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온이와 서림이가 탑고개에 나와 앉아서 도부장수들 오기를 기다리다가 하도
오래 오지 아니하여 졸개 하나를 금교까지 보내 보았더니 금교서는 떠났고 탑고
개에는 오지 아니한 것이 분명 용고개길로 돌아나간 모양이였다. 금교역말 갔다
오는 편에 약주와 돼지고기를 사와서 고기 안주하여 술이나 먹으며 비 그치기를
기다리자고 서림이가 한온이와 공론한 뒤, 두목과 졸개들을 동네 사람의 집에
가서 쉬라고 흩어보내고 단둘이 주막방에 앉았을 때 평산. 봉산 선비들이 주막
에 와서 술을 찾았었다. 상제는 한온이요, 탕창은 서림인데 서림이는 외가 성이
엄가인 까닭으로 본성명을 감출 때 흔히 엄가로 변하였었다. 서림이가 선비들을
방안에 들일 때는 심심파적이나 할 생각이요 해칠 뜻이 아니었는데, 주육을 권
하다가 얼얼지육 소리를 들은 것도 마음에 미타한데다가 서가놈이니 창귀니 욕
설하는 것을 듣고 악심이 생기어서 방 밖에 나와서 봉당에 있는 졸개 넷에게 빨
리 여럿을 불러모으라고 분부하였다. 그 졸개 넷은 목들이 컬컬하여 탁배기 한
사발씩 얻어먹으러 왔었는데, 주인말이 방안에서 고기가 남아 나오거든 고기 안
주로 먹으라고 하여 술상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졸개 넷이 다 함께
동네로 뛰어간 뒤 얼마 아니 있다가 방안의 선비들이 주인을 불렀다. 술값을 치
러 주고 떠나려는 모양이라, 서림이가 졸개들 오기까지 지체를 시키라고 넌지시
주인에게 말을 일렀다. 주인이 방문을 열고 “왜 부르셨습니까? ” 하고 물으니
“술값 받으라구 불렀네. ” 하고 신진사가 말하였다. “안주두 변변치 않은데
많이야 줍시사구 할 수 있습니까. 쌀 한말 값만 냅쇼. ” “큰 병만두 못한 방구
리루 술 두 방구리에 쌀 한 말 값을 내라? 되우 비싼 술일세. ” “비싸지 않
습니다. ” 정생원이 앞으로 나앉으며 주인에게 이놈을 붙이었다. “왜 이놈 저
놈 합시오? ” “이 도둑놈아, 술 두 방구리에 술 한 말 값이 무어냐? 청석골이
적굴이라더니 주막쟁이놈까지 도둑놈이구나. ” “내가 샌님댁에 가서 무얼 훔
쳐왔소? 왜 도둑놈이라시우? ”“양반 앞에서 내라니 저런 죽일 놈 봤나. ” “
내라구 말구 소인이라구 하란 말이오? 소인이란 말은 내 평생에 한번두 입밖에
내본 일이 없소. ” “오, 네가 버릇을 못 배웠으니까 좀 배워야겠다. ” “어려
서 아버지 어머니한테 못 배운 버릇을 지금 다 늙어 뉘게 배워요? ” “오늘 우
리가 먹은 술값을 봉산읍내 정생원댁에 와서 받아 가거라. ” “나는 외상술 팔
지 않았소. 쓸데없는 말 말구 술값 내구 가시우. ” “술값을 안 내구 가면 우리
를 어쩔 테냐? ” “술값을 안 내면 백날이라두 못 가시지요. ” “이놈, 네가
양반들을 사구류할 작정이냐! ” “양반 행티 너무 마시우. ” “양반 행티라니
저런 죽일 놈의 말버릇이 있나. ” 정생원이 주막 주인과 아귀다툼하다시피 하
는 것을 한생원이 가만히 듣다가 못하여 “여보게 치명이, 내 말 듣게. 이런 데
와서 술을 먹는 것이 우리의 불찰이니까 한 말 값이든 두 말 값이든 달라는 대
루 주구 가세. ” 하고 정생원더러 말한 뒤에 곧 주막 주인을 보고 “쌀 한 말
값이 두자 상목으루 몇 밀이야? ” 하고 쌀값을 물었다. “올 같은 흉년 쌀금에
다섯 필이야 안 주실 수 있습니까. ” 쌀 한말에 두자 상목 다섯 필이란 말도
엄청나는 말이건만, 한생원은 두말 않고 자기의 가진 두 필을 먼저 내놓고 다른
사람들더러 다섯 필을 채우라고 말하였다. 선비들이 상목을 모아서 술값을 치르
는 중에 두목과 졸개들이 풍우같이 몰려왔다. 서림이가 방안의 선비들을 죄다
잡아 묶으라고 호령하여 이십여 명이 짚신발 신은 채 방안에들 뛰어들어와서 선
비 하나에 둘씩 셋씩 달려들어서 방 밖으로 끌어내다 앉혀놓고 바 새끼 있는 대
로 갖다가 뒷결박들을 지웠다.
