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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8권 (13)

카지모도 2023. 7. 7.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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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왕동이가 다시 의관을 차리고 한온이를 따라 그 첩의 집에 와서 안방에

들어앉았다. 한온이의 첩은 잠깐 인사하고 건넌방으로 건너간 뒤 다시 얼굴을

내놓지 않고 할멈 하나와 아이년 하나가 방에 드나들며 술상 심부름을 하였다.

주인 손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권커니잣거니 술을 여남은 잔씩 먹었을 때

"단둘이 너무 심심하니 술 칠 기집 하나 불러올까?" 한온이가 말한는 것을

"조용히 이야기해 가며 술먹는 것이 좋으니 고만두게." 황천왕동이가 밀막

았다. "자네는 천생 고리삭은 샌님이여." "그저 샌님두 아니구 고리삭은 샌님이

여? 자네가 사람 칭찬을 너무 과히 하네." "자네가 품안으루 기어드는 젊은 기집

을 내박찼다지? 그게 고리삭은 샌님이라 할 짓이 아닌가." "만일 본서방의 칼을

맞았던들 사내대장부라고 할 뻔했네그려." "그렇지, 사내대장부면 칼을 맞을 때

맞더래두 기집을 받아주지 내박차지 않네." "자네 말대루 하면 흘레개를 제일등

사내대장부루 쳐야겠네." "에라 이 자식아, 그건 억설이다. 개하구 사람하구 어디

같으냐?" "어른더러 이 자식이 무어냐? 욕 말구 술이나 어서 먹어라." "자네가

먹을 차례 아닌가?" "벌써 옹송망송하냐? 이건 내가 부어논 잔일세." 한온이가

술을 마시고 잔을 가뜩 채워서 황천왕동이를 주며 "도둑놈 도학군자, 이 술 한잔

잡으시오." 권주가 흉내를 내었다. "어른을 놀리면 종아리 맞는 법이다." "참말

자네가 그때 기집더러 종아리채를 해오랬나?" "나를 정말 고리삭은 샌님으루 아

네그려. 종아리채가 다 무어란 말인가." "그래두 나는 그렇게 들었어." "누가 거

짓말을 한 게지." "그때 이야기 한번 자세히 들어보세." "그까진 이야길 누가 한

단 말인가. 술이나 가져오라게. 술이 다 없어졌네." "술은 얼마든지 있네. 우리

실컨 먹어보세." "자네 술이 늘었네그려." "전에 통히 접구두 못하던 술을 지금은

한 자리에 이삼십 배 예사 먹으니 굉장히 늘었지. 이게 선생님한테 배운 술일세.

꺽자 정자 분이 검술 선생님이 아니라 검자 떼구 술선생님이야." "우리 형님이

남의 집 자식을 버려놨군." “자네두 사람이 될라거든 선생님을 배우게. 선생님

같이 기집을 좋아해야 사내대장부 값이 있네.” “배울 것두 없든가부다.” “선

생님이 기집 후리는 수단이 있어. 그 수단이 아마 검술 수단만 못지않을 겔세.

장찻골다리 소홍이란 기생년은 임선다님을 오매불망 못 잊어서 상사병에 걸리게

되었네.” “자네가 조방꾼이 노릇을 하구 뒤에 앉아서 저 따위 소리를 하지.”

“소홍이 하나 사귈 때는 내가 더러 글을 가르쳐 드렸지만 그외는 모두 선생님

의 자작자필일세.” “들여앉힌 기집들두 자네가 천거 안하구 누가 천거했겠나?

” “애매한 소리 하지 말게. 자네가 잘 모르면 내 이야기할게 들어보게. 박생원

의 딸은 순이 할미란 매파를 놓구 데려왔구, 원판서의 딸은 노박이놈을 데리구

가서 업어왔구, 또 김씨 과부는 격장해서 사는 중에 후려왔다네. 하나나 내가 알

까닭이 있나. 나는 그 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세 집 뒤치다꺼리에 골만 빠지네.

이왕 말이 난 길이니 말이지만 선생님이 데려가든지 어떻게 하든지 속히 귀정을

내주어야 사람이 살겠네. 자네 이번에 가서 말씀 좀하게.” “말할 것이 동이 나

두 그런 말은 안 하겠다.” “자네 누님 대신 강짜하나?” “미친 소리 하지 마

라. 노밤이란 그 미친 놈은 지금 대체 어디가 있나?” “선생님의 셋째부인, 아

니 자네 누님까지 치면 넷째 부인인 김씨 집에 비부쟁이루 가서 있네.”

