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많다구 파의한다던가? ” “아니오. 내일이라도 곧 주단거래하고 속히 택일
해서 성례하자고까지 말이 됐소. ” “그럼 다 됐네. 고만 가세. ” “내 말씀 좀 들
으시우. 나하고 색시 어머니하고 이야기하는 동안 색시는 방 한구석에 돌아앉았
드니 내가 간다고 일어설 때 얼른 바로 앉으면서 어머니, 저 할머니더러 좀 기
셔 줍시사고 하세요. 아까 쫓겨간 사람이 무슨 흉계를 꾸며가지고 다시 올른지
누가 알아요 하고 말하겠지. 내가 색시말을 들어보려고 이 늙은이가 안 가고 있
은들 무슨 소용 있어. 하고 말하니까 색시는 내 얼굴만 쳐다보고 말대답을 안합
디다. 색시가 사람이 얼마나 슬금하우. ” “그런 염려두 바이없지 않지만 나더
러 들마루에 쭈그리구 앉아 있으란 말인가? ” “색시 어머니가 딸을 데리고 부
엌에 내려가 있을 테니 나더러 뫼시고 방에 들어가 있으랍디다. " "여보게, 색시
는 이왕 상면했으니까 다시 말할 것 없구 장모감만 마저 상면하면 한방에 못 앉
을 것 없지 않은가. 방에 같이 앉았는다구 해야 내가 가지 않구 있겠네. 자네 들
어가서 내 말루 말해 보게. ” 순이 할머니가 방안에 들릴 만큼 큰소리로 “내
가 오늘 이 집에 드나들다가 새 신발이 날 나겠네. ” 하고 떠들며 들어가더니
한참 만에 들마루 앞에서 밖을 향하고 “선다님, 들어오시우. ” 하고 소리하였
다. 꺽정이가 방에 들어와서 색시 어머니와 맞절로 인사를 마친 뒤에 꺽정이는
색시 어머니의 내주는 아랫목 자리에 와서 앉고 순이 할머니는 방문 앞으로 앉
은 색시 어머니와 마주 앉고 색시는 윗목 한구석에 벽을 향하고 앉아 있었다.
꺽정이가 색시의 뒷모양을 싫도록 바라보다가 바로 앉히라는 뜻으로 순이 할머
니에게 눈짓하여 순이 할머니가 색시에게 가서 “바로 앉지 왜 잔뜩 돌아앉았
어? ” 하고 꺽정이와 대면되도록 돌려앉혔더니 색시가 다시 반쯤 돌아 앉아서
꺽정이는 색시의 옆모양을 바라보게 되었다. 색시가 고개를 다소곳하고 아래만
내려다보고 앉았는데 어찌하다가 곁눈이 꺽정이의 얼굴을 스치어갈 때가 있었
다. 방안 네 사람에 한 사람은 말이 없고 나머지 세 사람도 말수가 적어서 조용
하게들 앉았는 중에 홀저에 떠드는 소리가 박에서 나며 곧 여러 사람의 신발 소
리가 삽작 안으로 들어왔다. 꺽정이가 색시 어머니와 자리를 바꾸어 앉고서 방
문을 열고 내다보니 마당 한중간에 주속 의복을 입은 늙수그레한 사람이 가장
앞으로 나서고 그 뒤에 십여 명 사람이 둘러서는데 먼저 쫓아보낸 사람도 그중
에 끼여 있었다. 꺽정이가 곧 나가서 혼구멍들을 내놓으려다가 말을 좀 해볼 작
정으로 “이 집 빚은 내일 받으러 오랬는데 어째 오늘 왔소? ” 하고 물으니
주속 의복을 입은 사람이 꺽정이를 흘겨보년서 “빚 갚는단 말을 준신할 수 없
어서 기집아이를 데려다 맡아 둘테니 상목을 가지구 와서 빚 갚구 찾아가라구.
