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랑하는 첩 계향이와 같이 앉아서 어린 아들의 재롱을 볼 때는 한숨이
부지중 절로 나왔다.
황천왕동이가 떠나간 지 사흘 만에 되돌아와서 보고 들은 청석골 대소사를
꺽정이에게 이야기하는데, 가던 전날 노밤이 까닭으로 한바탕 난리 꾸민 이야기
를 들은 대로 다 옮기고 나서 “노밤이는 형님께서 오셔서 조처하실 때까지 함
부루 나다니지 못하두룩 감금해 두라구 이르구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잘했다.” 하고 꺽정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황천왕동이
돌아오던 이튿날 꺽정이가 이봉학이와 같이 장수원 길을 떠나는데, 황천왕동이
는 안식구들을 보호하고 있으라고 광복산에 머물러 두고 신불출이와 곽능통이는
무기와 길양식을 지워 가지고 데리고 떠났다. 광복산서 장수원까지 삼백이십여
리 길에 첫날 백 리, 이틀에 이백 리를 접어버리고 나머지 일백 이십여 리를 이
틀에 별러 온 까닭에, 광복산을 떠난 지 나흘 되던 날 점심때 장수원 원집에 와
서 청석골서 오는 일행을 반나절 동안 기다리었다. 배돌석이, 길막봉이, 서림이
세 사람이 다 저녁때 겨우 대어와서 저녁 전에는 이야기할 사이도 별로 없었고
저녁들을 먹은 뒤에 꺽정이가 신불출이와 곽능통이더러 방문 밖에 나가 서서 원
주인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금하라 하고, 청석골서 온 세 사람에게 계획을 이
야기하여 들리니 길막봉이는 당장 전옥문을 때려부술 것 같이 주먹을 부르쥐며
좋다고 말하고 배돌석이는 팔매돌을 많이 가지고 나오지 아니하여 내일 준비해
야 하겠다고 말하고 서림이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눈만 까막까막하였다. “서종
사는 좋은 꾀나 생각해서 말 좀 하우.” “글쎄올시다. 좋은 계책이 있을는지 생
각해 봐야겠습니다.” 서림이가 한동안 천장도 치어다보고 자리도 내려다보고
하다가 헛기침을 한두 번 한 후 꺽정이를 바라고보 “지금 제 생각엔 상중하 세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하고 말하여 “세 가지가 뭐뭐요?” 하고 꺽정이가 물
었다. “창졸간에 생각한 계책이라 세 가지가 다 신통치 않습니다. 맘에 드시지
않더래두 꾸중은 마십시오.” 서림이가 먼저 발뺌부터 하고 나서 비로소 계책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전옥에 갇힌 사람들이 불쌍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대장께
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구 파옥하려구 하시는 건 너무 과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파옥할 계획을 파의하시는 것이 상책일 것 같습니다.” 이봉학
이가 서림이의 상책을 듣고 연해 고개를 끄덕이니, 꺽정이는 흰자 많은 눈으로
이봉학이를 흘겨본 뒤 서림이더러 “내가 한번 맘에 작정한 일이니까 그 따위
상책은 아무짝에 소용이 없소.” 하고 불쾌스럽게 말하였다. “그러면 중책을 말
씀하겠습니다.” “소위 상책이란 게 소용이 없으니 중책, 하책은 들을 것두 없
소. 고만두우.” “중책은 파옥할 준비를 말씀하려는 것이올시다.” “무슨 준비
요?” “전옥은 조그만 골 토옥과 달라서 파옥하자면 큰일인데 준비 없이 되겠
습니까?” “글쎄, 무슨 준비란 말이오?” “가령 내일 밤 오경에 파옥하러 가
신다구 잡구 말씀하면 내일 저녁 성문 닫히기 전에 사람을 서너너덧씩 작패해서
뿔뿔이 문안에 들여보내서 빈집이나 으슥한 곳에 은신들 하구 있다가 밤이 사경
쯤 되거든 전옥 전후좌우 십여 간 내외 되는 곳과 위아래 대궐 좌우 옆과 종묘
앞과 육조 뒤와 좌우포청, 한성부, 내수사, 장흥고 근처에 있는 조그만 초가집들
을 골라 들어가서 불씨를 뺏어가지구 그 집과 그 이웃집에 불들을 놓게 합니다.
아닌밤중에 화재가 여러 군데 나서 서울 안이 발끈 뒤집히거든 그 틈을 타서 파
옥하시는 것이 중책은 될 줄루 생각합니다.” “그러자면 사람이 얼마나 들겠
소?”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만 적어두 사오십 명은 있어야지요.”