“그놈이 홑으루 미친 놈만두 아니데.” “미친 척하구 떡시루에 엎드러질 놈이지.”

한온이가 먼저 하품을 하여 황천왕동이도 따라 하품을 하고 나서 “고만 가서

자구 내일 일찍 가겠네.” 하고 일어나려고 하니 한온이가 붙들면서 “술 좀

더 먹어야 하네. 자, 우리 파탈하구 앉아 먹세.” 하고 자기가 먼저 의관을 벗고

황천왕동이의 의관도 억지로 벗기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술잔 놀인 오력을 내느라고 부어라 먹자 부어라 먹자 수없이들

먹었다. 주인 손 두 사람이 다 같이 고주망태가 되어서 술자리에 그대로 쓰러져서

이튿날 아침 해가 높이 솟아오르도록 정신들을 몰랐었다.

황천왕동이가 성루서 청석골로 내려오는 길에 혜음령도적 정상갑이와 최판돌이를

고개에서 만났는데, 청석골서 서울로 보내는 봉물짐이 어제 저녁때 고개를 넘어

갔다고 생게망게한 소리를 하여 황천왕동이가 근일에는 청석골서 봉물짐을 보낸

일이 없다고 말하였더니 상갑이가 판돌이를 돌아보며 “우리가 속았네그려. 그

놈의 눈치가 좀 수상하더라니.” 하고 말한 뒤 황천왕동이를 보고 “어제 저희

둘이 사람 몇 데리구 고개를 지키는데 태산 같은 봉물짐 하나가 오겠지요. 옳다,

오늘 벌이는 잘했다 생각하구 내달아서 짐을 벗어놓구 가라구 소리를 질렀더니

그 짐꾼놈이 청석골 임대장께서 서울 보내시는 짐이라구 말합디다. 그래서 뺏지

못하구 그대루 보냈습니다. 인제 알구 보니 그놈이 멀쩡하게 사람을 속였습니다

그려.” 하고 말하였다. 황천왕동이가 정상갑이와 최판돌이에게 군호 하나를 주

어 두려고 군호까지 생각하다가 말고 “그런 일이 앞으로는 없두룩 방지할 도리

를 생각해야 겠네.” 하고 말을 일러두었다. 황천왕동이가 서울서 늦게 떠나고

또 혜음령서 지체하여 다 저녁때 청석골을 들어와서 꺽정이만 보고 바로 자기

집으로 가고 석후에도 안해의 식후복 약시중을 하느라고 꺽정이 사랑에 일찍 오

지 못하였다. 등 너머에 외따로 가서 거처하는 곽오주 같은 사람은 황천왕동이

온 줄도 몰라서 사랑에 모인 얼굴을 돌아보며 “천왕동이 형님이 오늘두 안 왔

네.” 하고 혼잣말까지 하였다. 다른 두령들은 형님뻘 되는 사람을 부르자면 반

드시 이두령 형님이니 박두령 형님이니 부르건만, 곽오주는 걸핏하면 봉학이 형

님 유복이 형님 이놈 여보로 불렀다. 그대신에 형님뻘 중의 맞잡이 황천왕동이

가 오주야 불러도 대답을 잘하였다. 황천왕동이가 남나중에 와서 사랑마당에 들

어설 때 곽오주가 내다보고 “천왕동이 형님이 인제 오네.” 하고 소리치다가

방안의 다른 사람들이 웃는 것을 보고 “예 여보, 사람들 안됐소. 벌써 온 걸 나

만 속여먹었구려.” 하고 떠들었다. 황천왕동이는 자살궂은 사람이라 여느때와

같이 방안에 들어서서 “진지들 잡수셨습니까?” 도거리로 석후 인사 한마디만

하고 자리에 앉은 뒤 유독 곽오주를 보고 “자네는 서울 갔다온 뒤 처음 보네.

” 하고 따로 인삿말을 하였다. “대체 언제 왔소?” “아까 낮에 왔네.” “낮

에 내가 넘어왔다 갔는데.” “자네 넘어간 뒤든 게지.” “그런데 왔단 기별두

안 해주?” “나 온 줄을 참말 이때까지 몰랐나?” “알 까닭 있소. 지금두 안

왔느냐구 말하니까 여러 형님네까지 날 속일라구 시침들을 떼구 있었소. 모두들

서종사 물이 들어서 사람들이 변했어.” 곽오주 황천왕동이 두 사람의 수작을

다른 사람들은 그저 웃고 듣고 서림이는 곽오주의 나중 말을 탄하여 “내 몸에

는 왼통 곽두령의 잇자국이 백혔소. 하루 한번이라두 그예 씹히니까.” 하고 깔

깔 웃었다. “실없은 소리 인제 고만둬.” 꺽정이 말 한마디에 웃음판이 끝이 났

다. 꺽정이가 황천왕동이더러 서울서 들은 소문과 혜음령서 안 폐단을 여러 사

람에게 이야기하라고 말하고, 황천왕동이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 다시 여러 사람

