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청석골 두령 중의 황천왕동이가 탑고개를 나오게 되었는데 한온이가 심
심한데 같이 가겠다고 꺽정이에게 말하고 황천왕동이를 따라나왔었다.
홀아비로 지내던 탑고개 주막 주인이 도망꾼이 젊은 계집 하나를 갓 얻었는데
얼굴이 해반주그레하다고 하여 한온이는 주막 계집을 구경하려고 따라나온 것이
었다. 황천왕동이와 한온이가 주막방에 들어앉아서 계집을 데리고 희영수도 하
고 술도 먹었다. 해가 승석때가 다 되었을 때 두목 하나가 방 밖에 와서 "해가
다 져 갑니다. 들어가지 않으시렵니까?" 하고 품하여 황천왕동이가 두목더러 "다
들 게 있느냐?" 하고 물으니 "네 다 여기 있습니다" 하고 그 두목이 대답하였다.
"아무리나 고만 들어가자. 오늘 하루는 아주 빈탕이로구나." 하고 황천왕동이가
먼저 방 밖에 나서서 방안의 한온이를 도랑보며 "이 사람아 고만 나와." 하고 재
촉할 때 길에 나섰던 졸개 하나가 쫓아와서 "나귀 탄 양반 하나가 이 아래 옵니
다." 하고 말하여 황천왕동이는 두목, 졸개 십여 명을 얼른 주막 헛간에 들여세
우고 혼자 주막 앞길에 나서서 기다리었다. 나귀 탄 양반이 하인 하나를 데리고
오는데 행색은 초초하나 신수를 보든지 기상을 보든지 귀인이 분명하였다.
"이애들 나오너라!" 황천왕동이가 소리를 치자 곧 두목과 졸개들이 헛간에서
뛰어나와서 나귀 앞을 가로막았다. 하인은 대번에 궁둥방아를 찧고 주저앉고 양
반은 눈살만 찌푸리었다. 두목 하나가 졸개들을 보고 "얼른 끌어내리지 못하구
구경들 하구 섰느냐!" 하고 소리를 질러서 졸개들이 끌어내리려고 달려드니 그
양반은 찌푸렸던 눈살까지 펴고서 "대들지 말구 말루 해라. 너희가 내게 무얼 바
라느냐?" 하고 말하는데 말하는 모양이 태연하였다. 황천왕동이가 그 양반의 거
둥을 밉게 보지 아니하여 졸개들에게 "그 양반을 가만둬라." 하고 분부한 뒤 "우
리가 바라는 건 재물이니 재물을 가진 대루 다 내시우." 하고 대접하여 하오로
말하였다. "다들 보다시피 행장은 아무것두 없구 저 하인이 걸머진 자루에 길양
식이 너댓 되 들었을 뿐이니 그거라두 달라면 주지." 남은 일껀 하오로 대접하는
데 아니꼽게 반말을 하여 "다른 재물을 가진 것이 없거든 나귀라두 두구 가라
구." 하고 황천왕동이도 반말짓거리를 하였다. 황천왕동이의 눈치가 좋지 않은
것을 알았든지 그 양반은 바로 말씨를 고쳐서 "나귀를 주면 나는 무얼 타구 가
란 말이오?" 하고 하오를 하는데 이번에는 뒤쪽으로 황천왕동이가 "정강말을 타
구 가지 무얼 타구 가?" 하고 반말로 내뻗었다. "그대네 괴수가 임꺽정이 아니
오? 꺽정이가 여기 있거든 나를 상면 좀 시켜주구려." "댁은 대체 누구시우?" 황
천왕동이가 성정이 싹싹한 까닭으로 반말을 고만두고 다시 하오하여 주었다. "나
는 종실 단천령이오." 황천왕동이는 단천령을 잘 몰라서 누군지 아느냐 묻는 눈
치로 옆에 나와 섰는 한온이를 돌아보았다. 한온이가 단천령더러 "피리 잘 부는
단천령이시우? 금지옥엽이시구려." 하고 말한 다음에 황천왕동이에게 귓속말을
몇 마디 소곤소곤 지껄이었다. 황천왕동이가 단천령을 보고 "우리 대장을 상면하
구 싶거든 우리하구 같이 갑시다." 말하고 "여기 있거든 만나잔 말이지 일부러
다른 데까지 가서 만날 건 없소." 하고 단천령이 싫다고 대답하는 말은 들은 척
도 아니하고 두목과 졸개들을 둘러보며 "이 양반을 잘 뫼시구 가자." 하고 분부
하였다. 두목, 졸개 십여 명이 나귀 탄 단천령을 전후로 옹위하고 또 벌벌 떠는
하인을 양쪽에서 부축하듯 껴들고 산속으로 들어왔다.
