동안에 혹 면상도 터지고 혹 머리도 깨어졌
다. 좌우병방이 처음에 화적패의 수효가 얼마 못 되는 것을 넘보고 화적패를 둘
러싸서 잡으려고 군사들을 좌우로 벌리었더니, 바른편에 숨은 화적이 소리없이
바른편 군사들 뒤에 와서 별안간 아우성을 치고 대어들고 왼편에 숨은 화적도
마저 왼편 군사들 뒤에 와서 아우성을 치고 대전장을 치러 보지 못한 군사들이
라 한번 동요된 뒤에는 다시 정돈되지 못하고 마침내 와 하고 흩어져서 도망질
들을 치게 되었다. 우병방은 도망하는 군사를 금지하려다가 남나중 도망하고 좌
병방은 어느 틈에 활 가진 군사들과 같이 앞서 도망하였다. 도망하는 뒤를 쫓던
화적들이 읍내 가까이 와서는 더 쫓지 아니하여 좌우병방은 비로소 서로 만나서
공론하고 도망해 온 군사들이 거두어 모으기 시작하였다. 가사리로 나갈 때는
여러 횃불이 길을 밝혔으나 홰잡이 군사들이 모두 홰를 내던지고 도망질친 까닭
에, 희미한 별빛 아래서 좌우병방이 군사를 수합하는 중에 멀리 향굣말 가는 길
에서 사람의 소리가 많이 나는 것을 듣고 향굣말 사는 군사들이 어느 틈에 앞
질러 도망하여 집으로 가는가 생각하고 장교 몇 사람을 쫓아보내보았다. 장교들
이 향굣말 길로 오며 보니 그 사람들이 군사가 아니요, 백성들이라 앞장선 장교
가 “너희가 웬 사람들이냐?” 하고 소리질러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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