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임꺽정 8권 (7)

카지모도 2023. 7. 1. 06:36
728x90

 

 

휘파람 소리가 오고가는 동안에 백손 어머니는 아득한 아이 적 일이 생각에

떠올랐다. 아렴풋한 꿈자취와 또렷한 환조각이 한데 뒤섞여서 나타나는 듯 사라

지고 사라지는 듯 나타나서 정신 놓고 멍하니 서 있는데 다시 들리는 휘파람 소

리, 동생이 자기를 오라고 부르는 것만 같아서 허둥지둥 신발을 신었다. “어디

를 가실라고 그러세요?” “바위에 가실래요?” “아이 고만두시지, 거긴 가 무

어 하세요.” 다른 안식구들의 말하는 것을 백손 어머니는 듣는지 만지 대답 한

마디 아니하였다. 백손 어머니가 멍석자리에서 길로 내려설 때 “우리 영감을

혼자 가시랄 수 있나, 내가 따라가야지.” “갈 테면 사람 없는 데로 해 갑시다.

” “아무리나.” 백손 어머니가 곽능통이의 안해와 같이 대왕당 뒤를 돌아서

매로바위께로 오면서 바라보니 천왕동이는 바위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저애

가 벌써 내려오네.” “황서방께서 의관을 벗고 올라가셨구먼. 보지도 않고 용하

게 아셨네.” “진작 올걸.” 백손 어머니가 공연히 맥이 풀리는 듯 바삐 걷던

걸음까지 저절로 늦추어져서 천천히 걸어오는 동안에 천왕동이는 땅에 내려서서

손과 몸에 묻은 이끼를 털고 의관을 다시 차리었다. “누님 어째 오시우?” “

나도 바위에 올라갈라고.” “누님은 못 올라가우. 보기엔 우스워두 꽤 힘듭디

다.” “너 올라가는데 내가 못 올라가?” “옛날 말씀이오.” “지금 나이 좀

많기로서니 설마 아주 그럴라고.” “나두 전과 다른데 누님이야 더 말할 것 있

소.” “어디 내 좀 올라가 보마.” “당치 않은 말씀 말구 고만두시우.” 천왕

동이 말끝에 곽능통이의 안해가 “망령이지. 어디를 올라간다고 그러시오.” 말

하며 손목을 잡아끌고 서림이와 길막봉이와 또 김억석이까지 모두 나서 말리어

서 백손 어머니는 바위를 올라가지 못하였다. 백손 어머니가 눈뜨고 꿈을 꾸며

동생을 쫓아왔으나, 꿈도 이미 오는 길에 깨졌고 동생도 벌써 바위에서 내려온

때 혼자 따로 올라가기는 점적한 생각이 나서 여러 사람이 말리는 데 못 이기는

체하고 고만두었다. “고만 자리루들 가십시다.” 서림이가 말하고 여러 사람의

앞을 서서 그네터 뒤를 지나 자리로 올라오는데 의관한 사내 하나가 자리 앞에

서서 남아 있는 안식구들에게 무슨 말을 묻는 모양이라, 서림이는 김천만이가

와서 자기네 간 곳을 묻는 줄로 생각하고 “인제 왔나?”하고 소리를 치니 그

사내가 한번 돌아보며 곧 빠른 걸음으로 건너편 길로 가다가 비탈 아래로 내려

가며 못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서림이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괴상하다 생

각하며 자리에 왔을 때 백손 어머니가 먼저 “지금 여기 와 섰는 놈이 웬놈인

가?”하고 물으니 자리에 일어섰는 안식구 중에 배돌석이의 안해가 앞으로 나서

서 대답하였다. “글쎄, 모르겠세요. 나이 한 이십 남짓한 젊은 사람인데요, 처음

에 와서 청석골 임장사가 여기 왔다더니 어디 갔느냐고 묻습디다. 그런 사람 없

다고 대답하니까 우리들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들여다보면서 잼처 청석골서 오지

않았느냐고 묻습디다. 그래 마전서 왔다고 대답했지요. 또 무슨 말을 물으려고

하다가 여러분이 오시는 걸 보더니 온다간다 말도 없이 저 건너로 가버렸세요.

” 배돌석이의 안해가 말을 다한 뒤에 황천왕동이의 안해는 자기 남편에게로 가

까이 와서 나직한 말로 “염려스러운 사람은 아닐까요?”하고 물었다. “글쎄,

좀 수상스러우나 별 염려 없겠지.” 황천왕동이가 안해의 말을 대답하며 의견을

묻는 눈치로 서림이를 바라보니 서림이는 남들이 들어도 좋으라고 “청석골에

임가성 가진 유명한 장사가 있는 것은 세상에서 다 아니까 길서방을 그 장사루

잘못 알구 그것을 말거리 삼아서 안식구들에게 말을 좀 해보려구 한 것 같소.

