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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소문안패와 연락 있는 매파들이 꺽정이의 재물 많은 것과 계집 좋아하는 줄
을 알고 꺽정이 거처하는 처소에 하나둘 오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 되어서 여럿
이 드나들게 되었는데 서로들 시새워 가며 이쁜 과부가 있소, 음전한 처자가 있
소, 첩을 얻으시오, 첩장가를 드시오 천거도 하고 인권도 하였다. 여러 매파 중
에 순이 할머니라는 나이 한 육십 된 늙은이가 있는데 사람이 상없지 않은 것
같아서 그 늙은이의 말은 꺽정이가 가장 많이 귀담아 들어주었다. 어느 날 낮에
꺽정이가 마침 혼자 앉았을 때 순이 할머니가 와서 “오늘은 조용합니다그려.”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언제는 조용치 않든가? ” “나는 올 때마다 사람이
있습디다. ” “사람 없는 때 할 말이 있나? ” “꼭 사람 없는 데 할 말이 있
다는 게 아니라 그렇단 말씀이오. ” “그래 나를 첩 하나 안 얻어주려나? ”
“좋은 자리를 모두 퇴짜만 놓으시며 안 얻어준다구 말씀하시우? " "내 맘에 합
당해야 좋은 자리지. ” “저편에서 합당하다구 하는 자리는 선다님이 합당치
않다구, 선다님이 합당하다구 할 만한 자리는 저편에서 합당치 않다니 그러니
어렵지 않소. ” “대체 내가 합당하다구 할 만한 자리가 있긴 있나? ” “십만
장안 억만 가구에 선다님 맘에 흡족할 자린들 작히 많겠소. ” “왜 그런 자리
를 하나 못 튀겨내나? ” “글쎄, 그런 자리는 저편에서 도리머리를 흔들어요.
우선 산나뭇골 좋은 색시가 하나 있지만 남의 첩으로는 죽어도 안 간다니 어떻
게 하우. ” “첩으루 오지 않는다면 안해루 데려오지. ” “안해 있는 양반이
또 안해로 데려와요? ” “시굴 있는 건 시굴 안해라구 서울 있는 건 서울 안해
라면 되지 않나. 예전 송도 서울 시절에는 그런 일이 많았다데. ” “고래적 이
야기가 지금 시절에 당한가요. 그래 저편에서 육례를 갖추자면 그대로 하실 테
요? ” “색시가 내 맘에 들기만 하면 저편에서 하자는 대루 하지. ” “산니뭇
골 색시가 선다님 맘에 드실 것은 내가 다짐하지요. ” “내 눈으루 보기 전에
알 수 있나. 대체 어떤 집 딸인가? ” “가난한 양반의 집 홀어머니의 외딸인데
그 색시를 데려오시려면 홀어머니의 빚을 갚아 주셔야 해요. ”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일세. ” “빚을 갚자면 상목이 다섯 동이나 들겠답디다. ” “가난한 집
과부에게 누가 빚은 많이 주었네. ” “그 홀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빚
이 기막히는 빚입디다. 그의 남편 박생원이란 양반이 노름을 좋아해서 여간 세
간을 노름으로 다 떨어마치고 간구하게 지냈는데 노름판 친구 중에 윤정승댁 차
지 노릇하는 사람 하나가 박생원 생존했을 때 가끔 쌀말 나무바리를 보내주고
박생원 돌아갔을 때 초종을 치러주고 돌아간 뒤 삼 년 동안 모녀의 의식을 대어
주어서 그 차지를 모녀가 다 은인으로 여겼더랍니다. 그랬더니 올 구월에 박생
원의 삼년이 나자 그 차지가 사람을 중간에 넣고 딸을 첩으로 달라더라지요. 아
무리 은인이라도 딸을 첩으론 줄 수 없다고 거절했더니 그 뒤에 그 차지가 와서
빚을 내라더랍니다. 빚이 무슨 빚이냐고 불어본즉 초종때 쓴 것이 얼마, 삼 년간
대어준 것이 얼마 조목조목 적은 것을 보이는데 그중에 박생원 생존했을 때 보
내준 쌀말 나무바리 값까지 저저이 다 적혔더랍니다. 그게 모두 상목 다섯 동이
래요. 그 홀어머니는 빚에 부대끼다 못해서 딸을 내주고 싶은 맘도 없지 않은
모양인데 그 딸이 죽어도 첩으로는 안 가겠다고 한대요. 그래서 그 홀어머니가
나를 보고 빚 갚아주고 장가들 사람을 하나 구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빚은
다섯 동 말구 오십 동이라두 갚아 주겠지만 그 색시를 한 번 내 눈으루 보게 해
주게. ” “보시기가 좀 어려운데 내가 어떻게 해볼 테니 지금 나하고 같이 갑
시다. ” 꺽정이는 순이 할머니의 말을 듣고 의관을 차리고 순이 할머니를 따라
