꺽정이는 그날 봉산읍에서 단참에 검수역말을 와서 말을 여물 먹이느라고 지
체한 뒤 다시 쉬지 않고 빨리 왔는데, 서흥강을 건널 때 해가 꼬박 다 졌었다.
그러나 달이 밝아서 달빛을 띠고 서흥읍에 들어와서 자고 가려다가 앞길을 더
좀 줄이려고 용천역 와서 숙소하고, 이튿날 평산읍을 지날 때 봉산서와 같이 본
색을 알리려다가 친한 이방에게 말썽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대로 지나 김암역말
와서 중화하고 해 다 진 뒤에 청석골을 들어왔다. 말이 걸음을 잘하여 삼백 리
넘는 길을 이틀에 쉽사리 온 것이었다.
꺽정이가 박유복이를 데리고 떠나갈 때 이봉학이더러 자기가 다녀온 뒤 광복
산으로 가라고 이르고 또 자기없는 동안이라도 사랑을 쓰라고 허락한 까닭에,
여러 두령들이 전과 다름없이 매일 저녁 꺽정이 사랑에 모이는데 이봉학이가 사
람이 상냥하고 꺽정이같이 무섭지 아니하므로 자연 좀 무람들이 없었다. 이날
낮에 곽오주가 데리고 있는 아이놈들이 서로 쌈질하는 것을 곽오주가 빌어서 간
신히 뜯어말리더라고 길막봉이가 이야기하여 여러 두령이 곽오주를 조롱하느라
고 사랑이 떠나가도록 웃고 떠드는 판에 두목 하나가 사랑 앞으로 뛰어들어오며
“대장께서 오십니다.”하고 소리를 쳐서 여러 두령이 일어나서 부산히 벗어놓
은 의관들을 다시 차릴 때 벌써 꺽정이의 탄 말이 사랑 댓돌 아래 들어왔었다.
꺽정이가 방에 들어와 앉아서 두령들의 절을 받고 또 말 뒤에 쫓아들어온 두
목과 졸개들의 문안을 받은 뒤에 이봉학이를 보고 그 동안 별일 없었느냐, 광복
산 안신을 들었느냐, 두어 마디 말을 묻고 바로 마루에 섰는 신불출이를 내다보
며 “저녁 다 지났겠지? 내가 지금 시장하니 얼른 밥을 시키구 그러구 말을 잘
먹이라구 일러라.”하고 분부하였다. “형님이 타구 오신 말이 절따가 아니니 그
게 웬 말입니까?”하고 이봉학이가 묻는데 꺽정이는 웃으며 대답 않고 “내가
타구 온 말을 서종사 자세히 보았소?”하고 서림이를 돌아보았다. “신관이 어
떠신가 보입느라구 말은 미처 눈여겨 보지 못했습니다.” “끌어오래서 한번 보
우.” “제가 어디 말을 잘 압니까?” “알구 모르구 그대루 보구려.” 밖으로
끌어내간 말을 다시 끌어오라구 해서 달 밝은 마당 한중간에 세우고 서림이와
다른 두령 몇 사람이 말구경하러 마당으로 내려가려고 할 때, 배돌석이가 마루
에서 바라보고 “윤지숙이 말이구먼요.”하고 외치듯 말하였다. 꺽정이가 마루에
나와서 배돌석이더러 “네가 알아보는구나.”하고 말한 뒤 신발 신고 댓돌 아래
내려서서 말을 앞으로 끌어오라고 하여 말 목을 몇 번 툭툭 쳐주고 또 고삐 잡
은 졸개더러 “마굿간 첫칸에 갖다 들여매구 마죽에 콩을 많이 넣어줘라.”하고
일렀다.