서림이와 한온이가 장대고 나간 도부장수들은 만나지 못하고 뜻밖에 만난 선
비들을 잡아가지고 산속으로 들어왔다. 꺽정이가 선비들 잡아왔단 말을 듣고 서
림이를 보고 “그까지 낙방거지들은 왜 잡아왔소? ” 하고 책망 반 물으니 “그
놈들이 우리 욕을 망유기극하게 하기에 분풀이하려구 잡아왔습니다. ” 서림이
가 잡아온 까닭을 말하였다. “그럼 지금 잡아들여다가 분풀이를 해보구려. ”
“선비놈들에게는 첫째 위의를 보이는 게 좋으니 내일 아침 조사끝에 처치하지
요. ” “아무리나 생각대루 하우. ” 이튿 날 아침 도회청에서 조사가 끝난 뒤
에 서림이가 꺽정이를 보고 “어제 잡아온 선비들을 어떻게 처치할까요? ”하고
의향을 물으니 “다 죽여버리든지 다 놔보내든지 잡아온 사람이 맘대루 하우.
” 하고 꺽정이는 서림이에게 밀어 맡기었다. “그럼 지금 선비들을 하나씩 잡
아다가 혼구멍을 내겠습니다. ” 하고 말한 뒤 서림이가 곧 자기의 교의를 대청
끝으로 옮겨놓고 나와 앉아서 두목과 졸개들을 지휘하여 형장제구까지 차려놓게
한 뒤, 가두어 둔 선비들을 하나씩 잡아오되 그중의 정생원이란 자를 맨 먼저
잡아오라고 청령하는 졸개들에게 분부하였다. 얼마 동안 안 지나서 졸개 서넛이
정생원의 등을 짚고 또 좌우팔을 잡아끌고 들어왔다. “게 끓려라! ” 서림이 호
령 아래 졸개들이 정생원을 뜰 아래 끓려앉히었다. 대청 위 교의에 걸터앉은 서
림이와 뜰 아래 맨땅에 끓려앉힌 정생원과의 사이가 예사로 하는 말도 서로 들
릴 만하건만, 서림이가 위의를 보이느라고 뜰 위의 두목과 뜰 아래의 졸개로 말
을 받아내리고 또 받아올리게 하였다. “사람을 창귀라고 욕하는 입을 여기서
한번 다시 놀려봐라! ” “모르구 잘못했소. 용서하우. ” “용서해 줍시오 해두
용서를 할둥말둥한데 용서하우? 용서 못하겠다. 탑고개서 먹은 술값을 봉산으루
받으러 오라구? 그런 짓하란 것이 논어에 있더냐, 맹자에 있더냐? 한 일을 미루
어 열 일 알지. 네가 양반 자세하구 갖은 못된 짓 다 했을 게다. 너의 동네 백성
을 위해서라두 너는 죽여 없애야겠다. ” “술값으루 말씀하면 탁주 두 방구리
에 쌀 한 말 값을 내라니 이런 술값이 세상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세상 천하에
없는 술값을 내라는 것이 꽤씸해서 봉산으루 받으러 오라구 억탁의 말을 했습니
다. 그러구 이몸이 거향을 잘하구 못하는 건 봉산으루 알아보시면 대번 아실 일
이니까 구렁이 제 몸 추듯 말씀하지 않습니다. ” “네 말대루 다른 죄는 없다
구 치더라두 내 면전에서 욕설한 죄만 해두 열 번 죽어 마땅하다. ” “임장군
은 만부부당지용을 가지셨구 서모사는 지모가 제갈공명 같으시다구 말씀해야 옳
을 것을 그렇게 말씀 안한 것이 잘못인 줄 깨닫구 복복사죄하지 않았습니까.
