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안에 차지의 옷자락이 불에 타는라고 연기가 나는데 꺽정이가 불을 끄지 않고
도리어 이불폭, 이불솜 남은 것을 불위에 던져서 얼마 안 있다가 불꽃이 일어났
다. 연기가 방안에 자욱할 때 꺽정이는 마루로 나오고 연기가 방안에서 쏟아져
나올 때 꺽정이는 마당으로 내려오고 또 검은 연기속에 붉은 불길이 넘실 할때
꺽정이는 밖으로 나왔다. 산림골 사람들이 과부 모녀 사는 외딴집에서 불이 난
것을 알고 동이, 자배기 들을 들고 쫓아와서 우선 우물을 들여다보니 둥천에 섰
던 그리 작지도 않은 향나무가 뿌리째 뽑혀서 거꾸로 우물 속에 처박혀 있었다.
“이 향나무를 누가 뽑아서 처밖았을까.” “이것을 뉘 장사루 뽑는단 말인
가?” “글쎄 이거 별일 아닌가.” “잔소리 말구 얼른 물들 퍼내게.” “박샌네
과댁 모녀가 저 불속에 들었으면 벌써 화장했네.” “아까운 처녀가 죽었네.”
“그 처녀가 살아두 우리갠 차례 오지 않네. 뼉다구가 우리와 달라.” “아따 이
사람들, 어서 물들 좀 푸게.” “이놈의 나무를 뽑아내야 물을 푸지.” 여러 사
람이 우물속에 처밖힌 향나무를 뽑아내기 전에 불난 집은 다 타서 퍽석 주저앉
았다. 남은 불을 잡고 여럿이 불탄 자리에 들어서서 방 있던 데를 헤쳐보니 남
녀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바싹 탄 송장들이 나오는데 수효가 열이 넘었다. “
이 집에 웬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었을까?” “못된 놈들이 처녀를 뺏어가려구
작당해 가지구 왔다가 불에 타 죽은 겔세.” “불은 대체 어디서 났을까?” “
과부가 딸 뺏기지 않으려구 불을 놨는지 모르지.” “바지 저구리만 다니지 않
는 바에야 불 속에 가만히 앉아서 타 죽을 놈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과부
모녀가 수단으루 손들을 술을 억병 먹여서 곯아떨어뜨렸는지 누가 아나.” “그
럼 과부 모녀는 도망했을까.” “도망했는지두 모르지만 내 생각엔 이 속에서
같이 타죽은 것 같애.” “어째서?” “너두 죽구 나두 죽잔 심사루 불은 놨기
쉬우니까.” “자네 말이 근리한 말일세.” “우물 동천의 향나무가 뽑한 것두
심상한 일이 아니야. 과부 모녀가 죽을때 원통한 기운이 뻗쳐서 생나무 뿌리가
뽑혔는가베.” “글쎄 그런 일두 있을까.” “기집이 함원하면 오뉴월에두 서리
가 온다네. 생나무 뿌리 뽑히는 일두 더러 있지 않겠나.” 이 사람들의 지껄이는
말을 곧 참말같이 믿는 사람이 많았으나 그중에는 믿지 않는 사람도 없지 아니
하였다.
