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식전에 꺽정이가 상목 열 필을 소홍이의 집 바깥 심부름하는 사람에게
지워가지고 남성밑골을 와서 얼마 안 되었을 때, 노밤이가 몸을 뒤흔들며 들어
오더니 성큼 마루 위로 올라와서 방 안을 들여다보고 절을 꾸벅꾸벅 세 번 하였
다. “너 어떻게 알구 왔느냐?” 꺽정이 묻는 말에 노밤이는 “선다님 오신 것
을 저야 모를 수가 있습니까.”대답한 뒤 곧 이어서 “선다님께서 서울 오셨으
면 오셨다구 제게 기별을 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선다님두 야숙하십니다.”말
하고 외눈을 희번덕거리었다.
“남소문 안을 다녀왔느냐?” “동소문 안을 다녀왔습니다.” “엇먹지 말구
정당히 묻는 말이나 대답해라.” “엇먹다니 천만의 말씀을 다하십니다. 남소문
안 놈들이 고약들 해서 저는 다시 안 갈랍니다.” “남소문 안에서 알면 저눔이
뼈도 못 추릴라구 저런 소릴 하지.” “선다님께서 오실 듯해서 지가 요새 날마
다 남소문 안에를 갔습니다. 어제두 가서 선다님 오셨냐구 물으니까 모른다구들
합디다. 그놈들이 저를 왜 속입니까. 그런 천하의 고약한 놈들이 어디 있습니까?
” “그래 동소문 안에 가서 나 온 줄을 알았느냐?” “선다님께서 동소문 안에
와서 기실 듯 생각이 들어서 허허실수루 식전 일찍 갔더니 웬놈이 문 밖에서 세
수를 하는데 낯이 익어 보이겠지요. 그래서 다시 보니 작년에 짐을 져다 주던
놈입디다.” “짐을 져다 주다니?” “지가 선다님을 따라올 때 선다님 짐꾼놈
이 제 짐까지 져다 주지 않았습니까?” “옳다, 네가 그때 쌀자루 하나 짐 위에
얹어달라구 호부했지. 그러니 네가 오늘 부자 상봉한 셈이냐?” “선다님께서
저를 보시구 실없은 말씀 안 하시면 심심하십지요?” “예끼눔.” “선다님 오
늘 절에 행차하십니까?” “그건 왜 묻는냐?”“선다님께서 행차하시면 저두 뫼
시구 갈랍니다.” “고약한 눔들이라구 욕을 하면서 젯밥은 얻어먹으러 갈라느
냐?” “그 집안 놈들은 고약하지만 주인 상주와 정분이 자별한 처지에 칠일재
를 안 가봐 줄 수 있습니까?” “네가 안 가면 섭섭하다구 할는지두 모르지.”
말하는 꺽정이와 옆에서 듣는 이봉학이며 황천왕동이가 모두들 웃는데 노밤이는
능청맞게 “섭섭하다구 하다뿐이겠습니까.”하고 꺽정이의 말을 대답하였다.
이때 신불출이와 곽능통이가 같이 들어와서 꺽정이에게 식전 문안을 드리었
다. 이봉학이와 황천왕동이에게는 먼저 와서 문안을 드리고 갔던 것이다. 꺽정이
가 마루에 놓아 둔 상목 덩이를 재에 보시 줄 것이라고 일러서 신불출이와 곽능
통이에게 내맡기는데, 노밤이가 “저 많은 상목을 다 보시 주실랍니까?”하고
물어서 “너더러 누가 그런 참견 하라느냐!”하고 꺽정이가 꾸짖었다. “선다님,
저 몇 필만 줍시오. 저이가 요새 지내는 게 아주 마련이 없습니다.” “너 줄 것
없다.” “중놈들 좋은 일 하시느라구 펀히 굶다시피 하는 부하를 봐주시지 않
는 법이 있습니까?” “이눔아, 되지 않은 소리 듣기 싫다.” “아무리 재하자
말씀이라두 바른 말씀은 바르게 들어 주세야지요.” “듣기 싫다는데 그래두 지
껄이는구나.” “더두 바라지 않습니다. 두서너 필만 저를 줍시오.”