말하자면 왈자겠지. 그렇기에 우리가 오니까 내뺐지요.”하고 요요하게 말하였다.

김천만이가 늦게야 찾아왔는데 옳게 차린 음식 한 목판을 일꾼에게 지워 가지

고 와서 안식구들을 대접하고 사내들을 따로 술먹을 데가 있으니 같이 가자고

청하였다. 서림이는 김천만이가 오면 술대접을 받으려니 장대고 기다리던 터이

요, 황천왕동이와 길막봉이도 술 먹으러 가자고 청하는 것을 배각할 사람들이

아니라 세 사람이 다같이 김천만이를 따라가려고 일어설 때 황천왕동이의 안해

가 “나 좀 보시오.” 남편을 불러가지고 “아까 그런 사람이 또 혹시 오더래도

우리 여편네끼리만 있으면 말대꾸하기가 거북하니 당신은 가시지 않는 게 좋겠

소.” 말하는 것을 황천왕동이는 갈 욕심이 있어서 “어째 그렇게 염려가 많아.

그러다가는 머리 시겠네.” 쓸까스르고 백손 어머니는 여편네의 기세를 올리려

고 “우리 여편네는 사람 아닌가. 못생긴 소리 하지 말게.” 핀잔을 주었다. 황

천왕동이의 안해가 말은 더 하지 아니하나 눈치는 더 할 말이 있는 듯하였다.

사내 세 사람이 김천만이를 따라서 송악산 중턱을 더 지나 내려왔다. 술 먹을

자리를 시냇가에 잡아놓았는데, 뒤에 수목이 울창해서 산에 올라다니는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술 많고 안주 좋고 술 권할 계집까지 둘이 있었다. 김천만이

가 계집들을 가리키며 “다른 볼일두 있었지만 저런 미인들을 청해 오느라구 더

늦었습니다. 여기는 지금 기생이 씨가 졌으니까 더 말할 것두 없지만 설혹 있더

래두 저런 미인이 어디 있습니까. 저 기생들은 서울서 굿구경 온 것을 반계곡경

으루 길을 뚫어서 청해 왔습니다. 저 미인들이 큰 대접입니다. 그런 줄이나 아십

시오.”하고 말한 뒤 곧 다시 이어서 “배서방이 마저 오셨더면 좋을 걸 빠져서

섭섭하지만 언제 오실지두 모르구 기다릴 수 없으니까 나중에 사람이나 한번 올

려보내볼 작정하구 우선 우리 넷이 어젯밤 승부를 끝내 봅시다.”하고 말하였다.

맑은 물 푸른 숲 사이에서 기생들의 권주가를 들으면서 한잔 한잔 또 한잔, 잔

들을 기울였다.