늙은 오가가 꺽정이 돌아왔단 기별을 듣고 보러 와서 꺽정이가 오가와 같이
방으로 먼저 들어오고, 그 뒤에 다른 두령도 따라 들어와서 아래윗간에 좌정들
하였다. “윤지숙이의 말을 어떻게 뺏어 타구 오셨습니까?” 서림이가 묻는 것
을 꺽정이는 “이야기가 기니 밥이나 먹구 나중 이야기합시다.”대답하고 곧 오
가를 돌아보며 “요즈막은 설움을 좀 잊으셨소?”하고 물었다. “잊었으면 좋겠
는데 잊어지질 않습니다.” 오가의 대답에 “요새두 하루 몇 차례씩 산소에를
올라가신답니다.” 서림이가 발을 달았다. “웬 성묘를 그렇게 자주 다닌단 말이
오?” “속 답답할 때 무덤 앞에 가서 마누라를 좀 부르면 속이 좀 시원한 것
같아요.” “그럼 숫제 시묘를 살아보시구려.” “망발 토달아놓구 그런 생각두
없지 않아 있습니다.” “고적한 데서 여러 생각이 나시는 게니 첩 하나를 얻으
시우. 그럼 위로가 되시리다.” 오가가 대답은 없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왜
그러시우?” “내 맘 속에 살아 있는 마누라를 마저 죽이게요? 싫습니다.” “
내처 홀아비루 지내실 테요?” “지금 말씀한 거와 같이 내 몸은 홀아비래두 내
맘은 아직두 핫애빕니다.” “서종사가 정문 세울 공론을 낼 만두 하우.” 꺽정
이가 서림이와 이봉학이를 돌아보며 웃었다.
얼마 아니 있다가 열두 접시 쌍조치의 저녁상이 들어와서 꺽정이가 밥을 먹고
상을 물린 뒤에 비로소 평산서 황주까지 가며 대접받은 이야기를 일장 다하여
여러 두령들이 듣고 모두 좋아하였다. 그중의 서림이는 첨속으로 “쌈 않구 이
기는 것을 병법에 제일루 칩니다. 평산, 서흥, 봉산, 황주 네 골을 대병으루 내리
무찌른들 이보다 더 통쾌할 수 있습니까. 대장께서 대공을 세우시구 돌아오셨으
니 한번 큰잔치를 배설하구 승전곡을 울리며 질겁게 노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
다.”하고 말하다가 당치 않은 소리 한다고 꺽정이에게 핀잔을 받았다.
이튿날 서림이가 뒤로 두령 몇 사람을 충동이어서 잔치를 차리자고 꺽정이에
게 등장을 들다시피 하여도, 꺽정이는 종시 고개를 외치는 것을 이봉학이가 추
석에 떡섬이나 나우 만들고 소바리나 더 잡혀서 추석놀이 어울러 한번 잔치를
하자고 말하여 겨우 허락을 받았다. 승전곡을 울리자면 기악을 변통해야 한다거
니 오두령 부인 졸곡안이니 기악은 고만두자거니 잔치할 공론들이 분분한 중에,
남소문 안 한첨지가 작고하였다고 전인으로 통부가 와서 꺽정이는 곧 서울을 간
다고 하여 잔치고 추석놀이고 다 고만두게 되었다.
청석골 두령들이 거지반 한첨지 부자와 면분이 있지마는 그중에 서울을 자주
다니는 황천왕동이는 한온이와 교분이 두터운 사이라 초종 때 가보겠다고 하고,
이봉학이도 서울 가서 조상하고 서울서 광복산으로 가겠다고 하여 꺽정이는 이
봉학이와 황천왕동이더러 다같이 가자고 말하였다.
꺽정이가 청석골에 남아 있을 두령들을 보고 자기 서울 갔다올 동안 대소사를
서로 의논들 하여 조처하라고 이른 뒤에 “이번에 서울 가선 서울 있는 안식구
명색 넷을 모두 이리 데려올 작정인데 내가 한첨지의 장사까지 보구 오자면 그
안에 먼저들 내려보내게 될는지도 모르니 초막 너덧 채 미리 치워놔두게 해라.
”하고 말을 하니 다른 두령들은 그저 들을 만하고 있는데, 서림이가 웃으면서
“서울가서 치가하신 사람이 셋이라더니 셋이 아니라 넷입니까?”하고 물었다.