황천동이가 단천령을 허생원 약국에 잠시 앉혀 두게 하고 바로 한온이와 같이
꺽정이 사랑에 와서 보니 꺽정이는 마침 소흥이 집에 가고 사랑에 없었다. "단천
령 노주의 저녁을 얼른 어디다가 시켜야 할 텐데 어떻게 할라나?" 한온이의 말
을 "형님 말을 들어봐야지. 형님 있는 데루 우리 가세." 황천왕동이가 대답한 뒤
두 사람이 같이 소흥이 집으로 꺽정이를 보러 왔다. 소흥이가 광복산서 청석골
로 온 뒤에 초막 한 채를 조금 변작하여 가지고 딴살림을 하게 되었는데, 집 밖
에 울도 두르고 방 앞에 퇴도 놓았으나 원래가 초막이라 일자집 삼간뿐이었다.
황천왕동이와 한온이가 소흥이 집 삽작 안에 들어와서 방 앞으로 가까이 오는데
방문이 닫히고 방안에 말소리가 없어서 둘이 서로 눈짓하고 도로 나가려고 할
대, 소흥이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탑고개들 나가셨다더니 언제 오셨세요? 대
장께서 여기 기십니다. 어서 이리 들어들 오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두 사람이
방안에 들어와 앉은 뒤 황천왕동이가 단천령 붙들어 온 사연을 말하니 꺽정이는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나귀가 좋으면 나귀나 뺏구 보내지 그건 왜 붙들어온단
말이냐?" 하고 말하는 것이 붙들어온 것을 긴치 않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황천왕
동이가 한온이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붙들어가지구 와서 피리를 한번 듣구 보
내자구 말합디다. 그래서 붙들어왔습니다." 하고 한온이에게 밀어붙여서 한온이
가 단천령의 피리가 용하다는 소문을 이야기한 끝에 소흥이더러 "자네는 더러
들어봤겠지?" 하고 물었다. "그 양반 형님의 거문고도 들어보고 그 양반의 피리
도 들어봤지요. 그 양반이 피리에는 귀신이에요." 꺽정이가 소흥이의 말을 듣고
"이왕 붙들어왔으니 오늘 밤에 여럿이 모여서 피리를 한번 들어보자." 하고 황천
왕동이더러 일렀다. "그 노주의 저녁은 뉘게다 시킬까요?" "온이가 청해 온 손님
이니 온이 집에서 어련히 잘 대접하겠느냐?" 꺽정이가 일변 황천왕동이에게 대
답하며 일변 한온이를 보고 웃었다.
꺽정이가 소흥이 집에서 사랑으로 왔을 때, 서림이가 마침 와서 단천령을 탑
고개에서 붙들어온 것과 여럿이 밤에 모여서 피리 들을 것을 꺽정이의 이야기로
듣고 "단천령을 하루 묵혀서 내일 밤에 피리를 듣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
고 말하였다. "내일 밤이 좋을 게 무어요?" "여러 가지루 좋겠습니다. 난데 나간
이두령, 길두령 두 분이 내일은 들어올 테니 원만히 함께 모여서 하룻밤을 즐겁
게 보내는 것이 좋겠구요, 또 피리를 불 때 장단 쳐 줄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
할 텐데 이왕이면 내일 송도에 사람을 보내서 음률 아는 기생을 한둘 붙들어오
는 것이 좋겠구요. 그러구 또 여럿이 모여 놀 처소루는 옹색한 이 사랑보다 널
찍한 도회청이 좋겠는데 내일 밤이면 밤에 선선치 않두룩 준비를 잘할 수 있지
만 오늘 밤에는 준비할 새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밤에 이 사랑에서 한번
듣구 내일 밤에 도회청에서 또 한번 들으면 되지 않소?" "여느 율객이나 광대만
같으면 그렇게 하는 게 좋겠지요만 종반 중에두 내로라 하는 훌륭한 양반을 율
객이나 광대같이 대접해서 말을 잘 들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피리를 한사코 불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랍니까. 죽이기는 쉬워두 억지루 불리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또 억지루 불려서는 재주껏 불릴 수두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내일 하루 손님으
루 대접을 잘해서 맘을 눅여주구 저녁 연석에서 술과 기집으루 흥을 돋아 준 뒤
에 피리를 한번 들려달라구 청하면 그 재주를 다 내놓게 될 듯합니다."
서림이 말에 꺽정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 황천왕동이와 한온이를 불러서 피
리는 내일 밤에 듣게 하고 대접은 아무쪼록 잘하라고 말을 일렀다.
이튿날 아침 후에 꺽정이가 황천왕동이더러 송도 가서 김천만이와 상의하여
기생 두엇을 데려오게 하라고 하고 김산이더러 도회청 밤잔치를 한온이와 같이
준비하라고 하고 또 서림이더러 한온이 집에 가서 단천령을 잘 대접하라고 분부
하였다. 서림이가 단천령에게 가 있다가 와서 "대장을 만나뵙구 싶어하는 눈치든
데 만나보실랍니까?" 하고 물어서 "만나볼 테니 이리 데리구 오구려." 하고 꺽정
이는 대답하였다. "이왕 특벽히 대접하실 바엔 가서 보시는 게 어떨까요?” “내
가 가서 하정배하리까?” “대접을 아주 융숭하게 해주시려면 가보시는 것두 좋
을 듯해서 말씀한 게 올시다.” “안 온다거든 고만두구 온다거든 데리구 오우.”