나서서 산림골로 색시를 보러 가게 되었다. 산림골 궁벽한 구석에 와서 향나무
박힌 우물이 하나 있고 그 우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초가 외딴집이 하나 있었
다. 순이 할머니가 꺽정이와 같이 우물께 왔을 때 그 초가집 안에서 떠들썩하게
지껄이는 사내 목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저기가 색시 집인데 지금 아마 빚쟁
이가 와서 떠드나 보우. 내가 가보고 오께 잠깐 여기 서서 기다리시우. ” 하고
꺽정이더러 말한 뒤 혼자 그 집을 향하고 갔다. 꺽정이가 한동안 우물 옆에서
오락가락하는 중에 떠들썩하던 소리는 그치었는데 순이 할머니가 나오지 아니하
여 갑갑증이 나서 초가 앞에 와서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사내 하나는 들마루에
걸터앉았는데 두 팔을 뒤로 짚고 비스듬히 앉은 꼴이 장히 배때가 벗고 주인 과
부는 방안에 들어앉아서 얼굴도 내놓지 않고 사정을 하는데 목소리가 다 죽어가
는 사람과 같았다. 주인 과부가 죽어가는 소리를 하면 할수록 그 사내는 기가
높아지며 “더 참아 줄 수 없어. ” “안된다니까 그래. ” 하고 반말지거리를
턱턱 하였다. 못된 놈이 의지 없는 과부 능멸하는 것을 꺽정이가 눈앞에 보고
괘씸한 생각에 곧 쫓아 들어가서 꼭두잡이하여 들어내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서
순이 할머니를 불렀다. 방안에 들어앉았던 순이 할머니가 꺽정이의 부르는 소리
를 듣고 밖으로 나오더니 오래 기다리게 한 탓으로 책망이나 받을 줄 알고 “빚
쟁이가 가거든 색시 어머니에게 귀띔 좀 하구 나오려니, 쇠귀신 같은 작자가 맡
질기게 안 가구 앉아서 가진 기광을 다 부리는구려. 색시 아이는 방 한구석에
엎드려서 소리도 못 내고 우는데 보기에 하도 불쌍해서 좋은 말로 달래느라고
진작 나와서 말씀도 못했소. ” 하고 발명을 부산히 하였다. “그 빚쟁이놈이 윤
가의 집 차지라든가? ” “윤정승댁 차지가 보병옷을 입고 다니겠소. 꼴이 그
차지가 보낸 사람 같습디다. ” “심부름 온 놈이 주제넘게 무얼 못하느니 안되
느니 하나. ” “차지의 몸받아 가지고 온 사람인갑디다. ” “대체 무얼 못한다
구 무얼 안된다구 그러든가? ” “색시 어머니가 빚을 좀더 참아달라구 사정하
니까 못한다 안된다 합디다. ” “그래 상목 다섯 동을 당장에 내라든가? ” “
사흘 안에 상목을 내준다구 말해서 보내라게. ” “선다님께서 내주시려우? ”
“내가 내주겠네. ” “색시도 안 보시고 작정하실 테요? ” “색시는 봐서 맘
에 들지 않으면 파의하더래두 상목은 주겠네. ” “정말이오? ” “한번 준다면
주는 게지 정말 거짓말이 왜 있을까. ” “그럼 얼른 들어가서 색시 어머니더러
말하겠소. ” 순이 할머니가 몇 걸음 안으로 들어가다가 다시 돌쳐나와서 “색
시를 내가 상면하도록 해드릴 테니 선을 똑똑히 보시우. ” 하고 말하니 꺽정이
가 “색시를 지금 그 사내놈 앉은 데쯤만 내세워두 예서 볼 수 있지만 들어가서
상면하게 되면 더 좋지. ” 하고 대답하였다. 순이 할머니가 안으로 들어간 뒤
얼마 아니 있다가 주인 과부와 같이 부엌 모퉁이에 나와 붙어서서 한동안 수군
거리는데 꺽정이는 밖에서 들여다보고 섰기가 창피하여 우물 둥천 향나무 옆에
와 있었다. 곧 나와서 일변 우물 편으로 쫓아오며 일변 꺽정이더러 오라고 손짓
하였다. 꺽정이가 집 앞으로 들어오면서 “왜 그러나? ” 하고 물으니 순이 할
머니는 멀리 나가지 않고 서 있다가 꺽정이가 가까이 온 뒤에 “저 작자를 어떻
게 하면 좋단 말이오? ” 하고 말하였다. “무얼 어떻게 한단 말인가? ” “빚
조르러 온 사람이 간 뒤에 선다님께 색시를 보인다고 했는데 그 작자가 안 가고
앉아서 말썽을 부리우. ” “빚을 사흘 안에 갚는다구 했으면 고만이겠지 또 무
슨 말썽이야. 수표를 써내라구 하던가? ” “수표를 써내라면 좋게요? 숫제 안
간데요. 그 작자의 말본새 좀 들어 보실라우? ” 순이 할머니가 목소리를 우렁
우렁하게 변하여 가지고 “생쥐 입가슴할 것두 변변히 없는 집에 하루 이틀새
상목 몇 동이 어디서 난담. 공연한 소리지. 사흘 안에 야반도주하라구 꾀를 내주
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지만 잘 안될걸. 그래 지금 내가 안 가구 있으면 나를 보