항자는 불살이라니 잘못했다구 사죄하는 걸 죽이는 법이 있습니까. ” “그놈
더러운 놈이다. 빨리 내다 목을 비어라! ” 하는 천둥같은 호령이 대청 안침에서
나왔다. 꺽정이가 호령한 것이다. 좌우에 벌려 섰던 졸대들 중의 오륙명이 일시
에 내달아서 정생원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데, 정생원은 벌벌 떨면서 서림이를
치어다보고 “그저 목숨만 살려주시면 결초보은 하겠습니다. ” 하고 우는 소리
를 하였다. “목숨은 아까운가 부다. 그렇게 살구 싶거든 요순우탕 문무주공 공
자 맹자 주자 하늘에 기신 여러 조상님네 굽어 살피셔서 잔명을 보전하게 해줍
소서 해봐라. 혹 살는지 모르니. ” 서림이가 조롱하느라고 한 소리를 정생원은
살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조롱인 줄도 모르고 주문 외듯 그래로 옮기었다. 서림
이가 한바탕 깔깔 웃은 뒤 “그놈 삼천육부지자로구나. 참말 더러운 놈이다. 그
놈은 대장 명령대루 끌어내다가 목을 비구 그러구 다른 놈을 하나 끌어오너라.
” 하고 분부하여 정생원은 여러 졸개들에게 끌려나갔다. 정생원 다음에 평산
선비가 하나가 잡혀았다. 뜰 아래 맨땅에 끓어앉아서 대청 위 교의에 걸터앉은
서림이를 치어다보며 자기는 말 한마디 잘못한 일이 없는데 무슨 죄가 있는 지
죄목이나 알아지라고 말하였다. “네 얼굴빠대기를 보니 양반 자세하구 동네 백
성들에게 행학 많이 했을 게다. 그 죄가 죽어두 마땅하다. ” 서림이가 죄를 얽
어서 으름장을 놓으니 그 선비는 행학한 일 없다고 누누이 발명하고 또 살려달
라고 구구이 빌었다. “용서없이 죽일 것이로되 인생이 불쌍해서 약약히 볼기깨
나 때려 용서할 테니 그리 알아라. ” “유죄무죄간 때리면 맞는 것이지만 이왕
맞을 바엔 형문을 맞겠습니다. ”상사람이면 혹 형문두 치지만 양반은 반드시
볼기를 치는 것이 우리의 법이다. “ ”그럼 할 수 있습니까. 볼기라두 맞겠습니
다. “ 서림이가 졸개들에게 형틀과 태장을 내놓으라고 분부할 때 꺽정이가 뒤
에서 ”여보 서종사, 볼기는 다 무어요? 그놈두 먼저 놈같이 목을 비라
구 내주우. “ 하고 말하여 그 선비도 마침내 여러 졸개들에게 끌려나가서 망나
니 구실하는 졸개 손에 머리를 넣게 되었다. 그 선비뒤에 봉산 선비 둘과 또 평
산 선비 하나가 차례로 잡혀와서 대개 먼저 선비와 어슷비슷하게 애걸복걸하다
가 모두 참혹한 죽음들을 당하였다. 정생원부터 여섯째 번에 잡혀온 사람은 한
생원인데, 졸개들이 먼저 다섯 사람과 같이 잡아 끓리려고 하니 한생원은 딱 버
티고 서서 앉으려 들지 아니하였다. ”빨리 끓혀앉혀라. “ ”빨리 굻려앉히랍신
다. “ ”네이. “ 호령 소리, 긴 대답 소리 바로 무시무시한데 한생원은 꿇려앉
히려고 애쓰는 졸개들을 뿌리치면서 ”양반이 죽으면 죽었지, 도둑놈 앞에 무릎
을 꿇지 않는다. “ 하고 소리질러 꾸짖었다. 막된 것들 여럿에 약한 선비 하나
라 한생원이 마침내 서 있지 못하고 주저앉았으나 한 무릎도 꿇지 않고 두 다리
를 앞으로 내뻗었다. 마른 정강이를 연해 걷어채여서 부러질 것같이 아프건만
이를 악물고 다리를 오므려들이지 아니하였다. ”그걸 꿇리지 못한단 말이냐! “