꺽정이가 신불출이와 곽능통이를 내다보며 “그눔 밖으로 내쫓아라!”하고 분
부하여 노밤이가 두 시위에게 등밀려 나가면서 “선다님이 제게 이렇게 하실 줄
은 몰랐습니다.” “이래서야 어디 선다님을 믿구 살 수 있습니까.” “사람을
남게 오르라구 흔드시는 게지 도덕여울서 태평 잘 지내는 놈을 공연히 서울 백
사지땅에 끌어다 노시구.” 연해 투덜거리었다.
꺽정이가 이봉학이와 황천왕동이를 데리고 남소문 안에 와서 아침 상식 참례
하고 상식 끝에 서사 시켜서 따로 준비한 전을 드리고, 늦은 아침때 상주 일행
과 작반하여 흥천사를 나오는데 노밤이가 어디 있다 왔는지 뒤에 따라오면서 갖
은 미치광이짓을 다하였다.
흥천사는 태조대왕이 신덕왕후 강씨의 혼령을 천도하려고 이룩한 절이라, 처
음에 문안 황화방 정릉동에 있었는데 태조 승하 후에 태종대왕이 신덕왕후의 정
릉을 황화방에서 양주 사아리로 천봉할 때 절도 따라 옮기었었다. 태종이 신덕
왕후를 태조의 둘째 배위로 치지 아니하여 종묘에 묘주를 뫼시지 않고 능침에
능관을 두지 아니한 까닭으로 정릉은 임자 없는 묵무덤같이 되어서 무덤 뒤의
곡장이 군데군데 무너지고 무덤 위에 억새가 길길이 자랐으나, 흥천사만은 경산
절로 유수하여 문안의 큰 시주를 많이 받는 까닭을 법당도 일신하게 중수하고
중들도 근감하게 많았다. 요부한 한첨지 집에서 물력을 아끼지 않고 큰재를 하
므로 중들의 대접이 특별하여 상주의 가족은 차치하고 상주의 친구까지 칙사같
이 떠받들었다.
상사난 때 불사를 세우하는 것은 고려 적부터 내려오는 풍속인데, 불사의 큰
것을 들어 말하면 상사난 뒤에 한 차례 중들을 청하여 빈소에서 법문을 펴는 것
은 이름이 법석이니 야단스럽기가 짝이 없었고, 일칠일로부터 칠칠 사십구일까
지 칠일마다 절에 가서 재 올리는 것은 이름이 식재이니 물력이 많이 드는 중에
일칠일 첫재와 사십구일 마지막재에는 상가에서 물력을 더 많이 들일 뿐 아니라
친척 고구가 모두 와서 보시를 쓰므로 부비 드는 것이 엄청났었고, 또 소대상과
기타 기고날 중들을 집으로 청하여다가 제사 전에 먼저 만반 공양하는 것은 이
름이 승재니 중들의 인도를 받아야 혼령이 와서 운감한다고 믿었었다. 한양 개
국 후 칠팔십 년까지는 사대부가에서도 불사를 으레 하던 것인데, 성종대왕 즉
위 원년에 법을 세워서 이것을 금하였다. 사대부들은 국법이 두렵고 물의가 무
서워서 차차로 못하게 되고 여엄에서 옛 풍속을 지켜서 하기는 하나, 기강을 세
우고 풍속을 바로잡는 사헌부 관원들이 알고 까다롭게 굴면 국법에 비쳐서 죄책
을 당하게 되므로 관원을 잘 기이는 사람이거나 또는 국법을 우습게 아는 사람
이라야 비로소 예전 세월같이 상사에 불사를 세우할 수 있었다.
한첨지의 집은 대대로 불사에 정성을 들여서 어른 상사는 말할 것 없고 어린
아이 초상에도 법석을 차리고 사십구일 지난 뒤 백일에도 굉장한 재를 올리는
집인데, 흥천사가 단골 절인 까닭으로 조만한 재나 불공에는 얼굴도 내놓지 않
는 주장중이 나와서 여러 젊은 중들을 데리고 친히 재를 올리었다.