과부 모녀가 순이 할머니를 따라서 산림골을 지나갈때 길가에서 본 사람들이
있어서 과부 모녀는 불 나기 전에 도망한 형적이 있다고 말이 떠돌았다. 남부에
서 산림골 작은 화재에 인명이 많이 상한 것을 한성부와 형조에 보하고 한성부
에서 윤정승댁 차지 한 사람과 낭속 열한 사람이 산림골로 빚 받으러 가서 돌아
오지 아니한 것을 탐지하여 남부에 알린뒤에 남부의 주부와 참봉은 날마다 형조
관리의 뒤를 따라 산림골에 나와서 화재 뒤를 조사하였다. 타죽은 송장들이 타기
도 몹시 탔거니와 꺼낼 때 함부로 다뤄서 검사할 여지도 변변히 없으나 수효는
열둘인 것이 분명하여 과부 모녀는 같이 타죽지 않은 줄로 짐작하고 뒤로 종적
을 찾는 중에 과부 모녀의 도망한 형적을 아는 사람이 있단 말을 듣고 출처를
채근하여 사람을 하나씩 둘씩 연해 잡아갔다. 남의 말을 듣고 옮긴 사람들은 매
를 맞기도 하고 즉시즉시 놓여나왔으나 말을 낸 사람들은 여간 매를 맞을 뿐아
니라 죽도록 단련을 받았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불 나기 전에 여편네 셋이 향
나무박이 우물께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을 뿐이라 셋중에 과부 모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셋의 둘이 과부 모녀라면 하나는 어디 사는 누구인지 얼굴들은 가리어
서 보지 못하고 가는 곳은 살피지 않아서 알지 못하므로 미심스러운 말이나마
더 주워 댈 건덕지가 없었다. 서슬이 푸른 윤원형의 집 사람이 자그만치 열둘이
나 한꺼번에 죽었는데 죽은 까닭을 자세하 알아바치지 못하여 형조의 판서와
참판이 추고를 당하고 남부의 주부와 참봉이 벼슬들이 떨어졌다. 간세배가 과부
모녀와 부동하여 음모로 살인하고 화재로 엄적한 것이 아닌가 윤원형의 의심이
들어서 포도청을 시켜 널리 염탐하게 하였다. 이때 우변 포도대장은 이몽린이요,
좌변 포도대장은 남치근인데 남치근은 을묘년 난리에 방어사로 전공이 있고 그
뒤에 전라도의 병사로 위명이 잇어서 비록 신임 포장이나 연로 무능한 이몽린보
다 상하 신망이 두터운 까닭에 윤원형이 남치근을 청하여다가 간세배의 현적과
과부 모녀의 종적을 염탐하여 보하고 부탁할 때 우포장과도 상의하라고 일러서
남치근이 이몽린을 찾아왔었다. 이몽린은 일이 생기는 것을 머릿살 아프게 여기
거니와 윤정승이 자기 후배인 좌포장에게만 부탁한 것을 마음에 고깝게 여겨서
남치근이 말하는 것을 흥흥 하고 듣기만 하다가 “영중추대감 분부시니까 영감
께서두 헐후히 아실 리 없겠지요.” (이때 윤원형의 벼슬이 영중추대감이었다)
남치근이 말할 때 이몽린은 펄쩍 뛰다시피 하며 “헐후라니 될 말이오?” 하고
대답한 뒤 “영중추대감 분부가 기시기 전에 나는 미리 염탐해 보았소. 영중추
댁 차지 하나가 반명의 집 딸을 뺏어다가 작첩하려구 그 어미 과부에게 백문선
이 헛문서루 빚을 지워놓고 빚을 못 내거든 딸을 내라구 위협해 오던 끝에 그날
그 딸을 강탈하려구 성군작당해 가지구 갔다가 화재에 타죽었다우. 화재가 어째
서 나게 되구 십여 명이 어째서 다 죽게 된것은 자세히 알 길이 없으나 과부 모
녀가 여러 사람을 방안에 들여앉히구 술을 마냥 먹여서 다들 취해 쓰러진 뒤에
불놓구 도망했단 말이 근리한 추측일줄 아우. 간세배라면 차지나 간세배라구 할
까 다른 간세배라곤 없는 모양이구. 과부 모녀는 다른 기집사람하구 같이 도망
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있다구 형조에서 사람들을 잡아다 단련했지만 아무