“하나는 기생인데 그 기생이 치가한 기집들버덤 더 떼기가 어렵소.” 꺽정이가
서림이의 묻는 말을 대답하고 나서 먼젓번 서울 갔을 때 소흥이에게 자기 본색
까지 알린 것을 비로소 여러 두령에게 이야기하였다. 서림이가 꺽정이 듣기 좋
게 소흥이를 조감 있는 기생이라고 칭찬한 뒤 “서울 여편네들을 초막 살림시키
는 건 너무 가엾지 않습니까?”하고 말하니 “그럼 대궐을 짓구 데려올까?”하
고 꺽정이는 허허 웃었다. “광복산과 평안도 세 군데의 안주인으로 한 사람씩
보내 두시면 어떨까요?” 꺽정이가 서림이의 말은 대답 않고 다른 두령을 돌아
보며 다른 말을 시작하였다.
이튿날 꺽정이가 서울길을 떠나는데 이봉학이, 황천왕동이 두 두령 외에 내행
을 내려보낼 때, 배행시킬 사람으로 신불출이, 곽능통이 두 시위와 집안 하인같
이 두고 부리는 졸개 두 명을 데리고 가기로 하여 서울서 온 전인까지 일행 여
덟 사람이 늦은 아침때 청석골서 떠나서 길에서 두 밤을 자고 사흘 되는 날 일
찍 서울을 들어왔다.
한첨지 큰집에로 와서 보니 사랑방에 빈소를 만들고 앞마루에 달아내어서 여
막을 지었는데, 여막 안에 한온이가 혼자 있었다. 한온이의 형 한윤이는 폐인이
라 상주 노릇도 못하는 듯 조상을 받지 않았다. 조상을 마치고 한온이와 수작을
하는 중에 다른 조상 손이 왔다고 하여 꺽정이가 이봉학이와 황천왕동이를 데리
고 여막 밖에 나섰는데, 머리사랑에서 일보던 서사가 쫓아와서 “어디들 들어앉
으셔야 할 텐데 조용한 방이 있어야지오.”하고 여막 안에 들어가서 주인 상주
와 수어하고 나오더니 꺽정이를 보고 “그전에 와서 기시던 방을 치워 드릴께
저를 따라들 오십시오.”하고 일각문 밖에 있는 옆집으로 인도하였다. 안방, 건
넌방에 사람들이 가득가득 있는데, 서사가 안방 사람을 다른 데로 보내고 방을
치워 주었다. 꺽정이가 서사더러 바쁜데 미안하지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여 황
천왕동이를 밖에 내보내서 졸개들 지고 온 짐을 들여오게 하여 가지고 온 부의
를 내주고 부의 외에 상목 온 필 두 필을 내주며 전 지낼 제물을 장만하여 달라
고 부탁하였다.
한첨지의 집은 남소문 안 적당으로 양대의 다아놓은 지정이 있는 까닭에 상가
와 와서 붙박여 있는 사람도 버걱버걱하도록 많거니와,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더욱 많아서 뻔찔 그치지 아니하는 데 사내는 어뜩비뜩 오합잡놈이 태반이요,
여편네는 수상스러운 무리개짜리가 다수이었다. 말하자면 서울 안 무뢰배의 도
회청인 듯하였다. 이봉학이가 꺽정이를 보고 이목이 너무 번다해서 재미없으니
어디든지 조용한 데로 거처를 옮기자고 말하여 꺽정이는 그 말을 쫓아서 한첨지
집에서 가까운 남성밑골 박씨집 안방을 치우고 세 사람이 옮기고 두 시위와 두
졸개를 마저 옮기려고 박씨집 이웃에 방 하나를 빌렸더니, 방이라고 됫박만 하
여 장정 넷이 잘 수가 없으므로 두 졸개는 동소문 안 김씨집 빈 행랑에 갖다 두
었다.