” 하고 말하는데 말본새는 고사하고 말하는 조격부터 거드름스러웠다. “기집
아이라니 이 집 색시 말이지. 내가 벌써 맡았는데 또 누가 맡아? ” “네가 대
체 웬 놈인데 중뿔나게 나서서 말썽이냐! ” 저편에서 오는 말이 곱지 않으니
이편에서 가는 말도 험하였다. “네가 운원형의 집 차지눔이라지. 봐한즉 낫살이
나 좋이 먹은 눔이 염체두 없이 남의 집 색시를 뺏어가려구 몇 해씩 근사를 모
았단 말이냐? 근사 모으느라구 애는 썼겠지만 헛애 썼다. 이 집 색시는 임자 있
는 사람이야. 그 임자가 내다. ” 그 사람이 어이가 없어 말이 선뜻 안 나오는지
한참 있다가 “임자라니 임자란 게 다 무어냐? ” 하고 뇌었다. “속시원하게
분명히 말해 주랴? 이 집 색시가 내 안햇감이다. ” “안햇감이야? 안햇감은 고
만두구 안해라두 내 빚 갚기 전엔 내가 데려갈 테다. ” “네 소위 빚이란 것이
터무니없는 빚인 줄까지 내가 잘 안다. 그렇지만 이왕 물어준다고 말한게니 내
일 받으러 오너라. 만일 오늘 말썽을 부리러 들면 내일 빚두 다 받았다. ” 그
사람이 꺽정이에게 목자를 부라리며 “이놈, 되지 못한 놈이 거센 체 마라! ”
불호령하고 곧 뒤에 섯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저놈부터 끌어내오게. 잘 안 끌
려나오거든 막 사그리 내려조기게. ” 말을 이르니 십여 명 사람이 제각기 꽁무
니에서 몽치들을 빼어들고 몰려 들어와서 오륙 명은 지대 위에 올라서고 사오
명은 들마루로 올라왔다. 꺽정이가 눈결에 한손을 내밀어서 들마루를 들어 앞으
로 기울이며 곧 뒤집어엎었다. 들마루에 올라섰던 사람들은 대개 다 건공잡이로
나가떨어지고 지대 위에 올라섰던 사람들은 거지반 들마루에 치여 자빠졌다. 그
동안에 색시가 어머니 뒤로 오고 순이 할머니까지 한데 가 몰려서 셋이 옹기종
기 앉았는 것은 꺽정이가 보고 한번 빙그레 웃은 뒤에 “나 있는 동안은 저 따
위 놈들이 몇 백 명이 오더래두 겁날 것이 없지만 내가 간 뒤에 오면 탈인데,
여기 단칸방에서 내가 자기는 어려우니 숫제 이 집을 버리고 모녀분 다 나 있는
데루 같이 가면 어떻겠소? ” 하고 색시 어머니의 의향을 물은즉 색시 어머니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주저하다가 딸이 소곤거리는 말을 듣고 비로소 “좋두룩 해
주세요. ” 하고 가고 있는 것을 꺽정이에게 맡기었다. “그럼 지금 곧 일어섭시
다. ” “저 사람들 간 뒤에 찬찬히 가지요. ” “저눔들을 쫓아보내자면 치구
달쿠 자연 성가실 테니 여기들 내버려 두구 갑시다. ” “세간 나부랭이는 어떻
게 할까요? ” “그까짓것 내버리구 갑시다. 저눔의 빚 갚을 것만 가지구두 훌
륭한 세간을 얼마든지 장만할 수 있지 않소. ” “옷이나 갈아입어야지요. ” “
얼른 갈아입으시우. ” “미안하지만 잠깐만 밖에 나가 기세요. ” 주인 과부 모
녀가 옷 갈아입는 동안 꺽정이는 방문 밖에 나와 섰었다. 들마루는 비록 육중하
지 않더라도 사람이 사오 명이나 위에 올라섰는데 한손으로 한편 옆을 쳐들어서
앞으로 뒤집어엎는 것이 여느 사람보다 동뜬 힘 가진 장사가 아니곤 생의도 못
할 일이라 윤원형의 집 차지는 힘센 주먹이 몸에 미칠까 겁이 나서 다른 사람을
돌볼 생각도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가 얼마 만에 다시 안으로 들어와서 몇
남은 성한 사람과 같이 나가떨어진 사람을 일으키고 치여 자빠진 사람을 빼놓는
중에 그 장사가 방문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고만 질겁하여 또다시 밖으로 뛰어
나가는데 팔 다친 사람은 고사하고 허리 삔 사람, 발 접질린 사람도 모두 천방
지축 뛰어나갔다. 차지가 우물께 와서 뒤를 돌아보며 겨우 발을 멈추어서 여러
사람이 차지 옆에 모여 서는데 서 있기 어려운 사람은 주저앉기까지 하였다. “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은가?” 차지가 여러 사람을 돌아보며 의논하듯 말을 내니
“얼른 가서 도차지께 말씀하구 사람을 오륙십 명 풀어 달라지요.” “그놈이
댁 대감마님을 착호 성명하지 않습디까. 그런 죽일 놈이 어디 있어요? 아주 대
감마님께나 정경부인 마님께 말씀을 여쭤서 별반거조를 내시두룩 하시지요.”
“아직두 둘이 저 안에 남아 있는데 우리가 가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요?”
“우리가 여기 섰으면 소용 있습니까? 그놈이 쫓아나오기 전에 얼른 가십시다.