꼬투리두 얻지 못하구 말았다우. 과부 모녀가 서울 안에 잠복해 있으면 어떻게
든지 종적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형조 북새에 벌써 어디루 고비원주한 모양이
오. 영감두 아무쭈룩 염탐시켜 보시우만 별수가 없으리다.” 하고 말하였다. 우
포장 이몽린의 막내아들이 자기 사랑에서 상가 성 가진 문객을 데리고 잡담하는
중에 “자네 산림골 이야기 자세히 들었겠지. 그게 우리를 욕보이던 털보놈의
짓이 아닐까. 그놈이 사람 십여 명을 쥐두새두 모르게 죽이구 나서 엄적하느라
구 집에 불을 놓구 뒤에 불 끄러 오는 사람들이 얼른 물을 긷지 못하게 하느라
구 향나무를 뽑아서 우물 속에 박구 가지 않았을까. 향나무가 절루 뽑힐 이치가
만무하니 사람의 한 짓은 분명하나 그 나무를 사람의 힘으루는 뽑을 장사가 없
으리라구 말들 하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 청동화루 접어붙이던 털보놈이 생각
나네.” 하고 말하니 그 사람이 무릎을 치면서 “참말 그런가 보우.” 하고 대답
한 뒤 “내가 대령 포교에게 귀뜀해 주리까?” 하고 물었다. “대령 포교 한두
놈에게 말해선 아무 소용없네. 그런 장사놈을 잡자면 대적을 잡는 일체루 좌우
포청이 다 풀려야 할 테니 적어두 아버님께 여쭈어서 착수하시두룩 해야 할 겔
세.” “그럼 영감께 말씀을 여쭈시우.” “말씀을 여쭤두 잘 들으실는지 모르겠
네.” “댁 영감에서 전에는 일에 쇳소리를 내셨는데 근년에는 무사태평만 제일
루 여기시니 아마 연로하신 탓인가 봅디다.” “연만하신 터이니까 후기두 없으
시겠지.” “그러나 한번 잘 여쭤보시구려.” 상가의 권하는 말에 아들은 “틈을
봐서 어디 한번 여쭤보자네.” 하고 대답하였다. 어느 날 밤에 이포장의 아들이
느직이 그 아버지에게 저녁 문안을 와서 지싯지싯하고 물러가지 아니하니 그 아
버지가 무슨 할 말이 있는냐고 물었다. “향자 산림골에서 화재 났을 때 우물위
에 섰던 향나무가 우물 속에 들어가 박혀 있었답지요?” “그래, 그게 뉘 장난
인 것을 너는 짐작하느냐?” “사람의 힘으론 뽑을 장사 없다구 나무가 절루 뽑
힌 것같이 말들 한다오나 그럴 이치야 있습니까?” “힘꼴이나 쓰는 놈이 뽑았
을 게지. 집에 있는 상가의 힘으루는 뽑지 못할까?” “상가가 향나무와 향나무
박혔던 자리를 보고 와서 제 힘으루는 해토머리 물씬물씬한 땅에서두 뽑기 어렵
겠드라구 말합디다. 그 향나무가 밑둥이 제법 굵더랍니다.” “상가 버덤 더 센
사람두 세상에 있지 없겠느냐?” “상가가 서울 온 뒤에 저버덤 왕청뜨게 힘센
자를 하나 만나봤답는데 그자가 지금 서울 안에서 돌아다닌답니다.” “그자두
기생방이나 다니는 왈짜겠지. 산림골 사람들이 불 끄러 갔을때 향나무 섰던 자
리 근방 눈위에 여러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것을 보았다구 말들 하더라기에
나는 벌써 힘꼴 쓰는 왈짜놈이 한턱 먹기내기 한 줄루 짐작했다.” “사람 죽이
구 불놓은 것을 향나무 뽑은 자의 한 짓으루 보시지 않습니까?” “향나무 뽑힌
것이 화재 났을 때 비로소 여러 사람 눈을 뜨이었다구 한데 관련을 붙여서 이런
소리 저런 소리 하지만 실상 향나무는 향나무대루 뽑히구 화재는 화재대루 나서
그 사이에 아무 관련이 없을 게다.” “힘센 자 아니면 십여 명을 어떨게 몰사
죽엄시키겠습니까?” “향나무 뒤에 남은 발자국이 여러 사람의 발자국인 것은
말말구 네 말대루 힘센 자가 혼자 한 짓이라구 하자. 그자가 사람들을 죽이구 나