보시들을 쓰게 될 때 노밤이가 꺽정이를 와서 보고 보시 쓰게 상목 한 필만
달라고 간청하여 꺽정이가 상목 열 필을 세 사람이 똑같이 세 필씩 쓸 가량하고
한 필은 노밤이를 내주었다. 노밤이가 보시 놓는 것을 꺽정이는 보지 못하였으
나 놓았으려니 하였더니, 저녁때 재가 파하여 문안으로들 들어올 때 황천왕동이
가 노밤이 허리에 상목 한 필을 둘러감은 것을 보고 꺽정이에게 말하여 꺽정이
가 일부러 길가에 서서 뒤에 오는 노밤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밤이가 앞에 와
서 서는데 허리에 감은 상목이 홑두루마기 아래로 환히 다 보이었다.
“왜 안 가시구 여기 서셌습니까?” 노밤이의 묻는 말에 꺽정이가 들은 체 않
고 “너 허리에 감은 것이 무어냐?”하고 호령기 있는 말로 물었다. 노밤이는
제 허리를 굽어보며 “이것 봐, 훤히 보이네. 일껀 선다님 못 보시게 할라구 감
추었는데.”하고 능글능글하게 말하였다. “이눔, 네가 얼마나 죽구 싶어서 나를
속이느냐!” “지가 선다님을 기망할 길이 있습니까. 처음에 보시를 놨습지요.
아니, 놓다가 생각하니까 부처님이 쓸 것 같으면 아깝지 않지만 까까중이놈들이
쓸 것인데 아깝더구먼요. 그래서 도루 집었습니다.” “잔말 말구 풀어서 이리
내라.” “선다님, 주신 것을 도루 뺏으시렵니까?” “주먹으루 얻어맞기 전에
얼른 풀어내라!” 노밤이가 앙탈 않고 순순히 두루마기를 벗고 친친 감은 상목
을 풀어서 꺽정이 앞에 사려놓았다. 꺽정이가 황천왕동이를 돌아보며 “이것을
얼른 갖다가 절에 주고 오너라.”하고 일러서 황천왕동이가 상목을 거두어들고
흥천사로 다시 갈 때, 노밤이는 황천왕동이의 가는 뒤를 바라보면서 “선다님두
이심하십니다.”하고 꺽정이를 매원하였다.
꺽정이가 심부름도 시키고 재구경도 시키려고 겸삼수삼 절에 데리고 갔던 신
불출이와 곽능통이는 바로 남성밑골로 가라고 남소문 안 사람을 따라보내고, 이
봉학이와 황천왕동이를 끌고 원씨집으로 들어왔다. 남성밑골 박씨는 이미 인사
들 하고 보게 하였으므로 동소문 안 원씨와 김씨를 마저 보게 하려고 역로에 원
씨집에 먼저 온 것인데, 이 집 저 집으로 끌고 다니지 않고 원씨집에 앉아서 김
씨까지 데려다가 인사들을 시키었다. 이왕 들어온 길에 원씨의 반찬 솜씨를 보
이려고 저녁밥을 시키었더니, 군저녁에 별찬까지 장만하느라고 동안이 걸려서
밥들을 먹을 때 벌써 길거리에 행인이 그치었었다. 동소문 안에서 자게들 되었
는데 김씨집에 빈 사랑이 있지마는 전에 노인이 거처하던 구들인데 오래 폐방한
구들의 누기를 갑자기 점화하여 제할 수 없으므로 김씨의 쓰는 안방을 비어서
이봉학이와 황천왕동이를 재우고 김씨는 원씨집에 와서 외롱서 한방에서 자게
하고 꺽정이까지 삼내외 같이 잤다.