“만나자구 오라시면 오겠습지요. 그럼 가서 데리구 오겠습니다.” “그리 하우.”
서림이가 단천령을 데리러 간 동안에 꺽정이는 심부름하는 졸개들을 사랑 바
깥마당에 세우고 신불출이 곽능통이 두 시위를 사랑 마루에 세워서 손이 오거든
거래하고 들이게 하였다. 미구에 졸개 하나가 나는 듯이 들어와서 “서종사께서
손님을 뫼시구 오셨습니다.” 하고 아뢰고 신불출이가 밖에까지 들릴 큰소리로
“손님 듭시라구 하랍신다.” 하고 외친 뒤에 서림이가 앞서고 단천령이 뒤따라
들어오는데, 꺽정이가 열어놓은 방문으로 내다보니 단천령의 얼굴 모습이 언
뜻보기에 이봉학이와 비슷한 데가 있어 보이었다. 단천령이 방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꺽정이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서서 여러 두령 모일 때 이봉학이의 앉는
자리를 가리키며 와 앉으라고 청하였다. 좌정하고 수인사가 끝난 뒤에 단천령이
먼저 “내가 말씀할 일이 있소.” 하고 말을 내어서 “무슨 일이오?” 하고 꺽
정이가 물었다. “탑고개에 나왔던 사람들이 내 나귀를 달라는데 내가 서울까지
이백 리 길을 도보루 가기가 어려워서 사정하구 싶으나 속담에 잔고기 가시 세
다구 그 사람들은 사정을 잘 들어줄 것 같지 않아서 대장을 만나게 해달라구 말
했다가 여기를 붙들려오게 되었소. 처음 뵙구 이런 말씀을 해서 믿으실지 모르
지만 사람 하나를 날 주면 내가 서울 가서 그 사람에게 나귀를 주어 보내리다.
” “나귀는 아무리 좋더라두 내가 욕심내지 않을 테니 염려 마시우.” “그럼
나를 오늘 가게 해주시우.” “이왕 오셨으니 일이일간 묵어가시우.” “내가 집
을 떠난 지가 오래 돼서 생각에 일각이 삼추 같소.” “오늘 묵어서 내일 가시
우.” “지금 집에 갈 맘이 살 같아서 하루바삐 가야겠소.” “임꺽정이는 한 말
을 두 번 세 번 곱씹구 되풀이하는 사람이 아니오.”
꺽정이의 말이 힘진 데 눌리었던지 단천령은 가겠단 말을 다시 하지 못혔다.
단천령이 무료하여 앉았는 것을 서림이가 위로하느라고 “하루쯤 더 묵으셔서
별루 낭패되실 일은 없겠지요?” 하고 말하니 단천령은 한참만에 “낭패될 일은
없지만 잠시라두 있어 부질없은 사람을 붙들어 묵히시는 게 무슨 의사신지 의사
를 몰라서 궁금하우.” 하고 대답하였다. “서울 양반이 이런 데 오시기가 어디
쉽습니까? 쉽지 않은 길이니 묵어가시란 말이지요. 우리가 예법은 모르는 사람
이지만 손님으루 대접하는데 악의는 먹지 않습니다. 맘을 놓으시구 하루 놀다
가십시오.” “이 산속에 수석이나 좋은 데 있거든 한번 구경시켜 주시우.” “
내가 이번에 묘향산을 구경하구 오는데 산세두 웅장하구 수석두 기특합디다.”
서림이는 묘향산을 보지 못한 사람이라 “녜, 그래요?” 하고 말할 뿐인데 꺽정
이가 전에 본 산들을 비교하여 “묘향산이 산세가 웅장하기는 백두산만 못하구
수석이 기이하기는 금강산만 못하지요.” 하고 단천령의 말을 뒤받았다.
“대장은 백두산을 구경하셨소?” 하고 단천령이 묻는 것을 “우리 대장께서
는 북으루 백두산부터 남으루 한라산까지 조선팔도의 명산이란 명산을 골고루
다 구경하셨답니다.” 하고 서림이가 대신 대답한 뒤 꺽정이가 이어서 “전에
우리 선생님이 산수에 벽이 있는 분이어서 많이 따라 다녔었소.” 하고 다시 대
답하였다. “대장의 선생님이 이인이랍디다그려?” “우리 선생님 말씀을 뉘게
들으셨소?” “이장곤 이찬성의 후취 처삼촌이 지인지감이 있어서 이찬성을 조
카사위 삼았단 이야기두 전에 들었구 갖바치에 숨은 인물이 이어서 조정암 선생
이 친구루 사귀구 영정대왕께서 영의정감으루 치셨단 이야기두 전에 들었지만,
그가 한 사람인 것은 이번에 묘향산 가서 알았소.” “묘향산 중에 우리 선생님
일을 자세히 아는 사람이 있습디까?” “수월당 노장중이 자세히 압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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