꺽정이 일행이 상경한 이튿날이 한첨지 작고한 지 한이레라 동소문 밖 흥천사
에 나가서 칠일재를 올린다고 하여 꺽정이, 이봉학이, 황천왕동이가 다같이 재구
경을 간다고 말하였는데, 재에 보시 쓸 포목을 따로 유렴하여 가지고 오지 아니
하여 꺽정이의 객지 비용 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봉학이의 광복 노수 쓸 것
까지 알뜰히 다 보시에 쓰기로 하였다. 보시를 많이 쓰면 재주인의 낯이 나는
까닭에 더 있으면 더 써도 좋지만 한온이더러 대라기 외에는 달리 변통할 길이
없었다.
“한첨지집 서사더러 말씀해 보시지요.” 황천왕동이가 말하는 것을 꺽정이는
듣고 대답이 없는데, 이봉학이가 꺽정이 대신 대답하듯 “아무리 나중 회계는
해주더라두 당장 경황없는 집에 말하기가 무렴하지 않아?”하고 말하였다. 꺽정
이가 이봉학이와 황천왕동이더러 “좀 창피하지만 내 한 군데 가서 물어보구 오
지.” 말하고 나와서 장찻골다리 소흥이를 찾아왔다. 서로 만나 반기는 수작이
끝난 후에 꺽정이가 한첨지 초종에 온 것과 흥천사 칠일재에 갈 것을 말하고 보
시 쓸 상목 열 필쯤 변통해 주겠느냐고 물으니 소흥이가 웃으면서 “한 동이라
도 쓰실라면 쓰십시오.”하고 선선하게 대답하였다. “지금 자네게 있나?” “내
일 절에 나가실 때 가지고 가시게 해드리지요. 그럼 낭패없지오?” “뉘게서 꾸
어 줄 작정인가?” “나도 그만한 근력은 있으니 염려 마세요.” “내가 갚을
때는 장리구 곱절이구 자네 요구대루 해서 갚음세.” “갚으신다면 나는 안 드
릴테요.” “갚지 말라면 나는 안 쓰겠네.” “내게 선다님 게고 선다님게 내게
지요. 갚는 건 다 무에요?” “그만침 알구 가겠네.” “수선한 상가에 와서 주
무실라고 그러세요? 내게서 저녁 잡숫고 주무시지요.” “이번에 내 동생을 둘
이나 데리구 와서 가봐야겠네.” “다같이 와서 주무셔도 좋지 않아요. 저 아랫
방을 치우까요?” “고만두게. 이따 봐서 내가 자러 옴세.” 꺽정이가 남성밑골
로 들어와서 이봉학이와 황천왕동이더러는 변통될 포서가 있으나 내일 식전에
보아야 알겠다고 어리뻥뻥하게 말하여 두었다.
석후에 이봉학이와 황천왕동이만 남성밑골서 자게 하고 꺽정이는 장찻골로 자
러 왔다. 소흥이가 술을 사다 두어서 일 년 중 제일 밝은 달 아래에서 미인이
권하는 술잔을 손에 드니 짬짬이 있을 이봉학이와 황천왕동이가 자연 마음에 걸
리었다. “술이 있을 줄 알았더면 동생들을 데리구 올 걸 그랬네.” “내일 저녁
에 같이 오시지요.” “내일 절에서 늦게 들어오면 오게 될는지 모르겠네.” “
그럼 모레 오시지요.” “모레 동생들이 시골을 안 가면 데리구 옴세.” “저녁
한 끼 대접하면 어떠까요?” “그건 주인의 처분이지.” “그럼 저녁들 잡숫고
밤까지 노시게 하세요.” 밤이 이슥한 뒤 자리에를 누워서 꺽정이는 봉산군수
윤지숙을 두 차례 망신시킨 것을 이야기하고, 소흥이는 뒤로 모은 천량 손 모아
서 신실한 사람에게 맡긴 것을 이야기하여 이야기에 깨가 쏟아져서 자지들 않고
닭을 울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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