이튿날 원씨집에서 아침들 먹고 남소문 안으로 올 때 이봉학이와 황천왕동이
가 한온이를 잠깐 보고 바로 광복산으로 떠나겠다고 하는 것을 꺽정이가 오늘
소흥이에게 가서 놀고 내일 떠나라고 붙들었다. 한온이에게는 조객들이 오는 까
닭에 오래 앉았지 못하고 남성밑골로 왔다. 일기 좋은 날 방에 가만히 들어앉았
기 심심하여 남산에를 올라가자고 공론하는데, 박씨가 꺽정이를 와서 보고 송편
이 있으니 자시려느냐 물어서 송편으로 점심을 엇기고 나서려고 할 때 곽능통이
가 따라오고자 하는 눈치로 증왕에 남산을 올라가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여 꺽정
이가 곽능통이 외에 신불출이까지 다 데리고 나섰다.
남산 잠두를 향하고 올라오는 길에 한 곳에 와서 꺽정이가 걸음을 멈추고 뒤
에 오는 이봉학이를 돌아보며 “을사년 국상 나던 해 내가 여기를 올라와 보구
그 뒤 오늘이 처음일세.”하고 말하니 이봉학이도 꺽정이를 따라서 걸음을 멈춘
뒤 입으로 을부터 경까지 천간을 외면서 손가락을 꼽아보고 “그럼, 열여섯 해
만입니다그려.”하고 대답하였다. “그때는 캄캄한 밤에 여기 와서 헤매느라구
꽤 고생했네.” “어째 밤에 여기를 올라오셨습디까?” “선생님 심부름으루 왔
었어. 내가 이야기를 아니했든가?” “형님께 그런 이야기를 들은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이야기를 한 것두 같구 안한 것두 같구 의사무사해.” “대체 무
슨 심부름이에요?” 꺽정이가 이야기를 하려고 돌아서니 황천왕동이는 이봉학이
뒤에 섰다가 옆으로 나서고 신불출이와 곽능통이는 황천왕동이 섰던 자리로 들
어섰다.
“지금 영부사 윤원형의 형 윤원로가 인종대왕을 방자해 죽이려구 김륜이를
데리구 여기 와서 움집을 묻구 있었네. 김륜이란 우리 선생님하구 동문수학했다
는 술수하는 사람이야. 나는 처음에 까닭두 모르구 선생님 하라신 대루 여기 와
서 두 놈을 혼뜨검내서 쫓은 뒤에 움집 안에 있는 제웅에서 생년월일 써붙인 종
이쪽을 떼구 앞뒤에 꽂아놓는 바늘 사십여 개를 다 뽑구 그러구 제웅을 불에 살
라버렸네. 그 움집 묻었던 자리가 바루 저길세.” 꺽정이가 가리키는 곳은 조그
만 골짜기 안에 있는 자리 한 닢 깔 만한 편편한 둔덕이었다. “윤원로의 방자
를 형님이 제지하신 줄은 우리두 이때껏 몰랐으니까 세상에선 더구나 알 까닭이
없지요.”하고 이봉학이가 말하니, 꺽정이는 이봉학이를 빈정거리듯 또는 자기
몸을 조롱하듯 “세상에서 알면 나 죽은 뒤에 비 하나 세워 줄까?”말하고 한바
탕 껄껄 웃었다. “잠두에 올라가서 십만 장안을 굽어봐야 그 세상이 어디 우리
세상인가. 올라갈 재미 없네. 여기서 바루 소흥이게루 내려가서 술이나 얻어먹
세.”
꺽정이가 말하여 이봉학이와 황천왕동이가 다같이 한옆으로 비켜서서 꺽정이
의 앞서갈 길을 틔워놓을 때, 곽능통이가 황천왕동이를 보고 “저이나 잠깐 잠
두에 올라갔다가 남성밑골루 내려갑지요.”하고 묻는 것을 꺽정이가 듣고 “너
희두 같이 가자.”하고 말하였다.
소흥이는 꺽정이가 다 저녁때 올 줄 알고 방마루도 아직 어질더분한 채 치우
지 않고 있다가 초면 손님들을 데리고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심부름하는 계
집아이와 조석해 주는 여편네 외에 살림해 주는 늙은이까지 다 나서서 허둥지둥
비질, 걸레질 들을 하고 꺽정이 일행을 맞아들이는데, 꺽정이의 말을 드디어서
가외로 따라온 두 사람은 따로 뜰아랫방에 들여앉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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