더러 그런 폐단을 무슨 방법으로 방지할까 공론들 하라고 말하였다. 혹은 군호

를 정해 주자고 말하고 혹은 목패를 만들어 쓰자고 말하는데, 서림이가 말하기

를 액내 사람이 왕래할 때는 군호를 쓰고 액외 사람을 무사히 통과시킬 때는 목

패를 주되 거둬들일 지명을 박아서 주고 또 액외 사람에 혹시 후대할 만한 사람

이 있어서 각별히 보호시킬 때는 대장의 차신 장도를 주되 장도 끈에 거둬들일

지명을 써서 주기로 방법을 정하여 각처에 알리고 이 방법을 시행할 때 장도와

목패의 본보기는 한번 미리 각처에 돌려 보이고 군호는 다달이 한 번씩 고쳐서

각처에 알려 주자고하여 꺽정이가 서림이의 말대로 작정하였다. 여러 두령이

한담들을 시작할 때, 서림이가 꺽정이를 보고 “토포사 난단 소문이 비록 진적

한 소문이 아니라두 토포사가 나면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을 미리 생각해 두는 것

이 좋지 아니할까요?” 하고 말하니 꺽정이는 뒤로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토포사가 나면 나는 때 어떻게 할 것을 생각해두 넉넉

하겠지.” 하고 대답하였다. “생각해서 곧 할 수 있는 일은 나중이라두 넉넉하

겠지요. 그렇지만 시일이 걸릴 일은 미리 예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토포사

나기 전에 무슨 예비할 일이 있소? 생각한 것이 있거든 말하우.” 여러 두령이

모두 한담을 그치고 서림이의 말을 기다리는데, 서림이는 말을 정중하게 하려고

먼저 헛기침을 몇 번 하였다. 서림이 헛기침에 곽오주 비위가 뒤집혀서 “서종

사 말할 것 나는 벌써 다 알구 있소. 포두산지 무슨 산지 나오면 또 이천 광복

산으루 피란가잔 말이겠지.” 하고 꿰진 소리를 하여 서림이는 곽오주를 바라보

며 “곽두령 지레짐작이 용하시우.” 칭찬하듯 조소하듯 말대꾸를 한마디 한 뒤

에 다시 꺽정이를 보고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토포사가 만일 나구 보면 우리

가 여기 앉아 배기진 못합니다. 손바닥만한 산공에서 무슨 수로 토포사의 관군

을 막아냅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취할 만한 방책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

는 서흥 대현산성이나 재령 장수산성이나 또는 은율 구월산성 같은 큰 산성 하

나를 뺏어서 웅거하구 토포사의 관군을 막아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군량만 있으

면 몇 달 동안은 접전할 수 있을 겝니다. 그러구 나중에 모두 잡혀 죽더래두 우

리의 이름은 반드시 뒤에 남을 겝니다.” “도둑놈으로 뒷세상까지 욕을 먹잔

말이오?” 꺽정의 호령기 있는 말에 서림이는 말중둥이 끊이었다가 옆에 앉은

이봉학이가 “또 한 가지 방책을 무어요?”하고 물어서 이봉학이를 돌아보며 뒷

말을 계속하였다. “또 한 가지 방책은 전에두 대장께 말씀을 여쭌 일이지만 우

리가 한군데 붙박여 있지 말구 동에 가 번쩍, 서에 가 번쩍 종적을 황홀하게 하

는 것입니다. 가령 토포사가 황해도루 나온다 하거든 우리는 강원도에 가 있구,

또 토포사가 강원도루 온다구 하거든 우리는 평안도에 가 있어서 토포사를 한두

달만 헛다리 짚구 돌아다니게 하면 조정공사 사흘이라니 조정에서 하는 일이 어

디 오래갑니까? 토포사가 도루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구 우리가 어디루든지 길