” “그놈이 만일 쫓아나올 맘이 있으면 벌써 쫓아나왔지 이때까지 꾸물거리구
있겠습니까.” “제가 어젯밤에 꿈을 잘못 꾸었더니 꿈땜이 너무 지독한걸요. 옆
구리가 결려서 죽겠습니다.” “저는 엉겁결에 어떻게 여기까지 뛰어왔지만 인
젠 꼼짝 못하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중구난방으로 지껄이었다. 차지가 여러 사
람을 보고 “고만들 지껄이구 내 말 좀 듣게. 내가 얼핏가서 사람들
을 데리구 올 테니 자네들은 여기 잇게. 저 안에 남아 있는 사람두 마저 끄내오
려니와 그놈의 동정을 잘 살펴보게. 그놈이 만일 어디루 가거든 뒤를 밟아서 가
는 데를 똑똑히 알아오두룩 하게.” 하고 말을 이르는 중에 “벌써 저기 나오는
데요.” 하고 누가 소리하여 차지와 여러 사람이 다같이 과부의 집으로 머리를
돌리었다. 꺽정이와 순이 할머니가 과부 모녀를 치마 쓰이어 앞세우고 집 앞에
나오는 것을 차지가 바라보고 “저놈이 기집아이 모녀를 데리구 나오지 않나.
어디루 돌려 앉히려는 겔세. 여보게, 모두 향나무 뒤에 가서 아무소리 말구 앉아
있다가 저것들 가는 뒤를 밟아보세. 하고 여러 사람의 앞을 서서 향나무 뒤로
올라갔다.
꺽정이가 세 사람을 데리고 우물 옆을 지나서 가는 중에 몇 사람이 슬금슬금
뒤따라오는 것을 알고 순이 할머니더러 색시 모녀를 데리고 먼저 남소문 안으로
가라고 이르고 자기는 돌쳐서서 우물께로 걸어왔다.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급한
걸음으로 향나무 뒤에가서 그곳에 앉았는 사람들을 분주히 붙들어 일으키는데
꺽정이가 바라보고 “이 눔들, 어디루 내빼려구 들면 한 눔 남기지 않구 모주리
모가지를 빼놓을 테니 거기서 꿈쩍들 마라!”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한달음에
쫓아와서 우물 앞에 버티고 섰다. “내가 너눔들에게 손대지 않는 것이 큰 덕택
인 줄 모르구 내 뒤를 밟으면 어쩔테냐! 괘씸한 눔들 같으니. 너희눔들은 모두
저 빈 집에 가서 방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거라. 그래야 목숨들을 살려 줄 테
니.” 꺽정이가 호령질을 통통히 하는데 향나무 뒤에 있는 여러 사람은 꿀꺽 소
리도 못하였다. “이리들 내려오너라!” “얼른들 못 내려오겠느냐!” 꺽정이가
여러사람을 불러내려서 도야지떼 몰듯 몰고 빈 집에와서 방안에 몰아넣고 돌마
루에 치일 때 중하게 다쳐서 운신 못하는 사람들까지 마저 방안에 끌어넣은 뒤
에 여편네들의 걸음으로 남소문안에 갈 동안쯤 지키고 있으려고 돌마루를 들어
다가 방문앞에 놓고 걸터앉았다. 안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얼마 뒤에 여러 사람의 앓는 소리가 이어 나고 중간에 가끔 벽의 흙 떨어지는
소리가 섞이어 났다. “이눔들이 벽을 뜯지 않나?” 꺽정이가 허허실실로 방문
을 열어보니 몇 사람이 방문 맞은편 들창을 뜯어 키우는데 소리나는 것을 감추
려고 여럿이 일부러 앓는 소리들을 하고 있었다. “들창을 왜 뜯느냐! 죽구들 싶
어 몸살이 났느냐?” 꺽정이가 방안으로 들어오니 여러 사람을 이러나저러나 죽
는 줄 알고 악들이 올라서 운신 못하는 사람들 외에는 모두 몽치, 창, 칼, 방망
이짝 들을 손에 쥐고 꺽정이에게 달려들었다. 도망갈 대 없는 쥐가 고양이을 물
러 덤비는 셈이라 꺽정이의 주먹과 발길이 왔다갔다 하는 동안에 십여 명 사람
이 늘비하게 쓰러졌다. 차지가 여러 사람의 뒤로 돌다가 맨 나중 발길에 걷어차
이는데 공교히 윗목에 놓인 질화로 위에 가 쓰러져서 화로가 깨어졌다. 정신없
는 중에도 불을 피하여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차지를 꺽정이가 쫓아가 발끝으로
걷어질러서 그 자리에 엎드러지며 “오냐, 사람을 죽이구.” 하고 안간힘을 썼
다. 꺽정이가 눈을 부릅뜨고 차지를 내려다보다가 헌 치마와 때묻은 이불을 갖
다놓고 폭을 찢어서 차지부터 뒤결박을 지우기 시작하였다. 어느 사람이 하나
먼저 “살인이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곧 여러 사람이 따라서 소리들을 지르
니 꺽정이가 뒤결박들만 지우지않고 이불솜을 뜯어서 입들까지 틀어 막았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꺽정 7권 (19) (0) | 2023.05.31 |
---|---|
임꺽정 7권 (18) (0) | 2023.05.30 |
임꺽정 7권 (16) (0) | 2023.05.27 |
임꺽정 7권 (15) (0) | 2023.05.26 |
임꺽정 7권 (14) (0) | 2023.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