사내 세 사람이 산 아래로 내려가고 안식구들만 남은 뒤 한동안 지났을 때,

갓을 삐딱하게 모로 쓰고 웃옷 소매를 거드쳐서 어깨에 붙인 어뜩비뜩한 젊은

사람 대여섯이 패를 지어가지고 멍석자리 앞을 지나서 건너편으로 가더니 얼마

아니 있다가 그 패가 되돌아오는데 사람 수가 늘어서 여남은이나 되었다. 먼저

와서 말 물어보던 젊은 사람도 그증에 끼여 있는 것을 말대답한 배돌석이의 안

해가 선뜻 알아보았다. 그 패가 멍석자리 앞에 와서 우뚝우뚝 서더니 말 한마디

않고 바로 신발들 신은 채 멍석 위에 올라와 앉았다. 백손 어머니가 두 눈썹을

거스르고 “남의 자리에 왜들 와 앉소?”하고 나무라니 그 패의 한 사람이 “이

게 멍석자리지 나무자리야?” 엇조로 게다가 반말짓거리로 대답하였다. 백손 어

머니가 자리를 걷어차고 일어서서 “되지 않은 것들 다 보겠다. 빨리들 일어나

가거라!” 통통히 꾸짖자, 그 패가 일시에 쫙 일어나서 “이년, 뉘게다 놈을 붙

이느냐?” “네년은 눈깔두 없느냐?” “이년, 양반을 몰라보구 괘씸한 년.” “

이년, 죽일 년 같으니.” 이런 욕설을 중구난방으로 지껄이며 백손 어머니에게로

대들었다. 백손 어머니가 이놈 치고 저놈 치고 죽을 힘을 다 들여서 여러 놈과

싸웠다. 백손 어머니의 마음은 열 사내 백 사내를 우습게 여기지만, 힘은 한두

사내도 당하기 어려운데 그래도 바락바락 덤비다가 어떤 자의 발길에 배를 걷어

채여서 자리에 고꾸라졌다. 다른 안식구들도 다 가만히 있지 않고 혹 돌멩이로

때리고 혹 짚신짝으로 두들기고 혹 물고 꼬집어뜯었으나 한껏해야 백손 어머니

의 조력군들이라 백손 어머니가 한번 고꾸라지고 다시 꼼짝 갱기를 못하니 모두

백손 어머니 옆에 와서 매어달렸다. 그자들이 다른 여편네들은 다 놓아두고 황

천왕동이의 안해만 잡아 일으켜세우며 곧 힘꼴 든든한 자들이 양쪽 겨드랑 밑을

바짝 치켜들어서 오둠지진상을 하고 다른 자들이 전후에 옹위하고 산 아래로 몰

려내려갔다. 이것을 본 여러 구경꾼들 중에는 눈살을 찌푸리고 혀를 쩟쩟 차는

사람도 많고 “저런 죽일 놈들 봤나.” “저놈들이 벼락맞아 죽지 않나.” 이렇

게 욕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으나 붙들려가는 여편네를 구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왈자패가 청석골 안식구를 칠 때에 여편네들이라고 사렴도 두었겠지

만, 그보다 치고 달코 하는 것이 엄포에 불과한 까닭으로 손찌검들을 몹시 하지

아니하여 다친 사람은 백손 어머니와 서림이의 안해 둘뿐인데 백손 어머니는 얻

어맞아서 뺨이 부어오를 뿐 아니라 걷어채여서 뱃살이 꼿꼿하여 한동안 쩔쩔매

었고, 서림이의 안해는 신짝을 들고 얼쩡대다가 어떤 자에게 떠다박질려서 나자

빠지는 바람에 허리를 삐었었다. 그외의 다른 사람들은 혹 머리가 흐트러지고

혹 옷이 찢기어서 꼴들이 사나울 뿐이지 별로 다친 데는 없었다. 백손 어머니가

올케의 잡혀가는 것을 보고 쫓아가려고 일어서다가 못 일어서고 배를 움켜쥐고

앉아서 김억석이를 불러오란 말인지 쫓아보내란 말인지 “억석이 억석이!”하고

이름만 불렀다. 배돌석이의 안해가 대왕당에를 뛰어서 그 아버지를 보고 대강

이야기한 뒤 곧 쫓아가 보라고 말하니 “나는 바빠서 갈 수두 없지만 나 혼자

가서 아무 소용없다. 그자들 가는 데나 알구 오라구 네 동생이나 보내보자.” 김

억석이가 아들아이를 불러다가 말을 일러서 왈자패를 뒤쫓아가 보내고 백손 어

머니를 와서 보려고 딸과 같이 오면서 “네 동생 녀석이 너를 굿구경시키려구

애를 부등부등 쓰기에 동기간 우애가 기뜩해서 너더러 오라구 하고 이왕이면 네

낯을 좀 내주려구 같이들 오라구 했더니 내가 생각이 부족해서 당초에 안할 일

을 공연히 했다. 처음부터 이것저것 속상한 것두 기가 막힌데 종말엔 이런 의외

일까지 생겨서 뒤가 조용치 못할 모양이나 어쩐단 말이냐? 후회막급이다.”하고

연해 쓴입맛을 다시었다. 김억석이가 백손 어머니 옆에 와서 위로 인사도 하기

전에 “빨리 쫓아가지 왜 이리 왔소?” 백손 어머니가 책망하여 “제 자식놈을

쫓아보냈습니다.”하고 발명하였다. “그까지 아이를 보내서 무어해?” “저는

가면 무어합니까. 그놈들 십여 명을 저 혼자 당할 수 있습니까.” “내 동생을

얼른 찾아가서 말 좀 하오.” “이 여러 인총 중에 어디 가 찾습니까? 만일 장

안으루들 내려가셨다면 더구나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해야 좋

소?” “제 생각엔 아무 별도리 없는걸요.” “그럼 그 사람은 죽는 사람이야.”

“잡놈들은 욕만 보이지 죽이진 않습니다.” “욕보면 죽는 게지.” “보입기에

대단 괴로우신 모양이니 당집 아래채 마루방을 치어드릴께 가서 좀 누워 기시지

요. 그러구 여러분두 다 그리 가십시다.” 백손 어머니가 싫다고 고개 외치는 것

을 다른 식구들이 우겨서 마침내 백손 어머니는 배돌석이와 곽능통이 안해의

좌우 부축을 받고 서림이 안해는 길막봉이 안해의 어깨를 의지하고 다같이

김억석이를 따라서 대왕당으로 내려갔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꺽정 8권 (9)  (0) 2023.07.03
임꺽정 8권 (8)  (0) 2023.07.02
임꺽정 8권 (6)  (0) 2023.06.30
임꺽정 8권 (5)  (0) 2023.06.29
임꺽정 8권 (4)  (0) 2023.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