을 뚫어서 대간 하나만 일으켜 세우면 토포사쯤 파직시키기는 여반장 용이합니

다.” “여보 서종사?”꺽정이가 불러서 “녜.” 서림이가 꺽정이를 향하고 바로

앉았다. “이왕에 다 말한 일인데 지금 새삼스럽게 두 가지니 세 가지니 말할

게 무어요? 토포사가 나오는 때 그렇게 하면 고만 아니오.” “그렇게 하자면

예비해 둘 일이 있습니다.” “무슨 예비요?” “우리의 소굴을 몇 군데 더 예

비해 두어야 임시 군색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소굴을 예비하다니?” “전

자에 광복산 갔을 때 인가가 있어두 군색을 여간 겪지 않았는데 더구나 인가 없

는 데 가선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 몇 군데 가서 우리가 거처할 만한 집칸을 미

리 세워두잔 말씀입니다.” 꺽정이가 서림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끄덕하였

다. “토끼두 세 굴을 판다는 셈으루 소굴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우선 먼

저 성천,양덕,맹산 평안도에 서너군데 만들어놓구 차차 다른 데두 더 만들두룩

하시면 제 생각엔 좋을 것 같은데 어떨까요?” “좋겠지.” 꺽정이가 한번 좋다

고 말한 바에는 다른 두령들이 아무리 좋지않다고 딴소리를 하여도 소용이 없지

만, 곽오주 한 사람 외에는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황천왕동이와 길

막봉이도 송악산 서림이의 꾀가 신통한 것을 보아서 전과 같이 곽오주와 한 동

아리가 되지 아니하였다.

청석골 도중의 공용 재물은 부근 동민과 인읍 이속이 갖다 바치는 것도 다소

없지 아니하나, 대개는 탐관오리나 토호거부의 재물을 뺏어들이는 것인데 한 달

에 한두 번 또는 네댓 번 두령들이 졸개를 거느리고 백 리 이백 리 밖까지 나가

서 뺏어들이었다. 뺏어온 재물에 도중의 소용없는 물건은 으레 서울이나 송도로

보내서 상목을 바꾸어다가 쓰고 남는 것을 저축하여 저축한 상목이 수천 동씩

곳간에 쌓일 때도 있었다. 이때 도중의 상목이 그다지 많진 못하나마 새 소굴을

열 군데 스무 군데 만들더라도 경비 부족할 염려는 조금도 없으므로 꺽정이가

서림이의 말을 좇아서 평안도에 소굴을 만들어 두기로 작정하고 보낼 두령을 고

르는데, 박유복이는 평안도 지방에 익숙하고 배돌석이는 집 역사 감역에 능란하

다고 두 사람을 같이 보내기로 하였다.

꺽정이는 무슨 일이든지 작정해 놓고 흘미죽죽 오래 두지 못하는 성미라 이

튿날 식전 조사에 전날 밤 작정한 두 가지 일을 다 명령으로 내리어서 각처에

돌릴 기별군은 당일내로 띄워 보내게 하고, 평안도 보낼 사람들은 떠날 준비를

차리라고 겨우 하루 말미를 주었다. 박유복이와 배돌석이가 양반 행세하고 부담

마들을 타기로 하여 역사에 부비 쓸 서총대 무명을 부담상자 네짝에 그들먹하게

다고 대목,소목,미장이 일하는 졸개 십여 명은 하인과 마부를 삼아서 데리고 가

기로 하였다. 일행이 너무 많으면 남의 이목에 두드려져서 의심을 사기 쉬우니

맹산 가서 모이기로 하고 뿔뿔이 떠나라고 서림이가 말하여, 다음날 식전에 박

유복이가 먼저 졸개 두 명을 하나는 하인,하나는 마부로 데리고 떠나고 그 뒤에

졸개 칠팔 명이 각각 괴나리봇짐을 해 지구 둘씩 셋씩 작반하여 떠나고, 맨 나

중에 배돌석이가 길양식과 다른 행구를 졸개 두 명에게 나누어 지우고 말,사람

넷이 같이 떠났다. 배돌석이는 해가 한나절 기운 뒤에 청석골서 떠난 까닭에 그

날 겨우 오십 리를 오고 그 이튿날 백 리를 오고 사흘 되는 날 역시 백 리를 와

서 봉산읍에서 숙소하게 되었다. 배돌석이가 황주 경천역말서 역졸 노릇할 때

봉산서 장교 다니던 황천왕동이를 자주 찾아다녀서 봉산 장교에 안면 있는 사람

이 많았으므로 마음에 서먹서먹한 생각이 없지 아니하나, 그 사람들이 그저 장

교를 다니란 법도 없고 설혹 그저 다니는 사람이 있다손 잡더라도 설마 어떠랴

생각하고 봉산읍에 숙소참을 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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