와서 무슨 의사루 향나무를 뽑아놓구 가겠느냐.” “불 끄러 오는 사람들이 물
을 얼른 길어내지 못하두룩 한 게 아니겠습니까?” “여러 사람이 우물에서 나
무 하나 들어내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리라구 수탐하기 좋은 표적을 뒤에 남기
구 간단 말이냐. 그런 어리석은 놈이 어디 있겠느냐. 대체 사람이 무슨 일을 당
하든지 첫째 일의 갈피를 잘 잡아야 쓰는 법이다. 이포장의 아들은 그 아버지의
말에 눌려서 다시 말을 더 하지 못하였다. 쩍정이는 불타는 집에서 나오던 때
공연히 뒤가 궁금하여 우물동천에 올라와서 연기속에 불길이 솟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고 섰는 중에 멀리서 사람의 소리지르는 것이 풍편에 들리어서 ”아랫동
네 사람이 불난 것을 안게다.“ 생각하고 곧 몇 걸음 내려 디디는 중에 불 끄러
오는 사람들이 우물물을 얼른 못쓰게 해놓고 갈 생각이 불현듯이 나서 걸음을
멈추고 향나무를 와서 쥐고 흔들어 보다가 언 땅에 생나무가 쉽게 뽑히지 않는
줄 짐작하고 두 팔을 겉어붙이고 대들어서 두 손으로 나무 밑동을 쥐고 한 발로
땅을 빼드딩기고 온 몸의 힘을 다하여 끙소리 두서너 번에 나무 뿌리가 끊기며
뽑히며 솟아올라왔었다. 등그렇게 위가 퍼진 향나무를 거꾸로 우물속에 틀어박
는데 틀어 박을수 있는 대로 깊숙이 틀어박고 나서 속이 다 시원한 것같이 긴
숨을 내쉬었었다. 꺽정이가 불 끄러 오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산림골
막바지로 올라갔다가 모르는 길을 이리저리 헤매어 날이 저물어 갈 때 남소문
안 처소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순이 할머니가 혼자 방에 들어 앉았다가 나와 맞
으며 “어째 이렇게 늦으셨소?” 하고 물었다. 꺽정이는 색시 모녀가 방에 없는
것을 괴이쩍게 여겨서 순이 할머니의 묻는 말을 대답하는 둥 만 둥하고 “어째
자네 혼자 있나?” 하고 도리어 말을 물으니 순이 할머니는 웃으면서 “건너방
에 편히들 깁시니 아무 염려 맙시오.” 하고 조롱하듯 대답하였다. “누가 건너
방에 들여앉히라든가?” “젊으신 양반이 한바탕 수선을 떠셨지요.” 젊으신 양
반이란 한온이 말이니 한온이가 그 동안 와서 순이 할머니이게 대강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건너방에 있던 노밤이와 상노아이는 바깥 사랑방으로 내보내고 색시
모녀를 한갓지게 들여앉힌것이었다. “젊은 주인이 와봤단 말인가?” “나하구
같이 앉아서 선다님 오시기를 고대고대하다가 산리뭇골루 사람을 보내보러 가셨
소. 내가 자꾸 권했지요. 나는 꼭 무슨 일이 난 줄 알았구려.” “나간 지가
오랜가?” “나가신 뒤에 내가 건너방에 가서 늘어지게 오래 앉았다가 색시가
고달파하기에 편히 좀 누워 있으라구 이르구 다시 이 방에 와서 한참 되었으니
까 그 동안에 굼벵이가 굴러가두 넉넉히 산리뭇골을 갔다왔을 게요.” “자네
좀 가서 내가 왔다구 말하구 오게.” 꺽정이가 순이 할머니를 한온이의 큰
집에 보내고 방으로 들어가는 길에 건너방에 와서 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색시
어머니와 말 몇마디 수작하고 섰을 때 “선생님 오셨습디다그려.” 하고 한온이
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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