하고 호령을 듣고 졸개들이 곧 다리를 분질러 접치려고 드니 한생원은 뒤로 벌
떡 드러누워 몸부림을 치고 발버둥질을 쳤다. 한생원이 한사코 꿇어앉지 않는
것을 서림이가 보고 ”그대루 일으켜 앉혀놔라. “ 하고 분부하여 졸개들이 한
생원을 잡아 일으켜서 마음대로 앉게두고 한옆으로 물러섰다. ”양반 고집은 쇠
고집이라더니 너두 반명이라 고집이 무던하구나. “ 서림이가 놀림조로 말을 하
니 한생원이 눈을 부릅뜨고 서림이를 똑바로 보며 ”이놈, 네가 누구를 놀리느
냐! 내가 너희 같은 도둑놈들에게 놀림받을 사람이냐! 너희가 나를 죽이기는 할
지라두 놀리지는 못한다. “ 하고 통통히 호령하였다. ”그렇게 기쓰구 발악하지
말구 꿇어앉아서 빌어라. 빌면 목숨을 살려 줄 테니. “대체 빌긴 무얼 빌란 말
이냐? 우리가 너희에게 빌 일이 무어냐! 우리의 친구 하나가 꺽정이를 대적놈이
라구 또 서림이를 꺽정이의 창귀라구 말했다구 우리를 잡아다가 이 욕을 보인다
니 그래 꺽정이가 대적놈이 아니냐! 서림이가 꺽정이의 창귀가 아니냐? 그 말이
무에 잘못이냐! 설사 그 친구의 말 삼가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구 하기루서니 우
리가 너희에게 빌 일이 무어냐? 그러구 너희 같은 무도한 도둑놈들에게 설려줍
시오 죽여줍시오 빌 사람이 누구냐? ” 한생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꺽정이가 “
여보 서종사, 저 사람은 사내요. 저 사내는 내가 살려 보내겠소. 이때까지 잘못
했습니다, 살려줍시오 소리에 욕지기가 나서 못배기겠더니 인제 속이 좀 시원하
우. ” 하고 말하였다. 서림이가 한생원은 도회청 옆에 있는 허생원 약방에 보내
서 잠시 앉혀두게 하고 남아 있는 선비의 하나를 잡아오라고 하여 신진사가 한
생원 다음에 잡혀오게 되었다. 졸개들이 뜰 아래에 꿇려 앉히려고 하니 신진사
는 “에라 이놈들, 가만 있거라! ” 하고 졸개들을 제지한 뒤, 서림이를 치어다
보며 “비록 다 같은 죄수라두 사람 따라 대접이 각기 다르려든 황차 죄수 아닌
사람을 천한 죄수루 대접하는 법두 있는가. 선비란 작위 없는 사람이나 작위 높
은 삼공육경고 등분없이 마주 겨루는 건 그대네두 잘 알 터이지. 조정의 공경과
항례하는 선비가 적굴의 적괴와 항례를 못할까. 내가 무슨 말을 물으려거든 먼
저 계하수루 대접을 말라. 그렇지 않으면 천언만어를 묻더라두 한마디 대답할
리가 없으니. ” 하고 여러 말을 늘어놓았다. 서림이가 먼저 한생원의 뻗대고 꿇
지 않던 것을 생각하고 “네 성이 신가라더니 참말 흉내내는 잔나비로구나. ”
하고 말하였더니 신진사가 두 눈썹을 일으켜 세우고 “그게 무슨 소린고? 사가
살불가욕이라니 선비를 죽이면 죽이지 욕보일 법이 없는데 계하에 꿇려 욕을 보
이러 들고 또 언사에 하대하고 욕설까지 하니 그럴 데가 어디 있을까. 어, 고약
한지고. 나는 그대네가 적당이라두 서절구투 좀도적과 달라서 바른말을 바르게
들을 도량들이 있을 줄루 믿었더니 내가 너무 지나치게 믿었군. ” 하고 준절하
게 책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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