“하책이란 건 또 무어요? 마저 들어봅시다.” “하책은 사람 한 십여 명 데리
구 가서 파옥해 보시는 게올시다. 다른 사람들 안 데리구 단 네 분이 가셔서는
일이 애초에 성사될 가망이 없습니다.” “어째서?” “파옥하는 데는 다른 사
람이 더 간다구 별루 더 나을 것이 없지요만, 옥중에 갇힌 다섯 사람이 다들 제
발루 걷지 못하기가 쉬운데 네 분이 어떻게 시람을 주체하실랍니까. 게다가 만
일 군관과 군사들이 앞뒤루 대어들게 되면 네 분은 앞을 짓치구 뒤를 막느라구
다섯 사람을 돌보실 새가 없을 테니 네 분 외에 열 사람쯤이나 더 가야 번갈아
업구라두 오지 않습니까.” “청석골서 한 오십 명 불러올려다가 불 놓는 계책
을 써봐두 좋겠지만 그러자면 날짜가 너무 늘어지는걸.” 꺽정이 말끝을 이봉학
이가 “일만 여의하게 된다면 날짜야 좀 늘어진들 어떻습니까?” 하고 말하니
“저런 사람 봐. 청석골 내왕하는 동안이 하루이틀인가. 그 동안 우리는 여기서
내처 묵잔 말두 안 되구 갔다가 다시 오잔 말두 안되구 어떻게 하잔 말이야.”
꺽정이가 핀장을 주었다. 서림이가 꺽정이를 보고 “가까운 데 사람을 불러 써
보시지요.” 하고 말하여 “가까운 데 어디?” 하고 꺽정이가 물었다. “혜음령패가
사람이 몇이나 되리라구.” “그래두 모두 주워 모으면 오십 명이야 되겠습지요.”
“정가 최가가 저의 일이 아닌데 그렇게 알뜰히 다 모아가지구 올까.” “상갑이 판
돌이하구 친한 길두령이 가서 서울 안에 불 놓구 전옥 파옥한단 말은 말구 그저
사람이 많이 드는 큰일이 있으니 사람을 모을 수 있는 대루 많이 모아가지구 가
자구 하면 뒤의 노느목을 바라구 저이 자식놈들까지라두 다 데리구 옵니다.”
“노느목을 바라구 왔다가 노느목이 없는 줄 알면 낙망이 되어서 일들을 잘할라
구.” “일이 성사되면 상급을 후히 주마구 낙망들 안 되두룩 어루만지시지요.”
“어디 그렇게 해봅시다.” 꺽정이가 서림이의 말을 좇아서 길막봉이 시켜 혜음
령패를 불러오기로 작정하였다. 꺽정이는 길막봉이를 곧 밤길로 떠나보내고 싶
었으나, 이날 밤에 가을비가 제법 소리를 치고 와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그대로
하룻밤을 같이들 지내었다. 이튿날 식전 길막봉이를 떠나보낵 때 꺽정이가 처음
에 당일로 다녀오라고 이르다가 사람을 모으는 동안이 있어서 당일 오기 어려우
리라는 서림이의 말을 듣고 하루 말미를 주어서 닷샛날 저녁전에는 틀림없이 대
어오게 하라고 고쳐 일렀다. 혜음령패가 오면 오는 날 저녁과 가는 날 아침 두
끼는 먹어야 할 터인데 장수원 온동네 여닐곱 집에 양식 주고 밥을 시킬 수는
있겠지만, 양식까지 대라기는 어려워서 양식 변통할 공론이 났다. 어디 가서 부
자집 하나를 떨어다가 양식거리 외의 다른 부비까지 쓰자고 서림이가 발론하여
이봉학이와 배돌석이가 모두 좋다고 찬동할 때 꺽정이는 다른 생각을 먹고 “우
리 오늘 홍천사에나 가볼까.” 하고 말하였다. “절을 떨게요?” 서림이 묻는 말
에 꺽정이가 아니라는 대답으로 고개를 외쳤다. “혹시 오늘들 올는지두 모르니
양식을 시급히 변총해 놔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홍천사에를 가볼 생각이
났소.” “홍천사에 가서 양식을 꾸어 오실랍니까?” “글쎄, 어디 가봅시다.”
꺽정이가 한첨지 일칠일재에 갔을 때 홍천사 주장중이 속이 택택하단 말을 들은
까닭에 그 주장중을 가서 보고 떼를 쓰려고 생각한 것이었다. 절에 놀러가는 셈
을 잡고 가자고 꺽정이가 세 두령, 두 시위를 다 데리고 홍천사에 와서 주장중
을 찾아보았다. 주장중은 꺽정이와 이봉학이를 한첨지 재에 보시 많이 쓰던 시
주로 대접하여 정결한 방을 치워서 들어들 앉게 하고 특별한 찬을 장만해서 점
심들을 먹게 하였다. 점심이 끝난 뒤에 꺽정이가 주장중을 보고 “내가 대사보
구 할 말이 있네.” 하고 말시초를 내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객중에
급히 쓸 일이 있으니 상목 댓 필만 취해 주게.” “있으면 취해 드리겠습니다만,
없어서 못 취해 드립니다. 미안합니다.” “댓 필을 못 취해 주겠다? 그러면 열
필만 내게.” “다섯 필두 없는데 열 필이 어디서 납니까? 소승을 놀리시느라구
실없은 말씀을 하십니다그려.” “네가 나를 누군지 모르지? 나는 청석골 임꺽
정이다. 상목 열필을 당장에 내놓지 않으면 네 모가지를 돌려앉힐 뿐 아니라 네
절 기둥뿌리를 빼놓을 테다!” 주장중이 얼굴빛이 노래져 가지고 한동안 아뭇소
리 못하고 앉았다가 다 죽어가는 사람의 목소리로 “나가서 주선해 보겠습니다.