낸 이가 이리 올 테니 그가 오거든 말해 보라구. ” 사내의 말을 흉내내고 다시
자기의 본목소리로 말하였다. “색시 어머니가 사정을 다해서 말하고 내가 경계
를 따져서 말해도 그 작자는 어느 바람이 부느냐는 듯이 들은 척도 안하고 앉았
으니 저걸 어떻게 하면 좋소? ” “그놈이 천하 고약한 눔일세. 나하구 같이 들
어가 보세. ” 꺽정이가 순이 할머니를 앞세우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꺽정이가
마당에 서서 그 사내를 바라보며 “ 네가 이 집에 빚 받으로 온 사람이냐? ”
하고 불호령 쇰직하게 말을 붙이니 그 사내는 어이없는 모양으로 대답을 안하였
다. “다른 말 길게 할 것 없이 이 집 빚은 내일 와서 받아가거라. ” “게가 대
체 무어 다니는 사람이게 함부루 아무더러나 해라를 합나? ” “아무것두 안 다
니면 너 같은 눔더러 해라를 못하랴. ” “너 같은 놈은 무어야? 날 누구루 알
구 그래. 내가 윤정승댁 사람이야. 우리 댁 대감 말씀 한마디면 하늘에 방망이
달구 도리질하는 놈이라두 금부 아니면 포도청이야. ” “네가 윤원형의 집 종
놈인 줄 알았다. 잔소리 말구 빨리 일어나거라. ” “하늘이 높은지 땅 낮은지
아직 모르는군. ” “가라구 말루 이를 제 얼른 가거라. ” “사람을 바루 땅땅
어르네. ” “요눔! 네가 버릇을 좀 배워야겠다. ” 꺽정이가 한두 걸음에 지대
위로 뛰어올라오며 곧 그 사내를 멱살잡아 치켜들었다. 그 사내가 똥개 없는 사
람이 아니건만 허깨비같이 번쩍 들려서 두 다리가 대롱대롱하였다. “너 같은
맨망스러운 눔은 태기를 쳐서 창아리를 터쳐놓을 테다. ” 꺽정이가 그 사내를
한손으로 치켜든 채 밖으로 나오는데 순이 할머니가 뒤따라나오면서
“그대루 놔보내시우. ” 하고 말하니 꺽정이가 본래 손찌검까지 할 생각은 없
는 터이라 “아따 그러지. ” 하고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 사내가 똥줄이 빠지게
도망한 뒤에 꺽정이와 순이 할머니가 다시 안에 들어와서 꺽정이는 들마루에 올
라앉고 순이 할머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예 안 들어오시려고 하시는 것을
내가 억지로 뫼시고 들어왔소. ” 순이 할머니가 거짓말로 공치사하고 “우리
알지도 못하는 양반이 순이 할머니께 우리 정경을 들으시고 가긍하게 여기셔서
우리 빚을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신다는데 우리가 뵈입고 백배 치사래도 해야 하
지 않겠느냐! 그래서 순이 할머니께 뫼시고 들어오시라고 말씀했다. 누추하나마
방으로 들어옵시사고 해서 모녀가 다같이 뵈어야겠지만 홀어미의 처신으로 남의
말이 무서우니 네가 마루에 나가서 어미 대신 겸 뵈어라. ” 주인 과부가 딸에
게 이르더니 한참 만에 부스럭 소리가 나고 다시 한참 만에 방문이 열리고 그리
고 순이 할머니가 먼저 나서고 그 뒤에 색시가 나왔다. 음산하던 들마루가 홀저
에 환하여지는 것 같았다. 색시가 얼굴은 탐스럽고 살빛은 희었다. 의젓한 중 아
름답고 천연스러운데 태가 났다. 오랫동안 울고 난 끝이라 해당화 비에 젖어 무
게를 못이기는 듯 가련하여 보이었다. 꺽정이가 색시를 보는 데 정신이 팔려서
색시의 절을 받을 때 맞아 주라고 순이 할머니의 눈짓하는 것도 모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색시가 절 한번 하고 곧 도로 들어간 뒤에 순이 할며니가 꺽정이
옆에 와서 귓속말로 “색시 좋지요? ” 하고 물으니 꺽정이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아주 아퀴를 지어서 말하고 갈까요? ” “나는 먼저 밖에 나와서 서
성거린 지 얼마만에 순이 할머니가 밖으로 나와다. ”말 다 됐소. “ ‘그래 대
례를 지내기루 말이 됐나? ” “상처하시고 후취하신다고 했지요. ” “후취라
니까 좋다구 하던가? ” “후취는 상관없지만 연치가 너무 틀려서 흠이라고 합
디다. ” “색시 나이 몇 살이랬지? ”“열아홉이오. ” “내 나이 곱절이 넘네
그려. ” “선다님 연세를 서른 넷으로 줄여 말했건만 많다고 합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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