” 하고 말하며 바로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꺽정이가 눈을 부라리며 “내 말두
안 들어보구 어딜 나가려구 하느냐!” 하고 꾸짖어서 도로 주저앉히었다. “네가
밖에 나가서 어디루 도망할 생각이냐, 뒤루 포청에 밀고할 생각이냐?” “아닙
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 앉아서 상좌를 불러다가 말해라.” “상좌를
누가 불러옵니까?” “내 사람을 시켜두 좋다.” 주장중이 신불출이에게 상좌의
이름을 일러주어서 신불출이가 그 상좌를 불러온 뒤에 주장중은 주머니 끝에 찬
열쇠를 끌러서 상좌를 주며 “문안 시주가 불공드려 달라구 맡긴 상목이 궤 속
에 있다. 아마 네댓 필 될 게니 다 꺼내오너라.” 하고 이르는데 꺽정이가 신불
출이에게 “너 상좌하구 같이 가서 상목을 들구 오너라. 그러구 대사 말대루 궤
속에 있는 상목은 있는 대루 다 가져오너라.” 하고 분부하였다. 신불출이를 보
낼 것이 없다고 주장중이 밀막는 것을 꺽정이는 들은 척 안하고 “어서 가거라.
” 하고 재촉하여 상좌의 뒤를 딸려보냈다. 주장중이 네댓 필 되겠다던 상목이
가져온 뒤 보니 거의 삼곱절 열두 필이나 되었다. “열 필을 가져가기루 했으니
두 필은 내놓구 열 필은 다섯 필씩 묶어서 너하구 능통이하구 둘이 걸머지구 가
자.” 하고 꺽정이가 신불출이에게 말을 일렀다. 신불출이와 곽능통이가 상목을
걸머지기 좋도록 묶은 뒤에 세 두령더러 두 시위를 데리고 먼저 가라고 하고,
꺽정이는 뒤에 떨어져서 주장중을 붙들고 앉아 있다가 먼저 간 사람들이 멀리
갔을 만한 때 비로소 주장중을 보고 가노라고 인사하고 홍천사에서 나와서 장수
원으로 돌아왔다. 홍천사 주장중은 탐심 많고 인색하여 남이 주는 건 받지 않는
일이 없고 남이 달라는 건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상목 열 필을 꺽정이에게 뺏기고 아까워서 가슴이 쓰리고 분해서 치가 떨리었
다. 꺽정이의 가는 곳을 알아서 포청에 고발하려고 꺽정이가 절에서 나간 뒤에
바로 영리한 불목하니 하나를 쫓아보내서 뒤를 밟게 하였다. 홍천사 대중이 몰
려오든지 또는 좌우포청이 쏟아져 오든지 꺽정이는 조금도 겁날 것이 없으나,
소소한 일로 앞의 큰일에 방해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조심조심하여 장수원으로
가는 뒤를 밟지 못하도록 일행 여러 사람을 먼저 보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올
때도 곧장 오지 않고 동소문 밖 삼선평길로 멀리 동아왔었다. 주장중이 보낸 불
목하니가 한동안 허덕지덕 꺽정이 뒤를 밟아오다가 중간에서 떨어져서 다리를
쉬어가지고 천천히 절로 돌아가서 그 사람이 동소문 안에 들어간 뒤 어디로 새
었는지 아무리 찾아보아도 눈에 보이지 않더라고 주장중에게 말하여, 주장중은
즉시 상좌를 포청에 들여보내서 꺽정이가 도당을 많이 거느리고 절에 나와서 상
목 십여 필을 뺏어가지고 동소문 안으로 들어왔다고 고발하게 하였다. 좌포장
김순고가 좌포청에서 홍천사 중의 고발을 받고 포교들을 내놓아서 꺽정이의 종
적을 염탐시키었다. 우포청에서도 이것을 알고 역시 포교를 내놓아서 좌우포청
포교들이 성안, 성 밖으로 가을중 쏘대듯 하였다. 길막봉이가 바눌티 정상갑이
집에 와 앉아서 상갑이의 짝패 최판돌이까지 청해다 놓고 장수원에 대장과 두령
몇 사람이 모여서 무슨 일을 경영하는데 의외로 사람이 많이 들게 되어서 가까
운 데로 청병하러 왔으니 사람을 많이 모아가지고 장수원으로 가자고 말한즉,
최판돌이는 그저 들을 만하고 있고 정상갑이는 일을 알려고 여러 가지로 캐어물
었다. 구변 없는 길막봉이가 한참 끙끙거리다가 일은 가보면 알 테니 미리 묻지
말라고 막잘라서 정상갑이가 더 묻지는 못하나 진기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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